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어려워하던 21년 겨울, 제가 원목실을 담당하고 있는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에 노(老)스님 한 분이 입원하셨습니다. 암으로 투병하시며 요양병원에 계셨던 스님은 이제 임종을 맞이하실 시기가 되어 호스피스를 방문하신 것입니다.

환자분들께 기도를 드리려 호스피스 병동을 다니던 중, 병동을 돌보시는 수녀님의 말씀을 듣고, 스님이 계신 임종실(臨終室)을 찾았습니다.

의식 없이 호흡기를 착용하신 채 조용히 누워 있는 스님의 모습은, 죽음을 준비하는 병약한 노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보호자도 없이 생의 마지막을 호흡기에 의지한 채 기다리는 노스님께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습니다.

다른 종교의 수도승(修道僧)에게 어떤 기도를 해 드려야 할까 고민하다, 학생 때 반쯤 외워둔 《반야심경》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여러 번 읽은 불교의 경문이 《반야심경》밖에 없었고, 무엇이라도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옆에 앉아 조용히 《반야심경》을 읽어드렸습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이 구절이 이 순간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힘겹게 숨을 쉬며, 지금껏 살아온 시간과 기억들을 무(無)로 돌려보내는 이 과정이 고통스러운 모습이지만, 경건하고 평온한 침묵으로 느껴지는 것은, 일생을 한마음으로 노력해온 수행자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며칠 동안 매일 병실을 방문하고, 그때마다 매번 《반야심경》을 읽어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어 있는 병실을 마주하고 나서야 스님께서 열반에 드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밤 조용히 열반하시고 보호자가 모셔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빈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많은 경문을 읽어드릴걸’ 하며, 후회가 찾아왔습니다. 일생을 불가의 수행자로 읽으셨을 수많은 경문 중 일부라도 조금 더 많이 읽어드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 온전히 수행자로 현세의 삶을 마치신 스님의 모습이 존경스럽고 부럽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안타까운 마음에 시작했지만, 곁에서 경문을 읽으면서 노스님을 위한 것이 아닌 저 자신을 위한 경문이 되었습니다. 

병원에 있으면, 응급실과 중환자실 그리고 호스피스 병동과 암 병동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합니다. 어떤 죽음도 사연이 없지 않고, 외로움이 없지 않고, 슬픔이 없지 않고, 남겨짐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죽음이란 마음에 아픔을 주지만, 살아 있음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특별함을 아름다운 인생이 완성되는 과정으로 보지 못하고, 오직 측은하고 안타까운 고통으로 받아들인 제 어리석음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던져졌습니다.

저는 노스님의 법명을 알지 못합니다. 병원에 기록된 것은 그분의 성함뿐입니다. 저는 더욱이 노스님의 삶이 어떠하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분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셨는지, 수행에서 깨달음을 품고 사셨는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며 사셨는지, 오로지 아는 것은 스님께서 수행자로서 제 기억에 남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수도자(修道者)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 또한 수행의 순간임을 깨닫습니다. 홀로 남겨져 모든 것이 무가 되어버린 것 같은 때에도, 오직 수도자로 온전히 그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어야 수도자가 됩니다. 수도자란 오랜 시간 수행을 한 사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수행을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노스님께서 수행자로서 남겨지는 마지막 순간에 잠시나마 곁에서 도반(道伴)처럼 함께 머물 수 있어서, 지금도 저에겐 우연하지만 소중한 행운처럼 느껴집니다. 속세의 험난한 삶의 마지막에도 스스로 수도승으로 남으신 노스님의 모습에서, 앞으로 제가 만나야 할 삶의 길을 바라봅니다.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홀로 남은 병상의 외로움도 없이, 죽음으로 무가 되는 두려움 없이, 남겨둘 것을 염려하는 마음 없이, 속세의 갈등과 고민을 뒤로하고 스님이 다시 떠나시는 해탈의 길, 조용히 《반야심경》 한 구절로 기도합니다. 


이상윤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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