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시절, 아들의 일상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자의식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아들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내면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한참 밝고 유쾌해야 할 시기에 세상의 모든 일을 달관한 듯 초연한 모습으로 평범한 세상의 일부분이 되고 싶지 않아 거드름을 피웠다. 그래서 아들의 일상은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이러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서로의 불만족이 정점에 닿을 무렵 아들은 어머니와 다투게 되었다. 젊은 패기를 장착한 아들은 무질서한 논리로 어머니를 곤혹스럽게 했고, 아들의 저항에 놀란 어머니는 아들에게 ‘너는 하늘에서 떨어졌냐, 아니면 땅에서 솟아났냐?’라고 역정을 내셨다. 물론 엄청난 짜증을 섞어서 말이다. 아들의 거드름이 묻어나는 사춘기의 반항을 관찰한 어머니는 아들의 탄생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아들에게 아주 실존적인 반문을 던진 것이다. 어머니의 반문으로 아무런 인간적 연고도 없듯이 거드름 피우며 살던 아들은 과거 자신이 지녔던 질문을 회상한다. 

 

사춘기 시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 아들은 친지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당돌한 질문을 했다. 이런 생물학적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은 부메랑이 되어 아들에게 돌아왔다. ‘엄마가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라는 답을 듣고 아들은 한없이 서러워했다. 자신의 처지가 마치 다리 밑에 버려졌고, 주워온 자식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서러워하는 꼬맹이의 반응을 즐거워하였다. 

이렇게 진지한 꼬맹이의 반응은 어른들의 예능을 위한 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물론 아들이 자신의 출생에 대한 답변이 이중적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들의 성장은 놀라웠지만, 의지가 나약한 탓에 삶은 그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찬란한 봄날 같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혹독한 겨울의 날 선 추위도 견뎌내야 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몰랐던 까닭이다. 그 성장통의 중심에는 서투른 아들을 지켜주었던 어머니가 있었고, 그의 어머니도 그 통증의 무게를 함께 견디어 내어야 했다. 

 

모든 것이 서투른 아들이 성장하여 집을 떠난 후, 어머니는 아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아들의 가장 찬란한 젊은 시절을 지켜보지 못한 까닭이다. 어머니는 자식이 부모를 떠나 독립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지만, 그녀에게 그 시간은 너무나 빨리 다가왔다. 그럼에도 아들이 젊은 시절에 부모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부모의 신뢰와 사랑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부모의 사랑이 충분하지 못했다면 아들은 희망을 찾아 떠날 용기와 기력도 없었을 것이다. 

부모의 신뢰와 사랑은 아들의 삶, 특별히 힘들고 고된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었다. 아들이 혹독한 겨울의 날 선 추위도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을 무렵, 어머니는 아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성인이 된 아들은 어머니의 손길이 익숙하지 않지만, 어머니의 품이 필요했던 순간들을 떠 올리며 신세를 갚는다. 어머니의 품을 떠난 후 아들은 어머니로부터 그리울 적마다 아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얼굴을 쓰다듬는다는 말을 듣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진 속의 아들을 쓰다듬는 어머니의 고백에서 아들은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그리움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로마 중심부의 메룰라나 31번가에 소재한 성 알폰소 성당에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성화가 제대 중앙에 제법 높이 놓여 있다. 그리스의 크레타섬에서 제작된 이 성화는 영원한 도움이신 성모 혹은 기적의 성화라고 불린다. 성화 덕분에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도움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증언들이 많이 수집된 덕택에 얻어진 명성이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소녀의 꿈속에 성화 속의 여인이 나타나 성화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자리하면 좋을지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 위치가 바로 메룰라나 31번가의 성당이다. 

성당 바로 앞, 메룰라나 거리는 로마의 주교좌 성당인 라테라노 대성당과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연결해 주는 제법 큰 도로이다. 이 도로를 따라 일 년에 한 번, 로마의 주교이기도 한 교황은 주교좌인 라테라노 대성당을 출발해 성모 마리아 대성당까지 행렬을 주관한다. 교황이 현시된 성체를 모시고 선두를 이끌면, 많은 이들이 초를 들고 장엄한 행렬 예식에 참여한다. 

이를 성체 거동이라고 한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 성체의 형상으로 거리를 지나는 모습을 메룰라나 31번가에서 매년 지켜본다. 아들을 지켜 보고 싶은 어머니의 염원은 소녀의 꿈을 통해서 전달되었고,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그리움이 묻어나는 이 염원을 아들은 충분히 그리고 넘치게 이해한다. 그리하여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그리움은 메룰라나 31번가의 기적이 되었다.

14세기에 그려진 이 성화는 어린 예수가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황급히 안기는 모습을 포착한다. 어린 예수는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떨어질 정도로 급하게 어머니의 품으로 뛰어든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눈빛은 황급히 주위를 살피고 경계하는 눈빛이다. 아들에게 위협이 되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를 지켜내고자 하는 어머니의 의지가 얼굴에 담겨 있다. 

그럼에도 마리아의 눈빛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인류에 대한 연민과 자비의 눈빛, 혹은 인류에 대한 슬픔과 번민의 눈빛으로 해석한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성화 제작자의 치우치지 않는 의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성모의 눈빛은 오묘하고 신비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이 성화 속에는 어머니의 강인함과 어린 아들의 두려움이 함께 공존한다. 공포를 이겨내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옆에는 위험으로부터 아들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 성모의 모성이 버티고 있다.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그리움과 모든 위협에서 아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세상 어머니들의 모성이 담겨 있기에 성모의 모습은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된다. 오늘도 성모 마리아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메룰라나 13번가에서 아들 예수를 기다리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기 직전, 예수는 제자들 중 하나인 요한에게 성모님을 두고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한다. 십자가 아래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던 어머니를 자신이 가장 아끼던 제자에게 부탁한 것이다. 이 부탁은 ‘내 어머니를 지켜달라’는 요청과 같다. 인류를 위한 희생제물로 자신을 바친 예수의 어머니는 ‘피에타’상에서 표현된 것처럼 주검이 된 아들을 말없이 품에 안고 의연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어떠한 통곡과 절규도 없는 피에타의 성모는 자신의 절제된 슬픔과 예리한 아픔을 의연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하늘에서 아들 예수를 내려다보고 있고, 땅에서는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 ‘피에타’를 제작한 미켈란젤로의 의도이다. 

 

현실의 아들이 간혹 어머니의 집을 떠날 때면 그의 어머니는 대문까지 마중 나와 아들의 뒷모습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 마치 피에타의 성모가 아들의 주검을 내려다보듯 자신의 시선을 아들에게서 떼어내지 못한다. 

이제 사춘기를 훨씬 지나 지천명의 중간 지점을 통과하는 아들도 하늘로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그래서 가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대신한다. 그제야 어머니의 태 속에서 아홉 달을 보내고, 탯줄을 끊고 태어난 아들은 하늘의 아들이나 땅의 아들도 아닌, 어머니의 아들임을 깨닫는다. 

이제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그리움이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그리움이 되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아들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가?’

 권오상 / 구속주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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