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사의 흥망성쇠에서 배운다

1. 시작하는 말

최근까지 일본불교에 대한 편견은 매우 강했다. 무엇보다도 식민 지 강권통치 시대의 일본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발생했 다고 할 수 있다. 오키나와처럼 영구적인 동화를 목표로 했던 일본 이 자신의 문화를 한반도에 이식시키고, 한국인들을 그 문화에 종속시키고자 했던 것은 강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수순이다. 불교도 그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패망 후, 한반도에서는 거의 모든 일본 불교의 종파가 철수했다. 현재는 입정교성회나 창가학회와 같은 근 대에 나온 불교계 신종단 외에는 거의 포교가 이뤄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현재 일본불교에 대한 연구나 관심은 점점 높아져 가 고 있다. 특히 2000년대에 근대사에 대한 연구가 폭발적으로 일어 나면서 근대 일본불교에 대한 연구를 필두로 점점 확대되고 있다. 그중에서 일본에 대한 실제적 이해를 위한 유학이 늘면서 일본 문화 자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것도 새 흐름이다. 한국 문화재의 상당 부분이 불교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일본 또한 역사 적으로 유형·무형의 불교문화가 두텁게 축적되어 있다. 일본 문화 론은 불교를 제외하고는 논의가 불가능할 정도다. 불교 미술, 문학, 음악, 건축 등은 일본 문화의 저변을 이루고 있다. 신불습합의 전통 이나 다양한 신종교의 활동, 예능이나 일상 문화에서 불교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일본불교는 이제 국내에서 흥미의 차원을 넘어 연구의 대상, 문화 교류의 직접적 대상이 되고 있다.

시야를 넓혀 세계적 차원에서 일본불교는 어떨까. 근대 이후 일 본 불교학의 비약적 발전은 동아시아불교를 대표할 정도였다. 여기 에는 중국과 한국 불교의 쇠락도 한몫하였다. 또한 탈아입구를 통 한 일본 문화의 서구 진출과 국수주의에 기반한 문화제국주의도 거 들었다. 주지하다시피 선(禪)을 서구에 알린 것도 일본이며, 대정 신수대장경이 여전히 전 세계 불교 연구자들의 텍스트로 자리 잡은 것도 사실이다. 서구에서 일본불교 연구는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 일본에서 공부한 많은 연구자가 자국으로 돌아가 일본불교 연구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풍요로운 일본불교와 함께 한국·중국은 각자의 불교문화 를 꽃피우면서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한자 문화권의 불교 교류 또한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인도에서 발원 한 불교가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과 한국을 통로로 일본으로 건너 가 만개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일리가 있는 말이 다. 국내에서는 종파불교로 폄훼되던 일본불교가 그 다양성으로 인 해 새롭게 각광받기도 한다. 종파불교는 중국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를 계승하거나 독자성을 구축하여 일본 나름의 종파를 형성, 서 로 경쟁하면서 발전해 왔다. 종파의 다양성은 그만큼 대승불교 구제 방식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불교의 생명력이 크고 활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처럼 역동적인 일본불교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 니다. 가지와 잎이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로 성장하려면 수많은 시 련이 따르기 마련이다. 한 톨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살아남기 위해 척박한 땅에 수맥을 찾아 깊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 는 고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일본불교 또한 마찬가지로 나름 의 오랜 역사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확립한 것이다. 거목으로 성장 하기 위한 자연환경의 행과 불행이 교차하듯이 일본불교 또한 시대 와 인간이라는 환경이 둘러싸고 있다. 한마디로 시기상응(時機相 應)의 주체적 힘을 기반으로 성장과 응축을 반복해 가며 뻗어왔다.

최근 일본불교의 대내외적인 환경은 한국처럼 녹록지 않다. 근대 일본의 혼돈, 고도 경제성장, 동서 냉전과 신자유주의의 물결, 동일 본 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의 문제 등 메이지혁명 이후 150여 년 동 안의 급격한 변화는 일본인들의 삶에 불교의 존재 의미를 다시 묻 게 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지구적 차원의 온난화와 환경파괴, 자원 의 고갈, 지속적인 국지전 등 인류의 공업(共業)은 삶을 더욱 파편 적이며 불안하게 한다. 불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계의 대응이 필 요한 상황이다. 문제를 통찰하는 불교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커져 가고 있다. 일본불교의 흥망성쇠 역사를 통해 그 응답의 가능성을 살펴본다.

 

2. 불교의 상륙과 부흥

불교의 일본 발아는 서기 552년, 정치적 차원에서 백제가 불교를 일본에 공전(公傳)한 역사로부터 시작됨을 《일본서기》가 기록하 고 있다. 중국에 불교가 토착화하는 데에는 이하론(夷夏論)의 장벽 이 있었지만, 황로(黃老)와 부도(浮圖)가 나란히 하게 됨으로써 불 교의 유입이 가능했다. 일본은 야오요로즈노카미(八百万の神)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다신의 나라, 즉 신국이었다. 이를 어떻게 뚫고 정착할 것인가가 역사상의 과제였다. 불교의 동진이 성공한 요인 가운데에는 토착신앙과 융합을 잘 이룬 것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가 인도 밖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힌두문화와의 관계 에서 보듯이 문화적 습합의 틀을 내재적으로 확보한 점에 있다. 일 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교의 상륙 이후 일본 역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불법을 옹호 한 소가(蘇我)씨족과 불법 도입을 반대한 모노노베(物部)씨족과의 쟁투는 객신(客神)인 불상을 모신 불교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더해 정치적 의도가 가세한 것이다. 전자는 불교를 왕권 확립의 계기로 삼았으며, 후자는 씨족 중심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했 다. 결국은 소가씨족의 승리로 불법이 일본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에 더해 율령제 국가를 지향했던 쇼토쿠태자(聖徳太子, 574~622) 의 종교정책이 불교의 첫 토착화를 안정적이게 했다. 그는 스이코 왕(推古王)의 섭정으로서 ‘관위12계’ ‘17조헌법’ 등을 제정하여 왕권 중심의 국가체제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고대국가 수립에 불교의 공헌은 절대적이었다. 당시 중국과 한반 도의 선진적인 문물과 국가 운영의 기술을 불교를 통해 확보함으로 써 부족국가에서 벗어나 왕권국가 확립을 꾀할 수 있었다. 쇼토쿠 태자는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견수사(遣隋使) 를 파견하기까지 했다. 왕권국가로서 자신감을 갖고 교류를 시작한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불교라는 공통의 정신세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헌법인 ‘17조헌법’에는 유교와 불교의 사상을 배경 으로 하되, 유교는 군신 간의 예를 강조하고, 불교에 대해서는 민심 을 모으는 구심점으로 삼았다.

제2조에는 “불교의 삼보를 신실하게 경배하라. 불법은 4생(四生) 이 최종으로 귀의할 곳이며, 만국에게는 궁극의 종교다. 어느 시대 의 누구라도 불법을 존중하지 않는 이는 없다. 세상에 극악한 사람 은 없다. 대체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가능하지만, 삼보에 의지하 지 않으면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하며 삼보의 경배를 통해 민심을 순화시키고자 하고 있다. 유입 과정도 그렇지만 이처럼 애초에 국가불교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다.

나라(奈良) 시대에 불교의 민간 포교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국 분사(國分寺)를 두어 위난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소위 진호(鎭 護)국가의 역할을 불교가 맡도록 했다. 국가는 사찰을 승사(僧寺) 와 니사(尼寺)로 나누어 운영했다. 전자는 금광명사천왕호국지사 (金光明四天王護國之寺), 후자는 법화멸죄지사(法華滅罪之寺)라고 불렀다. 국가 사찰에서 주로 독송된 경전은 호국삼부경으로 부르는 《법화경》 《인왕경》 《금광명경》이다. 불안한 국내외의 정치적 상황 을 불력(佛力)으로 돌파하고자 한 것이다. 점차 불교를 매개로 한 외교적 교류도 빈번해졌기에 정부의 불교 관장은 국가적 위엄을 확 보하는 것이기도 했다. 8세기 중반 나라의 동대사 대불 조영은 이 러한 국가불교의 절정을 보여준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불교의 발전은 두 세계의 확산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이처럼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국가불교다. 가마 다 시게오(鎌田茂雄)는 《중국불교사》에서 “인도불교는 아쇼까왕에 의한 불교 보호정책이 국가적 규모로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불교가 지향하는 자비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 이 지상의 국가를 이상국가로 삼기 위한 ‘법(dharma)에 의한 통치’ 정책이었다.”고 한다. 그 리고 “중국의 남북조 시대의 호족(胡族)국가가 취한 정책은 불교를 인민 지배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었다. 이 전통은 남북조를 통일한 수(隋) 왕조(589~618)에도 계승되었다.”1) 고 한다. 역사상 양자의 구별은 시대적 상황이나 통치자에 따라 다르며,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또 한편으로는 불교 신앙의 속성상 민간 전파를 들지 않을 수 없 다. 고대 일본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은 민중 차원에서는 교키(行基, 668~749)다. 도래계의 일족으로 민간불교를 전개한 그는 국가불교 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당시 민간 포교는 법으로 금지되었 기 때문에 불법으로 포교를 한 것이다. 그러나 뒷날 국가는 그를 동 대사 조영에 참여시켰다. 민중의 힘을 빌린 것이다. 성공적인 활동 으로 승관의 최고 지위인 대승정에 임명되었다. 위로부터의 불교, 아래로부터의 불교라는 이원적 세계는 결국 큰 마찰이 없이 국가가 민간 포교를 수용함으로써 불교 토착화의 1단계가 순조로웠음을 보여준다. 국가불교의 저변에는 권력으로서는 제어할 수 없는 신앙 의 세계가 있음을 통치자들 또한 잘 파악하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정치의 변동, 개혁과 혁명이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심성 을 권력의 장에 결코 하나로 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종교는 왕후장상으로부터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심리적 교호(交互) 작용에 의해 확산된다. 권력의 장의 내부냐 외부냐라는 물음에 종교는 오히려 양자를 포괄하는 이 상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 다. 역으로 국가는 종교적 세계의 일부 혹은 피안으로 가기 위한 교각(橋脚)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다. 종교가 국가의 장에 갇히게 될 때, 이는 교단 권력과의 유착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그 장을 벗어나 고자 하는 새로운 종교적 혁명이 수반된다. 그 힘의 배경은 물론 민 중의 신앙의 장이다.

교키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의 하나는 그가 남긴 영목화현불(靈木 化現佛)이다. 감득불(感得佛)이라고도 한다. 이를 주장한 사람은 불교미술 전문가 이노우에 타다시(井上正)로 그는 교토국립박물관 의 학예실장으로서 전국을 누비며 불상을 조사했다. 그의 저서인 《고불(古佛)》(1986)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박물관에서 만나는 불상은 유명 불사(佛師)들이 만든 균형 잡힌 ‘예 술품’이다. 이노우에의 보고에 의하면 그렇지 못한 불상들, 뒤틀리 며 팔이나 눈이 없거나, 비틀어지거나 굽어 있는 불상들이 태반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평범한 백성들의 몽감 혹은 영감에서 나온 것 으로 신목으로 보호받던 나무들을 불상으로 조각했다. 그래서 거의 가 일목불(一木佛)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고대로부터 시작된 신불습합의 과정이다. 신이 부 처의 보호를 받는다는 초기 단계다. 인도불교에서 발생하여 계승 된 본지수적(本地垂迹) 사상에 기반한 신불 관계의 역사가 일본에 서도 재현된 것이다. 이는 뒤에 신불동체설, 신본불종(神本佛從)의 사상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불교 토착 과정에서는 반드시 지역의 신앙체계와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목화현불이 모셔진 곳의 사찰 연기(緣起) 설화의 특징에는 교키의 행적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교키는 민간 포교를 행하면서 민중들의 삶과 밀착했다. 그는 당 시 수도인 헤이조(平城)에 성곽을 건설하는 노동난민들을 구제하 는 활동을 했다. 연못이나 도랑을 정비하고, 선착장 주변에 무료 숙박소인 보시옥(布施屋)을 운영했다. 주로 긴키(近畿, 궁성이 있는 교토와 나라, 오사카를 포함하기도 함) 지역에서 활동했음에도 이 지역을 벗어나 여러 사찰 연기의 설화 소재로 등장한다. 마치 신라 원효대사의 연기 설화가 전국에 산재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 한 현상은 그만큼 민간 포교가 대중 구제의 현장이었음을 말한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민중을 고승들은 잘 포착했던 것이다. 대 승불교의 총원인 사홍서원이나 불전에 나타나는 다양한 별원은 민 중의 현실적 고통을 먼저 해소하고자 하는 것에 기반해 있다. 국가 불교의 한계를 교키는 정확히 인식하고, 대승불교 본래의 지향점 위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성공한 토착화

일본불교의 1차 토착의 시기는 고대 전반기에 완료되었다. 고대 후반은 이러한 토착화가 일본화 과정으로 향하는 성숙기라고 할 수 있다. 이의 배경은 6국사2) 의 성립이 보여주듯이 일본이 독자적인 왕권국가로서 면모를 대내외에 과시하는 주체성에 있다. 대체로 수 도를 교토로 삼은 헤이안( 平安, 794~1192) 시대와 겹친다. 그만큼 국가도 안정되고, 정신적으로 성숙기에 다다른 때이기도 하다. 특 히 이 시기를 주도한 종파는 종합불교인 천태종과 진언종이다. 각 각 사이초(最澄, 762~822)와 구카이(空海, 774~835)의 중국 구법 후에 생성된 종파다. 사이초는 천태지의 대사처럼 불교의 종합화를 꾀하고자 했으며, 쿠카이는 교학과 수행에서 완전성을 목표로 매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한계는 여전히 국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사이초는 나라를 중심으로 한 남도(南都) 종파들의 전횡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대승계단 설립을 목표로 천태종의 실력 을 배양했다. 수행자 양성의 기획인 〈산가학생식(山家学生式)〉에 서 “나라의 보물은 무엇인가. 그 보물은 도심(道心)이다. 도심 있는 사람을 이름하여 국보라고 한다.”3) 고 설한 것은 단지 국가와의 수 평적 관계 설정만이 아니라 국가를 초월, 불국토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구카이와 그 제자들은 여러 밀교 의식을 통해 통 치자들과 귀족들에게 환영받았다. 이들 세력은 고대 후반기에 절대 적이었다.

그러나 절대권력은 부패하는 법이다. 고대 왕권은 후반기 섭관 (攝關)을 독점한 후지와라(藤原)씨족의 대두, 율령제의 쇠퇴, 재난 의 발생 등으로 사회에 불안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불교계 또한 이 러한 암울한 시대적 변화를 법멸에 해당하는 말법의 도래로 보았 다. 특히 1052년을 말법 시작의 해로 보기도 했다. 사사(寺社, 불교 와 신도) 세력은 이를 이용, 장원을 확장하는 등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결국 11~12세기 이르러 상왕이 독 자적인 지배체제를 구성한 원정(院政)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합 집산의 정치가 펼쳐진 것이다. 그동안 국가의 우산 안에 있던 불교 계 또한 민중과는 괴리되어 갔다. 12세기 후반 힘의 강자인 무사 세력의 부상으로 독자적인 정권이 탄생했다. 이른바 막부(幕府) 정권이다.

혼란의 시기, 불교는 더 이상의 민중 구제의 주체로서 인식되지 않았다. 종교는 언제나 시대의 고난 속에서 역동성을 부여받기 마 련이다. 구체제는 가고 새로운 체제가 그 왕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종교의 역사다. 중세 신불교4) 가 바로 이러한 역사를 증명한 다. 그 시작은 정토종의 호넨(法然, 1133~1212)이다. 많은 일본의 불교 역사가들이 언급하듯 선택과 집중의 불교사가 새롭게 열린 것 이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제2의 토착화이자 불교의 일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등장에는 기성 교단, 특히 남도 6종, 천태종, 진 언종의 반발과 압력, 나아가 국가권력을 이용한 탄압도 있었다. 그 러나 불법의 역사는 구곽을 과거 속으로 흘려보낸다.

중세 신불교를 흔히 불법승 삼보의 분화라고 본다. 실제로 종교 의 구성 원리이기도 한 삼보는 어느 한쪽 면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핵심 되는 입장에서 보면, 신불교의 분화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불보는 정토종을 비롯한 신란(親鸞, 1173~1262)의 정토 진종(淨土眞宗), 잇펜(一遍, 1239~1289)의 시종(時宗)이다. 정토계 경전에 의거한 아미타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는 종파다. 법보는 니치렌(日蓮, 1222~1282)의 일련종으로 볼 수 있다. 니치렌은 ‘나무 묘법연화경’을 외는 제목(題目), 《법화경》의 적문(迹門)과 본문(本 門) 가운데 후자에 기반한 본문 만다라, 그리고 계단(戒壇)을 3대 비법으로 삼았다. 승보는 에사이(榮西, 1141~1215)의 임제종, 도겐 (道元, 1200~1253)의 조동종이다. 이들은 수행 본위의 선종을 확립 함으로써 말법 시대를 극복하고자 했다. 특히 도겐의 지관타좌(只 管打坐)는 오매일여의 수행으로써 목전의 불성 현현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철두철미한 본각에 의거한 수행론이다.

 

중국에서 발생한 전통적인 13종파 또한 경전이 번역됨에 따라 각각의 종(宗)을 형성해왔다. 경전에 의거한 종파는 결국 교상판석을 통해 자종의 우월함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구조를 형성했다. 후에 독립한 선종은 깨달음의 방식에 대한 논의로 다양한 분열 양상을 가져왔다. 교와 선 어느 쪽이든 불교는 근본적으로 역사상의 석가 모니불로 수렴되는 공통의 원형을 견지한다. 나아가 대승의 반야사 상에 의거, 경전의 양산 또한 대량으로 이뤄졌다. 어떤 종파에 속하 든, 불교야말로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을 통한 인간의 완전한 자 유와 해방이 목표다. 일본 중세불교 또한 사회구조의 파탄과 새 질 서의 모색 속에서 말법이라는 내적 제약을 극복하며, 불법에 대한 의지와 희망으로 초기와 대승의 정신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재건해 낸 것이다.

정토종이 신불교의 첫 단추를 끼운 것은 정토사상의 개방적이고 민중적인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나무아미타불’이야말로 가장 비 계급적이며 민주적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염불을 할 수 있다. 시간과 장소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신앙의 완전한 평등을 구현한 다. 정토신앙은 실제로 종파성을 초월하여 민중신앙의 저변을 이룬 다. 특히 죽음에 있어 왕생정토 사상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죽 음만큼 보편적 현상은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민중의 정토신앙을 말법 시대의 하열한 근기의 불법으로 보는 것도 대승의 차원에서 본다면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중세 일본의 정토종 약진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 다. 따라서 신불교는 민간 포교의 전통을 계승했다. 고대 후반 쿠야 (空也, 903~972)에 의한 칭명염불의 민간 포교는 염불의 민간화와 교키의 민중 구제가 결합한 형태를 보여준다. 그는 헤이안 중기의 인물로 칭명염불로 저잣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교키처럼 지방에서 우물과 강을 정비하고, 다리나 도로를 건설했다. 무엇보다도 벌판 에 버려진 시신을 모아 화장했다. 재물이나 음식을 탁발하여 빈민 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염불의 민중화와 함께 불교 본연의 자비행 을 실천했다.

이러한 전통이 중세 신불교의 부흥에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중론이다. 히지리(聖)의 활동이 그것이다. 히지리는 산 림에 은둔하는 승려나 영능을 가진 자로부터 교키나 쿠야와 같은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승려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는 개념 이다. 쿠야는 아미타히지리(阿彌陀聖) 또는 이치히지리(市聖)로 부 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민간 포교자로서 대중의 신망이 높았다. 고대 말로 갈수록 히지리를 포함하여 지경자(持經者), 쇼닌(上人) 등 독자적 활동을 하는 승려들이 출현한다. 중세 신불교의 조사들 도 이러한 계층에 속했으며, 이들의 자유분방한 사회적 활동이 독자적인 종파를 수립하는 배경이 되었다.


물론 신불교의 선두 주자인 호넨의 경우는 천태종의 우종(寓宗)으로서 정토종을 독립시켰다는 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여기에 는 천태정토계에 속한 겐신(源信, 942~1017)에 의한 관상염불, 제 행왕생을 포괄하는 《왕생요집(往生要集)》과 염불결사의 출현이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시대 말의 정변과 약육강식의 무질서 로 인한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로서 사후 왕생은 각광을 받았 다. 이 또한 수행을 통한 난행도로서 성도문보다는 염불을 통한 이 행도인 정토문을 선호하는 민중의 희원(希願)을 실현하는 것이기 도 했다.

호넨의 제자인 신란이 《무량수경》에 등장하는 법장비구에 의한 48원의 서원성취를 통해 믿음의 종교로서 일본 최대의 종단인 정토 진종을 확립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거성요원(去聖遙遠, 성인 이 가신 지 오랜 시기)의 시대, 말법 만년에 접어든 암울한 법멸의 절망을 딛고 신불교의 조사들은 불법의 부활을 이뤄냈다. 그것은 불법 스스로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민중이야말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불법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주인공임을 확 인하게 된 것이다.

4. 국가불교의 한계

모든 종교가 그렇지만 국가와의 관계는 많은 것을 파생시킨다. 가마다 시게오 또한 동아시아에서 국가불교에 대한 논의가 필수적 이라고 생각했다. 고대에서 근대로 내려올수록 일본불교는 양자의 관계가 더욱 첨예하게 대립한다. 불교의 토착화 또한 민중 속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국가 또는 지역 권력자들의 전횡에 저항할 수 있 는 힘이 생겼다. 농민봉기에 해당하는 잇키(一揆)가 그것이다. 중 세 이후의 사회구조가 봉건제로 정착하면서 지역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불교 또한 지역으로 포교가 활성화되면서 토후 세 력에 대한 대응이 가능한 집단으로 발전해 갔다.

잇키는 중세에 무력을 갖춘 사원의 승려들, 중하위 계급의 무사 집단들, 자위적인 촌락 농민들 사이에서 다각도로 일어나는 투쟁 을 말한다. 처음에는 무사 집단의 잇키가 주를 이뤘지만 후대로 내 려가면서 지역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잇키가 발생했다. 대표적인 잇 키는 야마시로국잇키(山城國一揆)이다. 무로마치 시대에 3개의 지 역이 결성하여 군벌들과 전투를 벌였다. 지역의 젊은이들과 노인에 이르기까지 합세하여 마침내 일정 정도 지역민의 자치에 의한 지배 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도쿠가와 막부 체제기에는 40여 개의 잇키 가 발생했다. 19세기 중반인 막부 말기로 가면서 사회변화를 바라 는 잇키, 메이지 시대에는 신정부에 반발하는 잇키가 일어났다.

불교와 관련한 잇키로는 잇코잇키(一向一揆)가 가장 유명하다. 당시 전국 최대 세력으로 변모해 가던 정토진종의 문도들이 일으킨 잇키다. 정토진종은 원래 일향종(一向宗)으로 불렸다. 법장비구의 서원에 기반, 믿음과 감사의 염불을 중시하는 정토진종은 8세기 중 흥조 렌뇨(蓮如, 1415~1499)의 지도하에 획기적으로 성장했다. 전 국(戰國)시대에 지역 토후 무사들, 지역 상공업자들, 농민들을 문도 집단으로 조직하는 데에 성공했다.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에 성장하 는 민중의 주체성을 포착하며, 자신을 보호해줄 신앙심을 북돋우는 것에 요인이 있다. 잇코잇키는 지역과 시대를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가가(加賀)잇코잇키는 지방의 수호(守護, 지역 관직)를 추방하여 지역 지배권을 획득했다. 본원사잇코잇키에서는 본원 사의 종교적 영향력 확대와 이권 획득을 위해 막부를 비롯한 전국 의 권력자들과 싸웠다. 정치항쟁의 잇키로서 장군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와 전면전을 벌인 이시야마합전(石山合戰)에 문도들이 대거 참여했지만 패배했다. 이러한 정쟁 참여의 결과, 마침내 본원 사는 서본원사와 동본원사(大谷派)로 나눠지게 되어 세력 약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1532~1536년 동안 일어난 법화잇키는 일련종 문도들이 중심이 되어 잇코잇키에 대항하며 교토 지역민들 의 자치권 획득을 위한 항쟁이다. 히에이산(比叡山) 천태종의 승려 들과 다이묘(大名)연합군이 가세하여 패배하고 말았다.

종교적 정체성 및 자주성과 연관된 잇키는 정권의 입장에서는 사 회 불안의 요인이었다. 막부정권의 붕괴로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 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강력한 불교 정책이 있었기 때 문이다. 그 핵심은 본말사제도와 사청제도 및 단가제도다. 에도막 부는 불교 통제책인 이 제도들을 통해 거의 완벽하게 불교계를 권 력의 관리하에 두게 되었다. 이들 제도의 시행을 시기적으로 본다 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기, 에도막부가 성립되자마자 제종 · 제사원법도가 집중적으로 공포된 시기다. 다음으로는 시마바라(島 原)의 난 이후, 기독교 금지를 위해 사청제도를 전국에 실시한 때 다. 마지막으로는 사원 소속임을 밝히는 종문아라타메(宗門改め) 와 종지인별장의 작성이 확립된 시기다.

제종·제사원법도는 16년간 천태종·진언종·법상종·정토종·임제 종·조동종에 16번에 걸쳐 하달되었다. 특히 천태종과 진언종에 집 중적으로 실시되었다. 그 이유는 이들 사원은 고대 말부터 승병을 통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교토를 중심으로 대사원을 거느리고 있는 양 종파는 언제든 막부 권력에 위협을 가할 수도 있었다. 본말사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의 전국 사찰을 통제 하기 위해 그대로 이식한 것을 보면 그 특징을 잘 알 수 있다. 겉으 로는 교학의 발전과 도제의 양성 등 불교 발전을 위한 것으로 보이 지만, 무엇보다도 본사의 특권이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하이어라키(hierarchy, 수직적 위계질서) 구축을 목표로 한다.

중세만 하더라도 종파와 종파는 서로 넘나들며 하나의 불교적 회 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본말사제도는 일차적으로 종파성 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다. 덕분에 근세에 각 종단은 종학을 구현하는 데에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본사 중심의 운영을 통한 정치경제적 차원의 규제 기능이 숨어 있었다. 1632년 막부에 의한 본말장(本末帳)이 작성되었으며, 이에 기반한 막부 차원의 종무행정을 위해 1635년에는 종교행정을 위한 기관인 사사부교(寺社奉行)를 설치했다. 이로써 종교에 대한 국가의 관리 가 일차적으로 확립되었다. 국가는 결국 종교를 자신의 계급 아래 둠으로써 민심을 통제, 이용하는 데에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동서 고금에서 이러한 예는 수없이 발견된다. 종교법인을 통해 국가가 종교를 승인하는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국가의 전횡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거세된다.

다음에 막부가 취한 정책은 불교도들에 대한 구체적인 통제였다. 그 계기는 시마바라의 난이다. 1637년, 사가·나가사키현의 시마바 라와 구마모토현의 아마쿠사(天草) 지역 농민들이 연대한 백성잇 키다. 시마바라성을 보루로 삼아 막부와 지방 정부에 대항했지만, 3만7천여 명의 가담자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여기에는 기독 교 신자가 많았다. 기독교 금지령은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 臣秀吉)에 의해서였지만, 외국 봉쇄와 더불어 강화되었으며, 오가 조(五家組)에 의한 감시가 이뤄졌다.

사청제도 또한 숨어서 활동하는 가쿠레키리시탄(隱れキリシタ) 여부의 확인을 위해 모든 주민의 기록을 단가사(檀家寺)에 두고, 사 청증문(寺請証文)을 통해 기독교도가 아님을 증명받았다. 이로써 사원은 국가의 말단 행정기관이 되었다. 사원에서는 매년 단가 여 부를 조사하여 관청에 신고했는데, 이는 종지인별장(宗旨人別帳)5) 에 기록되었다. 1613~1614년경 조사가 실시되었지만, 전국에 걸친 조사는 1635년이 되어서였다. 이 종지인별장은 메이지 신정부에 의해 사청제도가 폐지되면서 호적법의 호적으로 계승된다. 1632년 에 막부는 각종 본산에 본말사의 실태조사를 명령하였다.

이처럼 에도막부의 불교 통제에 의해 사원들은 국가기관처럼 운 용되었으며, 후대로 갈수록 사원들은 단가를 자신의 경제적 기반으 로 활용했다. 사원은 전통적인 불법과 왕법 중에서 왕법을 우위로 인식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국가주의가 대두된 것이다. 고대로부 터 불교는 그나마 국가권력과의 긴장감이 남아 있었고, 더하여 하 부에서는 잇키를 통해 정치권력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거시적 차원 에서 고대와 중세에 형성된 대종단들은 완전히 국가불교화 되고 말 았다.

그리고 단가사에 조상들의 위패가 차곡히 쌓임으로써 장제불교 (葬祭佛敎)로 변해갔다. 불교의 장제는 중세 이후 정토불교가 발흥 하면서부터 다양한 의례로 발전했다. 중세 말기에 77일 · 백일 · 1주 기 · 3주기 · 13회기 · 33회기의 불교의례가 갖춰졌다. 촌락공동체의 장례 협력 중심은 호적 관리를 맡은 단가사찰이 되었다. 더 이상의 포교가 필요 없는 장제불교는 사회구조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자신의 단가에게 사원의 보수나 유지, 법요나 불사의 비 용을 요구함으로써 단가들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는 에도 말기로 가면서 미토번 등의 지역에서 폐불훼석(廢佛毁釋)을 낳았 다. 국가불교 폐해의 부메랑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옴을 여실히 보 여준다. 이는 근대 일본불교의 비참한 현실로 재생산되는 운명에 부딪힌다.

5. 공멸의 함정

국가도 하나의 삶의 환경이다. 절대적이지 않으며 시대와 사람에 따라 변한다. 불교는 한 시기 인간 의식의 종합인 국가에 대해서도 대응하고 전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 일본불교의 한계가 여기 에서 발생했다. 1868년 메이지혁명에 성공한 신정부는 막부체제를 부정하고, 왕정복고를 선언했다. 막부의 보호 우산 속에 있던 불교 계 또한 폐불훼석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근세 불교는 이보다 더 좋 을 수 없었다. 비록 국가권력 아래였지만, 백성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안온한 세월을 구가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권력을 창출 하며, 모든 백성을 단가로 둠으로써 자신의 지배하에 자신의 의지 대로 움직이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날도 종지부를 찍는 날 이 온다. 새 국가는 다시 불교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절대 권력 에 중족시켰다.

신정권 수립에 이어 바로 불교계에 내린 행정명령은 ‘신불분리령’ 이다. 불교 토착화와 민간 종교와의 평화적 공존의 역사를 하루아 침에 무너뜨린 것이다. 핵심 행정조치는 1868년 3월에 내려진 ‘신 불판연령(神佛判然令)’이다. “하나, 금번의 왕정복고(王政復古)는 진무(神武) 창업의 시원(始原)에 기초하여 모든 일을 일신(一新)하 고, 제정일치의 제도로 회복함에 있어 먼저 첫 번째로 신기관을 재 흥하여 설립하고, 그 위에 차츰 제전(祭奠)도 발흥하도록 명함. (중 략) 하나, 금번 제국 대소의 신사에서 신불혼효(神佛混淆)의 상태 가 폐지됨에 따라 별당(別堂), 사승(社僧)의 무리는 환속한 뒤, 칸 느시(神主), 진닌(神人) 등의 칭호로 바꾸고 신도(神道)로써 근무해 야 함. 만약, 부득이 이에 지장이 있거나 또는 불교 신앙에서 환속 할 뜻이 없는 무리는 신사 근무를 중지하고 퇴거할 것.6) 진무왕은 고대 제정일치 사회를 담당했다고 하는 신기관(神祇官)을 설립한 왕이다. 이로써 근대국가를 제정일치의 왕조로 복귀시킨 것이다.

이 조치는 승려들을 신사로부터 완전히 추방하는 것이었다. 이는 불교계에 대한 탄압의 빌미가 되어 전국의 사찰을 통폐합하고, 승 려들을 추방하여 환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과도한 폐불 현상이 일어나자 오히려 신정부는 신불혼효의 금지가 파불(破佛)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는 행정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신기관(神祇官), 신기성(神祇省), 교부성(敎部省)으로 이름을 바꾸어 가며 신도 국 교화 및 불교 통제를 실시했다. 교부성 산하에는 교도직(敎導職)을 두어 신관과 승려를 관리로 삼아 국민교화에 동원하기도 했다.

1872년에 제정한 ‘교칙 3조’는 1경신애국의 뜻을 명심하여 지킬 것, 2천리인도를 명확히 할 것, 3황상(皇上)을 받들어 조정의 뜻 을 준수하도록 할 것이었다. 불교계는 제정일치 국가의 도구로서 신도의 하부 구조에 편입되는 상황에 대해 저항했다. 그럼에도 결 국 1889년 황실전범과 대일본제국헌법의 제정, 1890년 교육칙어의 제정으로 신도 국교화는 완결되었다. 모든 것은 국체(國體)라는 한 마디로 수렴되었다. 그동안 막부에 의해 유기되어 있던 왕권을 회 복하고, 전제군주에 의한 통치의 절대성과 신성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근대 불교계는 메이지유신의 해에 일본 최초로 종파들 간의 회합이 이뤄졌다. 그리고 8개조의 불교개혁안을 내놓았다. 1 왕법과 불법은 분리할 수 없다는 논, 2기독교를 연구해 비판, 배척 하는 논, 3자신 종파의 교학을 연구하는 논, 4불교·유교·신도의 정립을 위해 연마하는 논, 5자기 종파의 폐단을 없애는 논, 6새롭 게 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논, 7 각종 인재를 등용하는 논, 8 각 지 역 사람을 잘 가르친다는 논이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구태의연한 점은 왕법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밝힌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서도 국가의 배타성과 궤를 같이한다. 다행한 것은 뒤의 논의로 갈수록 불교의 변화, 발전을 위한 대안을 마련, 근대의 교학 연구와 교육기 관 수립으로 불교학의 획기적인 비약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근대 불교의 한계는 결국 국가를 초월해야 함에도 삶의 현실 구 조인 정치권력의 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근대 일본은 실패했다. 동아시아에서 일찍이 서구 문명을 수용하고, 벤치마킹하 여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부국강병을 이뤘지만, 서구의 패권주의와 제국주의적 의식마저 모방함으로써 패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 한반도와 주변 국가에 대해서는 네오 오 리엔탈리즘(neo-orientalism)적 망상으로 침략을 감행했다. 화려한 다이쇼 데모크라시(1910~1920년대 사회·정치·문화적으로 민주주 의적 자유를 누리던 시기)로 백가쟁명의 활발한 사회적 의식이 확 산되기도 했지만, 이 또한 보편타당한 세계적 의식으로 확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국가의 대외팽창전략에는 대부분의 민중이 눈을 감았다.

국가신도를 제외한 국가의 교묘한 종교 통제는 1945년 패망 때까지 대일본제국헌법에 반영되어 있었다. 제28조는 “일본 신민은 안 녕질서를 방해하지 않거나 신민다운 의무에 위배하지 않는 한에 있 어서 신교(信敎)의 자유를 가진다.”는 독소조항이 그것이다. 이미 쇼토쿠 태자의 ‘17조헌법’을 흉내 내어 일본왕의 무소불위의 입법 · 사법·행정·군권을 17조에 걸쳐 명기해 놓았다. 3조는 “천황은 신성 하여 침범할 수 없다.”고 하여 신성불가침을 확고히 했다. 신민다운 의무는 일본왕의 신성불가침을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 천황을 모독 하면 최고의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 서기(日本書紀)》의 신화에 기원한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존엄성과 우월성을 논하는 국체론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그 정점에 부활한 일본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시즘 및 군국주의의 기세가 나라를 덮었던 1930년대에서 1945 년 일본 패망까지 불교계 종단 또한 종교적 사명을 포기한 집단이 나 다름이 없었다. 불조는 물론 종조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자신의 단가인 민중을 전쟁터로 몰아넣은 죄과는 씻을 수 없는 역사가 되 었다. 불교 최고의 계율이자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드러내는 불살 생계를 집단적으로 범한 탐진치 삼독의 폐해가 불교계를 무지와 무 명으로 뒤덮었다. 그 핵심에는 소위 ‘전시교학’이 있다. 이를 분석하 면, 일본왕은 부처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자신의 신도들이 전쟁터 에서 죽으면 그곳이 정토며, 전쟁이 곧 수행이라는 궤변을 하달했 다. 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에 국가의 영령(英靈, 꽃다운 혼)이 되 어 묻히는 것은 극락과 다름없는 최고의 영예였다. 역사상 불교계 교단이 이처럼 국가의 수족이 되어 전쟁의 화신으로 타락한 시대는 없었다.

대표적인 정토불교와 선불교 교단의 전시교학의 구조는 어떠했 는가. 정토진종은 양익(兩翼) 또는 양륜(兩輪)으로 표현했던 국가 와 불교의 관계를 교학의 해석 방식인 진속이제(眞俗二諦)에 결부 시켰다. 종교의 진리(dharma)를 세속국가의 윤리에 복종시켰다. 마침내 일본왕의 권력을 아미타불의 위광으로 감싸기까지 했다. 그 리고 불교민족주의적 행태로서 전쟁을 성전으로 승화시켰다. 선종 의 전쟁 논리는 전쟁선이다. 무사도에 불교의 선수행이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살생까지 불교가 승인한 것은 아니었다. 이 미묘 한 지점을 근대 선종계는 이용했다. 전쟁터가 바로 수행의 완결 지 점이며 해탈의 장이라고 보았다. 일살다생(一殺多生), 즉 한 사람 에 대한 죽음으로 다수를 살린다는 논리가 횡행했다.

이러한 황당한 역사는 파헤쳐 살펴보면 그리 특이한 것은 아니 다. 우리가 종교의 주변에서 목격하는 현실이 시대적으로 응축되어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교단주의다. 교조 또는 종조의 가르침을 구 현하는 도구에 불과한 교단이 권력의 주체가 되고, 보호해야 할 절 대성을 지닌 조직으로 보고 그들의 구성원들을 노예로 삼는 현상 이다. 모든 존재가 그렇듯 조직 또한 무상(無常)한 것이다. 거기에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삼을 영원불변성은 없는 것이다. 근대 일본 불교계는 교조인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배신한 이단으로 흐른 것이다.

둘째는 불조와 종조의 가르침을 관념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불교의 선조들이 피와 땀이 흐르는 삶의 현장에서 터득한 가르침 을 자신의 삶 속에 살아 있는 뼈와 살로 철저하게 투영시키지 못한 것이다. 공업으로 형성된 국가와 사회에 대한 팽팽한 윤리적 긴장 감으로 감시하고 비판하며 삶의 객관적 환경을 개척했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거기에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파사현정의 정의(正義)가 설 자리는 없었다. 모든 판단을 사후로 연기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더욱 강한 윤회의 사슬로 얽어매게 한 것이다. 금과 옥조의 가르침도 한순간 한 줌의 휴지 조각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불교계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6. 맺는말

일본의 근대는 우승열패의 서양 사회의 기반이 된, 물질과 과학 문명의 아시아적 이식의 모습과 그 한계를 잘 보여준다. 자본주의 를 등에 업은 패권국가의 모습은 영락없는 퇴폐적 서구 문명의 그 림자에 다름 아니다. 불교계는 이에 대한 비판과 성찰로 고통에 처 한 민중을 앞장서 이끌었어야 했음에도, 오히려 국가의 하부구조 속에서 국가의 주구(走狗)로 전락하고 말았다. 치욕의 역사였다. 대다수의 종단이 전후에 통절한 참회를 했지만, 뼈아픈 역사를 되 돌릴 수는 없다. 현실이 보여주듯 국가는 이상적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 실현을 위한 권력의 구조물이기도 하다. 정치권력은 한때의 부유물이다. 국가를 초월하여 통찰력을 가진 불교는 국가 를 절대화하지 않아야 한다. 진리 구현의 주체자로서 행동해야 하 는 것이다. 근대 일본불교를 역행보살로 삼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어두운 근대 일본불교이지만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의 교단을 개혁하거나 대승불 교 운동처럼 새로운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교단 개혁을 외친 정토 진종의 기요자와 만시(清沢満之)나 조동종의 오우치 세이란(大内青 巒)의 활동은 대표적이다. 다나카 지로쿠(田中治六), 안도 히로시(安藤弘) 등이 창립한 불교청도동지회(佛敎淸徒同志會, 후에 신불 교도동지회)는 종래의 종교적 제도 및 의식 철폐를 외치고, 정치상 의 보호와 간섭을 거부하였다. 국수주의적인 다나카 치가쿠(田中 智學)의 국주회(國柱會)가 나왔지만, 경전의 가르침에 입각한 니와 노 닛쿄(庭野日敬)의 입정교성회, 마키구치 츠네사부로(牧口常三 郎)의 창가학회가 나왔다. 패망 이후 지금까지 월간지 《재가불교》 를 발행하고 있는 재가불교협회와 경전 번역과 불법 보급을 행하는 불교전도협회도 창립되었다.

1930년대에 맹렬히 활동한 세노오 기로(妹尾義郎)의 신흥불교청 년동맹이야말로 불교가 할 수 있는 모든 사회참여를 한 사회개혁 조직이다. 3대 강령은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다. “1 우리는 인류가 소유한 최고 인격 석가모니불을 찬앙하고, 동포 신애의 교강에 근 거하여 불국토 건설의 실현을 기한다. 2 우리는 기성 종단이 불교 정신을 모독한 잔해적 존재가 되었다고 인식하며, 이것을 배격하고 불교의 신시대적 선양을 기한다. 3 우리는 현 자본주의 경제조직 이 불교 정신을 배반하고, 대중 생활의 복리를 저해하는 것으로 인 식하며, 이것을 개혁하여 미래사회의 실현을 기한다.” 오늘날 더욱 절실한 불법을 내건 사회운동이다.

일본의 불교학이 세계적인 이유는 수많은 종립학교를 내세워 도 제를 양성하는 한편, 서구 종교학이나 불교학을 받아들여 학문의 근대화를 꾀했기 때문이다. 불교계 종립학교는 전국에 50여 개에 달한다. 1880년대의 ‘대일본교정대장경’으로부터 시작된 대장경 편 찬은 ‘대정신수대장경’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각종의 종전(宗典) 을 필두로 총서, 사전 등 불교 연구의 도구들이 쏟아졌다. 일본·한 국·중국·티베트·인도불교는 물론, 초기 및 대승불교 연구는 원전 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연구되었다. 계율·화엄·천태·삼계교·선·정토사상 연구는 물론 불교서지학, 불교철학, 불교민속학, 불교경제 학에서도 발군을 자랑한다. 티베트, 중국 및 서역의 학술탐사가 근 대에 이루어졌고, 대승비불설 논쟁, 필사본 연구, 종교비교학적 연 구, 불교 회화·건축·음악 등의 불교문화론의 전개는 여전히 활발하 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인도학불교학회와 일본불교학회 외에도 수 십 개의 불교 관련 학회가 활동 중이다.

일본불교의 이중성과 양면성, 빛과 그림자, 절정과 퇴락은 무엇 을 의미할까. 어떤 인간이나 집단도 명멸하는 역사적 존재에 불과 하다. 따라서 일본불교는 현대 불교의 향방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 다. 국가와 불교는 자신들의 세계로 포섭하고자 하는 민중을 대상 으로 갈등과 경쟁을 하면서도 때로는 협력과 조화를 이루기도 한 다. 그럼에도 만인의 고(苦)를 해소하고, 안락과 평화를 추구하는 불교는 욕망을 독점 ·중재 ·배분하는 국가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관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일본불교에서 얻는 교훈이면 충 분하지 않을까. ■

 

원영상 wonyosa@naver.com
원불교 교무, 일본 교토불교대학 문학박사. 주요 논문으로는 〈일본불교의 내셔 널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근대일본의 화엄사상과 국가〉 〈소태산 박중빈의 불교개혁사상에 나타난 구조고찰〉 등과 저서로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공저) 등이 있다. 현재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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