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쯤의 일이다. 사제로 서품되고 채 1년이 되지 않은 새 신부 때였다.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신촌의 한 병원을 찾았다. 병자성사란 가톨릭에서 사제가 아픈 이를 위로하고 또 치유의 은혜를 기원하는 예식을 말한다. 죽음이 임박한 경우에는 살아생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기도 해 ‘종부성사(終傅聖事)’라고도 한다. 

경찰 고위직을 지내셨다는 형제님 한 분이 살짝 일으켜 세운 침대에서 나를 맞았다. “형제님, 안녕하세요. 위독하시다 해서 병자성사 드리러 왔습니다.” 하였더니 그가 대뜸 나에게 물었다. “신부님, 혹 돈오돈수를 아십니까?” 순간 이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인가 하면서도 신학교 대학원 과정 ‘한국사상사’ 시간에 들었던 돈오점수, 돈오돈수 이야기, 돈점 논쟁이 떠올랐다. 깨달음은 단박에 이루어지더라도(돈오) 점진적인 수행의 길을 계속 가야 한다는(점수) 것이 그간의 통설이었는데, 근간에 성철 큰스님이 ‘깨달은 연후에도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면 어찌 그것을 깨쳤다 하겠느냐’ 하시며 돈오돈수를 내세우셨다고 배웠다. 어쭙잖게 깨쳤다 하지 말고 참된 수행의 길에 정진하라는 의미의 말씀이라 기억되었다.

그래서 그의 손을 잡고 “예, 압니다.” 하였더니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 분명한 소리로 내게 말하였다. “신부님, 지금의 제 심정이 돈오돈숩니다. 이제는 제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나도 또렷한데 저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습니다.” 나는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씀드린 것으로 기억된다. “눈 한 번 제대로 못 뜨고 세상 떠나시는 분도 적지 않을 터인데, 이마저도 감사한 일이겠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사도좌에서 받은 권한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에게 전대사를 베풀며 모든 죄를 용서합니다.” 며칠 뒤 그의 장례미사는 슬픔에 압도되지 않은, 무척이나 차분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이루어졌다.

깨달음과 관련한 불교 용어나 표현 가운데 나에게 익숙한 것은 ‘오도송’ ‘한소식 하다’ ‘견성성불’ 등이다. 깨달음을 제대로 보고 듣는 일에 비유한 것이 재미있다. 가톨릭 시인 가운데 구상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깨우침을 〈은총에 눈을 뜨니〉라는 제목으로 적었다. 그의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두 이레 강아지’란 생후 2주 된 강아지다. 2주는 강아지가 첫 눈을 뜨는 때라 한다. 큰조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한참을 기다려 조카와 첫 대면을 하였다. 뽀얀 얼굴의 사랑스러운 아가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헤치고 나온 탓인지 아가의 얼굴은 붉고, 푸석푸석했다. 한쪽 눈은 감겨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실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첫 눈을 뜬다는 것은 아마도 이 정도를 말하는 것이리라. 구상 시인은 자신이 비로소 눈뜨고 마주한 세상과 인생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중략)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시인은 눈뜸으로 자신의 내부에서는 이렇듯 천지가 개벽하고 형형색색 빛이 섬광처럼 쏟아지며 생명이 약동하는데도 세상은 무심히 그대로 돌아가더라 하였다. 그가 깨달은 연후에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범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일상을 살다 갔음을 짐작게 하는 구절이다.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나로서는 불교의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구상 시인이 혹여 어느 큰스님과 자신의 깨달음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모르겠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이들과 격의 없이 두루 사귀었으니 말이다. 그랬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점잖게 쫓겨났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웃음이 난다. 

요즘도 가끔 신촌의 그 병원을 찾게 된다.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서나 돌아가신 신자의 빈소를 찾아 기도해 주기 위해서다. 지금도 병원의 어느 병실에서 누군가 불쑥 내게 물을 것만 같다. “신부님, 돈오돈수를 아십니까?”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대답할지 궁색하기만 하다.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김동희 / 천주교 의정부교구 마두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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