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통계청의 종교인구조사 결과를 보면 불교 인구가 많이 감소하여 불교가 제2의 종교가 되었다고 한다. 불교계에서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여기저기에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국불교의 현재 모습을 반성하고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앞날을 헤쳐나갈 지혜는 무엇인가. 붓다는 어떻게 하면 불교가 쇠약해지지 않는지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장아함 《유행경》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불퇴법(不退法)’이 그것이다.

첫째, 자주 서로 모여 정의(正義)를 강론해야 한다. 둘째,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화동(和同)하여 서로 공경하고 순종하고 어기지 않아야 한다. 셋째, 법을 받들어 금기할 바를 알고 그 제도를 어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넷째, 대중을 보호할 능력이 있고 지식이 많은 비구가 있는 경우, 마땅히 그를 공경하고 받들어야 한다. 다섯째, 바른 생각을 잘 지켜 간직하고 효도와 공경을 으뜸으로 삼도록 가르쳐야 한다. 여섯째, 음욕을 떠난 깨끗한 행을 닦고 욕망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일곱째, 남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로 돌리며 명예와 이익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나이 많은 이와 젊은이는 서로 화합하고 순응하여 그 법을 부술 수 없다.

《유행경》에는 이 밖에도 일이 적은 것을 즐기고, 말을 적게 하고, 잠을 적게 자고, 패거리를 만들어 쓸데없는 일을 말하지 않고, 덕도 없이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악한 사람과 어울리지 말고, 산이나 숲속의 한적하고 고요한 곳을 즐기는 자세로 수행하면 법은 더하고 자라나서 줄거나 닳지 않는다는 가르침도 있다. 또 칠각의(七覺意)를 비롯한 여러 수행에 정진하면 법이 쇠하지 않고 더하게 된다는 가르침도 있다. 《유행경》에 있는 이런 가르침들을 합하면 모두 54가지가 된다. 그 주요 내용은 계율을 잘 지키고 선정수행에 정진하여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컨대 계 · 정 · 혜 삼학(三學)을 배워 익히면서 정법을 중심으로 화합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런가 하면 대승 경전인 《범망경》에는 ‘사자 몸속의 벌레[獅子身蟲]’ 이야기가 나온다. 사자는 백수(百獸)의 왕으로 다른 어떤 짐승도 덤벼들지 못한다. 하지만 사자 몸속의 벌레가 생기면 그것이 사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붓다의 정법에 따른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올바르게 배우고 닦으면, 수행자는 백수의 왕인 사자와 같은 존재가 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벌레에 물려 죽는다는 것이다. 장아함과 《범망경》의 가르침은 불교 교단에 소속된 사람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준칙이 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할 것이다.

물론 불교의 가르침에도 속제(俗諦)에 속하는 부분이 있듯이, 현실사회 속에서 생활하는 불교도는 세속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불교이므로 사회와 만나 소통해야 하고, 그로 인한 영향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최선인지를 불교도는 숙고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붓다가 출가자에게 탁발로 음식을 얻어 생활할 것을 설한 것은 욕심을 떠난 식생활에 일차적 목적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재가자와의 만남과 소통에도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붓다는 세간을 떠나 수행에 정진할 것과 함께, 세간과 만나고 소통해야 함을 염두에 두었다는 뜻이다.

알고 있듯이 붓다는 이런 활동을 통해 세간과 소통하고 대기설법을 해왔다. 이는 재가자의 처지와 능력을 고려한 설법이 이루어졌음을 짐작게 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불교는 시대를 초월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에 정진하는 동시에 그 시대의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해탈과 행복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세속사회에서 온갖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그 처지와 능력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진리의 길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에 지워진 중대한 책무다.

흔히들 21세기를 탈종교의 시대라 한다. 이 바람이 한국에도 불어와 이제는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많아졌다. 그러나 영성(靈性) 관련 관심은 더욱 깊어져 진정한 종교적 가르침과 수행에 목말라하는 대중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많은 제도종교가 진정한 종교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이는 불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교가 진정한 종교의 면목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많은 토론이 있어야 한다.

그중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고 대안 모색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숙제로 다음의 몇 가지를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산업혁명 이래로 축적된 대기오염으로 발생한 기후 위기와 불안한 지구환경은 인간이 살 수 없는 상태로 변해가고 있다는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과학자들은 몇 년 안에 큰 변화가 없다면 지구 생태계의 6차 대멸종이 다가온다는 섬뜩한 경고를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세계적인 경제 불평등이 유례없는 악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을 대체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디지털 치매’라는 말이 적용될 정도로 현실과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앞으로 인공지능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 인간은 어떻게 될지 막연한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21세기의 지구사회에는 지금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여러 가지 문제가 대규모의 파도로 몰아닥치고 있다. 이런 현실에 불교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다면 그 장래는 불문가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인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라고 했다. 어떤 문명이든지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겪는데,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면 성장하지만, 응전에 실패하면 붕괴와 해체의 과정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육체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이 있으며,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과정을 겪는다고 했다. 2천6백 년 전 붓다의 전법 활동으로 시작된 불교는 북으로는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었고 남쪽으로는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태국 등으로 전해진 뒤 18세기 서구에 전파되었다. 불교가 전해진 곳에서는 늘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불교는 그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기도 하고 반대로 실패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불교의 역사에서 도전에 대한 응전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이고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세계 불교의 흥망성쇠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였다. 즉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역사는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지는 않지만, 역사가 움직이는 깊은 원리는 과거나 현재나 큰 차이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말한다면 오늘의 한국불교가 2위 종교로 추락했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과연 정법을 선양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는가. 우리는 서로 화합하고 올바른 수행을 했는가. 재가 신자들에게 바른 법을 가르쳤는가. 이런 질문에 우리는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결론은 너무나 명백하다.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정법을 선양하는 데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교단이 화합해야 하고 세속사회의 문제에 바른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일을 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불교도의 삶이고 수행이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붓다의 깨달음은 중생에 대한 큰 자비심에서 비롯되었음을 되새기면서, 21세기 현재 중생의 커다란 괴로움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는지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

《불교평론》은 이런 문제의식으로 ‘불교사의 흥망성쇠’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기획했다. 한국불교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3년 9월

 

장성우(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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