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 전 아내와 함께 동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7박 9일 여정 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의 여러 유서 깊은 도시 들을 둘러보았다. 프랑크푸르트, 로텐부르크, 뮌헨, 밤베르크, 잘 츠부르크, 빈, 부다페스트, 브르 노, 프라하, 카를로비 바리……. 이 도시들은 멀리로는 중세에까 지 거슬러 오르는 각종 건축과 거리를 오늘이라는 시간 위에 고스란히 펼쳐놓고 있었다. 비 록 주마간산이었지만 그 풍경 들 속에 스며든 21세기 현지인 들 삶의 모습 또한 매우 인상적 이었다.

들뜬 기색이라곤 좀처럼 찾아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도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눈여겨 살펴본 표정들 속에는 차분함이 서려 있었다.

왜 그렇게 느껴졌을까? 고작 하루 한나절 스치듯 지나는 여 행자에게 차분함을 넘어 고즈넉 하기까지 하다는 인상을 준 이 유는 무엇이었을까? 고색창연 한 중세풍 건축 탓이었을까? 주 로 돌을 다듬어 지은 미려한 건 축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줄지어 선 그 거리 풍광 때문이었을까?

아니었다. 그것은 ‘간판’이었다. 그 도시들이, 그 도시의 사람들 이 그렇게 자신의 내면을 향해 침잠할 줄 아는 모습으로 내게 비친 것은 순전히 간판 때문이 었다. 그 여러 도시의 어느 거리, 어느 건물에도 간판은 그야말로 절제되어 있었다. 작게, 가능 하면 최소한으로 내걸려 있었다. 외곽도로나 고속도로의 차창 밖 풍경에서도 그런 절제의 미학이 이어지고 있었다. 흔한 입간판이 나 현수막 하나 없이 먼발치 마 을이거나 평원이거나 숲이거나 그냥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우 리 이런 물건 팔아요’ 하고 다투 어 외치는 살풍경에 길든 눈에게 는 가히 놀랍고도 신선한 모습이 었다.

여정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들 어서는 순간 그 도시들이 보여준 절제의 미학을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흑백이 나 청홍과도 같은 극명한 대비였 다. 오감을 파고드는 정보들이, 광고들이, 소리들이, 목소리들이 사방팔방 흘러넘쳤다.

우리나라를 찾는 서구인들은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생동하는 삶의 전형이라고 환호한다지만, 오감마다 켜켜이 쌓인 피로에 지칠 대로 지친 나에게는 좋게 말 해 정보의 바다이지 그것은 홍 수이자 범람이고 해일이었다. 공 항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쩔 수 없이 또 마주친 간 판들의 그 메마른 아우성이라 니……. 길가의 전신주에까지 빼 곡하게 내걸린 날 선 언어들이라 니…….

이따금 발길 닿는 대로 절을 찾는다. 숲길 저쪽 일주문을 향 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면 시나브로 속진이 씻겨나간다. 가 람에 들어서면 왜 하필 이 자리 에 도량을 앉혔을까, 그 연유에 대해 헤아린다. 그러고는 대웅전 부처님을 뵙고 다시 그분의 눈길 을 빌려 사방의 경개를 찬찬히 살핀다. 이런 헤아림을 통해 비 로소 고요를, 청정한 고요를 만 난다.

당우 사이를 거닐다 보면 ‘묵언(黙言)’이라고 적힌 팻말을 만 나게 된다. 그 팻말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흠칫 몸이 움츠러 든다. 평소 수다스러운 편이 아 닌데도 심신 안팎의 오지랖을 여 미게 된다.

우주의 모든 사물이 원융을 이루고 있는 이 화엄 세계에서 첫 번째로 할 일은 바로 침묵일 것이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속에서 저마 다 자신의 말을 앞세운다면 어 찌 되겠는가?

올해 계간 《좋은시조》 여름호 ‘신작소시집’에 단시조 10편을 묶 어 발표한 일이 있다. 그 원고를 추리면서 맨 앞에 〈당호(堂號)〉를 배치했다. 일종의 서시(序詩) 격이었다.

 

설악산 그 큰절 요사채는 적묵당(寂默堂)

군소리 허튼소리 아예 말란 회초리

그 당호 내 속뜰에도 깊이 새

겨 내걸다

― 윤효 〈당호(堂號)〉 전문

 

2007년부터 16년째 10행 이내 의 짧은 시로써 시의 진면목과 마주 서고자 하는 시동인 ‘작은 詩앗 · 채송화’에 참여하고 있다. 몇 마디 말 속에 생의 비의와 울 림을 담아내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펼쳐가는 활동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시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노래한 〈시를 위하여〉 연작이 13편쯤 있다. 그 첫 번째 작품은 이러하다.

 

한 생각을 두 줄로 늘이지 말 것

다만

열 생각을

한 줄로 줄일 것

 

시인. 제19회 유심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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