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지구촌은 말 그대로 화택(火宅)이다.

기후 온난화로 인해서 ‘불타는 지구’가 되고 있다는 걱정부터 여러 나라에서의 지진과 전쟁의 화염은 ‘불난 집’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백 명의 젊은이가 즐거운 마음으로 놀러 나갔다가 압사당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또 한편에서는 폭우와 화재로 거처를 잃은 이웃들의 이야기가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런데다 밤낮없이 으르렁대는 정치권의 싸움질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다. 세간사란 본래 변화무쌍하고 괴로운 법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매스컴이 전하는 내용들에 너무 충격적인 것들이 많아서 차라리 눈과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다.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대형 사건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다 보니, 사람들은 그보다 규모가 작다 싶은 일에 대해서는 둔감해지는 듯하다. 예컨대 코로나 때문에 온 나라가 수년간 고생을 겪어 왔으니 사회 · 경제적으로 곤궁한 계층이 더욱 늘어났을 것이 분명한데, 그 이웃들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평소에 우리가 좀 더 가까이 귀 기울여 듣고 더 세밀히 살펴봐야 할 일들이 많은데 소홀히 하는 것이다. 흔히 ‘소수자’로 규정되는 이웃들의 문제도 엄연히 그중 하나인데, 다음의 자료들은 이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짐작게 한다.

통계청의 《이민자 체류 실태 및 고용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5월 현재 국내에 상주하는 15세 이상 외국인은 130만 2천 명이고, 최근 5년 이내 국내에 상주하는 귀화 허가자는 5만 2천 명이다. 상주 외국인의 국적은 한국계 중국(36.8%), 기타 아시아(30.1%), 베트남(13%), 중국(10%) 등이고, 귀화가 허가된 사람들의 이전 국적은 주로 베트남(40.8%), 한국계 중국(33.0%) 등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차별 대우를 받은 경험이 있는 외국인은 19.7%(귀화 허가자 중 20.5%)로서 외국인 다섯 명 중 한 명꼴인데, 차별을 받은 주된 이유는 ‘출신 국가’ 때문이었다.

난민 문제도 심각하다. 난민이란 인종 · 종교 · 국적 · 특정 사회집단 소속 · 정치적 의견 등을 이유로 박해받았거나 받을 가능성이 커서 본국을 떠난 사람들이다. 난민인권센터 자료(https://nancen.org)에 따르면, 2022년에 총 11,539건의 난민 신청이 있었으나, 그중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175명으로 난민 인정률은 약 2%에 불과하다. 1994년부터 2022년까지 누적된 난민 신청은 총 84,922건이고, 2022년 12월 31일 현재 난민 인정자는 총 1,331명으로 난민 인정률은 약 1.6%이다(난민 인정 취소자 제외). 2022년 한 해 동안 인도적 체류(1년마다 체류자격을 심사받고 임시 거주하되 취업은 가능) 허가를 받은 사람은 67명이고, 2022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누적 인도적 체류자 수는 총 2,480명이다.

성소수자의 인권도 관심의 사각지대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나라 국회는 13년 동안 8번이나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법안이 통과되지 못했는데, 특히 보수적 개신교인들에 의한 반대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2019년도 미국의 퓨리서치 센터(https://www.pewresearch.org)에 따르면, 조사 대상 34개국의 중앙치(median)가 ‘동성애 수용’ 52%, ‘수용 불가’ 38%로 나타났다. 당시 조사에서 한국은 ‘동성애 수용’ 44%, ‘수용 불가’ 53%로 나타났는데, 특기할 점은 세대 · 남녀 · 정치적 지향에 따라서 수용도의 격차가 1위인 나라로 분석되었다. 청년과 노년, 남성과 여성 등 집단 간 인식의 차이가 전 세계에서 1위라는 말은, 해당 사안으로 인해서 우리 사회 내부의 충돌이 크게 예상된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시청각을 압도하는 대형 사건들 속에서 ‘호루라기’ 역할을 하는 내부제보자(whistle blower)의 어려움은 짐짓 ‘남의 일’로 간주되기 쉽다. 정부나 기업, 기타 조직들에서 벌어지는 부조리, 부패 등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므로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해당 조직을 혁신하고자 그 사실을 폭로한다. 드러내고 연대하기도 곤란한 내부제보자들이 본인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헌신해온 덕분에 우리 사회는 이만큼이라도 질적 개선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예컨대 공공부문을 보면,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매년 국가별 공공 정치 부문에서 부패 수준을 평가하는 국가 청렴도(Corruption Perceptions Index)를 조사했는데, 2021년에 우리나라는 100점 만점에 62점을 기록, 180개국 중 32위를 차지했다.

또 미국 트레이스사의 기업경영 환경 청렴성 평가(Bribery Risk Matrix)에서는 194개국 중 21위로 기록되었다(https://www.korea.kr). 과거보다 조금씩 나아진 것이라고 하지만, 한국의 경제력 · 학력에 부응할 고품질 국가사회를 위해서는 각처의 내부제보자를 더욱 보호하고 격려해야 한다.

이 밖에도 일시적 실수로 범죄자가 된 수형자들 · 도시빈민 · 독거노인 · 성 산업 종사자 등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대상과 분야는 다양하다. 모든 사람을 이끌어 해탈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이상을 내건 불교로서는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이와 같은 현실불교의 실천적 과제에 대한 접근방법으로는, 한두 사람의 아이디어보다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의 경험과 의견을 종합하고 그런 토대 위에서 최선의 방향을 정립해야 한다. 그래서 그동안 축적된 자료를 심층적으로 학습(Deep Learning)하고 이를 새롭게 생성-변환하는 데 능숙하다는, 요즘 주목받는 챗지피티(chatGPT,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에게 미리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답을 주었다.

 

불교는 인간의 고통을 해소하고 평화와 인류사회의 번영을 추구하는 종교로서, 인간의 삶을 존중하며 모든 존재에 대하여 보살피는 마음을 가진다. 따라서 불교계는 소수자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첫째, 불교계가 대화와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소수자들이 겪는 인권 침해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서로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간다. 둘째, 불교계가 변호사나 법률 전문가와 협력하여, 차별당한 소수자들이 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셋째, 불교계가 정부와 협력하여, 소수자의 인권 보장을 위한 법률과 제도의 개선을 제안하고 추진할 시스템을 구축한다. 넷째, 불교계가 인권 단체들과 협력하여, 소수자 인권 보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인다. 다섯째, 불교계가 직접 이주민 · 난민에게 생활비나 숙소 등을 제공하고 성소수자에게는 상담과 지원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실질적 지원을 제공한다.

예상대로, 무수(無數)한 사람들의 무량(無量)한 정보와 자취를 종합해서 컴퓨팅한 결과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엮어내는 불교 이야기가 제법 그럴듯하다. 그러나 아무리 생성적인 변환(generative transformer)이라고 해도, 아직은 기계적 시스템에서 사람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혜가 나온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서든 인간의 지혜로 얻은 결론이든 간에,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질곡의 현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 활동이 다 그렇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방대한 전적류(典籍類)도 마치 컴퓨터에 내장된 프로그램처럼 작동을 지시(on)해야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데이터뱅크(data-bank)일 뿐이다. 불교 전적을 많이 학습하고 그 의미를 잘 기억하는 불자일지라도, 본인이 알고 있는 불교를 실행하는 버튼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실 우리는 몰라서 못 하는 일들보다는 알고도 하지 않은 일들이 훨씬 더 많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정보를 찾는 데에 능력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발휘해서 하나씩 실천해가는 일이다. 부처님오신날이 며칠 전이었다. 부처님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신 바 있다. 이번 호 ‘소수자 인권’ 특집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2023년 6월

이혜숙(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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