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사의 흥망성쇠에서 배운다

1. 들어가며

마우리아 제국(322~182 BCE)을 통치하던 아쇼까왕(재위 268~ 232 BCE)의 비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진다.

약 2년 반 동안 나는 우바새였으나, 나는 처음 약 1년 동안은 법을 위해 열심히 정진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약 1년 동안은 승가에 가서 열심히 정진하였다. (소마애법칙)

전승에 따르면 아쇼까왕은 즉위 7년에 모종의 이유로 불교로 귀의했으나 그다지 열렬한 신봉자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나 즉위 8년이 지날 즈음 벌어졌던 칼링가 전쟁을 계기로 다르마(dharma) 에 의한 평화 통치를 선언하였고, 불교에 대한 지원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쇼까왕 이후, 마우리아 왕조에서부터 굽타 왕조(ca.400~600 CE)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국가의 비호하에 인도아 대륙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인도 동북지역 일대에서 유행하였 던 불교가 아시아 종교전통 중 가장 유력한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법현(法賢, 337~442)이나 의정(義淨, 653~713), 현 장(玄奘, 602~664) 등 과거 동아시아 승려들이 남긴 여행기를 통해서도 우리는 적어도 7세기경까지는 인도에서 불교가 성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시기 이후부터 인도 내에서 불교의 교세가 점차 약 화되었고, 마침내 13세기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인도에서 소멸해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인도는 불교가 발흥 한 지역임과 동시에 오늘날 불교가 사라진 곳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물론 역사 속에서 하나의 종교전통 혹은 사상전통이 발생했 다 사라지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처럼 원산지에서 사라진 종교전통이 원산지 이외 지역에서 오늘날까지도 거대한 규모를 형성하고 있는 사례는 흔하지 않다. 특히 현존 불교전통에 몸 담고 있는 이들에게 인도불교의 소멸은 불편한 사실이다. 신성한 붓다의 가르침이 다른 곳도 아닌 원산지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가?

이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크게 역사상 불교가 맞게 된 인도 사회의 변화양상과 그에 대한 불교의 대응이라는 두 측면을 놓고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인도불교의 소멸은 특정 사건이나 원인에 의해서 일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그 요인 또한 역사적, 사회적, 종교사상적 맥락 등을 아우르는 다층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가 인도불교의 요인들을 분석해 왔는데, 크게는 힌두교의 융성과 이슬람의 박해와 같은 외부적 요인과 불교 내부의 타락이나 힌두화와 같은 내부적 요인들로 나뉜다. 아래에서는 이렇게 제시된 여러 원인을 염두에 두고, 우선 인도불교가 처했던 사회상과 그 안에 드러나는 인도불교 소멸의 원인을 고찰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불교의 소멸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 논할 것이다.

 

2. 인도 사회의 변화와 불교의 위기

대개 인도불교의 위기는 8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 시기 인도의 종교지형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이는 모두 불교의 존속에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불교가 인도 사회에서 겪었던 위기는 크게 1) 사회경제적 변화 2) 힌두교와의 습합 3) 무슬림의 침략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회경제적 변화

우선 굽타 왕조의 시대가 끝나고 인도의 지역화가 가속되었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 대부분의 국가는 주요 종교를 후원하였고, 그 형식은 사찰의 건립이나 토지 보조금 지급, 승단이 위치한 지역의 일정 수입 기부, 기부 재산에 대한 세금 면제 등 행정적 지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국가의 지원뿐 아니라 상인 계층이나 왕족이 개 인적으로 보시하는 행위도 불교 승단을 운영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불교의 경우 자체적인 생산 활동을 지양하고 국가 체제와 일반 신도들의 후원에 사찰 운영을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가 분열되면서, 각 지역의 종교들은 그들의 후원자를 모으기 위 해 경쟁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불교는 그동안 누렸던 국가적 지원, 재가신도들과 왕족들의 후원을 뒤로하고 그러한 경쟁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이 시기부터 부흥했던 힌두교 또한 불교의 성세에 위협이 되었다. 8세기 이후 샹카라(Śaṅkara, ?~?) 등이 주창한 베단타 철학이 등장하며 인도 고래의 브라만교가 교리 체계를 정비하였고, 이를 통해서 다시금 인도 종교의 주류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특히 힌두교는 농촌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는 도시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불교와는 선명하게 대비되는 힌두교의 장점이었다. 인도의 지역화에 신흥국가들은 그 지역의 전문 행정 관을 찾아야 했고, 힌두교의 사제계급들이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신흥국가들이 힌두교에 지원을 강화하였고 상대적으로 불교의 입지는 좁아졌다.

2) 힌두교와의 습합

힌두교의 영향력으로 인해 불교는 그 사상적 독자성을 위협받 게 되었다. 라다끄리슈난은 불교 소멸을 논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된 근본 원인은, 그것이 당시에 유행하던 비슈누교, 쉬바교, 탄드라 신앙 등과 같은 힌두교의 여러 종파와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 다.”(Radhakrishnan, 1996) 실제로 불교는 7~8세기부터 힌두교 시바파의 일파인 딴뜨리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이라 불리는 밀교(密敎) 전통을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사상과 의례를 채용하면서 내용상으로도 형식상으로도 힌두교의 그것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난해한 딴뜨리즘의 발달로 불교의 교리는 대중과 괴리되었으며, 한편으로 대승불교가 강조하는 신앙은 힌두교의 박티 요가와 크게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초기부터 불교가 비판적으로 보았던 브라만교의 카스트 또한 여러 실용적인 목적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불교의 사상적 정체성이 크게 약화되었다(Bronkhorst, 2011).

반대로 힌두교 또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두 종교 간의 간극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전술한 샹카라의 철학이 불교 사상에 많은 영 향을 받았다는 점이나, 힌두교의 비슈누신이 화현한 열 가지 화신 중 아홉 번째가 바로 붓다라는 점은 힌두교가 불교의 교리를 흡수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가다듬어 갔음을 방증한다. 이처럼 두 종교 전통이 서로 닮아가게 됨에 따라, 전술한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힌두교는 불교의 세를 압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3) 이슬람 문화권의 침공

이러한 상황에서 이슬람의 도래는 인도불교 소멸에 상당히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6~7세기부터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그 영향력을 뻗친 무슬림은 986년부터 인도 북서부를 공격 하였고 13세기에는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인도의 지역화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인도 북서부 점령 또한 불교의 경제적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해당 지역민들은 이슬람 정 권에 세금을 납부해야 했고, 이는 다시 승가를 지원하는 재가 불교도들의 재정 상태를 악화시켰다. 또한 이슬람의 침공은 인도 북부 의 무역로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중세 인도의 북서부 지역, 히말라야 지역 및 중앙아시아 접경 지역에서 불교가 무역 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침략과 팽창, 그리고 중앙아시아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결과로 불교의 생존과 성장을 지탱해 온 교역로에서 파생된 재정 지원과 경제적 기반은 쇠퇴하였다.

유일신인 알라를 신앙하는 무슬림들에게 인도의 전통종교는 우상숭배로 간주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불교 또한 이러한 혐의를 피할 수가 없었다. 무슬림의 종교 전파 과정은 자못 폭력적 인 면모를 띠고 있었다. 인도 북서부를 지배한 무슬림은 불교의 토지를 점유하고 사찰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하였으며 많은 승려들을 살해하거나 개종시켰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무슬림 군대의 기록은 그들이 이교도들과의 전투에서 얻은 승리를 열정적으로 묘사한다(John Powers, 2015). 12세기와 13세기에 갠지스 평야 지역에서 수백 개의 불교 사찰이 파괴되고 불교 경전이 불태워졌고, 살아 남은 승려들은 전란을 피해 흩어져야 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1203 년 동인도 불교의 거점이었던 비끄라마실라 사원의 파괴를 인도불교의 종언(終焉)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이슬람의 파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승려들은 네팔이나 티베트 등지로 서둘러 피난하였다. 이후 불교는 급격하게 인도 본토에서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다만 이슬람의 불교 사원 파괴가 곧바로 불교의 멸망으로 직결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한 연구로 국내에 잘 알려진 호사카 슌지는 인도불교 소멸에서 이슬람이 역할을 한 것은 긍정하 지만, 그것이 정복전쟁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호사카 슌지, 2008). 그는 711년 이슬람이 인도에서 처음으로 침공한 신드 지역의 이슬람 전파 경위를 담고 있는 사료인 《차즈나마》를 분석하였 다. 이에 따르면 이슬람이 신드 지역을 점령하고 “개종, 공물, 죽음 셋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불교 승려들은 당시 정치 지도자에게 항복을 선택하도록 권유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불교가 쇠망한 것은 이슬람의 침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지만, 무력적 탄압 때문이 아니라 이슬람이 불교가 인도에서 지닌 사회적 지분을 너무도 강력하게 삼켜 버렸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특히 그는 불교의 사상을 카스트 제도에 대항하는 평등사상, 즉 ‘안티 힌두이즘’으로 규정하였다. 이 역할이 ‘신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이슬람으로 이행되었고, 불교도들이 7세기부터 점차 이슬람 으로 집단 개종함에 따라 불교가 소멸하였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8세기 이후 겪어야 했던 인도불교의 상황이다. 중앙 집권적 권력의 붕괴로 각 종교간의 무한 경쟁에 휘말려야 했으며, 힌두교의 부흥으로 이후 인도 주류 종교의 권위를 내어주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불교 또한 힌두교의 교리를 다대히 받아들여 교학적으로 독자성을 잃어갔으며, 무슬림의 침공에 의해 많은 사원이 소실되고 불교도들은 박해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 속에서 인도 불교가 소멸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질문이 생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핵심 원인들인가?

 

3. 인도불교 소멸 원인의 검토

이상의 논의들이 불교 소멸의 여러 양상을 잘 보여주는 것과 별개로, 이것이 진정 불교 소멸의 원인으로 볼 수 있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아래에서는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으로 나누어 그 요인들을 검토해보도록 한다.

1) 외부적 요인

외부 조건에 의해서 불교가 소멸했다는 이론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이 존재한다. 대개 인도불교 소멸의 요인을 분석할 때 가장 주목 받는 것이 이슬람의 침략이다. 그러나 이것이 ‘불교의 소멸’로 이어 지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주어진 상황이 어렵다는 것과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슬람의 침략으로 사찰이 파괴되고 승려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은 불교만이 아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인도 종교 중 불교만을 선별해서 파괴했을 리는 없다. 인도 대부분의 사원에서 약탈이 행해졌으며 사제들이 살해당했다. 그중 유독 불교만이 소멸하였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나아가 ‘사찰과 승려가 사라졌기 때문에 불교가 소멸하였다’는 것은 ‘사찰과 승려만이 불교로 규정되는 전부였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오직 소수의 엘리트 승려들과 그들의 근거지인 사찰만이 ‘불교’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파괴가 곧 불교의 소멸로 귀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미 13세기에는 불교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이슬람 침략이 불교 소멸의 원인이라고 보기보다는 그 이전부터 인도에서 불교의 세가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고 보는 쪽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는 자이나교가 이슬람 침공 이후에도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인도 종교의 하나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나아가 근대 학자들 중 몇몇은 이러한 관점이 ‘이슬람의 악마화’를 부추긴다고 지적한다(Audrey, 2018). 이슬람의 침공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기록들은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던 사찰 파괴의 사건들은 검토 없이 그대 로 믿는다는 것이다.

한편, 전술한 호사카의 주장 또한 반박된다. 판카즈 모한은 호사카가 전거로 삼고 있는 《차즈나마》의 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이 쓴 한국사를, 이라크전을 일으킨 부 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오류다.”(판카즈 모한, 2008)라고 비판하며, 승리자의 입장에서 불교가 집단개종을 했다는 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소위 ‘안티 힌두이즘’으로서 불교의 정체성을 규정하기도 어렵다. 호사카에 따 르면 불교는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는 ‘평등주의’의 종교로서, 이러한 사상을 따르던 불교도들이 집단적으로 이슬람으로 개 종하였고, 이것이 불교 소멸의 핵심 원인이다. 그러나 앞서 브롱코 스트의 지적과 같이 이미 불교도들은 카스트 제도를 수용하고 있었다. 애초에 카스트 제도를 받아들였던 후기 불교의 신도들이, 굳이 이슬람으로 개종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이 들어왔을 때 이미 불교는 카스트 제도에 대항하는 ‘안티 힌두이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외적인 요인에 의한 불교 소멸은 상기 인도의 불교를 제외한 많은 반례를 설명하지 못한다. 종교의 탄압은 비단 인도에 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삼무일종의 법난이라 불리는 국가 주도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이 있었으며, 이러한 탄압은 오히려 이후 폭발적으로 불교가 퍼지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로 눈을 돌려보아도 종교 탄압이 오히려 교세 확산의 계기로 작용하는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 시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약 250년간 박해를 받아야 했고, 그들의 신앙을 비밀조직처럼 운영하였다. 조선시대 가톨릭이 전래하였을 때도 마찬가지다. 국가적인 종교 탄압은 그 종교를 믿는 신도들의 신앙심을 높이고 종교 체제의 개혁 및 부흥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찰이 파괴된 후 다시 불교 재건의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이것이 불교 소멸의 ‘원인’이 아니라 불교가 이미 인도에서 소멸하였음을 보여주는 ‘증상’일지도 모른다.

2) 내부적 요인

외적 요인들이 다만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도불교 소멸의 원인은 분명 내부적 요건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가장 자주 지적되는 것이 ‘불교의 힌두화’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힌두교’라는 개념은 근대 시기 인도 종교를 통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이지만, 그것이 소위 인도 정통철학 전반을 지칭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불교는 베다나 우빠니샤드와 같이 인도 정통 철학의 안티테제로서 스스로의 철학을 다듬어 왔다. 그러나 ‘불교의 힌두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무아(無我)’로 대표되는 불교의 철학적 입장이 후대로 가면서 오염되었고, 그것이 불교 쇠락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러한 관점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불교의 철학 체계가 힌두교의 안티테제적 성격이 있었다는 것은, 그 사상적 지평에 힌두교가 놓여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가 인도 문화권에서 탄생한 이상 인도 문화권의 세계관과 철학을 벗어 나 어떤 ‘순수한’ ‘본질적인’ 사유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대승불교 경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소위 힌두교적인 성격 을 모두 타락의 증거라고 한다면, 이미 기원 전후부터 불교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오히려 타 종교와의 교섭은 불교의 사상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불교가 딴뜨리즘을 수용한 것이 불교 소멸의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설을 주장하게 되면 밀교와 불교의 타락을 동일선상에 놓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티베트나 동아시아에서는 밀교 전통을 이어받아 성공적으로 불교를 이어가고 있다. 심지어 티베트불교에서 밀교는 사상적 정체성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학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불교의 고답적인 논의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을 소수 엘리트 승려들이 전유하게 됨에 따라 불교가 대중과 괴리되었다는 것을 불교 쇠락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나카무라 하지메는 “전통적 불교 교단은 바라문에게 귀의하는 인도의 일반 민중들로부터 유리되어 독선적이며 고답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中村元, 1959)며 불교가 민중의 요구에 부응하기보다 일방적으로 지원을 받는 형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출세간(出世間)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에 불교를 비롯한 사문 전통은 스스로 세간을 떠난 이들의 종교이며, 깨달은 자는 그 자체로 공양을 받을 만한 자, 아라한이라고 불렸다. 적어도 불교 내에서 재가 신자가 승단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사유 방식이라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처럼 수준 높은 논의들이 8세기 이 후에 급작스럽게 등장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여러 불교의 논서를 통해서 불교 승려들의 논의가 이미 철학적으로 상당히 높은 경지에서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다. 더구나 현재까지도 상좌부불교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는 동남아시아불교를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설명은 불교 쇠락의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는다.

같은 견지에서, 여러 기록에서 종종 언급되는 당대 불교의 타락상이 불교 소멸의 핵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사제와 신도 사이에 위계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위계의 차이에서 오는 권력구조와 그에 따른 폭력의 가능성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 속에서 종교의 도덕적 해이는 곳곳에 서 눈에 띄며 기원전의 불교에서도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승려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다(Shopen, 1997). 그렇기에 종교 구성원의 해이는, 그것이 심지어 다수라도 하더라도 종교인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여전히 종교가 추구하는 이상이 존재하고 그것 을 수행하고자 하는 노력이 존재하는 한, 종교의 타락상은 어디까 지나 ‘증상’이다. 오히려 이러한 증상이 심화되는 것은 종교 자체의 자정과 혁신을 일으키는 힘이 될 수 있다.

 

4. 정체성의 상실과 불교의 가변성

1)정체성 상실과 민중의 지지 획득 실패

그렇다면 역시 인도불교 소멸의 핵심은 ‘정체성의 상실’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라다끄리슈난은 말한다.

지적인 흡수작용과 변형은 대승불교가 단지 위대한 비슈누교 운동의 종파적인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을 묵일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진전되었다. 보다 금욕적인 성격의 소승불교는 시바교의 한 종파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불교는 그 자체의 가르침이 지니는 어떤 독특성도 보이지 않았다. 바라문교 신앙이 보편적 사랑과 신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는 동시에 붓다는 비슈누의 화신이라고 주장했을 때, 인도에서 불교의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 (중략) 불교는 힌두교에 동화되는 가운데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불교는 인도에서 자연사했다 (Radhakrishnan, 1996).

동일한 문화권의 사상들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전술한 것처럼 불교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불교가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철학이라는 관점을 잠시 내려놓고 본다면, 불교의 역사적 맥락 또한 인도 문화권이라는 지적 토대 위에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 동일한 문화권에는 각 사상 간에 공유되는 문제의식과 방법론이 존재하며, 각각의 사상들이 이러한 지평 위에서 상호 영향하에 발전한다. 불교 또한 당연히 사상의 전개 과정에서 힌두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불교의 경우 이러한 변화가 결국 정체성의 상실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특정 집단의 정체성은 다른 집단과는 구분되는 그 집단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수의 엘리트가 전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고차원의 철학적 입장이 아닌 일반 재가신도들이 그러한 종교전통을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정체성을 말한다. 종교의 정체성이 중요한 이유는 일반 신도들이 그것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집단적 의식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때 ‘정체성’이란 사상이나 태도와 같은 무형의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건축이나 사제계급을 나타내는 상징, 복장, 의례와 같은 유형의 것 또한 집단의 정체성에 포함된다. 다만 정체성을 구성하는 유형의 것들은 그것을 받쳐주는 무형의 것들에 의해서 성립되고 의미를 지닌다. 만약 특정 집단을 유지하는 무형의 정체성이 없다면, 유형의 것들이 망각되거나 사라졌을 때 그 전통은 더 이상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불교가 겪었던 상황 또한 이러한 것은 아니었을까. 승단이 파괴되고 승려들이 사라진 이래, 더 이상 ‘불교’라고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인도 사회에서 망각되었던 것은 아닐까.

자이나교의 사례를 보자. 자이나교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자이나교 신도들은 견고한 신도 조직을 구성하고 있 으며, 신도들에 대한 승려의 지배력도 강력했다. 재가신도들 또한 소서계(小誓戒)를 엄수해야 했으며, 이러한 규율들은 스스로에게 자이나교도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설령 사찰이 무너지고 승려 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하더라도, 이처럼 잘 조직된 자이나교의 재가신도들은, 분명 자이나교를 부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반면 불교는 어떠했는가. 사상적으로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내 · 외부의 인식이 두 종교전통의 내용을 동일하게 인식했다면 유형의 종교 유산 이 사라졌을 때 신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불교도로 규정할 만한 근거를 잃게 된다.

그뿐만 아니다. 불교는 시작부터 베다의 제식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재가신도들의 정체성을 유지해 줄 만한 의식이나 의례들에 대해서도 소홀했다(조준호, 2013).

불교는 일상 가정의례는 물론 종교적 기원의례를 정착시켜 신도의 의식과 삶을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점 또한 재가신도의 입장에서 불교도로서 정체성을 심어주기에 미흡했을 것이다. 심지어 불교는 신도들의 결속력이나 충성도가 타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불교는 어떤 특수한 종교 관념을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는 것을 주장으로 삼는다. 흔히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자유롭고 파격적이며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종교로 서술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의 속성은 불교가 다른 종교 집단에 비해 결속력과 응집력이 약해 조직 충성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약점이 된다.

결국 종교전통이 외부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 전통을 견인해 나가는 것은 신자들이다. 그러한 신자들에게 불교도로서 정체성을 심어주는 데에 실패한 것이, 인도불교의 소멸을 이해하는 데 핵심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불교 사상의 가변성

물론 타 종교의 영향을 수용하는 것이 반드시 전통의 소멸로 이 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요한 생존전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이나교 같은 경우 힌두교의 생활의례를 수용하였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수용을 통해서 자이나교의 생존이 가능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즉 힌두교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자이나교가 존속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대응하는 것은 종교 전통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타 종교의 형식적인 면을 수용하는 것과 사상적인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은 다른 의미일지도 모른다. 본 발표의 내용을 고민 하던 차에 어느 선생께서 혹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링크를 하나 보내주었다. 보내준 링크의 동영상 자체는 익히 알고 있었던 내용 을 담고 있었지만, 그 영상을 페이스북에 링크한 사람의 코멘트가 인상적이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군요. 가장 큰 이유가 불교의 힌두화라고 정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힌두화된 불교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데, 한국 불자들만이 대승이 진짜 불교라고 믿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아마 이러한 코멘트를 단 사람은 불교가 인도에서 소멸한 원인이 불교의 힌두화에 있고,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불교는 힌두화된 불교인 대승불교이며, 따라서 진짜 불교를 모른다면 한국불교 또한 사라질 것이라는 귀결까지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런데 애초에 ‘불교의 힌두화’가 인도불교 소멸의 원인인가? ‘힌두화’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거꾸로 ‘진짜 불교’란 무엇인가?

《숫따니빠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불교의 사상적 정체 성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세상의 매듭을 풀어 버린
저 성자는 한 쪽의 편에 서지 않는다
평화롭지 않은 곳에서 평화로우며
다른 이들이 집착하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

지나간 번뇌를 버리고 새로운 번뇌를 만들지 않으며
편견을 갖지 않고 [하나의] 교리에 집착하지 않으니
저 현명한 이는 모든 견해를 벗어나
세상사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를 책망하지도 않는다.

— Suttanipāta IV, 912-3

불교가 초기부터 특정한 교리를 고집하는 것을 변견(邊見)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태도를 경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태도는 후대에 공(空) 사상과 같은 또 다른 철학적 태도로서 정형화되기도 했지만, 공 사상 자체가 ‘일체법의 자성(自性) 없음’이라고 귀결된다는 점에서 붓다 사후 교리적 차원-세속적 차원-의 전개는 여타의 사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불교의 세가 존재할 때는 이러 한 태도가 타 사상과 종교, 문화에 대한 수용력이라는 측면에서 장점으로 작용한다. 또한, 특정 교리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입 장은 타 문화권에서 불교가 전파되고 수용되는 과정에서 기존과는 다른 형태의 불교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기능한다.

동아시아불교에서 고안되었던 신불멸론(神不滅論)은 그러한 변용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동아시아의 불교 초기 수용과정에서 불교도들은 윤회와 업보 사상을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 하기 위해서 윤회의 주체인 ‘신(神)’을 설정했다. ‘신’이라는 개념 자체는 한역 경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지만 형이상학적 실체 (ātman)를 부정하고 자아 없음(anātman)을 주장한 인도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이질적인, 다시 말하면 ‘힌두적’ 사유라는 것도 분명하다.

이것은 윤회 개념을 대부분의 학파에서 공유하고 있었던 인도, 그리고 불교와 함께 윤회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 동아시아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신’ 개념은 동아시아불교의 정 체성으로 강화되어 왔으며, 역설적으로 중국 본토의 사상에 입각한 이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전혀 다른 문화권 에서 불교는 ‘비불교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한 변용을 통해서 자 신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중국 문화권은 기본적으로 현세 중심적 사유를 근간에 두고 있기에 내세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다. 이러한 토대에서 발전한 사유들 또한 이 생의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라고 본다. 따라서 동아시아인들에게 불교는 그것이 설파하는 무아나 연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윤회와 업보 개념이라는, 사실 불교를 넘어 인도 문화권 전체에서 지니고 있는 세계관을 통해 인식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신불멸론을 비판하는 도교 쪽이 오히려 ‘불변하는 자아가 없다’는 불교의 교리에 가까운 주장을 하게 된다.

신불멸론을 단순히 인도불교에 대한 오해, 혹은 무지의 소산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단견(斷見)에 집착하는 자들을 위해서 윤회를 설한다는 것은 이미 경전에서부터 언급되고 있지 않 은가. 적어도 지성사적인 측면에서 무아(無我)는 아(我)의 개념과 짝했을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만약 불변하는 자아에 대한 상견(常見)이 없다면 무아보다 먼저 설해져야 하는 것이 바로 업과 윤회이다. 불교의 신불멸론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동아시아에 불교라는 타 문화의 전통을 자리 잡게 하는 데 성공적인 역할을 한 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동아시아 불교인들은 이후에도 불교의 경론을 받아들이며 신불멸론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오류들을 재해석해 냈고, 신 (神)은 불성(佛性), 공(空), 알라야식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여전히 신불멸론이 가지고 있는 사유의 구조 자체는 유지되어 동아시아불교의 독특한 전개를 이루어낸다.

인도불교에서 미비했던 대승불교만의 보살계(菩薩戒), 그리고 여러 불교적인 생활의례들이 동아시 아 문화권에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접근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동아시아 불교 문화권에 속해있는 우리가 오늘 인도불교의 흥망성쇠를 논하고 거기에서 한국불교의 극복을 모색하고 있는 학회를 열 고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힌두화’를 벗어난 ‘진짜 불교’의 모색 자체는 불교 존립의 핵심이 아니다. 사상의 변화가 문제가 아니라, 불교가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상적 변동성이 궁극적으로 해당 문화 권의 다른 사상전통에 완전히 포섭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인도불교는 힌두교와의 습합을 통해서 결국 힌두교와 동일한 내용과 성격을 가지게 되어 구분이 어려워졌다. 윤회나 업설과 같 은 인도적 세계관을 그들의 정체성으로 두고 타 전통과 구분되었던 동아시아불교와는 달리, 동일한 인도 문화권의 사상인 불교와 힌두교는 공유되는 세계관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불교의 특징이었던 열린 태도가 힌두교로의 융화라는 형태로 귀결된 것이다.

이상으로 인도불교의 소멸에 관한 여러 양상을 검토해 보았다. 8 세기 이후 인도사회는 여러 측면에서 불교에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들은 불교 소멸의 핵심 요인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종교의 위기는 종종 재부흥의 기회가 되지만 불교는 그렇지 못 했던 것이다.

이 논문은 그 핵심 요인을 정체성의 상실이라고 결론내렸다. 인도의 불교는 그들의 정체성을 뒷받침하고 있던 유형의 것들이 사라졌을 때, 그것을 재건하고 부흥시킬 수 있는 동력 또한 상실해버렸다. 더 이상 ‘불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불교가 가지고 있는 ‘열린 태도’가 양날의 검이 되어 인도불교에 종언을 고했던 것이다.

 

5. 마치며: 오늘의 한국불교, 정체성은 무엇인가

동양을 대표하는 철학, 한국의 전통, 기독교와 양립하는 종교, 템 플스테이와 같은 힐링 문화. 다행히 한국불교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과거 인도에서 불교가 가졌던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하다. 그러나 ‘종교’라는 범주에서 한국불교를 논하자면 오늘날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사찰이 파괴되고 승려가 살해되지 않았지만, 한국 국민의 종교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라기보다 무관심에 가깝다. 2021년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종교인식에 관한 설문에서 무종교는 60%이며, 20대 미만의 무종교 비율은 무려 78%이다. 젊은 층일수록 종교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의미이다. 과거 인도불교가 겪었던 것과 마찬 가지로 한국불교 또한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느슨한 자연사의 상황에 놓인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은 어떠한 방향으로 정립될까. 한국불교는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도인불교, 시대에 맞지 않는 산중불교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현재 적극적으로 현대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대 과학과의 소통이나 인공지능 등 새로운 문물에 대한 수용은 타 종교에 비해 불교가 뛰어난 장점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상담 치유와 같은 분야에서도 불교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명상 기술들이 활용되고 있다.

다만 현대사회와의 적극적인 융화 속에서 불교라는 정체성을 부 지불식간에 숨기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는 ‘과학적인 종교’ ‘철학적인 종교’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런데 불교가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이라는 것이 불교가 곧 과학이나 철학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미 과학과 철학에서 과거의 전통이었던 불교가 제시한 것 이상의 학적, 사유적 진전을 이루었다면 과연 불교가 오늘날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다스리는 법을 가 르치지만, 그것은 불교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웰빙이나 심리치료라는 현대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된다.

이미 치유라는 키워드로 형성된 거대한 산업에서 불교는 그저 소수가 향유하는 힙(hip)한 문화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다. 본래 가지고 있던 불교적 가치는 쉽게 무시된다. 현대사회에 적응하려는 불교의 노력이 오히려 불교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귀결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급박한 사회 변화와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한국불교 또한 언젠가 과거의 문화유산으로만 남게 되지는 않을까. 그것을 극복할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있는가. ‘정체성’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불교적 이지 않은 태도인가. 인도불교의 소멸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어쩌면 언젠가 한국사회에서도 반복될 사건일지도 모른다. ■

 

이상민 leesm.budphil@gmail.com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동양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논문으로 〈地論學派の四量說について〉 〈‘삼법인(三法印)’과 동아시아 불교〉 〈누가 경전을 지었는가?-법상(法上, 490~580) 찬 〈교적의(敎迹義)〉 의 경전관(觀)〉 〈지론학파의 법계연기〉 등과 저서로 《6세기 북조불교 연구》 역서로 《《대승기신론》 성립 문제 연구》 등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 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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