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가 없는 천주교 사제들에게 조카는 자식만큼 예쁘고 귀하다. 둘째 조카 녀석이 대학에 들어가 첫 한 달이 지났다. 가족 모임에 조카들이 다 왔다. 나의 노모가 손주(둘째 조카)에게 “얘야, 이제 대학도 들어갔으니까 성당 좀 잘 다녀라.”라고 말을 건넸다. 둘째 녀석이 물끄러미 할머니를 쳐다보며, “할머니 내가 불교 학교에 갔는데, 무슨 성당이에요? 그냥 절에 가서 관세음보살이나 찾을래요.”라고 내뱉었다. 

순간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지만 내가 “그래, 맞는 말이야. 성당 다니기 싫으면 절이라도 열심히 다니거라.”라고 농담을 던졌다. 순간 큰 조카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야, 너는 유교에서 세운 학교 다니잖아!” 정말 그랬다. 삼촌이 천주교 신부인데, 큰 녀석은 유교, 둘째 녀석은 불교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가족 모두가 이제야 알아차렸다. 정말로 종교 간 다원주의의 현실을 우리 가족 안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종교 간에 사이가 비교적 좋다. 사이가 좋은 걸 넘어 서로 배우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공유하는 것도 있다. 역사적인 사례 한 가지만 이야기해보자. 

한 · 중 · 일 동아시아에 그리스도 신앙을 처음으로 전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1549년 가고시마에 온 이래, 교리를 전하면서 하느님에 해당하는 ‘Deus’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대한 적응적 고민을 하였다. 가고시마 불교 승려들과의 접촉을 통해 그는 불교 진언종에서 쓰고 있던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앞 글자 ‘대일(다이니치)’을 하느님의 의미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용어로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천주교가 남쪽 나라에서 온 불교의 한 종파로 이해되었고, 라틴어 ‘데우스(하느님)’를 일본어로 음차하여 ‘데우스(デウス)’로 명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래의 표현보다는 토착화된 용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선교사들도 있어서, 불교 용어인 ‘천주(天主)’라는 말을 데우스의 번역어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하비에르 이후 30여 년이 지나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하기 시작하면서, 아예 중국에서는 ‘천주’라는 말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으로 사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천당, 지옥 그리고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놓은 ‘감실(龕室)’ 등 상당히 많은 불교적 유산을 천주교에서 사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말들이 천주교의 용어로 되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물론 불교가 천주교로부터 받은 영향도 있다. 천주교의 관료적 조직체계나 유일신에 대한 타력신앙은 민중들의 유일불 주신 숭배 사상이 강화되는 데 영향을 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모든 종교는 다 같은 진리이며, 하나의 초월적 가치를 각자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한다.”는 어설픈 포스트모던적 다원주의나 종교혼합주의의 슬로건을 지지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배움과 유사성이 각자 진리의 가치를 더욱 깊이 있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두 종교의 영적 여정을 담은 ‘십우도’와 그리스도교의 ‘탕자의 귀환(루가복음 15, 11-32)’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비슷하다. 바깥세상으로 보물(진리)을 찾아 떠난 수행자가 갖은 고초 끝에 제자리로 돌아와 보물이 자신이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있음을 깨닫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달라이 라마는 그리스도교 신자인 서양인들을 향해, 자신은 불교를 설파하러 온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고향 같은 종교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도록 이야기하러 왔다고 말하곤 했다. 세상의 종교와 철학을 많이 알게 되고 그 신자들과 편견 없이 만남과 대화를 할수록 자신의 종교 진리에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모든 종교는 다 똑같은 진리를 공유하고, 진리(眞理)는 일리(一理)’라는 다원주의적 범신론은 기실 너무나 가볍다. 그것은 너무 피상적이고 그런 판단을 내릴 만큼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모든 종교와 철학에 대해 완벽한 지식과 깨달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들의 차이와 다양성의 가치에 대해서는 비교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 다양성과 그 특성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겸손해지는 것을 깨닫는다.

불교의 ‘십우도’와 기독교 성경의 ‘탕자의 귀환’은 우리가 밖에 나가서 낯선 것 또는 다른 것에 흠뻑 빠져들었다가 변모되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우리 안의 다른 부분이 충만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다음에 나의 조카들을 만나면 이야기할 것이다. 

“유교와 불교의 교양필수뿐만 아니라, 더 많은 불교와 유교의 선택과목을 수강하려무나. 그래야 너희가 가지고 있는 질그릇 속의 물건이 진짜 보물임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니!”

 

최영균 /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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