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생각하면 두 장면이 먼저 떠오 른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심우 장(尋牛莊)과 저 먼 만주의 굴라 재 고개다. 하나는 현존하는 기 념 공간이고, 하나는 역사 속의 기억 공간이다. 만해는 이 특별 한 공간을 통해 내게 몇 편의 연 작시를 쓸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러고 보니 만해는 시대를 앞서간 시의 선각이자 먼 미래에 찾아 올 후배 시인에게 사색과 성찰의 몇 고비를 체험케 해준 시의 스 승이기도 하다.

심우장 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고즈넉하다. 도성 북쪽이어 서 ‘성북’이라는 이름이 붙은 서 울 성북동 산기슭 222의 1. 좁고 가파른 골목 사이로 올라가자 만해가 노년에 머물렀던 심우장 이 나온다. 밖에서 본 심우장의 표정은 무심하고 무연하다. 오랜 침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날 그 자리에서 ‘만해시편’ 첫 번째 작품인 〈심우장 가는 길〉을 썼다. 군말을 몇 번씩 헹 궈냈더니 단출한 말만 남았다.

“멀다.

아직도 골목을 맴돌며
소를 찾아 헤매는

저 빈 집의
오랜

침묵!”

만해가 일제강점기인 1933년 에 지은 이 집은 특이하게도 남 향이 아니라 동북향이다. 조선 총독부 건물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햇볕이 덜 드는 북향 터 를 택했다고 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59㎡(17.8평) 규모의 소박한 단층집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서재 앞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편 액이 걸려 있다.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이다. 알다시 피 불교 수행에서 ‘잃어버린 나’ 를 찾는 깨달음의 과정을 의미 한다.

마당 한쪽에 만해가 심은 향 나무 한 그루와 수령 90년이 넘 은 소나무가 서 있다. 만해 시 〈님의 침묵〉 중 “푸른 산빛을 깨 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이라는 구절이 두 나무 의 그림자에 겹쳐지는 듯하다.

마루에 걸터앉아 오래 생각했 다. 만해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 고, 지금은 어디메쯤 있는 것일 까. 그러면서 얻은 두 번째 연작 시가 〈북정마을〉이다.

“하필 북향 터라니
푸른 산빛 을 깨친
단풍나무 숲은 어디 가고
늙은 향나무 소나무만
지붕 밑을 기웃거리고 있다.

북향 집에는
해가 빨리 진다.

나뭇 잎들이 가리키는
손가락 따라

일제히 마을을 덮는
산 그리 메.

북창에 살풋
그대 그림자 가 어린다.”

세 번째 시 〈목련이 북향으로 피는 까닭〉은 돌아와서 한참 뒤 에 썼다. 북향 터의 심우장 덕분 에 건진 시다.

“해마다
목련이 북향으로 피는 것은
햇살 잘 받는
남쪽 잎 부터 자라기 때문이네.

내 마 음
남쪽서 망울져 북쪽으로 벙 그는 건
그대 사는 윗마을에
봄이 먼저 닿는 까닭이네.”

만해는 심우장에서 11년을 살 았다. 방 안에 그의 원고와 글씨 등이 보관돼 있다. 3 · 1운동으로 투옥됐을 때의 옥중 공판기록도 눈에 띈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를 주도한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도 그중 한 명이었 다. 신문사를 그만둔 이 씨가 이 곳 동장(洞長)을 지내며 심우장 을 자주 찾았다. 만해는 그와 늦 게까지 얘기하며 오래 교류했다.

1937년에는 순국한 독립운동 가 김동삼의 유해를 모셔 와 이 곳에서 장례를 치렀다. 김동삼과 관련한 일화로는 ‘굴라재 활불( 活佛) 사건’이 유명하다. 만해가 젊 은 시절 만주 굴라재 고개에서 독립군 후보생들에게 일본 정탐 꾼으로 오인되어 총격당했다. 총 알이 머리에 박힌 상황에서도 그 는 쏜 사람을 욕하지 않고 마취 없이 수술을 받았다. 이때 치료 를 맡았던 김동삼이 “활불(살아 있는 부처)”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이때의 일을 네 번째 연작〈굴라재 활불 사건〉에 담아 보았다.

“젊은 시절이었지.
만주 굴라재 고개 넘다
머리에 총 맞은 그날.

독립군 후보생들이었어.
작은 키에 까까머리 나를
일본 밀정으로 오인했다는

그들이 무릎 꿇고 비는 동안
나도 빌었지. 마취 없이 수술받는 나보다
칼 쥔 손 먼저 기도해 달라고.

김동삼이라고 했던가. 맞아.
그의 손이 자꾸 떨리는 걸 보았 어.
뒷걸음치는 흰 소의 눈망울 같았지.

수술 마친 그가 낮게 외쳤어.
활불(活佛)일세! 그러나 이후
나는 평생 고개 흔드는 체 머리로 살아야 했지.

서대문형 무소에서 그가 죽은 날
북정 고 개 넘어 싣고 와서는
내 방에 모시고 오일장을 치렀지.

일생 에 딱 한 번 그때 울었어.

그는 쉰아홉, 나는 쉰여덟.
광복 8년 전이었지.

지금 생각하니
죽 어서 더 오래 산
그가 진짜 활 불이었어.

고개가 흔들릴 때마 다
한 땀씩 그가 내 머리에 새 겨놓은
만주의 햇살이 그립기도 해.

그땐 젊어서
마취 없이도 세상 견딜 만했지.
하루하루가 활불이었어. 그때 우리는.”

만해가 심우장에서 심혈을 기울인 것은 독립정신과 민족의식 고취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1934 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비롯해 《후회》 《박명》 등을 이곳 에서 썼다. 수많은 논설과 수필,번역문도 집필했다. 그는 필명으 로 ‘목부(牧夫)’ ‘실우(失牛)’ 등을 썼다. 목부는 ‘소를 키운다’는 뜻 이고, 실우는 ‘소를 잃어버렸다’ 는 뜻이다. 이는 곧 자기의 본성 인 ‘소’를 찾는 구도 과정과 맞닿 아 있다.

이런 수행을 통해 그는 인간 의 본성을 연구하는 데 매진했 다. 이를 ‘걷잡을 수 없는 슬픔 의 힘’을 옮겨 ‘새 희망의 정수박 이’에 들이붓는 작업이라고 표현 했다. 《님의 침묵》 서문에서는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라며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 을 잃고 헤매이는 어린 양이 기 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했다. 그 는 엄혹한 시대에 가장 부드러운 시어를 통해 삶의 근본을 탐색했 다. 그의 공부는 “그칠 줄 모르 고 타는 가슴”이 돼 수많은 이의 밤을 밝히는 심지가 됐다.

그는 총상 후유증으로 머리를 흔드는 ‘체머리’를 앓으면서도 인 문학적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았 다. 단재 신채호 유고집 간행을 추진하던 중,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생을 마감했다.

몇 년 전 3 · 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심우장이 사적으로 지정된 뒤로 관련 행사가 많이 열렸다. 그러나 아직 남은 일이 많다. 앞 으로 그의 구도자적 삶을 재조 명하는 학문적 접근과 함께 시 를 통한 교감과 공감의 폭도 더 넓어지길 기대한다.

심우장 벽에 걸린 만해 시 〈심우장 1〉의 뜻이 새삼 의미심장 하다.

잃은 소 없건만
찾을 소 우습도다.
만일 잃을 시 분명타 하면
찾은 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 리라.

 

고두현
시인. 제21회 유심작품상 수상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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