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사의 흥망성쇠에서 배운다

1. 인도네시아 개황과 불교

한때 동남아시아 대승불교의 꽃을 찬란하게 피웠던 나라가 있다. 지금은 과거의 영광을 유적으로만 볼 수 있는 곳, 바로 인도네시아 다. 7~10세기까지 이 나라는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으로 대 표되는 대승불교와 밀교의 중심지로서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해 상 불교왕국이었다. 그러나 11세기 초 남인도의 힌두계 촐라왕조 의 침입으로 불교를 옹호하던 왕권이 약화되고, 연이은 이슬람의 세력 확장과 동로마 제국 멸망 후 시작된 대항해 시대의 여파로 네 덜란드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이곳은 찬란했던 불교문화 유적 과 폐허만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 해양부에 위치한 나라로서 17,000개 이상의 섬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군도 국가이다. 2021년 9월 조사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의 인구는 약 2억 7,600만 명으로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며, 지난 2년간의 출산율 증가에 따라 그 수치가 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종교적 다양성으로 잘 알려진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 가 많은 무슬림 국가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이슬람교, 개신교, 천주 교, 힌두교, 불교, 유교 등 6개 종교를 인정하고 있다. 비록 불교가 6대 종교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기는 하나 그 수는 인도네시아 전체 국민의 약 0.8%인 200여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대부분의 불교도는 자카르타, 리아우, 리아우 제도, 방카 벨리퉁, 북부 수 마트라, 서부 칼리만탄에 집중되어 있다. 불교도의 대다수는 중국 계 화교이며 소수의 토착 불교도 공동체(자바인과 사삭 등)도 존재한다.

군도의 대부분 지역에서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지만 일부 지역 특히 발리섬에서는 힌두교가, 술라웨시섬 북부에서는 로마 가톨릭 이, 서티모르에선 가톨릭과 개신교 등이 일부 강세를 보인다. 특이 한 것은 이슬람교가 사실상 사회 분위기를 많이 좌지우지하지만, 보통의 아랍 국가들처럼 전형적인 신정(神政) 이슬람 국가와 달리 서구 식민지 시대 등을 거치며 세속 국가에 가까운 경향을 나타낸 다. 물론 이런 분위기를 탐탁지 않아 하는 이슬람 강경파들도 존재 하지만, 사실 이슬람이 인도네시아에서 주류가 된 것은 중세 이후 이며 그 이전엔 오히려 불교나 힌두교가 강세였다.

불교는 서기 1세기경 동남아시아의 인도화(Indianization) 기간, 해로무역을 위해 인도네시아 군도를 여행한 인도 상인들이 불교를 포함한 종교와 문화를 이 지역에 전파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구 자라트 지역의 상인들이 초기에 인도네시아에 불교를 전했다고 추 정하고 있는데,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상무역로는 교역 하는 상품 외에 문화와 종교적 신념까지도 용이하게 교환함으로써 이 지역에 불교가 점진적으로 파급될 수 있도록 했다.

오랜 옛날부터 인도네시아는 인도와 로마 그리고 중국과 한반도 를 잇는 문명의 교차로였다. 이 때문에 말라카해협을 경유한 이 교 역로를 통해 인도의 문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외래문화와 문물이 통 과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에 문화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불교와 힌두교 등의 종교였다.

고대로부터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와 자바는 지리적으로 인도양 에서 불어오는 동남풍이 말라카해협을 거쳐 자바해로 연결되기 때 문에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인도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왔다. 원래 불교는 인도네시아에서 힌두교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종교였다. 그러나 불교는 13세기경 이슬람 세력이 들어온 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명맥을 이어오 던 불교왕국들은 무역을 위해 진출했던 무슬림 술탄국에 의해 정복 됨으로써 개종되었으며 발리, 칼리만탄, 술라웨시 같은 외딴 지역 에서 살아남았던 일부 불교 공동체들도 현지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었다.

2. 해상 불교왕국의 발흥

지금까지 불교의 해외전파와 관련된 기존의 연구가 주로 육상 실 크로드를 통한 전파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근래 학계에서는 아시아 내에서의 연결 즉 서남아시아로부터 동남아 그리고 동아시아로 연 결하는 해로 또는 해상 실크로드라고 알려진 바닷길의 역할을 점 차 중요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인도와 스리랑카, 동 남아시아 제국은 고대에 다양한 형태의 불교 전파와 수용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남아 있다. 원래 바다를 통 한 여행은 고대 세계에서 사람과 물건을 이동하는 가장 빠르고 경 제적이며 안전한 방법이었던 만큼, 바다는 아득한 옛날부터 아시아 역사의 연결 고리였다.

인도로부터 인도네시아로의 불교 전래와 관련하여 몇 가지의 고고학적 증거들은 인도네시아가 불교 전래 초기부터 무역 및 문화 교류의 허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해상 무역로를 통해 인도 상인과 여행자들이 인도네시아 주민들에게 불교의 가르침과 관습을 소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을 추정케 한다.

인도네시아에 불교가 존재했다는 최초의 증거는 5세기의 고고학 유적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비문에는 종종 불교를 보호했던 통치자의 이름, 사원과 불탑의 건설 및 토지를 기증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특히 1863년 시아르튼(Ciaruteun) 강바닥에서 발견된 시아르튼 비문은 5세기 벵기 문자(인도 팔라바 시대에 사용됨)와 산스끄리뜨어로 쓰여 있으며, 당시 서부 자바를 지 배하던  초기 왕국인  ‘타루마나가라(Tarumanagara)’를  명확하게 언급한 최초의 비문이다.

중국의 구법승 법현은 《고승법현전》에서 “이처럼 90일 정도 가서 야바제(耶婆提, Javadvipa)라는 나라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외도 바라문이 흥성하여 불법을 말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이 나라에 머 물기를 5개월, 다시 다른 상인을 따라 배에 올랐다. 큰 배 위에는 역시 200명 정도의 사람이 탔고 50일분의 식량을 준비하였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

연구에 의하면 법현이 당시 기착하였던 이 지역은 358(추정)~ 669년까지 타루마나가라(Tarumanagara 또는 Taruma)라는 힌두 왕국이 지배하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여러 비문의 발견과 관련 연 구를 통하여 이 왕국이 서부 자바에서 가장 초기의 힌두 정치체제 를 갖춘 왕국이었으며 쿠타이, 칼링가와 함께 초기 인도네시아 역 사를 시작한 개척국가라는 것이 밝혀졌다.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 (隋書)와 당서(唐書)는 528~669년 사이에 타루마의 사신들이 방문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1986년 고대 타루마왕국의 영지였던 바투자야(Batujaya)지역의 고고학 단지에서 5~6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30여 개의 불교사원 단지가 발견되면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사리탑과 비문 및 불교 점토 봉헌판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타루마왕국에서 힌두교가 널리 신봉되고 있었다 하더라도 대승 불교 또한 이미 전래되어 있었으며, 7세기 중엽 수마트라의 스리비 자야(Srivijaya)에 의해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적어도 10세기까지 는 이 사원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현장, 의정 같은 중국의 구법승들도 이 지역에서 불교사원과 공동 체 및 당시 번성하고 있던 불교문화의 존재를 여행기에서 언급하 였다.

이후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7세기부터 13세기까 지 수마트라를 장악했던 스리비자야는 해양 제국을 건설하고 광범 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유지하면서 군도의 다른 지역에 불교 사상과 수행을 전파할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지리적 이점과 환경적 요소는 동남아시아 인근의 제국과 중국 및 한반도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 으며, 스리비자야는 불교 학습 및 확장의 중심지가 되어 중국, 인도 및 기타 아시아 지역에서 학자와 순례자가 모여들었다.

8~9세기에 자바를 통치했던 사일렌드라 왕조는 불교를 적극 장 려하고 보로부두르와 같은 기념비적인 사원을 건립하였으며 중부 자바의 마타람(Mataram) 왕국도 멘두트(Mendut) 및 파원(Pawon) 사원을 건립하며 불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에서 인도의 불교 승려와 학자들에 의해 승가 공동체가 설립되고 불교 교학의 전수와 경전 번역 및 지역 학자들과의 지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특이한 것은 이 기간 인도네시아의 불교는 힌두교의 신앙과 의식에 동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힌두-불교의 양상을 지닌 독특한 불교 로 변이되었는데 이는 인도네시아 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사일 렌드라의 영지를 차지한 산자야 힌두 왕국의 경우 힌두사원 인근에 불교사원도 함께 건립하였다.

1) 스리비자야 제국(Srivijaya Empire, 671~1025)

오늘날 한때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찬란한 불교의 꽃을 피웠던 과 거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많은 불교 유물과 비문들을 통하여 고대에 수 세기 동안 융성했던 해상 왕국의 불교 를 상상할 수 있다. 그중 가장 강력한 해상 불교왕국으로서 동남아시아 대륙부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 스리비자야 제국이 있다. 중국사에는 스리비자야 제국이 불교왕국이라는 의미를 지닌 삼불제 (三佛齊)로 등장한다.)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수마트라(Sumatra) 를 중심으로 발흥한 스리비자야 제국은 말라카해협을 장악하고 중개무역을 통하여 강 력한 힘을 구축한 후 동남아시아 전역에 불교 전파를 촉진하는 해상 강국으로 군림하였으며, 전성기에는 오늘날의 수마트라 일대와 말레이반도, 태국 남부와 자바, 보르네오, 술라웨시 및 필리핀 남부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던 불교 제국이었다.

인도네시아 군도에는 고대부터 두 개의 주요한 해상 통로가 있었 는데 하나는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사이의 말라카해협이고 다른 하나는 수마트라 남단과 자바 사이를 흐르는 순다해협이다. 이 두 바닷길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주요 항로에 위치하였기에 고대부터 이 두 해협을 장악하여 해상무역을 통제했던 세력들이 주 요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중 7세기부터 이 두 지역을 장악 했던 세력이 스리비자야 제국이었다.

스리비자야의 역사와 관련되어 언급되는 두 가지 주요 자료는 중 국의 구법승들에 의한 기록과 이 지역에서 발견되고 해독된 비문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특히 671년 이곳을 방문했던 의정의 기록은 스 리비자야 건국 초기의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또 다른 기록물인 케두칸 부킷(Kedukan Bukit), 탈랑 투워(Talang Tuwo), 테갈라 바투(Telaga Batu) 및 코타 카푸르(Kota Kapur) 비문 등은 팔라바(Pallava) 문자를 사용하여 옛 말레이어로 작성되었는데 스리비자야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스리비자야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역사적 유물은 수마트라 팔렘방(Palembang) 근처에서 발견된 케두칸 부킷 비문으로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비문에는 스리비자야의 창건 자이자 초대 왕인 ‘다푼타 향 스리 자야나사(Dapunta Hyang Sri Ja- yanasa)’가 팔렘방에 도착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주요 해상로를 장악한 스리비자야는 7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사이, 동남아시아 의 패권국이 되었으며 대륙부의 크메르(Khmer)와 참파(Champa) 까지 우호와 경쟁 관계를 번갈아 가며 지속했다. 그러나 스리비자 야의 주요 관심사는 당에서 송까지 지속된 중국과의 수익성 있는 무역을 유지하는 것이었다고 보인다.

〈그림〉 해양제국 스리비자야와 말라카 해협(wikipedia 사진)

 

팔렘방을 거점으로 하여 스리비자야는 이 일대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는데, 대승불교와 밀교를 받아들였으며 이후 인도로 가는 중 국 구법승들과 순례자들의 기착지가 되었다. 의정은 스리비자야에 서 1천 명이 넘는 승려를 발견했으며, 여러 나라에서 온 무역 상인들이 자주 어울리고 있으며, 인도로 가는 학승들은 한두 해쯤 스리비자야에 머무르며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기록했다.  나아가서 스리비자야의 왕들은 인도 남동부의 네가파탐(지금의 나가파티남)에 불교 수도원을 세우기까지 했다.

스리비자야 제국의 중심 도시가 팔렘방이 아니라 무아로 잠비 (Muaro Jambi)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 지역의 고고학 연구에 의하 면 무아로 잠비 사원 단지에서 여러 종교 사원이나 거주지가 발견 되었지만 팔렘방 지역에서는 비교가 가능한 사원이나 건축물의 유 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과 관계없이 이 유적 지의 조사를 통하여 발견된 여러 고고학적 증거는 이곳이 본질적으 로 대승불교와 밀교의 유적지로서 10세기의 유명한 학승 다르마키르티스리(Dharmakīrtiśrī) 와 관련된 불교 교학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외에도 7~13세기까지 스리비자야의 영역에 포함되었던 말레 이반도의 케다(Kedha)에서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동남아시아 의 불교와 관련된 최초의 비문이 발견되었다. 특히 7세기경의 비 문으로 추정되는 케다 지역에서 발견된 봉헌판 중 2개에는 대승경 전인 《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海意菩薩所問淨印法門經, Sāgara-matiparipṛcchā)》 의 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대승불교가 신봉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전성기에 스리비자야 왕국의 영역은 수마트라, 말레이반도, 자바 까지 확장되었으며, 무역로를 통제하는 것 외에도 인도 및 중국과 의 불교 교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나란다에서 발견된 동판 비문에는 “스리비자야의 왕 발라푸트라데바(Bālaputradeva) 가 나란다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이의 유지를 위해 5개 마을의 수익을 부여하도록 데바팔라왕에게 요청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스리비자야는 나란다는 물론 팔라 왕조와도 직접적인 접 촉을 유지하면서 군도의 수마트라와 자바, 말레이반도 남부는 물 론 스리비자야와 직간접적으로 교섭을 유지하는 지역의 예술에 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력은 사일렌드라 왕조로까지 확장되었다.

해상교역을 장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스리비자야는 10세기 말까지 자바 대부분을 지배하였지만 남인도의 해양 및 상업 왕국인 촐라(Chola)  의 침입을 받게 된다. 스리비자야가 지닌 중개무역의 지리적 이점이 이 지역을 노리던 촐라에게는 남아시아와 동아시 아 사이의 항로에서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1025년 촐라는 팔렘 방 일대를 점령하고 왕을 사로잡았으며 왕국의 다른 지역도 공격했 다. 지속된 위기로 12세기 말에 이르러 스리비자야는 작은 왕국으로 축소되었고, 수마트라에서의 지배적인 역할은 자바의 마자파힛 왕국의 가신으로서 잠비에 기반을 둔 믈라유(Mlayu)가 차지하게 되었다.

2) 사일렌드라 왕조(Sailendra Dynasty, 650~1025 추정)

중부 자바의 케두 평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불교 왕조로 사 일렌드라(Sailendra)가 있다. ‘Sailendra’란 ‘Saila(산 위)’와 ‘Indra(인 드라 신)’의 합성어로 ‘산 위의 신’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원래 사일렌드라는 자바의 지배 왕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케두 칸 부킷 비문 외에 다른 비문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앞 에서 살펴본 나란다 동판 비문에서 “발라푸트라데바의 아버지이 자 사일렌드라 가문의 보석(Śailendravamsatilaka)인 사마라그라비라(Samaragrawira)”라는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사일렌드라는 하나의 가문으로서 스리비자야와 혈통 관계로  묶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사일렌드라의 왕이었던 발라 푸트라데바가 후일 스리비자야의 왕으로도 기록된 것이다. 세데스 (Cœdès)는 “9세기 후반에 자바와 수마트라는 자바에서 통치하던 사일렌드라의 통치하에 통합되었으며 그 중심은  팔렘방이었다.”라고 주장했다.

스리비자야의 마하라자(Maharaja)가 된 사마라퉁가는 792년부터 835년까지의 재위 기간 중, 군사적 확장에 탐닉하지 않고 자바 의 스리비자야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825년에 완성된 거 대한 석조 만다라인 보로부두르의 건설을 개인적으로 감독하였다. 또한 그는 볼모로 사일렌드라에 와 있던 크메르 왕자 자야바르만 2 세(Jayavarman II)를 사일렌드라가 통치하고 있는 메콩 삼각주의 인드라푸라(Indrapura)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2세는 후일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톤레사프에서 북쪽 내륙으로 더 멀리 마헨드라파르바타(Mahendraparvata)로 옮긴 후 802년에 자 바로부터 크메르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앙코르 왕조를 세웠다.

그런데 사마라퉁가의 후계자인 프라모다와르다니(Pramodhawa- rdhani, 발라푸트라데바의 여동생)가 힌두 왕조인 산자야의 라카 이 피카탄(Rakai Pikatan)과 결혼하면서 왕국을 공동 통치하게 되 었는데, 이후 분쟁이 발발하고 전쟁에서 패한 발라푸트라데바는 수 마트라로 건너가서 스리비자야의 왕좌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자 바의 사일렌드라의 불교는 오래 존속하지 못하고 힌두 왕조인 산자 야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그러나 사일렌드라에 의해 건립된 세계최 대의 불교 건축물인 보로부두르는 그 건축학적 의미는 물론 부조의 경전적 내용을 통하여 찬란했던 당시의 영광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8~9세기 사일렌드라 왕조의 주요 건축물인 보로부두르, 짠디 세우(Candi Sewu), 플라오산(Plaosan), 멘두트(Mendut) 등의 장엄 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불교사원들은 사일렌드라를 불교의 중심 지로 만들었으며 이에 따라 많은 순례자가 모여드는 성스러운 불교 의 중심지가 되었다.

보로부두르(Borobudur)는 825년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의 마겔랑에 건립된 세계에서 가장 큰 대승불교사원으로 약 75년에 걸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보로부두르는 하나의 큰 사리탑으로, 위에서 보면 불교 우주론에 따라 기단으로부터 상륜부까지 욕 계, 색계, 무색계를 표현하고 있으며 거대한 만다라를 지상에 구현 한 형태로 건축되었다. 탑은 기단의 각 면이 약 118m인 정사각형 이며 8층의 플랫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아래쪽 5개 층은 정 사각형이며 상부의 3개 층은 원형이다. 상부 원형 플랫폼에는 하나 의 큰 중앙 스투파(stupa)를 둘러싸고 있는 72개의 종 모양의 탑이 있는데, 각 종탑은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으며 내부에 전법륜을 취하고 있는 좌불(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보로부두르에서 가장 압권인 것은 그 크기가 아니라 사원 회랑의 주벽과 난순을 장 식하고 있는 총 1,460면의 부조와 504좌의 불상이다. 부조는 기단 부터 《분별선악보응경》 《방광대장엄경》 《본생담》, 《화엄경》의 입 법계품의 선재구법도, 보현행원찬 등의 순으로 새겨져 있으며 화엄 정토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보로부두르가 언제 무슨 이유로 버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하지만 928년에서 1006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화산 폭발 이후 왕국의 수도를 동부 자바로 옮긴 것으로 보아, 화 산 폭발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랜 세월 사 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던 보로부두르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은 영 국 식민지 시기였던 1814년의 일로 당시 총독 래플즈(Thomas S, Raffles)에 의해서이다. 이후 수차례에 걸친 복원 끝에 1991년 유네 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원 과정에서 알려진 사실이지만 보로부두르와 파원 사원 그리고 멘두 트 사원은 정확히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학 자들은 당시 이 세 사원 간에 특정한 어떤 의식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외에도 보로부두르보다 규모는 약간 작지만 짠디 세우(Candi Sewu)는 중부 자바의 힌두사원인 프람바난에서 북쪽으로 800m 떨 어진 곳에 자리한 8세기의 대승불교 사원이다. 이 사원은 인도네시 아에서 두 번째로 큰 불교사원 단지로서 사일렌드라 왕조의 공주인 프라모다와르다니와 결혼한 왕자 라카이 피카탄의 통치 기간에 완 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불교와 힌두교의 공존과 조화를 위하여 힌두 사원인 프람바난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것은 정치적인 행위이 기는 하지만 불교와 힌두교 신행의 통합적 관습은 인도네시아 불 교의 전래 초기부터의 특징이기도 한데, 아마도 다양한 사람과 문 물이 오가던 관문으로서의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결과일 것으로 생각된다.

3) 마타람왕국(Mataram Kingdom, 716~1016)

메당(Medang) 왕국으로도 알려진 마타람왕국은 중부 자바에 기 원을 두었던 고대의 힌두-불교 왕국으로서 8~11세기 사이에 번성 했다. 산자야(Sanjaya)가 세운 이 왕국은 대규모 벼농사에 크게 의존한 것으로 보이며 나중에는 해상무역의 혜택도 받았다. 여러 연 구와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왕국은 인구가 풍부하고 상당히 번영하 였으며 어느 정도의 세련된 문명과 건축 기술을 성취한 것으로 보 인다.

여기서 같은 시기 함께 자바섬을 지배하고 있던 마타람 왕국과 사일렌드라 및 산자야 왕조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보아야 할 점이 있다. 특히 사일렌드라와 산자야 두 왕조는 8~9세기 고대 자 바의 역사 및 문화의 발전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고 대사를 밝히는 데에 각지에서 발견된 비문과 중국 또는 아랍의 문 헌에 의존해야 하는 한계로 인해 다소의 이견이 있긴 하나, 사일렌 드라 왕조는 8세기경 자바에서 등장한 지배 왕조로서 불교를 후원 하고 보로부두르의 건축에 공헌하였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고 보인다. 특히 마타람왕국과의 관계에 대해 사일렌드라는 마타람왕국 내에서 지배 가문으로서의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간주하는 듯하다.

원래 마타람왕국 자체는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이 상호 공존하는 힌두-불교적 성격을 가졌다. 흔히 인도-자바 문화로 불리는 전기 힌두-불교 시대의 문화가 인도 종교,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수용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후기 힌두-불교시대 문화는 토착화된 힌두, 불교와 민속신앙의 융합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나 불교의 강력한 후원자인 사일렌드라는 통치 기간 자바에서 불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사 일렌드라의 문화 및 건축, 특히 보로부두르 건설은 마타람왕국과 이후 자바 문명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9세기 중반에 이르러 산자야와 사일렌드라 사이의 관계는 악화 되기 시작하였는데, 852년 산자야 통치자 피카탄은 발라푸트라를 물리침으로써 자바에서 사일렌드라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후 발 라푸트라는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의 수도로 후퇴하여 마하라자 (Maharaja)가 되었다.

사일렌드라를 패배시킨 산자야 왕조는 그들의 영역에서 힌두교 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후원했다. 또한 지배 왕조로서 마타람왕국 을 통치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힌두사원 중 하나인 프람바 난(Prambanan)과 여러 사원을 건립했다. 그러나 산자야 왕조의 영 향력은 10세기에 이르러 쇠퇴하였으며, 마타람왕국은 결국 케디리 왕국과 싱하사리왕국과 같은 더 작은 국가로 분열되었다.

이후 들어선 마자파힛(Majapahit Empire, 1293~1527)은 마지 막 주요 힌두-불교 제국으로서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하 고 강력한 제국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이들은 힌두교와 불교의 혼합 주의로써 백성들의 조화를 시도하였으며 영적 스승으로서 시바와 붓다를 동일시하였다. 특히 마자파힛 전성기의 하얌 우룩(Hayam Wuruk)왕은 브라만교, 샤이바교, 불교를 뜨리빡사(Tripaksa), 즉 세 개의 날개라 부르며 이들의 조화와 결합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마자파힛 시대에는 이미 토착화된 불교와 힌두교가 일반 국민 사이에 깊게 뿌리박고 있던 민속신앙과 어우러져 종교의 전파나 신상 숭배를 위한 사원은 필요 없게 되었다. 나아가서 역대의 군주들이 힌두교도였기에 불교의 교세는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정치적 격변으로 불교는 물론 힌두교 또한 서 서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3. 전법과 구법의 바닷길

이미 바닷길을 통해 연결되었던 인도와 동남아시아 해상국가들 은 물질적인 교역뿐 아니라 사람과 문헌 등을 통해 종교를 비롯한 사상과 의례 체계들이 전달되었다. 이 뱃길은 인도와 스리랑카를 지나 서쪽으로 더 확장되면서 푸난(캄보디아)-광주-남경으로 연결되었다. 고대의 무역 항로이자 전법과 구법의 길을 떠났던 승 려들이 선택했던 이 항로는 인도양에서 태평양으로 나오는 관문인 말라카해협을 통과하는 가장 단거리의 항로였다. 천축의 승려 구나 바르만(Gunabarman, 求那跋摩)은 이 항로를 이용해 스리랑카에서 자바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몇 해를 보낸 다음 431년에 남경에 도착 하였으며, 5세기 구법의 여정을 마치고 중국으로 귀국한 법현(法顯)도 이 항로를 이용했다.

의정(634~713)은 광주(廣州)에서 출발해 해로를 따라 수마트라 의 팔렘방을 거쳐 인도로 들어갔으며, 나란다대학을 비롯한 인도 북동 지역에서 20여 년을 체류한 후 광주로 귀국했다. 이때 귀로의 여정은 동부 벵골만의 탐라립티(Tāmralipti, 현 서벵골의 Tamluk) 에서 출발해 스리랑카(2년 체류), 야바제(5개월) 등의 중간 지점을 거쳐 청주(淸州)에 도착하였다. 본래의 목적지는 구법의 경로를 역 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었지만 스리랑카에서 풍랑을 만나 뜻하지 않 게 야바제에서 체류한 뒤 청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후 팔렘방에 다시 와서 경전을 수집하면서 5~6여 년을 더 머무른 후 귀국하였다. 연속 두 차례에 걸친 의정의 여행은 각각 두 권의 여행 기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과 《대당남해기귀 내법전(大唐南海奇歸內法傳)》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의정의 기록 에 의하면 스리비자야에는 수천 명의 불교 승려가 교학을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당시 구법승이나 전법승의 주요 이동 수단은 귀중한 화물을 싣고 인도양과 중국해를 연결하는 해상 항로를 오가는 상선이었다. 이 배들은 또한 순례자, 외교관, 그리고 서로 이질적인 소속의 종교적 인물을 태웠다.   승려와 상인 사이의 관계는 여러 면에서 상호적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승려들이 선주나 상인들의 안전과 보호 를 기원하는 특정한 의식이나 의례를 제공하였다면, 상인들은 직접 적인 기부나 여타의 후원을 통해 승려와 경전 및 의식 용구 등의 운 송을 보장했다. 사실 전법승이나 구법승들은 서력기원 초기부터 힌 두교 전통, 산스끄리뜨어 및 기타 인도 문화 요소를 동남아시아로 전파하는 데 기여한 브라만교 경쟁자들이 이미 확보한 것과 동일한 네트워크를 따라 순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외에도 여러 구법승의 기록에 의하면 항해 도중 폭풍이나 폭 우, 번개로부터 피해를 입었으며 여러 귀중한 경전들이 소실되었 다고 전하고 있다. 바즈라보디(Vajraboddhi, 671~741)와 아모가 바즈라(Amoghavajra, 705~774)는 배가 위험에 처하자 이런 일이 악룡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한 상인들을 위하여 폭풍우가 치는 동안 〈대수구보살다라니(大随求菩薩陀羅尼, Mahāpratisarā dhāraṇī)〉를 낭송함으로써 배를 구원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11세기 밀교의 수행자인 아티샤(Atiśa)는 스승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 와 함께 수마트라에서 공부하기 위해 수바르나드위빠(황금도)로 항해하는 상인 그룹에 합류했다. 이때 그는 인도양을 항해하는 동 안 힌두신 시바가 사람들이 인도를 떠나는 것을 막으려는 초자연 적 폭풍에 직면하였는데, 시바와 그의 배우자를 물리치기 위해 아 티샤와 그의 제자 끄시티가르바(Kṣitigarbha)는 각각 분노한 탄트 라 존(尊)인 락타야마리(Raktayamāri, 아촉불의 화현)와 아짤라 (Acala, 不動明王)로 자신을 나타내어 방어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밀교에서 비로자나불의 분노의 현현으로 나타나는 아짤라는 동아시아에서는 부동명왕으로 부르고 있는데, 대개 불교의 대적 자인 샤이바파(Śaivas), 무슬림 및 티베트 뵌교의 수행자를 물리치 는 존재로서 등장한다. 이 이야기로 미루어볼 때 인도는 물론 군도 에서도 전통의 대승불교 대신 밀교가 주류로서 성행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문헌에 따르면 인도에서 해상 항로를 통해 중국으로 입국한 최초의 승려는 서기 247년에 난징에 도착한 소그드인 강승회(康僧會)였다. 이 외에도 더 많은 승려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남아시아 와 중앙아시아에서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난징이나 광저 우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다르마야사(Dharma-yaśas, 曇摩耶舍), 붓다지바(Buddhajīva, 佛陀什) 및 구나바르만 (Guṇavarman, 求那跋摩), 상가바르만(Saṅghavarman, 僧伽跋摩), 구나바드라(Guṇabhadra, 求那跋陀羅), 빠라마타(Paramārtha, 真諦), 보디다르마(Bodhidharma, 菩提達摩), 상가팔라(Sanghapala, 僧伽婆羅)와 만드라세나(Mandrasena, 曼陀羅仙) 등으로 대개 5세기에서 6세기 초 사이 난징에 도착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 군도의 해상 왕국들은 인도와 중국 승려들의 전법과 구법의 여정을 통해 대승불교와 밀교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 으면서 불교 교학은 물론 찬란한 불교문화를 그들의 영지에 구축하 였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서면서 불교는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왕권의 약화와 이슬람의 확장으로 인한 교세의 지형 변화로 이슬람 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서서히 인도네시아 종교 역사의 주 무대에 서 사라졌다.

4. 이슬람의 발흥과 불교의 쇠퇴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불교의 쇠퇴는 약 13세기경부터 시작하여 수 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쇠퇴의 직접적인 원인을 단적으로 확정하기는 어려우나 이슬람 무역상과의 접촉이 확산되 면서 야기된 종교 지형의 변화가 불교의 영향력 감소에 중요한 전 환점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무역상들은 주요 거점에 무역 네 트워크를 구축하고 지역 주민들과 문화 및 종교 교류에 참여하면서 이슬람교의 가르침과 관습을 소개했고, 점차 많은 인도네시아인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

1389년 마자파힛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하얌 우룩이 사망한 후 제국의 권력은 승계 분쟁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며, 수마트라 와 말레이반도의 북부 해안에 있는 봉신 국가에 대한 지배력을 잃어갔다. 특히 명(明)나라의 태감이자 제독인 정화(鄭和) 가 이끄는 함대가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여러 번 자바에 기착하였는데, 이 거대한 함대는 단순한 해상 탐험을 넘어선 힘의 과시로써 명은 몽골의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세계 패권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 원 정으로 인해 아시아의 지정학적 균형이 바뀌었으며 7차례의 원정 을 통하여 명나라는 광범위한 해양 네트워크에 대한 통제권을 재구 성하고 확립하게 되었다.

함대는 원정 기간 수차례에 걸쳐 남아시아의 정치에 개입하였는 데, 아마도 가장 중요한 개입은 새로 건국된 말레이반도의 말라카 (믈라카) 술탄국에 대한 지원이었다고 보인다. 말라카와 명나라 간 에 우호 관계가 성립된 후 말라카는 명 함대의 거점이 되었으며, 이 후 물산이 몰리면서 말라카는 인도네시아, 말레이반도, 태국으로 연결되는 지역 교역망의 거점으로 부상하면서 동남아의 교역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 배경에는 정화의 힘이 컸다.   당시 정화의 함대에 의해 전파된 이슬람의 확산은 수마트라에서 마자파 힛의 해상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그로 인해, 섬의 북부는 점차 이슬 람으로 개종하고 마자파힛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말라카는 이 지역에서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적극적으로 장려했 고, 명나라 함대는 자바 북부 해안에 중국-말레이 무슬림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이리하여 이슬람은 자바 북부 해안에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와 같은 정치적 격변은 힌두-불교 왕국인 마 자파힛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14~15세기에 이르러 말레이반도 와 수마트라, 자바에도 이슬람 술탄국이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등 장하였다. 이에 따라 통치자와 지배 세력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불교 왕실의 후원과 지원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특히 통치자의 개 종은 정치적, 사회적 영향을 지대하게 미쳤기 때문에 많은 백성이 이슬람을 따르게 되었으며 불교에 대한 후원이 상실되자 불교사원 과 교학의 중심지는 서서히 버림받게 되었다.

특이하게도 인도네시아 군도의 이슬람은 중동의 이슬람과 달리 지역 관습과 신념을 통합하도록 적응하여 이슬람의 혼합 형태를 만 들어 나갔다. 이는 이슬람 이전의 전통과 신념의 일부 요소를 유지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주민들의 원활한 종교 생활을 허용한 것으 로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같은 유화적인 전교 방식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슬람 인구를 가진 인도네시아 에서 극우 이슬람에 의한 종교분쟁이 중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발생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아가서 이슬람 법률 및 행정 시스템이 새로 건국한 이슬람 왕국 내에 정착되면서 불교는 더욱 소외되었으며, 불교는 소수의 지역 신봉자들에 의해서만 유지되었다. 이처럼 이슬람의 확산은 그 의식과 관습이 불교를 대체하면서 점차 일상생 활에서 불교의 영향력과 중요성이 잠식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마 침내 이슬람이 군도의 종교적, 문화적 주도권을 차지하면서 지배적 인 종교로 자리 잡았다.

인도네시아 군도가 지닌 지리적 특성상, 고대부터 많은 사람과 문물이 오가는 해양의 관문이었기에 여러 다양한 종교를 지닌 사람 들이 머무르면서 많은 문제와 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들 종교를 모두 인정하고 포용해 나가는 방식은 근원 자체를 해소 하지는 못할지라도 분쟁을 해소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로 작동되었 다고 보인다. 특히 전래 초기 불교와 힌두교는 서로의 영역에서 공 존하며 교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각기 다른 사원을 건립하여 구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밀교의 전래 이후 인도네시아의 종교지형에 서 힌두교와 밀교가 공생하면서 토착성이라는 인도네시아적 특수 성이 더해져 힌두-불교로 변이되었다. 이에 따라 불교가 지닌 이 성적 특성이 불분명하게 되었다. 나아가서 왕권과의 결탁이 강했던 힌두교로 인해 불교는 그 교세가 상대적으로 점점 약화되었는데, 사일렌드라 왕조 이후의 마타람이나 마자파힛 제국의 힌두-불교 적인 성향은 이후 붓다와 시바의 상이 동일한 공간에서 신봉됨으로 써 불교는 더욱 그 특성을 잃고 말았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도네시아에서의 불교의 쇠퇴 원인은 지 리적 특성에 의한 다양성, 세계사적 관점에서 관문 무역이 지닌 정 치 · 경제적 변동성, 그리고 토착성이 강한 인도네시아의 신앙체계 에서 힌두-불교적인 종교로 변이된 불교 본연의 문제 등이 어우 러진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원인을 하나 더 부가한다면 확산 당시 강성인 중동과는 다른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유연한 전교방식도 꼽을 수 있다.

5. 연꽃은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이슬람의 잠식과 서구(네덜란드와 영국)의 식민 통치를 거치면서 오랜 세월 불교는 그 맥이 끊겨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빠나두라 대논쟁으로 촉발된 스리랑카의 불교 부흥운동이 단초가 되어 올코 트와 블라바츠키 여사가 설립한 신지학협회(Theosophical Society) 의 영향을 받아 인도네시아에서도 불교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 일환으로 20세기 초 《신지학월보》와 《신지학보》라는 잡지가 각 각 스마란과 보고르에서 창간되었으며, 1918년 보고르 신지학협회 에서 베사카 축제를 개최하는 등 몇몇 불교 관련 움직임들이 일어 났다. 이후 1934년 스리랑카의 나라다 장로가 자바 불교도의 초청 으로 자바 일대에서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일찍이 신지학 협회의 사상에 공감하여 불교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던 복건계 중국 인인 퀘 테크 호이(郭德懷)와의 만남을 계기로 인도네시아에서 불교부흥의 씨앗이 싹트게 되었다.

이어서 중국계 인도네시아 승려인 아신 지나락키타(Ashin Jina- rakkhita)가 미얀마에서 득도한 후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 daw)로부터 위빠사나 수행 지도를 받고 귀국하여 1956년 스마란 교외에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다. 그는 포교 활동을 하면서 시마 인터내셔널(Sima International)이라는 계단( 戒 壇 )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동부 자바에서 불교도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4년 아신 지나락키타는 상좌 · 대승 · 탄트라 전통의 수도원 공동 체인 아궁 승가를 설립하면서 불교 전통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인도네시아 국가 철학의 근본적 원칙인 빤차실라(Pancasila) 와 관련된 유일신 문제에 대한 해결과 교단 내부에서 불교전통의 계승 과 관련된 몇 가지 대립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2백만이 넘는 불교도 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인도네시아 불교의 진흥과 포교의 역사 에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불교는 교세적 측면에서는 쇠퇴하 였으나 의례, 상징, 철학과 같은 요소는 지역의 믿음과 관습에 흡수 되어 토착 전통과 독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로부두르라는 세 계 최대의 불교사원으로 대표되는 찬란했던 인도네시아불교의 영 광은 오늘날 군도 내의 특정 지역에서 유적으로만 볼 수 있지만, 불 교의 역사적 영향은 계속해서 재평가되고 연구되고 있다. 특히 신 심 깊은 화교들에 의한 불교 조직의 재건과 새로운 사원의 건립으 로 불교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근래에 들어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가 확산하고 있어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 가 높아지고 있다.

전반적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불교의 부흥은 종교 다원주의의 광범위한 추세와 국가의 다양한 신앙에 대한 인식과 수용이 증가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이 절대다수인 인도네 시아에서 불교의 부흥은 사회 ·문화 ·정치적 변화 등 다양한 요인에 기인하지만, 이는 인도네시아 문화유산의 풍요로움과 종교적 다양성을 포용하고 기념하는 인도네시아 국민의 능력에 대한 증거일 것 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인도네시아의 종교지형 아래서 과연 연꽃은 다시 피어날 수 있을 것인가? ■

 

정기선 ksliner@hanmail.net

동국대학교에서 〈미얀마의 불교 문화양상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주요 논 문으로 〈미얀마불교의 적수의례〉 〈스리랑카 불치사 공양의례 일고〉 〈불교의례 의 좌법고찰〉 〈미얀마불교의 성립과 전개 연구〉 등이 있으며, 동남아시아의 불 교 의례와 문화연구를 진행해왔다. 현재 동국대학교 미래융합교육원 외래교수 이며 미얀마불교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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