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함께 돌아봐야 할 소수자 인권

1. 머리말

무명(無明)의 그림자를 지니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늘 어려움을 겪는다. 자신을 과장하거나 비하하는 방향으로 인식하면서 우월감 또는 열등감을 표출하곤 하는데, 그런 점에서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자아정체성을 본격적으로 형성하는 시기인 청소년기에는 열등감과 우월감의 교차를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외모나 지능, 힘 같은 요소들을 기준으로 삼아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일어나는 이러한 감정의 교차는 그들을 불안하고 격정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 거기에 그 시기 특유의 도덕적 완벽주의가 더해지면서 부모나 교사를 바라보는 경멸 섞인 시선이 나타나기도 한다.

청소년기 자녀를 둔 부모나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학교 교사들이 피해 갈 수 없는 심리적 갈등은 다른 한편으로 어른이 되어가는 정상적인 발달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과정을 잘 통과해 내도록 돕는 것이 교사와 부모의 중요한 역할이다. 부모는 어린이 시절의 육체적인 성장과 함께 이 시기의 정신적 성숙을 도와주는 주체이고, 교사는 이 시기의 정신적 성숙을 중심으로 어른의 몸을 갖춰가는 모습을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아 주는 주체이다.

그런 점에서 부모와 교사는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 역사 속에서는 부모가 교사에게 자식 교육을 온전히 맡기는 방식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시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학부모들의 관심과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 관계에 근원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21세기 초반 한국 시민사회에서는 어떤 지점에서는 관계가 역전된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학부모의 비중이 커지고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편으로 당연한 현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관계 재설정 과정에서 교사의 인권마저 존중하지 않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어 경계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학교교육은 부모와 교사의 연대가 중심이 되면서도 교사들의 교육권과 전문성이 존중받을 때 비로소 제대로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주체는 시민이고, 교사와 학부모 또한 그 역할을 부여받기 이전에 이미 시민이다. 학교는 시민을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런 점에서 사회를 이끌어가는 특수한 신분의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삼았던 동서양의 전통적인 학교와 근본적으로 차별화된다. 시민이 곧 지배자이자 지배를 받는 사람인 것이다. 이때의 지배 또한 임시적인 것일 뿐 신분이나 계급에 기반한 영속성을 부여받지는 못한다. 누구나 시민은 일정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 어떤 자리에 임명될 수 있지만, 동시에 시민들의 명령에 의해 그 자리에서 언제든지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시민의식과 덕성을 갖춘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 시민사회 학교교육의 목표이다. 시민의식은 시민성(citizenship)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이 시민성은 시민으로서 갖추고 있어야 할 권리의식과 덕성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학교교육은 곧 시민교육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다. 학교는 교과와 교과 외 활동 등의 다양한 관계와 경험을 통해 보다 온전한 시민을 등장할 수 있게 하는 핵심 주체이다.

그런데 우리 학교교육은 지금 시민교육을 제대로 해내고 있을까?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바로 답변하기 어려운 망설임을 경험하게 된다. 시민의 권리의식을 함양하는 교육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시민의 덕성을 함양하는 교육은 많이 부족하거나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인 시선을 지속적으로 만나곤 하기 때문이다.

그 시민의 덕성 중에서도 동료 시민을 그 자체로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하는 측면이 부족하다. 특히 이른바 사회적 소수자 또는 약자를 온전한 시민으로 인정하는 데서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심각하다. 인간다움의 근원은 동물적 차원의 힘의 논리를 극복하는 데서 출발하고, 그것이 다시 관계망을 통해서만 비로소 존재가 가능하다는 연기성(緣起性) 인식이라는 존재론적 차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소수자 차별의식 극복을 위한 학교의 역할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불교적 관점이 적극적으로 더해져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2.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과 불교 전통

사회적 소수자가 상대성과 유동성을 전제로 규정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우리 사회에서 현재 부각되어 있는 소수자들은 다른 사회나 시대의 소수자들과 상당 부분에서 차별화될 수 있다. 물론 소수자 개념이 부각되는 과정에서 서구 계몽주의 기반의 인권(human rights)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함께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인권 개념이 지니는 일정한 보편성의 영역을 우리 시민사회도 공유하게 됨으로써 빚어진 유사성에 대해서도 고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소수자로서의 여성’과 ‘장애인’이다. 전자는 페미니즘의 도입에 따라 부각되었고, 후자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근대적 관점의 수용에 따라 변화된 것이다.

불교 전통에서는 여성의 인격과 인권에 대한 주목이 붓다 당시부터 파격적인 수준으로 이루어졌지만, 그에 비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식은 다른 종교나 사상과 비교해도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석가모니 붓다의 결단은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평등사상의 구현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평등 의식이 시대 상황에 맞게 적용되지 못함으로써 21세기 초반 우리 사회에서는 오히려 뒤떨어진 비구니 차별이나 여성 불자에 대한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어 시정이 필요하다. 여전히 비구니 팔경법을 비판적 검토 없이 언급하거나, 나이 든 여성 불자를 하대하는 관행이 그런 상징적인 증거들이다. 그럼에도 종교 사상적 뿌리를 전제로 할 때 석가모니 불교는 여성 차별을 혁명적으로 극복해내고자 했던 전통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필요한 것은 그 석가모니의 정신을 오늘에 맞게 구현해내고자 하는 실천적 노력이다.

그런데 장애인의 경우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승가공동체라는 생활 공동체를 유지해야 한다는 필요에 따라 장애인들의 출가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초기 승가공동체가 일정 부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감출 수는 없다.

한때 수행승들이 애꾸눈인 자를 출가시켰다. 세존께 그 사실을 알렸다. “수행승들이여, 애꾸눈인 자를 출가시켜서는 안 된다. 출가시키면 악작죄가 된다.”

 

한때 수행승들이 눈이 멀고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인 자를 출가시켰다. 세존께 그 사실을 알렸다. “수행승들이여, 눈이 멀고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인 자를 출가시켜서는 안 된다. 출가시키면 악작죄가 된다.”

출가시키면 악작죄를 짓는 경우로 언급되는 것 중에는 지금 우리의 시각에서 보아도 수행 분위기 조성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고 볼 만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대중을 모욕한 자와 태형을 당했거나 죄상이 방부에 적힌 자 등은 출가시켰을 경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현실 승가공동체를 위해 출가를 금지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최소한의 수행 공동체 활동을 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들을 출가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불가피했을 것이라는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인용에서 단지 하나의 눈에 장애가 있다고 해서 출가를 금지한 것을 보면 과도하였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장애인들에 대해 하늘의 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인식했던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을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한 지점이다.

우리 전통과 서구 근대사상의 영향을 동시에 받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를 말하고자 할 때는 불교와 유교로 상징되는 전통의 소수자에 관한 인식과, 고대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를 수용하면서 18세기 이후 시민혁명을 사상적으로 반영한 시민사회의 소수자에 관한 인식을 동시에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만 한다. 유교의 경우는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서구 시민사회의 전개 과정에서도 20세기 중반까지 여성에게 제대로 된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과 21세기 현재까지도 흑인 차별의 그림자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미국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어야만 제대로 된 소수자 담론이 펼쳐질 수 있다.

이런 전제 위에서 우리 사회의 소수자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장애인과 여성이다. 소수자로서 장애인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해 집에만 있어야 하거나, 그로 인해 최소한의 교육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보고되고 있다. 스스로 장애인이기도 했던 대통령 김대중이 집권한 이후 다각적인 장애인 우대정책이 마련되었고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는 상황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쉽게 잦아들지 않고 있다.

2022년 8월, 토요일 오전 9시.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서부역에서 휠체어 이용자 두 명을 포함한 네 명의 활동가가 기차역 플랫폼 난간에 끈을 묶어 매달렸다. 이 기차역은 지역 교통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이용객이 많지만, 여전히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어 사용자들이 승강장까지 이동하기가 고역스러운 곳이다. 장애인 이동권 직접행동 단체인 ‘롤펜더 비더슈탄드(Rollfender Widerstand)’의 활동가들은 “독일철도(Deutsche Bahn)와 프랑크푸르트시가 역에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주지 않으니 직접 이동 수단을 가지고 왔다”며 도르래 시위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3시간가량 해당 역을 지나는 근거리 지역 철도교통에 지장을 미쳤다. 시위는 출동한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프레시안〉 2023년 3월 28일 자)

 

지난 1월 지하철 승차 시위를 중단했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중단 62일 만에 지하철 탑승 시위를 재개했다. 오늘 오전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승강장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8시 50분쯤 전장연 활동가들이 지하철 탑승을 시도했다. 다만 경찰이 이를 가로막으면서, 실제 승차하지는 못했다. 그 여파로 1호선 상행선 운행이 4분가량 지연됐다. 전장연은 오전 11시쯤부터 시청역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문화방송〉 2023년 3월 23일 자 뉴스)

위에 인용한 첫 번째 기사는 독일의 장애인 차별과 관련된 것이고 그다음 기사는 우리의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된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장애인 차별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차별 자체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가치판단 기준을 유용성과 다수의 이익에 두는 공리주의 윤리설이 시민사회의 주된 윤리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수적으로도 적은 소수자의 이익은 쉽게 다수의 이익을 위해 희생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의사결정 원칙인 다수결주의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동반자주의라는 다른 원칙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지점이기도 하다. 동반자주의는 민주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일차적으로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들 각각의 인격과 이익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임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우리 사회의 다른 소수자로는 성소수자와 무슬림을 들 수 있다. 성소수자 문제는 교육과정 개정이나 차별금지법 제정 과정에서 심각한 사회적 갈등 요인으로 부각되었고, 무슬림 문제는 대구 지역에 모스크가 지어지는 과정에서 현재까지도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성소수자가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2021년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집단 구성원 포용-성적 소수자’에 관한 설문조사 전체 참여자의 54.1%가 성소수자를 이웃이나 직장동료, 절친한 친구 등 어떤 사회적 관계로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응답했다. 같은 문항에서 외국인 이민자나 노동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응답이 12.9%, 장애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응답이 3.1%임을 고려할 때, 한국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 중 성소수자에 대한 배제적인 인식이 특히 높음을 알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장은 “건립 중인 모스크 앞에서 돼지고기를 이용해 이슬람 문화를 비하하고 적대감을 표출하는 행위는 인종과 종교를 이유로 한 소수자에 대한 전형적인 혐오 표현”이라며 “즉시 멈춰야 할, 우리 사회에서 용인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행동이다.”라고 말했다.”(《연합뉴스〉 2023년 3월 23일 자)

첫 번째 인용문의 ‘사회통합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는 성소수자를 외국인 이민자나 노동자보다 훨씬 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인식이 높다. 장애인은 그에 비하면 상당한 수준, 즉 3% 정도의 사람들만 사회적 관계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변하고 있어 최소한 이 문제와 관련지어서는 많은 부분 개선된 것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러나 자원분배와 관련지어 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몫이 돌아가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문항이 있었다면 다른 답변이 나왔을 것이다. 피상적 인식과 실제적 수용 사이의 간극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 사회의 소수자 문제는 주로 장애인과 성소수자, 무슬림 등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고, 불교가 갖는 포용성을 감안한다면 다른 종교나 사상과 비교해 비교적 높은 포용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해볼 수 있다. 물론 출가 공동체에서 장애인 배제라든지 사부대중 공동체에서 여성 차별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적극적인 개선 노력이 필요하고, 그 지점에서는 특히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인식 개선과 실천 노력이 절실하다. 그럼에도 불교의 지혜와 자비는 나 자신과 타인 또는 타자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불가능한 것으로 전제하고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이끄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소수자 문제를 극복할 가능성을 더 크게 지니고 있다. 이 가능성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내는 과제를 출가공동체와 사부대중 공동체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과정과 결과를 우리 시민사회와의 긴밀한 연계성 속에서 공유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첫걸음으로 우리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볼 필요성을 느낀다.

 

3. 사회적 소수자 차별의식의 뿌리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식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되어 지속되는 것일까? 먼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개념 정의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는 사회 안에서 불합리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위치에 있는 집단을 의미한다. 이 두 개념을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회적 소수자는 ‘신체적 또는 문화적 특징으로 불리한 환경에 놓이거나 차별대우를 받는 사람들로서 자기들이 다수의 사회구성원과는 다른 대상임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정의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약자보다는 사회적 소수자가 스스로 불리한 위치에 있음을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적 차원까지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적극적인 개념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도 사회적 소수자라는 개념을 사용하고자 하며, 필요한 경우에만 사회적 약자라는 개념을 보완적으로 사용할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는 스스로 신체적 또는 문화적 이유 등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을 하는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일컫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 불리한 위치 또는 부당한 대우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유동성을 지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소수자가 다수자가 되는 사례가 많이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에도 이런 변화는 늘 가능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근본이념으로 삼아 정착한 21세기 초반 한국 시민사회에서 다수자는 당연히 시민 자신이지만, 문제는 그 시민 속에 소수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데서 생긴다. 성소수자나 장애인, 무슬림 등이 그 예이다. 그들은 한국 시민사회의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소수자이다. 이 경우 이성애자나 비장애인, 기독교도나 불교도가 이에 대응하는 다수자가 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이동권이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고,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쉽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아직 숫자로도 소수인 무슬림의 경우도 일반적인 제도종교의 구성원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다.

이렇게 보면 사회적 소수자들은 사회적 다수자를 전제로 하는 상대적인 개념이 된다. 모든 개념이 절대적인 실체 또는 위상을 지닐 수는 없다는 중관(中觀)의 관점에 따르면, 사회적 소수자 또한 다수자의 전제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유동적인 개념이고, 이 유동성은 보다 바람직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이루기도 한다. 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 또는 해소할 가능성 또한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고, 이 경우 그 가능성은 개념의 상대성과 유동성에 의해 더 높아질 수 있다.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는 다수의 의식은 일차적으로 이 상대성과 유동성에 관한 인식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다수자의 위치에 지속적으로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할 수 있다면, 또 자신 또한 어떤 영역에서는 소수자로 분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면 차별의식의 상당 부분은 극복되거나 최소한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 차별의식의 다른 뿌리는 자신의 확보된 이익을 지속적으로 보장받고자 하는 의식이다. 다수자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그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유 ‧ 무형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보장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내 ‧ 외부의 노력을 통해 다수자와 소수자 개념이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일정 부분 인식한다고 해도, 그 이익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지점은 옳음과 이익 사이의 인지 불일치가 생기는 상황이고, 그 경우 행위 주체의 선택은 두 방향 모두로 열려 있다. 이익으로 열릴 경우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스스로의 선택을 정당화하면서 현재의 의식과 태도를 유지하게 된다.

자신이 지닌 소수자 차별의식의 상대성과 유동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결단을 내린다면, 그런 경우는 어떻게 될까? 이 경우에도 즉각적으로 모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전망을 하기는 어렵다. 오랜 시간 자신을 지배해온 습기(習氣)가 행동의 수정을 방해하는 요소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주목한 습기는 현대 철학과 심리학, 뇌과학 등의 연구를 통해서도 실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습관은 한두 번의 인지적 결단만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마음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배움과 수행의 과정이 요구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소수자 차별의식의 뿌리는 다수자와 소수자라는 의식과 개념 자체의 상대성과 유동성에 관한 인식의 결여, 자신의 이익을 고수하고자 하는 탐욕의 지속, 문제를 깨닫고 변화하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작동하는 습기 등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이 뿌리를 찾는 과정에 이미 일정하게 불교적 관점이 투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이 뿌리들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또 극복할 수 있을까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불교적 관점을 기반으로 실천적 노력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소수자 차별의식 극복을 위한 학교교육의 방향

가. 소수자 차별의식의 상대성과 유동성 인식 교육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시민교육의 중심으로서 학교교육의 역할이 가정교육과의 연계성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다. 학교교육이 시민의 권리임과 동시에 의무여서, 누구나 일정 기간 학교에 머물며 교사는 물론 동료 학생-시민들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경우는 그 의무교육 기간이 고등학교까지 확장되어 있고, 70% 이상의 학생-시민들이 대학교에 진학하는 상황이어서 학교교육의 역할을 충분히 부각시킬 만하다.

이러한 학교의 시민교육적 역할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으려면 먼저 학교를 시민교육의 장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우리 사회 전반의 인식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학교가 무엇을 하는 곳이어야 하는지를 물으면 가장 강조하는 것이 시민교육과 인성교육이지만, 정작 자신의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학교생활은 내신 성적을 올리거나 수학능력시험 준비를 잘하는 것으로 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기대들 사이의 간극은 어느 교육의 장에서도 생길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허용치를 훨씬 넘어서 있어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2020년에 국가교육회의가 전 국민 5만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결과에서도 이러한 심각한 간극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미래사회 학교의 역할에 대해 학부모들은 ‘공동체 속에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을 가장 높은 비율로 꼽았다. 학교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길러야 할 역량을 묻는 설문에서도 ‘공동체와 사회문제에 책임감을 갖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참여 역량’을 가장 높은 비율로 꼽았다. 다음 순서로 학부모들이 꼽은 것이 학생들이 가장 높은 비율로 선택한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이다.

자신의 생존과 실존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시민에게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시민들과의 관계망 속에서만 온전히 작동할 수 있는 역량임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붓다가 강조한 것처럼, 관계망 속에서만 존재자가 가능하고 따라서 그 존재자의 고정된 실체는 있을 수 없다는 연기설(緣起說)은 이 지점에서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늙음과 죽음의 원인이고 근원이며 조건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어남이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병, 죽음이 있다는 초기불교의 연기법은 중관을 거치면서 개념들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망과 그로 인한 실체 부정으로 이어지고, 대승에 이르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는 연기적 관계망이 형성되어 있다는 설로 확장된다. 사회적 소수자라는 개념은 다수자라는 개념을 전제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유동적이고, 그래서 고정된 실체가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소수자 차별의식 극복을 위한 학교교육의 출발점은 바로 그 연기적 인식 역량을 길러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근대 이후의 학교교육은 이러한 인식과는 정반대의 출발선에서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 당연한 출발점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존 로크(J. Locke)와 장 자크 루소(J. J. Rousseau)로 상징되는 서구 근대의 사상가들이 정립한 인간상을 토대로 근대 시민교육의 목적과 목표가 설정되었다는 비판은 이미 서구 교육학자들에 의해서 충분히 제기되었다. 그 대표적인 교육철학자 중 하나인 세이어 베이컨(B. Thayer-Bacon)은 로크가 당시의 교회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개인’을 기본 인간상으로 설정했고, 루소 또한 어린이들이 사회와 어른의 개입이 없을 때만 미래의 민주시민으로 자라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강조한다. 그들의 시대가 지닌 억압적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결과 인간을 ‘고립성과 이기성을 지닌 개인’으로 보는 개인주의적 사고가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데서 문제가 생겨났다는 비판이다.

인간이 자신의 고유성을 존중받고 싶어 하고 이익을 중시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만, 동시에 그 인간은 관계성을 중시하면서 이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선함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또한 신경과학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검증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인간을 ‘연기적 독존(緣起的 獨存)’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규정하고자 노력해왔다.

소수자 차별의식 극복을 위한 학교교육의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이러한 인간관의 재정립과 그 인간관에 기반한 시민교육의 장으로서의 위상 재정립이어야 한다. 그럴 수 있게 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관계적 존재이고, 다수자와 소수자의 구분 또한 원천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적 수준까지 확장하여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시민교육이 가능해진다. 이런 토대를 확고하게 마련한 이후에, 아니면 최소한 마련하고자 노력하면서 소수자 차별의식 극복을 위한 교육을 실시해야만 사상누각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불교의 연기론이 그 과학적 검증을 토대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나. 인성교육과 시민교육 중심의 학교교육 체제로의 개편

소수자 차별의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 학교가 감당해주어야 하는 역할과 위상을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다음 순서는 그럼 구체적으로 학교가 어떤 교육을 통해 그런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와 관련된 대안 모색으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다양한 형태의 구체적인 대안 모색이 가능하겠지만, 우리가 앞서 차별의식의 뿌리를 소수자와 다수자 개념이 지닌 상대성과 유동성 인식 결여와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탐욕, 문제를 인식한 이후에도 오래도록 남아 있는 습기 등 셋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이 세 요소를 극복할 수 있는 교육적 대안을 찾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 소수자 개념의 유동성과 상대성 인식 관련 과제는 이미 위에서 불교적 관점의 연기론을 학교 시민교육의 토대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요소에 주된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만약 소수자 개념이 지닌 상대성과 유동성에 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시민교육이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소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이겠지만, 실제로는 그 인식의 불완전함 또는 불명료함 등을 이유로 실제 의식이나 행동 차원에서는 눈에 띄는 변화를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 배후에는 바른 인식에 따른 행동을 저어하게 만드는 탐욕이 작동하거나, 몸에 밴 행동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습기가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주지주의적 도덕교육의 한계로도 지적되어 온 이 문제, 즉 도덕적으로 옳음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지적과도 맥이 통하는 지점이다. 소크라테스 같은 주지주의자들은 제대로 알기만 하면 행동은 자동적으로 보장된다는 입장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곧바로 그의 제자 계열에 속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의지의 박약 문제로 논박당했을 만큼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믿음과 양심, 수치심이 있는 한, 그리고 많이 배우고 열심히 정진하고 마음챙김을 확립하며 통찰지를 가지는 한 퇴보하는 법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지적 깨침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거나 지속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필요한 일곱 가지 방편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곧 믿음과 양심, 수치심이라는 세 가지 마음의 지향과 배움과 정진, 마음챙김, 통찰지의 추구라는 네 가지 수행 방법을 의미한다. 세 가지 마음의 지향이 토대를 이루면서 네 가지 수행 방법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행동의 구체적인 변화까지도 가능하다는 가르침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학교교육 또한 이러한 두 차원의 노력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어야만 소수자 차별의식의 극복이 현실 속 소수자 차별 현상의 극복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이를 학교 교실 상황을 기반으로 펼치고자 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물음에 관한 바른 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교실 상황과 그 교실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 사회 전반의 상황 등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자칫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는 대안들을 무의미하게 제안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실 상황을 특징짓는 말 중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이 ‘대학입시에 종속된 교실과 수업의 붕괴 현상’이다. 동시에 비교적 양호했던 학교의 평등성이 점차 훼손되면서 이른바 좋은 배경을 가진 아이들은 학교 폭력으로부터도 상당 부분 강하게 보호를 받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자살 등의 극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교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현실로부터 받는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현상의 하나로 분석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 정치계는 유독 혐오와 부패, 도덕적 불감증 등의 부정적인 언어의 홍수를 이루면서, 학교 시민교육의 성과를 뿌리부터 흔드는 부정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런 현실에 충분히 유념할수록 우리는 학교 시민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보다 굳건하게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마지막 보루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특히 그 중심이자 출발점은 ‘학교 교실 수업’이고, 그 수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차별의식 극복이라는 소중한 성과를 우리 학교 전반과 가정,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여 확장해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이외에 희망의 불씨를 찾기 어렵다. 우선 관련 교과들인 도덕 교과와 사회 교과 수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부각되어 있는 이른바 주지(主旨)교과인 영 · 수 · 국 중심의 시간표 편성 관행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 수준에서부터 읽고 셈하고 쓰는 주지교과를 통한 기초교육과 함께, 인성을 함양하고 시민성을 기르는 교육을 주로 담당하는 사회 교과와 도덕 교과, 예술 교과 등의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이런 전제 속에서 관련 교과의 수업 시간에 활용될 수 있는 다양한 수업 기법과 방법이 제시될 수 있어야 하고, 직전교육 등을 통해 충분한 교과 전문성을 확보한 교사들이 도덕성을 기반으로 자신 있게 관련 수업을 할 수 있는 지원체제와 문화가 확립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기준에 지속적으로 미달하는 교사들을 걸러낼 수 있는 자율적인 장치들이 동시에 마련되어야 하지만, 지금처럼 학부모들이 민원인처럼 교사를 함부로 대하는 실정법 중심의 학교 문화는 시급히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교사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 교사들보다도 먼저 우리 아이들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임을 학부모를 비롯한 모든 시민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참혹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사건들 중에는 근거가 없거나 관행적으로 이루어진 차별이 배경에 깔려 있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그렇게 본다면 사회적 소수자 차별의식을 극복하는 교육은 우리 사회문제의 핵심을 건드리는 중요한 과업인 셈이다.

 

5. 맺음말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얽혀 있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와 다른 사회, 지구촌 모든 것들이 얽혀 있고, 그 얽힘은 자연계의 모든 존재자로 확장된다는 것이 연기법이 말하는 기본 진리이다. 이 진리는 ‘와서 보라’는 붓다의 요청을 바탕으로, 불교라는 특정 종교와 사상의 한계를 넘어서 현대과학의 지속적인 검증으로 그 진리성을 인정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는 단순히 숫자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규범적 의미를 지니는 개념이고, 그 규범성은 소수자 차별을 극복해야 한다는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과제로 연결 짓는 토대를 이룬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가 상대성과 유동성을 지닌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이 글을 통해, 차별의식의 극복을 위해서는 먼저 그 상대성과 유동성을 인식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끌고자 했다. 이 과제를 실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주체는 가정과 학교, 사회 등이지만, 사회와 가정이 교육적 기능을 현저히 잃어가는 상황임을 감안하여 주로 학교교육의 역할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도 이르게 되었다.

물론 과연 우리 학교가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요인이 더 많이 발견되고, 그 요인들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답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과제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와 미래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가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방향으로 지원하고 격려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사회 전반의 불필요한 경쟁을 적극적으로 걷어내면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때로 경쟁의 대상이 되더라도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공감과 협력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또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킬 수 있는 곳으로 학교를 바꿔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남녀와 신분에 따른 차별이 당연시되었던 시절에 모든 사람을 받아들여 승가공동체를 꾸렸던 붓다의 실천적 지혜는 미래 학교교육의 방향 모색은 물론, 구체적인 수업의 장에서도 호출해낼 수 있는 소중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붓다의 그 지혜를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이다. ■

 

박병기 bkpak15@knue.ac.kr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도덕교육학을 전공했고,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철학과 계율을 공부했다.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한국교원대 대학원장 역임.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장으로서 2015 초 · 중 · 고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 연구를 총괄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우리 시민교육의 새로운 좌표》 등이 있다.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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