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사의 흥망성쇠에서 배운다

1.머리말

스리랑카불교의 역사는 《디빠왕사(Dīpavaṃsa, 島史)》 《마하왕사(Mahāvaṃsa, 大史)》 《쭐라왕사(Cūḷavaṃsa, 小史)》와 같은 스리랑카의 연대기를 통해서 방대하고 다양하게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 및 사상 연구는 확대하여 나갈 필요가 있다. 18차례에 달하는 왕국의 멸망을 거친 스리랑카는 오랜 기간 몸살을 앓았으나, 오늘날 부처님의 말씀을 전 세계에 전할 정도로 불교 를 굳건하게 지켜왔다는 데 큰 의미를 지닌다. 이는 불교 정신을 잃지 않았고 그 정신을 수호하는 불씨가 계속 타올랐기에 가능한 것 이다.

따라서 필자는 전 세계의 다양한 종교가 모여 있으면서도 불교 관련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이 미래 불교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또 현재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스리랑카불교의 흥망성쇠에 관련된 일련의 연구는 불교가 향후 연착륙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할 것이다.

아누라다뿌라는 스리랑카에서 불교전통이 시작되고 발전을 이룬 고대 왕국이다. 이때 시작된 스리랑카불교는 현재 마하위하라(Mahāvihāra, 대사파), 아바야기리(Abhayagiri, 무외산사파), 제따와나(Jetavana, 지다림파)라는 세 교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세 교단이 끊임없이 경쟁 발전하면서 형성된 전통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세계 불교계에서는 《청정도론》 《해탈도론》《아비담맛따상가하》 등의 책을 중요한 불교 문헌으로 여기고 있다. 고대 스리랑카에서는 경전과 불교 사상, 범어 문헌 연구 중심의 토론과 논쟁이 적지 않게 일어났다.

예컨대, 아바야기리의 《 해탈도론》을 상대(相對)하기 위하여 마하위하라에서 《청정도론》을 만들 었으며, 이러한 교단 경쟁의 와중에 교단 간의 감정싸움도 없지 않 았다. 그 과정에서 급기야 인도 승려인 상가미뜨라(Saṅghamitra) 의 극단적인 행위로 왕이 마하위하라를 파괴하고 후원을 끊기도 하였다. 한편 아란야까(Aranyaka) 전통에서는 수행을 주장하며, 가마와시(Gāmavāsi) 전통에서는 경전 공부를 강조하면서 이것 또 한 상호간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를 보면, 항상 논쟁하고 토론하면서 발전하였다. 또 근대의 식민통치 시기에 기독교 등 외세의 불교 말살 정책은 승단과 재가 사이의 불화를 조장하여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고, 나아가 불교 교육 정책을 말살시키려는 불교 탄압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식민통치 시기의 불교 말살 정책은 이후에도 계속 영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불교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많은 선각자가 불교 부흥운동에 앞장섰다.

2. 스리랑카의 경전 보전

(1) 불교의 전래와 수용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 아쇼까(Aśoka)왕 시대에 스리랑카에 파견된 마힌다(Mahinda) 장로로부터 받은 전통이 올바르게 잘 유지되면서 동남아시아에 불교가 전해지기 시작되었다. 마힌다 장로는 4명의 비구와 사미 수마나, 재가자 반두까를 데리고 스리랑카로 건너와 수도인 아누라다뿌라에서 동쪽으로 12㎞ 떨어진 미 힌달라(Mihintala)에 머물렀다. 그때 사냥을 나왔던 국왕 데와냥 피야 띳사가 마힌다 장로가 설한 《상적유소경(象跡喩小經, Cūḷa- hatthipadopama-sutta) 》 (MN 27)을 듣게 되었다. 마힌다 장로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한 국왕은 그에게 포교를 위한 편의를 제공해 주었고, 띳싸라마(Tissārāma) 사찰을 봉정(奉呈)하였다. 이 사찰은 후에 ‘마하위하라(大寺)’로 불리면서 상좌부불교의 중심지가 되 었다.

마힌다는 동행한 사미인 수마나를 시켜 인도에서 진신사리(佛舍利)와 발우(鉢盂)를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봉납할 투바라마(Thūpārāma)를 건립하였다. 또 마힌다 장로의 여동생 상가밋따가 얼마 후 스리랑카로 오면서 비구니 교단도 설립되었다. 상가밋따는 부처님의 성도지인 부다가야에서 보리수(菩提樹) 나무를 모셔와 아누라다뿌라의 마하메가와나 공원에 옮겨 심었다. 이 나무는 지금까지도 부처님의 상징으로 숭배의 대상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스러운 보리수이다.

마힌다 장로의 방문은 스리랑카의 문명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는데, 민속신앙과 사냥으로 살아온 스리랑카인들이 진정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전환점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스리랑카에서 아누부두(두 번째 붓다)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려왔다. 32세에 스리랑카로 건너와 불법을 전한 마힌다 장로는 80세에 열반하였다. 하 지만 그 후 많은 승가가 탄생하고 국왕과 귀족의 귀의가 이루어져 불교는 스리랑카에 튼튼하게 뿌리내려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2) 바나까(bhānaka, 암송) 전통

빨리어 경전이 ‘싱할라어’ 문자로 옮겨진 것을 상좌부불교 역사에서는 4번째 결집으로 간주한다. 그 시점까지 붓다의 말씀은 ‘구전 전통(Mukha-parampara)’ 또는 ‘바나까(bhānaka, 이하 암송) 전통’ 방식으로 전해져 왔다. 구전 전통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붓다가 반열반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반열반한 날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탓에 학자들간의 논쟁이 여전히 벌어진다. 아상가 교수는 붓다가 반열반한 시기는 상좌부불교 전통에서 따랐던 전통 연대기보다 최소 100년 이상 오래되었다는 현대 유럽 학자들의 주장이 이러한 논쟁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요컨대 ‘짧은’ 연대기와 ‘긴’ 연대기가 있는데, ‘긴’ 연대기로 볼 때 붓다의 말씀은 5세기 동안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결집이 있을 때, 붓다의 말씀을 결집하기 위해 ‘경(Dha-mma)’과 ‘율(Vinaya)’의 결집을 장로와 그 제자들이 담당했는데, ‘율’의 결집은 우빨리 장로와 그 제자들이 담당했다. 그리고 디가 니까야의 암송에는 아난다 장로와 그 제자들, 맛지마 니까야의 암송은 사리뿟따 장로의 제자들, 상윳따니까야의 암송은 마하 깟사빠 장로의 제자들, 앙굿따라 니까야의 암송은 아누릇다 장로의 제자들 이 맡는 등, 각 경전의 암송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담당하였다.

오늘날 전해진 붓다의 가르침은 16개의 암송 전통으로 전승된것인데, 기원전 3세기에 있었던 3차 결집 이전 인도의 암송과, 이후 기원전 1세기경 스리랑카의 암송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만큼 아쇼까왕과 목갈리뿟따 띳사 승려가 주도한 세 번째 결집이 불교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승려와 재가자들이 함께 암송 의 역할을 분담하였으며 16개 암송에 대한 설명이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에 기록되어 있다. 암송 전문가 그룹인 암송 담당자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전문 분야만을 암송하고 나머지는 제자들에게 전승하여 효과적인 전승의 체계를 갖추었는데, 그중 대표성을 지닌 전통은 ‘경’과 ‘율’을 담당한 제자들의 암송이다.

(3) 문자 경전의 대두

구전으로 전해지던 붓다의 말씀이 문자 기록까지 이어지는 과정 은 다소 복잡하고 험난하였다. 당시 붓다의 말씀(Buddha Vacana) 을 보전하고자 하였던 승려들이 전쟁, 가뭄과 같은 가혹한 환경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이웃 나라인 인도로 건너가게 되 었는데, 그곳에 머물기로 한 승려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동안 지켜온 경전을 보전하려고 하였다. 이후 다시 평화가 찾아와 스리랑카를 떠났던 승려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이들이 서둘러 가장 먼저 한 일은 각기 분담해서 암송하고 있는 붓다의 말씀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확인 결과, 그들의 기억이 온전함을 알게 되었으나, 각자의 기억만으로 방대하고 신성한 문헌들을 간직하는 것은 위험한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편 쿳다까 니까야 (Kuddhaka Nikāya)에 속하는 경전인 《닛데사(Niddesa, 간략한 설명)》를 기억하고 있는 승려는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 승려의 계율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도덕성이 강한 다른 승려들은 그에게서 그 경전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붓다의 말씀을 쉬운 말로 안전하게 지킬 방안이 시급하였던 것이 문자 경전이 성립한 첫 번째 이유이며. 스리랑카의 정치적 상황도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대사파(大寺派  Mahāvihara) 교단의 승려들은 왓타가미니 아바야(Vattagāmini Abhaya) 왕이 무외산사파(畏山寺派 Abhayagiri) 교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외산사파는 대사파에서 갈라져 나온 교단이었지만, 인도의 다른 불 교전통에 대해서 매우 개방적이었다. 이 전통에는 일반적인 용어로 ‘웨툴라와다(vetullavāda)’ 또는 이질적인 견해들이 담겨 묘사되고 있었다. 단순히 이름만으로는 정확하게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가 없으나, 확실한 것은 대사파의 견해와는 달랐다는 것이다. 대사파 전통은 아라한 마힌다로부터 내려왔던 상좌부 불교 전통을 그대로 고수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견해의 등장을 붓다의 순수한 말씀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하왕사(Mahāvaṃsa)》에서는 “옛날 승려들이 암송으로 지켜온 빨리어 경전과 논서들을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법(dhamma)을 보호하기 위해서 문자로 기록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승려들이 기억하고 있던 불교 경전의 복원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그 정황과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4) 패엽경(貝葉經)의 제작 과정

스리랑카에서 글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던 것이 ‘푸스골라 (Pus-kola)’이다. 이 ‘푸스골라’에 사용한 재료는 여러 종류인데 나무 껍데기, 흙, 은, 동, 나뭇잎 등이다. 글을 쓰는 도구는 가는 펜으로, 글을 쓴다기보다는 주로 새기는 방식이었다. 불교 역사상 첫 경전이 등장한 시기는 B.C 1세기경이며 그 경전이 바로 패엽경이다. ‘패엽’은 범어 ‘팟다라(pattra=잎)’의 음사로 나뭇잎이란 뜻이며 이곳에 필사하였다. 패엽경은 야자나무 잎을 넓이 5cm, 길이 45cm 크 기로 잘라 네모반듯하게 다듬어서 글자를 쓰기 좋은 형태로 만든 후 구멍을 뚫어 만든다. 패엽은 3시간가량 솥에 찐 다음 나무에 걸어 말리고 비비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을 거쳐 나뭇잎은 끈기가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형태가 된다. 패엽이 만들어지면 하나씩 꺼내 글씨를 새긴다. 글씨는 점필이라는 송곳의 손잡이 부분에 칼이 달린 독특한 도구를 사용한다. 송곳 부분은 글씨를 쓰기 위해, 칼날 부분은 좀 더 매끄럽게 다듬는 데 사용한다. 이처럼 준비가 완료되면 본격적인 사경 작업에 들어간다. 송곳을 이용해 패엽에 깊이 홈이 파이도록 경문을 쓴 다음 그 위에 잉크를 부어 문지르고 깨끗한 천으로 닦아내면 판 홈 속에 잉크가 스며들어 글씨가 새겨진다. 이렇게 완성된 패엽경을 다시 밀가루로 문질러 표면을 매끄럽게 마무리하고 여러 장을 함께 실로 묶어 한 권의 경전으로 완성한다. 수행력이 없으면 글자를 새기고도 글자가 제대로 쓰였는지를 알 수가 없으므로 수행력을 갖춘 승려들이 12년 동안의 가뭄을 겪으며 패엽에 경전을 새겨 패엽경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인도로 건너가서 700명의 암송을 지켜본 승려들이 스리랑카로 돌아와서, 패엽경에 쓰인 경전과 승려들의 암송을 비교했는 데 한 글자도 틀린 글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붓다의 초기 가르 침으로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 전해지는 초기 경전이다. 또 19세기 말에 로마자로 표기되어 유럽과 미국 등 지구촌 곳곳에 퍼져나가 붓다 가르침의 원형을 전달하 고 있는데, 지금은 한국에까지 전해져 많은 사람이 공부하고 있다.

3. 스리랑카불교의 역사

(1) 주석서의 역사와 발전

아누라다뿌라 시대는 스리랑카불교의 역사 속에서 보면 불교 교학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경전뿐만 아니라 주석서까지  보전되는데,  특히 5세기경에  만들어진 빨리어 주석서 《앗따까타(Aţţthakathā)》는 스리랑카불교에 변화를 일으킨다. 앗따까타는 일반적인 용어로 설명, 해설 등을 뜻한다. 경전을 읽을 때 주석서, 즉 해설서가 없다면, 그 시대의 철학과 전문용어에 익숙하 지 않은 이들은 많은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붓다 가르침의 대부분을 잘못 이해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잘못 이해된 문헌에 의존하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주석서의 주된 목 적은 붓다의 말씀이나 제자들이 지켜온 가르침에 포함된 용어의 해석을 제공하여 붓다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용어의 해석이 바뀌고 추가되면서 원형 이 손상될 우려가 있기에 주석서 단어와 의미의 변화를 명확히 기록하려 하였다. 더욱이 부처님의 말씀은 정신적 경험이 바탕이 된 것으로 그 깊은 뜻이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이다. 때론 붓다의 제자들도 가르침을 잘못된 방법으로 이해할 수 도 있다. 논사(論師)는 모든 단어의 해석을 제공하지 않고 언어적, 철학적으로 어려운 용어만을 설명하고 있다.

스리랑카에는 2종류의 주석서, 즉 마힌다 장로가 스리랑카로 가져온 주석서를 싱할라어로 번역해서 만들어진 주석서와 5세기에 붓다고사(Buddhaghosa)가 스리랑카로 와서 싱할라어로 되어 있던 주석을 빨리어로 옮긴 주석서가 있다. 물라(Mūla), 마하-빳짜 리(Mahā Paccari), 꾸룬디(Kurundi)가 마힌다 장로로부터 전해 내려온 싱할라어 주석서라고 판단된다. 오늘날에는 싱할라어 주석서 원본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아 학자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붓다고사를 시작으로 담마빨라, 우빠세나, 붓다땃따 등 많은 논사가 논서를 만들었고, 주석서뿐만 아니라 부주석까지 생기게 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경전과 논서(論書)의 흐름을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빨리어 경전은 BC 3세기경, 마힌다 장로에 의해 스리랑카에 전래된다. 둘째, 주석서는 BC 3세기부터 마힌다 장로에 의해 싱할라어로 옮겨졌고 이후에 논서가 만들어진다. 셋째, 싱할라어 논서는 AD 5세기경 붓다고사에 의해 빨리어로 다시 옮겨진다.

아디까람(E. W. Adikaram)은 붓다고사가 빨리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싱할라어 논서가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스리랑카의 문자로 쓰였던 논서들은 28개 정도의 이름을 찾을 수 있지 만 6개를 제외하고는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논서는 마하위하라, 아바야기리 두 교파가 소유하고 있다. 이런 중요한 역사적 근거들이 사라짐에 따라 스리랑카불교가 신앙뿐 아니라 학문적 측면 에서 중요한 부분을 소실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주석서와 빨리어 논서 연구의 활성화를 통해서 불교적 삶의 양식이 대중화됨에 따라 불교 수요층을 실질적으로 넓힐 수 있었다.

(2) 대승 사상가의 태도

스리랑카는 테라와다 전통을 선두로 이끈 나라이지만 대승불교 사상도 많이 녹아들어 있다. 그렇다면 스리랑카에서 대승불교가 존재하였던 적이 있었는지 반문할 수도 있다. 그에 관한 역사적 사실 을 증명해 줄 근거는 무엇인가? 스리랑카에서 대승불교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자료를 이용할 것인가? 접근 가능한 근거자료 수집 및 통계의 용이성과 신뢰성은? 이런 일련의 주제는 관련 전문 가에 의한 적절한 연구와 분석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스리랑카에서 대승사상은 기원전 1세기부터 시작 되었다고 보는데 기원전 1세기는 전쟁과 가뭄에 오랫동안 시달렸던 스리랑카 역사상 최악의 시기였다. 즉 기원전 43년에 인도로 하나의 띳사(Tissa)라는 바라문이 왓타가마니 아바야왕(Vaṭṭagāmaṇī- Abhaya, B.C. 43~29)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당시 남인도로부터 강한 무력을 갖춘 일곱 명의 타밀들이 마하띳타(Mahātittha)에 상륙 하여 수도 아누라다뿌라를 향해 진군했다. 남쪽으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전쟁에 휩싸인 데다, 가뭄이 찾아와서 12년 간 먹을 것이 전혀 없어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러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했는데, 존경하던 비구들의 시신을 먹었다는 기록까지 있다. 수천 명의 비구와 재가자가 죽고 많은 사찰이 황무지로 변하였다. 이에 다수의 비구가 스리랑카에서 인도로 피신하는 등 그야말로 대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런 최악의 사태가 앞에서 언 급한 패엽경 작업을 촉진하였다.

그 후 물러났던 왓타가마니 아바야왕이 12년간의 격렬한 전투끝에 타밀을 물리치고, 수도 아누라다뿌라를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다시 왕이 된 아바야왕은 자신이 전쟁을 피해 물러나던 상황에서 까람 싱할라족이 도망간다고 비난을 퍼부었던 자이나교 기리(Giri) 니간타(Nigaṇṭha)의 산사(山寺)를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 앞에 ‘두렵지 않다’라는 의미를 더해 아바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āra, 無畏山寺)를 지었다. 왕은 이 절을 자신이 힘들었을 때 보살펴 준 마하띳사(Mahātissa) 장로 개인에게 봉헌하였다. 이것이 불교 역사상 개인에게 사찰을 헌납한 최초의 사례이며, 이는 승려들 사이에서 커다란 논란거리가 되었다.

왕을 등에 업은 마하띳사가 권력을 과도하게 휘둘러 마하위하라 승려들의 명예와 권위를 훼손하자, 마하위하라에서는 마하띳사가 속인과 교류했다는 죄목을 들어 구출갈마(驅出羯磨)를 실시하겠다 고 위협했다. 마하띳사의 추종자들이 이를 거부하자 마하위하라 승려들은 율장에 따라 거죄갈마(擧罪羯磨)를 부과하려고 하였다. 이 사건으로 마하띳사와 그의 제자들은 아바야기리로 가서 머물렀다. 이로 인하여 스리랑카의 불교는 마하위하라와 아바야기리로 분열 되었다.

초기에는 두 종파 사이에 교리나 실천적 측면에서 차이점이 없었 다. 다만 아바야기리는 마하위하라가 율장에 따라 마하띳사를 징계 하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의 독자부 (犢子部)에 속하는 법희부(法喜部)가 스리랑카에 전해지자, 아바야 기리에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등, 아바야기리의 승려들은 인도에서 형성된 여러 종파와 접촉하였다.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이념들을 받아들여 비교적 진보적이었던 그들은 상좌부와 대승을 함께 공부 하게 된 것이다.

스리랑카 워하리까띳사왕(Vohārikatissa, 269~291)의 치세 때 최초로 웨뚤라와다(Vetullavāda)가 들어왔다. 이때가 인도에서는 대승불교가 활발해지던 시기였는데, 그런 영향을 받아 진보적이 된 아바야기리의 승려들은 법희부와 단절하고, 닥키나기리위하라 (Dakkhiṇāgiri-vihāra, 南寺)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사갈리야(Sāga- liya, 海部)라는 새로운 종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인도의 유명한 승려인 상가미뜨라(Saṅghamitra)가 스리랑카에 건너와 대승불교를 전파하였다. 고타바야왕은 두 아들의 교육을 상가미뜨라에게 맡겼는데, 이를 계기로 무외산사파는 완전한 대 승불교 공간으로 변하게 되었다. 상가미뜨라는 무외산사에 머물면 서 마하위하라의 승려들을 대승으로 개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인 마하세나왕의 승낙을 받아 마하위하라에 있었던 많은 불교 건축물을 파괴하고 그 자재를 운반하여 무외산사의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 이용하였다. 이런 충격적인 모습을 본 국민들이 왕을 싫어하였는데, 왕의 절친한 친구이자 신하였던 메가완나 아바야(Meghavaṇṇa-Abhya)가 군사를 일으켜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마하세나왕은 그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 대사를 복구하기로 약속하였고, 양측은 서로 화해하였다. 이 시기에 스리랑카는 대승의 보살 사상을 이어받아 보살 왕 이념이 탄생하게 되었고, 붓다를 관하는 수행[佛隨念]을 위한 불상 등 많은 미술 작품이 완성되었다.

스리랑카불교는 오랜 옛날부터 붓다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두 종파가 상호 경쟁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그 전통이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이 점은 붓다푸트라 승려의 《뿌자왈리야(pūjāvaliya) 》 라는 책에서도 언급된다. 그러나 특정 사상이나 주제, 그리고 상좌부와 대승이라는 교리적, 종파적 편향마저도 스리랑카 예술가들의 창조력을 막지 못하였다. 그들은 아누라다뿌라 시대 훌륭한 예술 작품인 아우카나(avukana) 대불과 같은 아름다운 조각을 조성하여 자신들의 독창적인 예술성을 과시했다. 부처님 을 향한 의례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함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불교 문화유산인 아우카나 대불은 북부 중부 지역 아누라다뿌라 구칼라 바나에 자리하고 있는데, 기념비처럼 서있는 불상(높이 15m)의 설 립 시기는 8세기 혹은 적어도 9세기 초엽으로 추정된다. 오른손은 스리랑카인의 특별한 시무외인(施無畏印)이며 왼손은 소매 끝을 붙잡고 있다. 이 불상의 형태는 상좌부와 대승불교의 영향을 함께 받은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발달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마하위하라가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고 대중적 신앙심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아바야기리 교파는 오 히려 대중화된 불교를 지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불교 유적지를 살펴보면 스리랑카불교를 대중화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아바야기리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리랑카의 대승불교의 유적으로는 오늘날 싱할라신의 형태로 남아 있는 보살상을 참고할 수 있다. 빠라나위타나(Paranavitana)에 의하면 불치사(佛齒寺)를 포함한 여러 곳에서 나타(哪吒)신과 유사한 관세음보살상을 볼 수 있으며, 또 보현보살을 사만신으로 여 기고 있다. 오늘날 스리랑카 곳곳을 둘러보면 두 보살의 상(像)이 가장 많은데, 고대 스리랑카 사회에서 보살 사상이 유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상적인 인간상이 ‘보디사트와(Bodhisattva, 菩薩)’라고 불리는 것은 그 영향 때문이 아닐까 싶다.

(3) 스리랑카 최초의 불교개혁

10세기 후반에 이르러 스리랑카불교는 타락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절대적 진리나 권위가 사라지면서 해방감을 느낀 부패한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비구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기도 하고, 많은 경우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재가자처럼 행동하는 등 오랜 기간 그러한 타락이 지속되었다. 그러자 빠라끄라마바후 1세(ParakramabāhuⅠ, 1153~1186)는 승가를 정화하여 세 개의 종파를 하나로 통일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가마와시(Gāmavāsi, 마을 거주자)와 아란냐와시(Araññavāsi, 산림 거주자)를 재건하였다. 또한 동남아시아와 남인도의 상좌부불교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이때 승가의 성직 계급제도가 확립 되었다. 이로 인하여 빠라끄라마바후 1세는 스리랑카의 위대한 왕 이라고 칭송된다.

한때 스리랑카는 남인도 촐라(Chola)족으로부터 침략당해서 고통을 겪었는데 빠라끄라마바후 1세의 치세 기간에는 오히려 인도 대륙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그곳에 군대를 파견했기 때문이다. 빠라끄라마바후 1세의 일대기를 보면 놀라운 일이 많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미얀마 원정인데, 12세기에 스리랑카에서 대양을 가로질러 미얀마에 군대를 파견했으며, 코끼리 부대까지 동행시켰다 고 한다. 그 결과 미얀마 바고 강 유역의 도시를 점령하기도 했다.

스리랑카 승가가 타락한 것은 대륙의 사조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승불교에 이어 밀교의 금강승불교까지 받아들였는데, 금강승 중에서도 좌도밀교를 받아들여 성적(性的)으로 타락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빠라끄라마바후 1세는 까쌋빠 대장 로를 통해 불교개혁을 추진했다. 까쌋빠 대장로는 삼장에 정통하고 특히 율장에 밝았다.

1165년에 뽈론나루와에서 승가의 개혁을 위한 테라와다 평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빠라끄라마바후 1세의 요청을 받은 까쌋빠 대장로는 아바야기리 등 부패한 교단을 폐쇄하였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저항이 있었다. 《마하왕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승려는 개혁에 참여하지 않고 해외로 이주하거나 재가의 삶으로 돌아갔다. 스리랑카 최초의 불교개혁에서 승단이 개혁되었고, 그 결과 마하위 하라 단일 교단이 성립된 것이다. 정통교단으로 인정받는 마하위하라 하나만 남기고 청정하지 못한 교단은 모두 폐쇄하였는데, 청정하지 못한 교단 중에는 웨툴라와다 전통을 고수하면서 비구들이 결 혼하고 아이를 낳고, 세속적 이익 추구에 골몰하던 무외산사 집단이 포함되었다. 오늘날 스리랑카에 존재하는 불교의 3개 교단은 이 때 성립된 마하위하라에서 시원되어 형성된 것이다. 12세기의 빠라끄라마바후 1세는 인도의 아쇼까대왕이 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승단을 정화하여 스리랑카불교를 부흥시켰기 때문이 다. 만일 진보적인 아바야기리가 현대까지 유지되어  마하위하라와 함께 이어져 왔다면 스리랑카는 세계적으로 가장 정통적인 불교국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스리랑카에서 빠라끄라마 바후 1세가 없었다면 오늘날 스리랑카불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 마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변질되고 불교 자체가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4. 식민지 시대와 불교 현황

포르투갈,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으로 이어지는 서양의 식민 통치는 스리랑카불교의 암흑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기원전 1세기에 있었던 교단의 부패보다 더욱 심각한 위기가 닥친 시기였다. 즉 스리랑카 불교를 말살하고자 본격적으로 탄압을 자행한 시기로, 450 년 동안 계속된 불교 박해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분야에 악 영향을 끼치고 있다. 페레라(Perera)에 의하면, 18세기 후반 스리랑 카의 학교 분포도는 웨슬리 미션스쿨이 206개, 로만 가톨릭이 205 개, 아메리칸 미션스쿨이 133개, 침례교 학교 38개, 사립학교 25개, 힌두교 학교 5개인데 불교 학교는 12개에 불과하였다. 더불어 가톨릭과 기독교로 이어지는 외래종교의 불교 박해 정책으로 승단과 재가 사이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꼿떼(Kotte) 왕조의 왕은 침략자인 포르투갈과 연합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왕궁마저 가톨릭에 헌납했다. 그나마 캔디 왕조가 불교를 유지하고자 노력했지만 1721년에 이르러 스리랑카 내의 비구 승단은 모두 소멸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세기에 태국과 미얀마의 도움으로 시암(Siam-Nikaya)과 아마라뿌라(Amarapura- Nikaya), 라만냐(Ramanna-Nikaya) 등 3개의 종파가 설립되면서 불교가 부활할 수 있었다. 승가 없이 거의 백 년 이상의 시간을 재 가자와 법사만 남은 형태로 명맥만 유지하다가, 교단을 설립하면서 다시 스리랑카불교가 복원되어 현재까지 내려오는 것이다.

(1) 빠나두라 대논쟁

서양 식민지배의 불교 말살 정책은 여러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먼저 학교에서부터 불교 교육이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에 대한 선교와 여론 호소가 이어졌다. 기독교 수용이 마치 대중을 위한 것인 양 호소하며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진 박해를 가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펼친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지키고자 하는 저항 운동이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중 1873년에 있었던 빠나두라 대론(Pānadurā Vāda)은 승려들과 기독교 목사들 간에 일주일 간 벌어진 종교 논쟁으로 유명하다.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우월성을 주장하는 몇 차례 공개토론이 열렸고, 그 연장선에서 미게투와 테구나난다 승려와 데이비드 드 실바 감리교 목사 사이에 대논쟁이 벌어졌다. 1873년, 수도였던 콜롬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쪽에 위치한 제법 큰 도시 빠나두라에서 양측 지지자인 7천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빠나두라 대논쟁’은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진행되었다.

1. 논쟁은 구술(口述)로만 한다.

2. 논쟁은 쌍방 기록하고 그 기록자는 서명하고 대담자에게 그 기록의 오류가 없음을 확인하고 서명을 받는다.

3. 대담자는 인용하는 책과 논문의 정확한 출처를 밝힌다.

4. 한 사람의 대담 시간은 최대 1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다.

5. 첫 시간은 기독교 측에 부여하고, 그 시간은 ‘불교의 허위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만 사용한다. 이어지는 시간은 불교 측에 부여하고 불교 측은 불교의 허위성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필히 변론한 후 ‘기독교의 허위성’에 대해 반격한다.

6. 이 논쟁은 8월 26일, 28일에 개최한다.

7. 논쟁은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그리고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이 루어진다.

8. 양측은 자체적으로 어느 쪽도 논쟁 중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보장한다.

9. 논쟁 중 논쟁자 이외의 모든 참석자는 조용히 들어야 한다. 그리 고 이 협정서에 서명을 한 사람은 청중들이 평온하고 냉정하도록 그 책임을 부여한다.

10. 빠나두라 팟티야(Panadura Pattiya) 마을의 돔바가하왓타(Do- mbagahawatta)라는 곳에서 이 논쟁을 위한 단층 건물을 짓는 것을 허가한다.

논쟁의 주제와 조건은 불교와 기독교 양측에서 승인한 것으로 이 논쟁은 영자지 신문인 The Ceylon Times를 통해 세계로 전해졌으며 결국 불교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빠나두라 대논쟁’의 승리는 스리랑카의 민족불교 운동을 촉발한 촉매제 역할을 하였고, 결국 불교 부흥의 시발점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한 이 대논쟁이 벌 어진 후, 1880년 미국인 신지학회(神智學會) 설립자이자 불교도인 헨리 스틸 스콧트(Henry Steel Olcott) 대령이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가톨릭교도들의 폭력행위에 대해 세계적인 여론을 환기시키고 전통불교를 보호하고자 협력하였는데, 이에 힘입어 스리랑카불교도 들은 민족불교 운동과 부흥운동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2) 스리랑카의 불교 선각자들

근 · 현대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부흥하기 위해 또는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온 이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 한 헨리 스틸 올코트 대령과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 아리야라트네 등이다.

(가) 올코트 경

헨리 스틸 올코트(Henry Steel Olcott)는 불교로 개종한 첫 번째 유럽인으로 서구적 시각으로 불교를 부흥하고자 애썼는데, 스리랑 카에서는 그를 보살이라고까지 칭한다. 그는 불교와 불교적 전통 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했으며 그의 이런 노력은 스리랑카인으로서 스리랑카불교의 위대한 지도자가 된 다르마팔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올코트는 신지협회를 만들어 활동했으며 후일 불교신지협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올코트가 보여준 불교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열정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일이 소위 ‘고따헤나의 폭동(Kotahena Riot)’과 관련된 올코트의 활약이었다. ‘고따헤나의 폭동’은 1883년 3월 25일 스리랑카 수도인 콜롬보 교외에 있는 작은 마을인 고따헤나에서 발생한 가톨릭교도의 불교도 공격 사건이다. 이에 따라 1884년 초에 위디요데야 피리웨나(Viddyodaya Pirivena)에서 열린 회의에서 ‘불교방위협의회’의 구성이 제안되었 다. 이때 인도에 있던 올코트는 급히 스리랑카로 와서 캔디에 있던 고든(Gordon)을 만났다.

올코트는 고든의 편지를 가지고 런던으로 가서 영국 정부의 고위층에게 그간 고따헤나에서 발생한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며 스리랑카인들이 원하는 사항을 전달하였다. 그 결과, 고따헤나 폭동 사건의 소송 문제를 게을리하였던 검사는 파면 었고, 영국 정부는 인도를 포함한 지배 지역의 모든 종교에 관해 중립을 지키게 되었다. 또한 붓다의 탄신일인 5월의 웨삭 포야데이는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 신도들에게까지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식민지 정부가 취해 왔던 국가나 종교 음악의 사용과 연주에 대한 제한을 완전히 해제하였고. 불교도에게 강요했던 목사 앞에서의 결혼 서약을 혼인 당사자들의 자율에 맡기게 되었으 며, 1856년에 제정된 사원과 사원의 토지에 관한 법률을 파기한다 는 등 모두 6가지의 확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1884년 스리랑카로 돌아온 올코트는 고따헤나의 디파두따사에서 세계 최초로 불교기를 사용하는 역사적인 날을 기리는 행사를 기획하였다. 올코트는 불교기를 푸른색, 노란색, 붉은색, 흰 색, 오렌지색의 5가지 혼합색으로 도안하였다. 푸른색은 부처님의 머리카락에서 따왔으며, 노란색은 부처님의 가사의 색에서, 붉은색은 입술에서, 흰색은 치아에서, 오렌지색은 피부색에서 따온 것이다. 1885년 공개된 불교기의 게양 선포문에서 “붓다에 대한 최고 경의의 표시로, 그리고 붓다의 탄신 즉 ‘광명의 날’을 기리 기 위해서 붓다의 몸으로부터 다섯 가지 색을 취하여 제작된 불교 기를 금년 웨삭 포야데이부터 게양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올코트는 불교청년단체인 YMBA(Young Man Buddhist Associ- ation) 운동을 펼치고, 사찰마다 일요일에는 어린이 학교를 운영하였다. 이 영향으로 스리랑카의 불교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1880년 이후에 그동안 승단만이 이끌어 오던 불교계를 재가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이끌기 시작하였다. 신지협회 실론불교지부는 두 개 의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각 지역에 다시 지점을 가 지고 있었던 재가자 집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승려로만 구성된 성직자들의 집단이었다. 올코트는 이처럼 인도, 영국, 스리랑카 등지를 오가면서 불교 부흥을 위하여 지대하게 공헌하였다.

(나)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스리랑카 역사상 대중에게 가장 활기 차고 생명감이 넘쳐흐르는 인물 중의 하나로 최근에 평가받고 있다. 그는 문화적 붕괴로부터 싱할라 종족을 구하였고, ‘불교개혁’을 감행하여 승려들을 정치적 관여와 민족의 첨예한 대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끈 민족적 영웅이다. 이후 그는 동아시아, 남아시아, 유럽, 미국을 다니며 불교학을 강의하고 불교의 세계적 확산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다르마팔라는 조국 스리랑카에서 꺼져가고 있던 불심을 다시 밝혔을 뿐만 아니라, 부다가야를 비롯하여 인도에 있는 부처님 성지를 복원하고 대각회(Maha Bodhi Society)를 설립하여 인도에서 불교 부활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다. 그는 마하보디협회를 설립하여 불교를 포교하고 수 세기 동안 방치되어 보존 상태가 취약한 부다가야(성도지)와 사르나트(최초 법문지)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 유적지 복원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였다. 또한 그는 1893년 시카고 (Chicago)에서 있었던 세계종교의회에서 남아시아의 불교도들을 대표하여 최초의 웨삭데이(부처님오신날) 축하행사를 진행하여 널리 이름을 떨쳤다. 이처럼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어디든지 해야 할 강의가 있거나 불교를 포교할 일이 있으면 최선을 다하였다. 주변의 측근들이 건강관리를 하라고 강권하였지만 늙은 나의 몸을 지키는 것보다 방방곡곡에 사찰을 세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생전에 8대 성지에 사찰을 짓고, 영국에 첫 사찰을 세울 수 있었다.

이처럼 그는 인도에서 소멸하는 불교를 다시 일으키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서양에 불교의 씨앗을 심은 제2의 아쇼까대왕으로 일컬어졌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마지막으로, “나는 인도에 다시 태어나길 바라며, 불법을 전파하기 위하여 적어도 25번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세계 불교의 부흥과 확산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또한 침체한 사람들의 불심을 살리는 일과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에 맞서 사회 혁명에 앞장서서 주도하였다. 그가 평생 펼친 불교 부흥운동과 사회봉사 활동은 불교의 밝은 미래를 세계 역사에 깊이 새긴 스리랑카불교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다) 아리야라트네

세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 인물인 아리야라트네(A. T. Ariya- ratne, 1931~ )는 1958~1972년까지 나란다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그러던 중 학교사회봉사연맹의 부사장으로 활동하며 가나 툴루와(Kanatuluwa) 마을, 즉 낙후된 지역 사회에서 시행한 유학 캠프를 계기로 사르워다야(Sarvodaya)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간디의 비폭력, 농촌 발전 그리고 자기희생 원칙 등의 사상을 굳게 믿고 생활화하고 실천한 인물이며, 또한 발전이라는 세속적 원리와 이타심과 연민이라는 불교적 이상 사이의 중요한 연관성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사르워다야 운동을 펼쳐나갔다. 사르워다야 운동의 기본 사상은 불교의 가르침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 바로 사성제, 중도, 사무량심 수행, 십바라밀 등이 사르워다야의 근본 사상이다. 또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수만 명의 ‘가족 모임’과 수백만 명의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 함께 스리랑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명상을 주도하였다. 스리랑카의 사르워다야운동 회장, 스리랑카 사회봉사 중앙협의회 회장, 스리랑카 성교육 아시아태평양국 회장, 스리랑카 중국학회 회장, 멕시코 칠카보드의 회원, 미국 국제평화식량위원 회, 세계기아프로그램 회원, 아시아 농촌개발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리야라트네는 무상(無常)을 사르워다야 운동의 근본이념으로 삼는다. 삶이 무상하기 때문에 불자들은 상호의존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며,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없다’는 무아(無我) 개념을 특별히 강조하며 “이런 이타적인 봉사를 열반으로 가는 길에 자기 마음을 좀 더 각성하고 자애로운 상태로 바꾸는 방법으로 본다”고 회원들에게 말한다. 이 운동의 일원이 되기 위해 자원하는 사람들은 연민에서 벗어나야 참여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연민은 그들에게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개인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고 이 우주에 공동으로 연관된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을 위한 봉사로 나의 시간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스리랑카 민족주의자들의 독단성과 교조주의적인 면모가 전혀 없었으며, 항상 수용적이고 대화에 개방적이었다. 아리야라 트네의 사상을 기초로 형성된 사르워다야는 스리랑카가 지적, 정신적, 문화적으로 세계에 제공할 수 있는 교과서적인 모범을 선보인 사회개혁 운동이다.

(3) 붓다자얀띠(Buddha-Jayanti) 역경과 부흥운동

부처님 탄생 2,500주년을 맞은 1956년,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제대로 된 지위로 복원시키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붓다자얀띠(Bud- dha-Jayanti, 부처님 聖年)’ 축제가 열렸다. 스리랑카 정부가 지원하는 국가적인 이 행사에서는 붓다의 생애와 관련하여 세계적 표준을 마련하고, 경전의 새로운 결집 등을 여러 국가가 함께 결의하였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스리랑카 정부는 싱할리어를 국어로 정하고, 불교를 국교로 결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불자들을 위하여 빠알리 삼장의 싱할리어 번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불교대백과사전을 편찬하고 매주 불자들이 절에 가서 불교를 공부할 수 있도록 담마스쿨(Dhamma school)을 시작하고, 명상부흥운동을 통해 다양한 명상센터들을 세웠다. 스리랑카에서 20세기까지는 싱할리어에 대한 필요성은 크지 않았다. 빨리어에 능통한 승려들에게 는 크게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450년 동안 식 민지였기 때문에 빨리어와 불교 공부를 할 수 없었으며 이후 승려들과 대중들의 주도로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여전히 교육이나 수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승려들은 일반 신도에게 빨리어 경전을 가르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붓다자얀띠 행사를 계기로 이와 같은 상황을 고민하던 승려들이 붓다자얀띠 역경 (譯經) 사업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스리랑카불자회의(Sri Lanka Bauddha Mandalaya)라는 특별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특별위원회의 조성과 후원으로 빨리어 역경과 출판을 담당하는 편집위원회(Tripitaka Translation and Editorial Board)가 구성되었는데, 스리랑카에서 빨리어, 범어에 능통한 승려들 25명이 참여하였으며, 이들 중 5명으로 최고편집심의회가 구성되었다. 편집위원들의 개별적인 번역 작업은 편집위원회, 편집대표 심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최고편집심의회의 결정에 의해 출판되었다. 총 34년에 걸친 노력으로 삼장이 빨리어에서 싱할라어로 번역되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훌륭 한 번역본이 나오게 된 이유는 편집위원회가 빨리어, 범어, 싱할라어에 능숙한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불교를 공부하고 싶은 많은 불자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근대불교 발전을 위한 중요한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싱할라어 번역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여 갈등을 겪고 있는데, 빨리어 번역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승려들 때문이다. 자의적 해석이나 번역의 오류로 인하여 빨리어 경전을 접하는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사례들이 왕왕 발생한다. 오역을 바로잡고 문장 누락이나 왜곡된 내용이 없는 역경(譯經)으로 불자들의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하지만 여전히 스리랑카불교에서 붓다자얀띠 역경 사업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5. 맺음말

11세기경에 힌두교의 침략으로 아누라다뿌라, 13세기에 뽈론나루와 왕조를 거치며 그들의 숭배 사상이었던 불교는 쇠퇴하게 되었다. 한편 힌두적 관념은 인도적 주술과 신을 숭배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그러한 사상이 불교에 습합되는데, 이는 불교가 쇠퇴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뽈론나루와 왕조 이후는 꼿떼(Kotte), 시따와까 (Sītavaka), 캔디(Kandy)의 세 왕조로 나누어졌는데, 그중 꼿떼 왕국의 왕은 포루투칼과 연합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왕궁마저도 가톨릭에 헌납했다. 그나마 캔디 왕조가 불교를 유지하고자 노 력했지만, 1815년에 가톨릭의 사상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힌두교와 가톨릭에 의해 탄압받았고 최근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불교는 역사적으로 늘 그랬듯 훌륭한 승가와 재가자에 의해서 복원되었다. 스리랑카에는 줄곧 논쟁, 토론과 같은 방식으로 불교 경전을 이해하고자 하는 대중의 불심이 꺼지지 않고 살아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테라와다불교의 발전과 유지, 그리고 활성화를 위해 스리랑카불교의 역할은 막중하다. 왜냐하면 스리랑카는 인도로부터 테라와다 불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국가인 동시에 오늘날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 통용되는 빨리어 삼장을 처음 문자로 기록하고 유지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붓다의 말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자 하는 스리랑카 승단과 불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계율을 융통성 있게 해석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서 승단의 규칙을 고수하면서 본질을 온전 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오늘날 전 세계인에게 진정한 붓다의 말씀을 전하는 커다란 역할을 스리랑카불교가 하였으며, 그들의 뜨거운 불심은 앞으로도 불교가 현재 만연한 배금주의에 타협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타성에 젖어 안주하지 않고 굳건하게 미래를 향해 뻗어가게 할 것이다. ■

 

담마끼띠 dammakiththi@hanmail.net

스리랑카 캘레니야대학교 산스크리트어학과, 서울불교대학원 대학교(석사), 동 국대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초기불교와 아비달마불교에서 본 죽음, 출생, 중유에 관한 연구〉(석사 논문)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공사상 에 관한 연구〉(박사 논문) 〈스리랑카에서의 삼장 보존과 현대화 과정〉 등과 “A comparative study on Mahayana Sutra of the World Father(loka pitṛu) and the Christian Gospels’ Universal Father” 등이 있다. 현재 마하위하라 사찰 이사장(주지)이며 다문화불교연합회 회장, 유원대학교 강사, 중앙승가대 강사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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