‘살아 있는 모든 것이 나의 어 머니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고려 대장경의 한 구절이 내 시심( 詩心)에 깊이 들어온 적이 있다. 그 때부터 마음속에 박혀 있던 가 시가 뽑히고 생각까지 바뀌게 되 었다. 마치 불법(佛法)이 ‘바꾸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에 대한 각성이 생겼던 것이다.

세상에는 너무 기막혀서 절대 로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한 참혹 한 일들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풀이된 두어 권의 경전을 읽으며 깨달았다. 이처럼 부처님이 설한 교법은 마음에 즐거움을 주고 고 통을 빼주는 것이며 괴로움의 원 천은 무지(無知)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방향로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지함을 깨닫는 것은 우선 내가 나를 찾는 일이며 일상의 소중함을 아는 일 이었다. 매일 하루치의 희망을 갈망하게 하고 매일 하루 분량의 나를 창조하게 해준 것이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다른 무엇과 도 바꿀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 한 단독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 고, 나에게 결핍이 있다는 것은 그다음에 충만이 온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믿게 되었다.

누가 나더러 종교가 무엇이냐 고 물으면 나는 그냥 마음속에 절 한 채 들여놓고 삽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 말이 나로선 불교를 믿는다는 말보다 나를 더 성 찰하게 만드는 말이라는 생각에 서다. 어떤 이는 내 시에서 불교 냄새가 난다고 농담처럼 말하지 만, 불교를 믿는 마음이 지극하 던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그 런 말들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 으로 들린다.

참된 말은 살아 있는 시 한 구절 같다는 생각 때문인지 지금도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을 때 면 오체투지 하는 스님들이 생각나고, 베란다 천장에 달아놓 은 풍경을 칠 때면 용맹정진하는 스님들이 또 생각난다. 마치 서로의 얼굴에 비친 자신의 이야기 를 하는 문학처럼 불교는 나를 힘들게 했던 무엇인가를 넘어서 게 하고, 나를 바꾸는 힘이 되어 준 또 다른 모습으로 내 시에 자리 잡고 있다.

시를 쓰면서 비유나 은유를 내 세울 때마다 부처님이 수많은 비 유를 들어 설법한 까닭은 비유 야말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말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도 진리에 도 달할 수 있는 지름길은 비유에 있다고 했다. 시법(詩法) 또한 진 리에 도달할 수 있는 적합한 말 법이란 생각이 들 때마다 수많은 비유를 든 부처님의 말법이 내 시작(詩作)에 최대의 의미를 준 것 같아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지구상에서 평균 2주마다 언어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 사실에 놀라면서 부처 님의 수많은 비유를 생각하다 보 면 불교와의 소중한 인연의 끈 을 붙잡게 된다. 그 끈을 붙잡으 려고 할 때, 청화 스님이 제일 먼 저 생각나고 이남덕 선생님과 작 가 남지심 친구가 생각난다. 청화 스님은 부여 백마강에서 천 도재를 올릴 때와 신도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뵌 적이 있다. 사 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영혼이 방황한다고 듣고 있었는데, 그 영혼들을 천도해 주던 스님이 법 향 같아선지 지금도 잊히지 않 는다.

“없는 것으로 없는 데 이르지 못하면 있는 것으로 없는 데 이 르다”라던 휴정 선사의 《 선가귀 감》 한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던 대학 4학년 졸업 무렵, 이남덕 교수님의 불교에 대한 강의는 마 음을 살리는 것 같다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강의는 딱 딱하기만 한 국어학 개론을 가 르치던 선생님을 존경하는 계기 가 되었다. 선생님의 불교에 대 한 깊고 진정한 말씀은 ‘도약의 높이보다 중요한 건 착지의 자리’ 라는 것을 알게 해준 소중한 시 간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가끔 신심이 천심이란 생각이 들면 불심이 깊은 남지심 친구가 생각난다. 선생님을 어머니인 듯 극진하게 살피던 그 마음에 슬 픔을 함께 지고 갈 친구라는 것 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 마음은 우주의 율동을 놓치지 않는 자 연 같아서 그 속에서 선생님은 얼마간의 안식을 찾지 않았을까 싶다. 그 생각을 하면 맑은 물이 모든 강에 흐른다면 그것이 희망 일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가 없다. 인연의 끈은 생각의 꼬 리처럼 긴 것 같다.

오래전 친구와 함께 북한산 에 있는 절에 간 적이 있다. 나 는 그때 누군가를 원망하며 용 서할 수 없는 마음 때문에 죽을 듯이 괴롭던 때였다. 그런 나를 알고 이해해주던 친구는 아마도 내 마음의 평정을 찾아주기 위 해 그곳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정신이 온전치 않 을 정도로 분노에 가득 차서 부 처님을 뵐 자신이 없었다. 한 시 간쯤 지났을 때, 친구는 천 배를 하고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절 계 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려오면 서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죽비로 나를 힘껏 내려치고 싶었다.

평소에는  입버릇처럼 마음속에 절 한 채 들여놓고 산다고 말 했지만 그것도 헛말처럼 느껴졌 고, 눈물이 저절로 날 정도로 부 끄러웠다. 나는 나 자신에 갇혀 허둥대는데  친구는 불심으로 다른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듯했 다. 그날 친구가 보여준 것은 아 름다움과 자비는 어디서나 자랄 수 있다는 절경 같았다. 나의 구 원이 시에서 왔듯이 맑은 산소 같은 인연 덕에 힘 얻어서 나는 의연하게 그 시절을 견뎠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가도 잠깐씩 내려온 길을 돌아 본다고 한다. 너무 빨리 달려와 서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 까 봐 살피는 것이란다. 시만 보 고 달려온 나도 나에게서 잠시 내려 지나온 길을 돌아봐야겠 다. 소멸에서 생성을 쓰는 데 시 의 근본 뜻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누가 만일 불교의 미래를 어떻 게 생각하느냐고 다시 묻는다면 “저는 불교를 믿습니다”라고 대 답할 것이다.

 

시인. 제16회 유심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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