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이 절실했던 시간이 있었다. 친구는 종교에서 답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종교가 없었던 나는 불교의 사찰과 천주교의 성당 그리고 개신교 예배당을 찾아갔다. 불교와 천주교의 ‘고요함과 침묵’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장엄함은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하였다. 

이후 두 종교의 가르침을 알아보았다. 당시 불안에 시달려 기진맥진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나는 삶의 화두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해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자신을 잃었다. 그래서 신의 은총에 의지할 수 있다는 천주교를 선택하였고,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만난 후 나의 수도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매번 사찰을 방문할 적마다, 처음 사찰을 방문했을 때 받았던 위안이 되살아나고, 특히 방문객들이 모두 떠난 저녁예불 전의 고즈넉함을 사랑한다.

 

일상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에 처할 때 혹은 종종 교회의 정제된 언어들 규칙, 규정, 의례들에 영혼이 건조해질 때 나는 ‘고요함과 침묵의 공간’ 안으로 몸을 숨긴다. 종교학의 표현을 빌려 ‘성스러움의 체험’에 대한 그리움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라고 말한 반 델 레에우의 말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이 세상의 여느 존재들처럼 순순히 자연의 법칙과 순리를 따르지 않고, 자신이 선호하고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택하는 존재이다. 그 결과 오류에 빠지기도 하고, 진퇴양난의 ‘한계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하는데, ‘성스러움의 체험’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여기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엉켜버린 주변 세계와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그런데 ‘성스러움의 체험’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체험으로 섬광처럼 한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러한 체험을 붙들고 재현하고 싶어 한다. 

모든 종교는 ‘성스러움의 체험’을 자신들의 교리/교의로 표현하고 의례, 관습과 규범을 정하고, 사람들의 원의를 채워줄 공간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의 전인적인 차원―육체적 심리적, 윤리 도덕적, 영적―에 영향을 주는 ‘성스러움의 체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초자연적 환상과 착각의 위험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며, 내적 외적 삶의 균형을 잡아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례 없는 풍요의 시대를 보내던 서구에서 1970~80년대 ‘성스러움으로의 회귀’ 현상이 일어났고, 우리나라도 1990년대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는 과도한 물질문명의 풍요가 주는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지금도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돈, 실업과 빈부격차의 심화, 기후변화로 인한 각종 재앙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관계 단절과 파탄, 분노조절장애, 우울증과 무력감, 무차별적 폭력이라는 사회병리학적 현상으로 고통받고, 쉽게 각종 중독(게임, 마약, 알코올, 일…… 등)에 빠지곤 한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물론 국가의 정책, 심리적 상담과 의료적 도움이 필요하지만, 종교 역시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시대가 가진 취약성은 일반적으로 가장 힘없고 약한 이들을 강타한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한편으로는 이들이 가진 현실적 필요에 도움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성스러움의 체험’으로 인도하고 여기서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직면한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토마시 할리크 신부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에게 “신비와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 상상력을 통해 이해되고 상상할 수 있는 저 너머의 영역에 관한 신비 체험으로―불교는 ‘공’의 신비 체험, 그리스도교는 ‘파스카의 신비’―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이다. “신비의 문턱에 서서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끈기를 지니고…… 마음속에 그 신비를 간직하고 그것이 무르익어 결국에는 우리의 존재가 무르익게 이끌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할리크 신부는 사람들이 ‘심오한 신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나는 종교의 경계 혹은 밖에 있는 사람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믿음을 제외하고는 종종 거의 모든 점에 동의한다……(그 이유는) 나도 간혹―세상과 인생의 수많은 모순이 지닌 양면성 앞에― 하느님께서 침묵하시고 멀리 동떨어져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짓눌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들은) 숨어 계신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와 같은 말마디를 만들어 낸다.” 

― 토마시 할리크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7쇄) 분도출판사 2022, 9-11쪽.

이들과 마찬가지로 종교 근본주의 광적 신앙은 공통점을 가진다. 심오한 신비를 자기 옳음의 잣대로 재단하고 사람들을 단죄하고 폭력도 불사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비를 성급하게 체득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물들어 즉각적이고 일회적인 욕구 충족과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는 유사종교와 영성 단체들은 이를 만족시켜줄 종교 상품을 제조하고 판매한다. 

예를 들면 뉴에이지 계통의 운동들(일본의 정신세계 운동, 한국의 기수련 운동, 초월명상 등), 동서양 종교와 고대인들의 신비 체험과 비술들, 웰빙을 위한 방법들을 적절히 칵테일 하여 영적 상품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방법으로 인간의 심오한 내면을 파괴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들은 때때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일시적인 긴장의 완화 정도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불교는 신비의 삶을 가르치는 데 많은 장점을 보유하고 있는 것 같다. 덜 조직적이고, 덜 교의적이고 이성과 언어 저 너머의 빈 공간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의 교리는 뇌과학의 이론과 천문학이 제공하는 세계관에 부합되는 점도 많아 과학기술문명과의 대화도 용이해 보인다. 

반면 제도로서의 불교가 일으키는 스캔들 때문에 때때로 사람들에게 걱정과 불신감을 주기도 하고, 출가자와 재가 신도들의 관계에 그림자가 드리울 때가 있어 보인다. 세상이 과거와 다르게 너무나 복잡하고 복합적인 양상으로 연결되어 돌아가고 있기에, 불교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선 출가자와 재가 신도들의 보다 긴밀한 협력이 필요해 보인다. 

이는 비단 불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도 해당하는 시대적 요청이다. 다행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재가 신도들이 세상 안에서 ‘일상의 수행자’로 진화하고 있는 모습은 긍정적이다. 세상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보유하고 열린 의식을 가진 불자들의 활동이 눈에 뜨인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불교 안에서도 새로운 희망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길 기원한다.          

이현숙 /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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