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지난 4월 21일 개최된 동방문화대학원대학 불교문예연구소 주최의 ‘탈종교 시대와 불교의 대중화’ 주제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을 필자가 정리한 것이다.

 

1. 문제 제기: ‘출가’와 ‘재가’를 구분할 필요가 있나

“초기불교에서 석존은 출가자와 재가자 누구든 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아라한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다. 이후 아비달마불교에서 이 문제가 불거지기는 했지만, 대승불교에 와서는 모든 중생은 성불할 수 있다는 점으로 완전 정리가 되었다. 《유마경》의 유마거사나 《승만경》의 승만부인은 재가불교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들이다.《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만난 53선지식이 보여주듯이, 불교의 출 · 재가 구분은 법(dharma)의 능력에 있어서는 무의미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대승불교가 애초에 지향했던 재가 · 출가 화합의 개혁성은 [사라지고] 다시 출가 교단 중심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붓다가 왕 · 귀족 · 장군 · 거부(巨富)에서 평민 · 유녀(遊女)에 이르기까지 재가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만나 대화하며 불법을 가르치고 그들의 역할을 중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단이 출가 수행자 중심이었던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떠돌이 생활[遊行]을 하며 깨달음을 구하려 집을 떠난 출가 수행자’들과 세속 생활을 하는 재가자들 사이에는 불교에 입문하면서 바라거나 기대하는 요구가 서로 달랐다. 이처럼 붓다 당시에도 출가 제자와 재가자 사이의 경계선이 있었지만, 그것은 두 그룹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할을 구별하는 선이었을 뿐이다.

“재가 신도는 신(神)을 요구하는 데 반해 출가 수행자는 스승을 원한다. 속세에서 살아야 하는 재가 신도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남에게 베풀고 싶어 하는 반면, 은둔생활을 하는 출가 수행자는 홀로 자기완성을 추구한다. 재가 신도는 적절한 의식(儀式)을 통해, 자신의 빈곤과 불행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뛰어난 능력을 얻기를 바라는 반면, 출가 수행자는 계율의 준수와 영적인 효력에다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두게 된다.”

붓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 그룹 사이의 이 차이가 크게 바뀌지 않고 이어져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붓다가 “그런 일은 재가 신도들이 할 테니 수행에 매진하라”고 했던 당부와 어긋나게 이미 오래전부터 사찰 운영을 비롯하여 붓다가 ‘재가자의 역할’이라고 분명히 했던 일까지 출가자들이 전담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한편 세속 생활을 하면서도 치열하게 수행 정진하여 계정혜(戒定慧) 삼학의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 많이 있었고, 근대 이후 한국뿐 아니라 세계 불교학계에서 이름을 드러내는 학자들 대부분이 재가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법(法)보시-재(財)보시’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역할을 나누던 구별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 지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출가자들은 ‘법보시-재보시’를 ‘깨뜨릴 수 없는 원칙’이라고 강조하고 각인(刻印)시켜 ‘재가자가 할 일은 오로지 재보시를 잘하는 것’이라고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막상 자신들의 의무이자 책임인 ‘법보시’는 소홀히 하여 시대 변화에 맞추어 재가자들에게 ‘바른 법’을 전하여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노력은 소홀히 하고 있다.

왜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기영은 1969년 〈불교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재가의 위치가 정당하게 평가된 것은 신라의 원효(元曉)에 의해서뿐이고, 선풍(禪風)이 지배적이던 시기에 있어서 재가불자가 설 땅은 거의 없거나 군색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전통’으로 굳어져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재가의 타자화(他者化)’ 현상을 출 · 재가 양쪽에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대승불교에서는 출가와 재가의 문제가 아니라 ‘보살도(菩薩道)를 실천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문제’이며 출가보살이건 재가보살이건 상관이 없다”는 말을 반박 · 비판할 불교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 500여 년과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 미군정 · 이승만 정권에 이르기까지 박해와 억압 또는 차별을 받으며 교단의 확고한 기반을 세우지 못한 채 정치권력에 끌려다니거나 의존하고, 급속히 성장해온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의 공격적 선교 앞에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하거나 방관하고 있으면서도 재가자 차별 분위기는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다. 물론 출 · 재가를 가릴 것 없이 말과 글로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고 하지만 구호에 그치고, 대규모 행사에 동원되는 관중 또는 조연(助演)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70년대까지는 요즈음처럼 출가와 재가 사이에 견고한 벽이 없었다. 청담 · 운허 · 성철 · 숭산 · 광덕 · 법정 스님 등 출가 수행자들, 불자 사업가 이한상과 장경호 · 장상문 부자, 그리고 황산덕 · 이기영 · 서경수 · 박성배 등의 불교 지식인들이 각기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 존중하고 도와주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에 넘기 어려운 담을 쌓아 가면서, 심지어 연말에 열리는 여러 시상식을 마무리하면서 기념 촬영을 할 적에도 출가자들은 앞쪽 의자에 앉고, 행사의 주인공인 대상 수상자를 포함한 재가자들은 조연(助演)에 머물며 뒷줄에 서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른 데에는 재가자, 특히 지도자를 자처하는 활동가들의 반성도 절실할 것이다. 1960~70년대 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가 적극 활동하던 때에 이기영 · 서경수 · 박성배 교수 등 불교학자와 덕산 이한상 등이 출가자들을 존경하면서도 해야 할 비판은 아끼지 않았고, 전법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지금 이 땅에 그런 불자 지식인들이 있는가, 이한상 같은 불자 기업인이 있는가? 긍정적인 답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솔직하게 질문해 보자. “과연 수행에만 전념하고 ‘법보시’에 나서는 출가자가 얼마나 되는가. 출가자와 재가자를 갈라놓는 담을 높고 견고하게 쌓아야 할 정도로 재가자가 차별의 대상이나 두려움의 대상인가. 출 · 재가가 함께 하지 않고서도 출가자 급감과 신도 숫자 정체의 늪에 빠져 있는 불교가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정부의 예산 지원 없이는 존립이 어려운 교단 운영을 출가자만의 힘으로 해나갈 자신이 있는가. 급변하는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고 제대로 적응하거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가?” 물론 “이보다 훨씬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도 불교는 살아남았다.”면서 이런 질문을 어리석다고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출가자 집단에서도 여기에 동의하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 대통령이 오면 추운 겨울에도 주지가 맨발로 달려 나와 맨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하고, 종단 지도자들이 ‘이승만 3선 연임’을 촉구하는 기도회와 친정부 시위를 하던 때에 비하면 불교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조계종 총무원장이 심지어 하급 공무원에게도 쩔쩔맸는데, 그에 비하면 이제 조계종 총무원은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과 여 · 야 대표들이 취임하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되었고, 함부로 경찰력을 사찰 내에 진입시키는 등의 탄압과 차별은 거의 사라졌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1987년 이후 빠르게 진행된 우리 사회 민주화 흐름도 있지만, 힘든 시절 출가 수행자와 재가불자들이 함께 차별 없이 화합하며 애써온 덕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이 말은 곧 ‘출 · 재가 사이에 높고 단단한 장벽이 생겨서 서로 외면하게 되면 언제든 다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차별의 담’을 허무는 차원을 넘어, 출가와 재가를 가르는 경계선 자체를 없애겠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와 남, 안과 밖, 흑과 백, 남과 북, 동과 서, 남자와 여자 … ’ 세계 곳곳에서 오랜 세월 차별을 합리화하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다. 기득권을 가졌던 쪽에서 먼저 경계선을 없앤 곳에서는 그 과정이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기득권 쪽에서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억눌렸던 쪽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러 폭발하면서 힘으로 무너뜨린 곳에서는 그 과정에서 폭력이 난무하고 형식상 경계선 지우기가 끝난 뒤에도 큰 후유증이 남아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불교가 재가불교를 차별하거나 외면한 채 계속 ‘출가자 독선’을 고집하면서 위기를 더 깊게 할지, 함께 힘을 합하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탈종교 현상이 갈수록 더 심화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출 · 재가의 차별’은 물론이고 굳이 둘을 구별하며 나눌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2. 현대 한국 불교사에서 ‘재가불교’ 등장의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 해외 유학승들의 환속

1945년 민족해방 이후 불교계는 교단 내부 문제와 외부의 좌우(左右) 갈등 상황에 휘말려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안정과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일제 강점기 프랑스 · 독일 · 일본 등에 유학하여 근대불교학을 연구하고 귀국한 승려들 중에서 환속한 범산(梵山) 김법린 · 일곤(壹壼) 백성욱 · 효성(曉城) 조명기 등이 재가 불교인으로 교단 내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세 사람은 후에 동국대 총장을 지내며 후학을 육성하고 종립대학의 기반을 다졌다. 그중 김법린과 백성욱은 기독교인 일색이었던 이승만 정권에서 각기 문교부와 내무부의 장관을 지내며 불교가 그나마 피해를 덜 당하도록 애쓰며 교단 재건을 뒷받침하고, 당시 지성계를 주도하던 인사들과 교류하며 ‘불교가 결코 후진적이지 않음’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해방 뒤 혼란 상황에서 조선불교 중앙총무원 원장에 취임한 김법린은 과거 일본인 소유였던 재산[敵産] 처리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본래 미군정에서는 ‘일본불교 사원은 불교계에’라는 기본원칙을 세웠지만, 서울에 있던 일본계 사찰 40여 곳 중 11곳만 불교계가 사용하고 나머지는 인수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1947년 9월 총무원장에 재임하던 김법린이 미 군정청에 공문을 보내 “당연히 불교계에 이양되어야 할 일본불교 적산이 하등의 연고 없는 단체, 또는 개인에게 불법점거 또는 부당하게 이양되어 있으며 이미 점유 중에 있거나 임대차 계약 완료된 재산까지도 다른 곳으로 이양되어 있다”며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 군정청의 비협조로 막대한 일본계 사찰 재산 인수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불교계가 동국대 문제까지 신경을 쓰기 어려운 상황에서 다행히 김법린이 군정청과 교섭, 서울 남산 북쪽에 있던 조동종 서본원사(西本願寺) 별원을 비롯한 일본 사찰들의 재산을 인수하여 동국대가 서울 중심가에 수만 평의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김법린과 백성욱은 일제 강점기에 만해 스님 지도로 항일운동에 함께 참여한 뒤 유학을 떠나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기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아 귀국하였으며, 이승만 정권 초반에 장관을 역임한 뒤 동국대 총장을 지내는 등 비슷한 길을 걸었다. 김법린이 동국대 총장 재임 시절 서울법대 불교학생회(법불회)와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지도교수를 동국대 총장실로 초대해 대학생불교연합회 창립과 지원을 제안하고 이를 성사시킨 것은 해방 후 그의 불교 활동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백성욱은 총장에서 은퇴한 뒤에도 경기도 부천 소재 백성목장에서 경전을 강의하며 불교 활동을 이어갔고 그 인연으로 후학들이 각기 ‘청우불교원 금강경독송회’ ‘바른법연구원’ ‘백성욱박사교육문화재단’ 등 수행 단체를 꾸려 가르침을 이어오고 있어서, 불교 운동의 역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다.

3. 재가불자 활동의 서로 다른 양상

가. 학문 연구와 사회운동 결합-이기영 · 서경수 · 고익진

이기영과 서경수는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지도교수를 맡아 각 대학에서 특강을 하고 수련회에 동참하여 젊은이들에게 보살의 길과 불교인의 자부심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시대를 앞서가는 칼럼을 써서 비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구도회와 한국불교연구원을 설립하여 대학 바깥에서 신행과 연구를 이어갔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 30년이 지났지만 그들이 함께 열정을 바쳤던 구도회와 연구원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들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불교학자 · 재가불교 활동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영은 구도회와 한국불교연구원 설립 이외에도 유네스코한국위원회와 경주 남산 지키기 등 불교계를 넘어 일반 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여성 불자들의 모임인 불이회 회원들이 시야를 넓힐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도 하였다.

이들의 다음 세대에 속하는 고익진은 건강 문제로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활동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교학계에 불교학과 한국 사상사 연구에 변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일승보살회를 조직하여 엘리트 불교인을 양성하는 데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이기영 · 서경수 · 고익진을 특별히 거론하는 이유가 있다. 세 사람은 학문 연구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였을 뿐 아니라 대학 밖의 불교 활동에도 적극적이었고, 이들이 떠난 뒤 이들과 ‘같은 길, 비슷한 길’을 간 불교학자가 드러나지 않는 것 또한 현대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 중 하나일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 ‘사회운동’ 및 교단 후원-이한상 · 윤용숙

법명 덕산(德山)으로 잘 알려진 이한상이 현대 한국불교를 위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 역할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중요하며 그 범위가 넓고 불사의 의미도 특별하다. 그가 한때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가였으므로, ‘돈으로 해결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돈을 가졌다고 해서 이한상처럼 큰 원력[大願]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그런 바람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길[道]을 제대로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출범에서부터 안착까지 운영경비를 비롯하여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일, 삼보장학회를 설립하여 우수한 불자 대학생들을 지원하여 그들이 불교학계와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일, 불교종립학교연합회를 조직해 교과서를 만들고 교법사 연수를 진행한 일, 군 법사 파송을 실현한 일 등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공적이다. 그뿐 아니라 어려운 종단 사정으로 발간이 어려워진 〈대한불교〉(현 불교신문)를 살려 기관지의 위상을 세우고 그곳에 황산덕 · 서경수 등의 불교 지식인을 초빙하여 건전한 비판의 마당을 펼치고 법정 스님의 날카로운 글을 게재하여 종단 지도부의 잘못을 비판하게 한 일, WFB(세계불교도우의회) 참여를 비롯한 해외 교류 활동 등은 원력과 의지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60년대에 서울 중구 풍전상가에서 진행한 박성배의 〈신심명〉과 백성욱의 《금강경》 강의에서 시작하여 운허 · 청담 · 탄허 스님의 강좌 등을 계속해온 삼보법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1970년대 초반 갑자기 출국한 뒤에는 미국 서부에 삼보사를 설립하여 교포 불자들이 신행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등 이한상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자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실상화 윤용숙은 재단법인 보덕학회를 설립하여 출 · 재가 구분 없이 불교 활동에 재정 지원을 하였으며, 재력을 갖춘 여성 불자들의 모임인 불이회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와 제2대 회장을 맡아 불이상을 제정하여 시행하는 기반을 닦았고, 경부고속철도 경주 통과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등 한국현대불교의 여성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보덕학회는 불교 활동 지원을 이어가고 있어서, 재가자 특히 여성불자들에게 ‘바른 불자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다. 선 수행 운동-김기추 · 이희익

백봉(白峯) 김기추와 종달(宗達) 이희익은 참선의 새바람을 일으키며 한국불교에 맑은 샘물을 채워준 대표적인 재가 수행자들이다. 두 사람의 타계 이후에 백봉을 백두산, 종달을 한라산에 비유하며 ‘한국 거사불교의 거목’으로 칭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이 뚜렷한데 그 자취는 앞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김기추는 “재가자 나름의 수행 방편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거사풍(居士風)을 세웠고, 이회익은 ‘생활선’ 수행 풍토를 조성하였다. 이 두 사람은 각기 재가 선 수행 모임인 보림회와 선도회를 조직하여 성태용 · 박영재 등 뛰어난 제자를 길러냈다. 스스로 선사라 칭하지 않았지만 선사와 다름없었던 이들이 한국불교에 자극을 주는 새로운 선풍을 불게 했다고 평가해도 될 것이다.

 

라. 순수 불교, 교단 및 불사 지원-장경호 · 강석진 ·  장상문

오늘의 한국불교는 앞에서 언급한 덕산 이한상과 ‘이 땅의 유마거사’라고 칭하는 대원(大圓) 장경호가 아니었으면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장경호는 서울 중심에 국내 최초의 불교 교양대학인 대원불교대학을 세워 당시 최고 학자들을 강사진으로 초빙하였으며 재학생들에게는 교재와 교통비 · 식사까지 제공하면서 불교의 희망을 이어가는 일에 진력하였다. 이 대원불교대학이 선구가 되어 그 뒤 전국 곳곳에 불교 교양대학이 세워지면서 ‘복(福)만 비는 불교’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공부하는 불교’로 분위기가 바뀌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장경호는 “불교 진흥을 위해 써달라”며 자신의 사재를 국가에 헌납했고, 그 뜻에 따라 출범한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은 불교방송 설립 및 운영 지원 · 군불교 진흥 후원 · 불교문화 콘텐츠 발전 지원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불사를 계속해오고 있다. 이런 대원 거사에게 ‘이 땅의 유마거사’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최초의 1억 달러 수출 달성에 공적이 큰 동명목재 창업주 강석진은 부산불교신도회 회장을 맡으며 부산 지역에서 불교활동을 하는 한편으로 동명불원을 설립하여 불교계[범어사 말사]에 기부하고, 동명대학교를 설립하여 불교 관련 학과를 설치하였지만, 장경호나 이한상과 비교하면 불교계 전반에 끼친 영향은 크지 않다. 그렇지만 현대 재가불교 역사 정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한편 중원 장상문은 부친 장경호의 타계 후 대원정사 · 대원불교대학을 운영하며 월간 《대중불교》를 발행하여 문서포교를 선도하고 ‘대중불교 운동’을 펼쳤으며,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과 불교방송 초대 사장을 맡아 ‘불교의 현대화 · 대중화’에 헌신하였다.

 

4. 재가불교 운동의 문제와 한계

현재 재가불교 운동을 대표하는 두 곳, 참여불교재가연대와 대한불교진흥원의 성공과 실패를 살피면 재가불교 운동의 문제와 그 한계가 잘 드러난다.

참여불교재가연대는 1998넌 세계 곳곳에 생생하게 중계되기도 했던 ‘조계사 폭력 사태’를 겪고 난 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데에 마음을 모은 재가불자들이 결성하여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많은 성과를 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교단자정센터’는 불교계 권력 집단에 대하여 경고를 보내며 더 이상의 타락을 막는 큰 역할을 하였지만, 자체 회관을 마련하며 성장해가던 재가연대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인 지 오래 되었다. 회원들뿐 아니라 초기 활동가 대부분이 떠나고 조직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도 안 보인다. 가끔 교단자정센터 명의의 성명서가 나오기는 하지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장경호가 출연한 재원을 바탕으로 설립된 대한불교진흥원은 역시 수십 년간 큰일을 해왔다. 불교방송 설립을 주도하고 그 운영을 지원해 온 일은, 장경호와 그의 유지(遺志)를 이은 진흥원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진흥원이 고위급 관료나 전직 동국대 총장 등을 위한 원로원 역할을 하는 곳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이사장 자리를 주고받으며 보수적인 경영을 하고 설립자의 뜻이었던 ‘불교 진흥’에는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한 것은, 특정 인맥 · 특정 대학 출신들이 이사장과 이사를 독점하게 되면서 이사장이 전횡하고 심각한 문제를 일으켜도 내부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가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9년 이한구 이사장 취임 이후 변화된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특정 인맥 중심 이사회 구성에서 오는 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재단 내부에 이런 문제가 있으니 당당하지 못하고, 조계종 중앙종회 등에서 ‘진흥원 특위’를 구성해서 비판 · 공격하는 데 대해 민감하고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앞으로 진흥원에 닥칠 첫 번째 위기는 조계종단과 바깥세상의 비판이나 이웃 종교계의 공격 때문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위기는 특정 학맥 중심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사회 내부에서부터 시작할 것이고, 결코 쉽게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창가학회 · 입정교성회 등 재가불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정치 ·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 재가불교 운동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서두에서 인용한 이기영의 말(“선풍(禪風)이 지배적이던 시기에 있어서 재가불자가 설 땅은 거의 없었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해방 이후 겉으로는 ‘통(通)불교’를 말하면서도 선종(禪宗)임을 강조하고 ‘선 수행만이 불교’인 것처럼 오도(誤導)하는 일부 출가자들에게 재가불자들까지 끌려다니면서 비판적 안목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왕조 500여 년의 무(無)종단 시대와 해방 이후의 비구-취처(娶妻) 갈등과 분쟁에서 비롯된 폭력과 고소 · 고발과 민사재판 등 법적 분쟁에 식상한 불자들이 심정적으로 ‘비구승 중심의 강력한 단일 종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요구는 전 불교계를 주도하는 종단인 조계종 출가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그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게 되었다. 다른 한편 재가불교 운동을 펼치는 그룹에서도 스스로 정법(正法) 구현을 책임지고 나가겠다는 원력과 의지보다는 ‘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서울 종로구 조계사’로 향한 비판에 활동 비중을 높이고 있어서, 결국 조계종 내부 정치 흐름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고 내부 동력을 잃게 되며, 조계종단에서 벌어지는 일탈 행위나 분쟁 때문에 함께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

 

5. 재가불교 운동이 나아갈 방향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한국에서 재가불교 운동이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도 거론하였지만, 필요할 때는 마치 구호처럼 ‘사부대중 공동체’를 이야기하지만, ‘비구-비구니 2부중 승가’를 거쳐 이제 ‘1부중 독존(獨尊 · 獨存) 체제’가 굳어져 가고 있다. 앞으로 오랫동안, 마치 ‘브레이크 장치가 고장 난 열차’나 ‘둑이 터져버린 강물’과 같은 이 흐름을 바꿀 기회를 잡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물길에 섣부르게 맞서다가는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묻혀버리게 될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가야 하는가.

첫째, 앞에서 길게 이야기하였지만 ‘출가자와 사이에 담’을 쌓거나 그들을 지나치게 어려워하지 않고 굳이 ‘출가-재가’로 구별하는 것까지 깰 자신감을 갖추어야 한다.

둘째, 출가자 그룹에 기대어 불교 운동을 하겠다는 환상을 깨야 한다. 우리가 잘 보고 있듯이 각 종단에 소속된 신도회나 단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특정 종단에 속하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는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출가자 집단, 그중에서도 조계종 권력의 중심부에 대한 비판 비중을 지나치게 높여서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심지어 조계종 권력을 ‘적(敵)’으로 상정하고 이들을 공격하는 것을 활동의 중심으로 삼다 보면, 자신들의 비판 활동이 실패할 뿐만 아니라 불자들에게서 외면받게 될 가능성이 높고 자기 기반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히려 비판 대상이었던 곳으로부터 역(逆)공격을 받아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넷째,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재가불교 운동을 하다가 1948년에 따로 교단을 창립하여 탈(脫)불교를 선언한 뒤 이른바 ‘4대 종단’에 들어간 원불교 사례를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 한편으로 성공한 듯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가불교 운동의 한계와 실패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내부 사정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재가불교 운동을 선언했으면서도 교단 창립 이후 세월이 흐를수록 성직자[남녀 교무]와 일반 신도 사이의 차별 문제가 드러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정토회의 사례를 냉정하게 분석하여 교훈을 삼을 필요가 있다.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개인에 대한 찬반 견해가 선명하게 엇갈린다. 재가불교 운동을 하던 그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것이 한국에서 재가불교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일 것이다. 정토회 또는 법륜이 조계종단과 ‘가깝지도 않고 아주 멀지도 않은 기묘한 관계’를 이어가는 곡예를 하면서 아직까지 국내외에서 기반을 다져가는 성공의 원인에는 이런 관계를 지켜나갈 수 있는 개인적 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곡예 전술이 앞으로 얼마나 더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법륜이 떠난 뒤에도 그 능력이 계속 발휘될 수 있을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어쨌든 법륜 이후 정토회의 안정과 지속 발전 여부는 정토회뿐 아니라 한국 재가불교 운동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불교계와 일반 사회에 미친 영향에서는 이에 훨씬 못 미치지만, 이기영이 세운 구도회와 한국불교연구원, 윤용숙이 설립한 보덕학회, 김기추와 이희익이 조직한 보림회와 선도회처럼 특정 종단에 의존하거나 얽매이지 않고 독자 활동을 펼치는 곳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각기 하는 역할은 다르지만, ‘불교’ 신행이라는 공동 목표를 함께 하는 활동이 활발해져야 조계종을 비롯한 승단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적절한 비판을 해서 안정과 발전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병두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태리어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석 · 박사 과정 수료. 오산대와 명지대 강사, 파라미타청소년엽합회 사무총장, 문화체육관광부 종무관 등 역임. 주요 저서로 《지혜로운 삶의 교훈 채근담》 《북한산성과 팔도사찰》 평론집 《향기로운 꽃잎》 등과 역서 《조선불교통사(근대편)》 《담마난다 스님의 불교 이야기》 등이 있다. 현재 종교평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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