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일생에 몇 번의 전 환기가 오게 되는데 나의 경우 20대 말과 40대 초반이 그러하 였다. 그리고 올해 예순 중반에 내게 또 한 번 생의 변곡점이 찾 아왔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 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후의 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 다. 이것은 내 뜻과 무관하게 도 래한 것으로서 우연으로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 우 리는 파도를 만드는 바람을 볼 수 없다. 개체의 운명을 좌우하 는 실재를 따를 도리밖에는 없 는 것이다. 나는 미래를 모른다.

산등성이에서 태어나 사람의 몸을 타지 않은 최초의 바람과 풋풋하고 싱싱한 햇살과 독도 앞바다처럼 시리게 푸른 하늘을 쐬 고 쬐고 감고서 어제도 잊고 내 일에의 기대도 없이 한 마리 야 생으로 애오라지 현재의 시간에 만 충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차편으로 두 시간 거리에 불과 하지만 예서 서울은 아득히 멀 다. 갓 지은 밥에, 텃밭에서 뜯어 온 상추로 한 끼니 때우는 소박 한 생활이 낯설지 않다. 최근 들 어 나는 강화에서 사계를 보내 는 중이다.

쏟아져 내리는 춘풍에 감자 잎사귀들 푸르게 젖고 있고, 고 추 모들은 가녀린 손 뻗어 허공 을 움켜쥐고 있다. 느티나무 가 지 끝에서 떨어지는 새 울음을 땅이 공손하게 받는데 고개 숙이면 가까이 다가왔다가 이마 들 면 멀어지는 앞산. 무논에는 아 침부터 들어찬 풍경이 빼곡한데 소리 없이 흙덩이 하나가 잘게 부서지고 있다. 바람과 햇살과 허공과 감자와 나무와 새와 무 논과 앞산과 내가 몸속 기관들 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다.

아내와 이웃 아저씨는 빈둥거리지 말고 움막 앞마당에 함부로 솟아난 잡풀들을 뽑으라 고 성화지만,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그들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딴 짓거리에 골몰 해 있다. 딴 짓거리란 아무 생각 없이 산이나 들, 하늘이나 길에 시선을 주었다 거둬들이는 일이다. 난 평생을 일에 치여 살아왔다. 잡풀들도 살려고 나와서 갖은 애를 쓰고 있는데 미관상 좋지 않다고 생존권을 박탈해서야 쓰겠는가? 분별력은 때로 차별이 되고 차별은 잔인한 억압과 폭력을 불러온다. 잡초들아, 너희도 생명인데 살아야지. 아내야, 아저씨야, 난 어제 《장자》를 읽었 단다. 그러니 나를 그냥 놓아두렴! 자연의 동작은 아무리 반복 해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 그들의 행위에는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여름 텃밭은 밭이란 말이 무색 하게 온통 풀 천지다. 풀과의 전 쟁을 치르다 보면 풀들의 끈질긴 저항이 어찌나 강력한지 금세 지 치고 만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 게 있다. 내가 그간 살아온 과정 이 풀이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악스럽게 억척을 부려 이나마 남들 우세 사지 않고 간신히 호 구를 마련해오지 않았나 하는 자기 연민 같은 알량한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다. 그렇게 풀의 입장에서 밭을 바라보게 되어 슬그머니 손에서 호미를 놓아버린다.

그렇다. 풀들은 숨길 수 없는 내 지난날이다. 나는 내 지난날 을 부정할 수 없다. 풀들아, 안심하렴. 사방팔방에서 파리떼처럼 팔다리에 매달리는 곡식의 울음 을 떼어내며 나는 밭을 빠져나 온다.

하나둘씩 친구들, 애인들이 떠 나고 있다. 누구의 잘못도 없이 멀어지고 잊혀 간다. 술과 우정 은 오래될수록 좋다는 말도 옛 말이 된 지 오래다. 산천도 인걸 도 의구하지 않다. 습관은 바꾸 기 힘든데 세상은 변화를 윽박지 른다. 사랑은 시작과 함께 이별 을 잉태한다. 시절 인연이 끝나 고 새 인연이 도래한다. 사람과 의 인연 대신 나무와 풀과 바람 과 바다와 하늘과 별과 구름과 강과 언덕과 산과 새와 곤충과 들길과 허공과 가깝게 지낸다.

가을이 익어가면서 강화 들판 은 한창 수확하는 손들로 바쁘 다. 벼 베는 손들이 있고, 고구 마 캐는 손들이 있고, 들깨 줄기 베어 넘기는 손들이 있고, 밤알줍는 손들이 있고, 열무 잎 솎아 주는 손들이 있고, 팔리지 않은 포도를 따 포도주를 담그는 손 들이 있다.

농로를 따라 걸으며 좌우로 고 개 돌려 번갈아, 벼들이 떠난 텅 빈 논들과 절정을 향해 익어가 는 벼 이삭들에 눈길을 준다. 벼 가 떠난 논들은 성장한 아들, 딸 을 여읜 양주마냥 늙고 지쳐 보 이는데, 아직 벼 이삭을 품고 있 는 논들은 힘이 넘쳐난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들판에는 바 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막 바지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하루 이틀만 남국의 햇볕을 베 푸시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의 시를 소리 내어 읽는다. 벼 이 삭들이 바람과 햇살 빨아대는 소리가 여울 소리처럼 밝고 높게 들린다. 강화에서는 내 손도 덩 달아 바빠져서 괜히 공기를 쥐었 다 폈다 한다.

눈 쌓인 들길 걷는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물었다 뱉는다. 눈밭에는 새들 이 남긴 발자국들 보인다. 하늘 아래 가장 깨끗한 상형문자들. 듬성듬성 서 있는 집들은 순한 가축들처럼 다소곳하다. 한 폭 의 묵화 같은 키 작은 산 위 낮 달이 떠올라 낙관을 찍는다. 어스름 번져오는 늦은 하오, 동네 를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돌 며 돌연 내 하루는 실종되고 아무도 소식을 묻지 않는다. 빈 들 녘이 컹컹 짖을 때마다 흐린 하 늘이 시나브로 멀어져간다.

 

시인. 제17회 유심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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