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이후, 외래종교의 사상체계로써 본토의 사상들과 융합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따라 불교는 전래 초기에서부터 본토의 사상인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와의 사상적 융합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수대(隋代)에 이르러 유불도 3교가 정립(鼎立)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인도와 서역의 불교와는 다른 중국불교의 독특한 사상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 · 도 양가에서도 심각한 사상적 변용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를 모두 논할 수는 없지만, 유학과 불교의 관계에 한정하여 말하면, 불교는 유학의 인성론(人性論)과 심성론(心性論)의 영향으로 ‘불성론(佛性論)’이 발전했으며, 후대에 유학은 불교의 발전된 ‘불성론’을 받아들여 유학의 심성론을 재구성하게 되었다.

유가는 본래 최고의 상위개념으로 ‘천(天)’을 설정하여 ‘인(人)’과의 관계를 논하는데, 이를 ‘천인지제(天人之際)’라고 하여 집중적으로 탐구하였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성인(聖人)’으로 설정하여 어떻게 인간이 그에 도달할 것인가를 논구하였다. 그런데 《중용(中庸)》에서는 “성(誠)은 하늘의 도[天之道]이고, ‘성’에 도달하려는 것은 인간의 도[人之道]이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誠)’은 성인(聖人)의 본성의 근원인 도덕과 규범을 의미하며, 바로 ‘천도(天道)’를 뜻한다고 하겠으며, 인간은 ‘천도’인 ‘성’에 다가가려고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중용》에서 “성으로부터 밝아짐[自誠明]을 일러 성(性)이라 하고, 밝음으로부터 성에 도달함[自明誠]을 가르침[敎]이라고 한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는 인간의 “‘성’에 도달하려는 것[誠之]”은 ‘자명성(自明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천도’에 도달하는 것이니, 이로부터 ‘천인합일’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중용》은 유가에서 제창하는 ‘천인합일’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불교에서는 이 세간의 발생과 소멸에 대하여 잡아함경(雜阿含經) 권10에서는 “세간의 집기(集起)를 여실하게 정관(正觀)한다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는 발생하지 않으며, 세간의 환멸(還滅)을 여실하게 정관한다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가전연(迦旃延)이여! 여래는 이변(二邊)을 떠난 중도(中道)에서 설한다.”라고 하는 유명한 ‘중도’의 설법이 있다. 이러한 ‘중도’는 반야부(般若部)에 이르러서는 셀 수 없이 언급되고 있으며, 나아가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모든 무아(無我)를 보고 아(我)를 보지 못하면 ‘중도’가 아니다. ‘중도’는 불성(佛性)이라 한다.”라고 설하여 ‘중도’를 ‘불성’과 연계시키고 있다.

이처럼 유학에서 가장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천인합일’을 ‘중용’과 연계시켜서 논하고 있고, 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불’의 근거인 ‘불성’을 ‘중도’와 연계하여 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중국불교에서는 필연적으로 유학의 ‘중용’과 불교의 ‘중도’는 만날 수밖에 없는 숙명이었다고 하겠다. 그에 따라 이 글에서는 유학에서 사서(四書)로 중시되는 《중용》의 서지사항과 그 핵심 사상을 살펴보고, 중국불교에서 《중용》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중용》의 서지사항과 사상적 핵심

《중용》은 이학(理學)의 근거가 되는 핵심 경전으로 유학의 철학 개론서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중용》은 본래 《예기(禮記)》 49편 가운데 제31편에 수록되었던 것이며, 유학의 철학적 사유를 논하고 있어 일찍부터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정이(程頤, 1033~1107)가 본래 33장이었던 《예기》의 〈중용편(中庸編)〉을 37장으로 나누어 정리하였으나 주희(朱熹, 1130~1200)가 다시 《예기》에서 《중용》을 발췌하여 장(章)과 구(句)로 나누어 새롭게 33장으로 편집하여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완성하고 독립된 경전으로 분리한 것이다. 그리고 《중용》을 《대학(大學)》 《논어(論語)》《맹자(孟子)》와 함께 ‘사서(四書)’로 규정하고, 유교의 근본 경전으로 중시하였다. 

《중용》의 작자는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 BC 483?~BC 402?)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백어(伯魚: 공자의 아들)가 급(伋)을 낳으니 그의 자(字)는 자사(子思)이다. 자사의 나이 62세에 송나라에서 곤란을 겪으면서 《중용》을 지었다.”라고 했다. 그리고 주희는 《중용장구》의 〈서(序)〉에서 “자사가 도학(道學)의 전통이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지은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청대(淸代)에 이르러 《중용》이 자사의 저작이라는 설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최근에는 《중용》은 자사에 의해 기초가 이루어졌고, 그의 저본(底本)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유가 학자들의 보충과 해설이 더해져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주희는 《중용》을 정리하여 《중용장구》를 완성하고, 그 구성 체재와 내용을 다음과 같이 6개의 큰 절(節)로 나누었다. 1절은 수장(首章)으로 전편(全篇)의 요체가 되는 중화(中和)를 말하였고, 2절은 2장에서 11장으로 ‘수장’의 뜻을 해설하며 중용(中庸)을 말하여 중용의 도를 이루는 치중화(致中和)하는 방법을 논하였고, 3절은 12장에서 19장으로 중용의 원리와 작용에 대한 비(費)와 은(隱)을 말하였고, 4절은 20장에서 26장으로 수양을 통해 천성(天性)을 터득하는 원리와 방법에 대한 성(誠)을 말하였고, 5절은 27장에서 32장으로 지성(至誠)을 체득한 성인의 도(道) · 덕(德) · 교화(敎化)에 대한 대덕(大德)과 소덕(小德)을 말하였고, 6절은 33장으로 다시 ‘수장’의 뜻을 거듭 밝히고 있다.

이처럼 주희는 《중용》의 형식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33장으로 정리하고, 전반부는 주로 중용(中庸)과 중화(中和)를 논하고, 후반부는 성(誠)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중용》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녀야 할 자세와 태도를 밝힌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역대 주석서로는 송대 석돈(石墩)이 편집하고 주자가 산정한 《중용집략(中庸輯略)》, 주자가 편집하고 주석한 《중용장구》와 《중용혹문(中庸或問)》, 명대 양주진(楊朱陳)의 《중용사초(中庸私抄)》, 관지도(管志道)의 《중용정석(中庸訂釋)》, 청대 대진(戴震)의 《중용보주(中庸補注)》, 강유위(康有爲)의 《중용주(中庸注)》 등이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성리학이 전래된 이후, 《중용》은 학자들에게 유교의 주요 경전으로 주목받아 조선조에 이르러 이언적(李彦迪)은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를 찬술하였고, 선조(宣祖)의 명으로 《중용언해(中庸諺解)》가 간행되었으며, 이이(李珥)의 언해본도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중용》의 사상은 어떠한가? 《중용》의 제1장은 다음과 같다.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름을 도(道)라 이르며,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바에도 계신(戒愼)하며, 그 들리지 않는 바에도 공구(恐懼)하는 것이다. 숨겨진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작은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혼자 있음을 삼가는 것[愼獨]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 ‘중’이란 천하의 대본(大本)이요, ‘화’란 천하의 달도(達道)이다.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致中和] 천지(天地)가 제 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라게 된다.

이 구절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희가 《중용장구》 전편의 요체가 되는 ‘중화(中和)’를 밝힌 제1절의 ‘수장(首章)’이다. 이로부터 ‘천명’은 ‘성(性)’으로 설정하여 그를 추구하는 것이 ‘도’라고 규정하고 있고, 그에 도달하는 수양의 방법을 ‘신독(愼獨)’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실현의 본질에서는 ‘중’을 제시하고, 그로부터 나타나는 것을 ‘화’라고 규정하여 ‘중화(中和)’를 논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은 “아직 발하지 않은 것”으로 설정하고, ‘화’는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니, 어떤 측면에서 중국불교에서 논하는 체용(體用)의 관계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상 후대에 이학자(理學者)들이 ‘미발지중(未發之中)’과 ‘이발지중(已發之中)’에 대한 수없이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바로 《중용》의 이 구절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에 이어서 《중용》 제2장에서는 ‘중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중니(仲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대로 한다. 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이면서 때에 맞게[時中] 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忌憚)이 없기 때문이다.”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가 알았으니,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가 밝아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가 알았으니, 어진 자는 지나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군자와 소인의 차별은 바로 ‘중용’을 실행하는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용’의 하나의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데, 바로 ‘때에 맞음[時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중(時中)’은 앞에서 언급한 ‘중화’와 함께 ‘중용’의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공자가 말한 “도가 행해지지 못하고” “도가 밝아지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지나치거나[過之]” “미치지 못함[不及]”에 있는 것이니, 이로부터 역시 ‘중용’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중용》에서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순(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가깝고 가벼운 말도 살피기 좋아하며, 악함은 숨기고 선함을 드러내었다. 그 양단(兩端)을 잡아 그 중간[中]을 백성들에게 썼으니, 이것으로 순임금이 된 까닭이다.”라고 하는 구절로부터 ‘중’은 양극단을 배제하고 그 중간을 택하는 의미도 명확하게 도출할 수 있다.

이렇게 ‘중용’의 의미를 밝힌 후에, 《중용》 7장에서는 “사람들은 모두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중용’을 택하여 한 달 동안도 지켜내지 못한다.”라고 하여 ‘중용’을 행하기가 쉽지 않음을 논하고 있다. 나아가 11장에서는 “군자는 ‘중용’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숨어 있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니, 오직 성자(聖者)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라고 ‘중용’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만이 능히 행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중용》의 20장에는 “성(誠)이란 하늘의 도이고, ‘성’에 도달하려는 것은 인간의 도이다. ‘성’을 이룬 사람은 힘쓰지 않아도 알맞게 되며,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어 차분히 도에 알맞음[中道]이니, 성인(聖人)이다.”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제1장에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름을 도(道)라 이른다.”라고 한 것과 다르게 ‘성(誠)’을 ‘천도’로 논하고 있고, 그에 도달하려는 것을 ‘인간의 도’라고 조금 다르게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중용’의 논리가 스며들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더욱이 ‘성’에 도달한 사람은 ‘도에 알맞음[中道]’ ‘성인’이라고 칭하는 것에서 ‘중용’을 실현한 상태를 ‘성(誠)’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를 22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誠)이라야 그 성(性)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성(性)을 다할 수 있으면, 바로 사람의 ‘성’을 다할 수 있고, 사람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곧 만물의 ‘성’을 다할 수 있고, 만물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곧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게 될 것이고,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게 되면, 곧 천지와 함께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로부터 ‘지극한 성(誠)’을 통하여 유학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경지, 즉 ‘천인합일’에 도달할 수 있음을 여실하게 엿볼 수 있다.

《중용》은 ‘천명’은 ‘성(性)’으로 설정하여 그를 추구하는 것이 ‘도’라고 규정하고, 그 실현의 본질에서는 ‘중’을 제시하고, 그로부터 나타나는 것을 ‘화’라고 규정하여 ‘중화’를 논하고 있다. 나아가 ‘중용’을 실행하는가에 따라 군자와 소인의 차별이 나타나는데, 군자는 ‘때에 맞음[時中]’을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고, 세상에 ‘도’가 행해져 밝아지지 못하는 까닭은 ‘지나치거나[過之]’ ‘미치지 못함[不及]’에 있음이니, 이를 ‘중용’으로서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중용’을 실현한 상태를 ‘성(誠)’으로 설정하고, 그 ‘지극한 성’을 통하여 천지의 화육을 도와 ‘천지와 함께 참여’할 수 있으니, 유학의 궁극적인 경지인 ‘천인합일’에 도달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대체적인 내용이 바로 《중용》이 제시하는 핵심적인 사상이라 하겠다.

3. 불교의 《중용》 이해

불교에서 ‘중도’를 중심으로 많은 교의가 전개된 바와 같이 중국에 전래한 이후 ‘중용’의 사유 양식은 중국 불교학의 전개에 여러 측면, 특히 ‘불성론’의 전개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중국불교의 사상사에서 본격적으로 《중용》을 불교학과 융합한 이는 바로 양숙(梁肅, 753~793)이다.

양숙은 12세에 천태종의 중흥조로 잘 알려진 형계담연(荊溪湛然, 711~782)을 스승으로 삼아 대사가 입적할 때까지 수학하였고, 또한 18세에 당시 유학자로 이름 높은 독고급(獨孤及, 725~777)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러한 불교와 유학의 인연으로 그가 찬술한 《산정지관(刪定止觀)》 6권과 그 지침서인 《지관통례(止觀統例)》에는 유학의 경서, 특히 《중용》의 사상과 융합한 흔적이 여실하게 보이고, 이러한 측면에서 당대(唐代) 유학자로서 ‘유불융합’을 선도한 이로 불교사에 유명하다. 특히 양숙은 한유(韓愈, 768~824), 유종원(柳宗元, 773~819), 유우석(劉禹錫, 772~842), 이고(李翶, 774~836) 등을 이끌어 ‘고문(古文) 운동’을 주도했는데, 철저한 배불주의자인 한유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양숙의 영향으로 ‘유불융합’을 제창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불조통기》 권41에는 “한림학사 양숙은 형계선사에게 천태를 배워 심요(心要)를 깊이 얻었다.”라고 하고, 《송고승전》의 형계담연 전기에는 “당 왕조에 그(형계담연)의 도를 통달하여 얻은 자는 오직 양숙 한림학사뿐이었다.”라고 한 바와 같이 재가지만 양숙을 형계담연의 사법 제자로 인정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송고승전》에서는 “《시경(詩經)》에 ‘까치가 둥지를 지으면 비둘기가 들어와 함께 산다.’라는 말은 양공(梁公)이 불교의 이굴(理屈)에 깊이 들어왔음을 이르는 말이 아니겠는가!”라고 서술한 구절은 바로 유학자가 불교의 이론을 깊게 이해하고, 또한 불교와 유학을 잘 조화시켰다는 평가라 하겠다.

양숙의 유불융합 사상은 그의 모든 저술에서 보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지관통례》의 다음과 같은 시작 부분이다. 

지관(止觀)이란 무엇을 함인가? 만법의 이치를 이끌어 실제(實際)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실제란 무엇인가? 성품의 근본이다. 물(物)이 회복하지 못하는 까닭은 혼미함과 움직임이 부리기 때문에 그렇다. ‘혼미함을 비춤[照昏]’을 ‘밝힘[明]’이라고 하고, ‘움직임을 멈추게 함[駐動]’을 ‘고요함[靜]’이라고 한다. ‘명’과 ‘정’은 지관의 체(體)이다. 인(因)에 있어서 ‘지관’이라고 이르고, 과(果)에 있어서 지정(智定)이라고 이른다. ‘인’을 행(行)이라고 이르며, ‘과’를 성(成)이라고 이른다. ‘행’이란 이를 행함이요, ‘성’이란 이를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성인은 미혹함이 가득하여 뜻을 상하게 하고, 움직임이 가득하여 방향을 잃음을 보아 그치게 하고[止], 그를 관(觀)하게 함이다. ‘고요함[靜]’으로 그를 ‘밝힘[明]’이니, 그 움직임을 능히 고요하게 하고[靜], 고요함은 능히 밝힘[明]이다.

이로부터 양숙의 ‘지관’에 대한 이해는 바로 ‘성(性)’을 회복하는 데 있음을 강조함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논리는 본질적인 ‘성’은 ‘고요함[靜]’과 ‘밝힘[明]’인데, 사람들이 그를 어그러지게 하는 것은 바로 ‘혼미함[昏]’과 ‘움직임을 부림[動使]’이라는 것이고, 이에 대한 대치가 바로 ‘지관’이며, 그를 통하여 ‘고요함’과 ‘밝힘’을 회복할 수 있다는 ‘복성명정(復性明靜)’의 주장이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중용》의 사상과 방법론을 포괄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상 사용하는 문자와 개념이 조금 달라서 그렇지 그 전체적인 사유 양식에서는 상당히 유사함을 엿볼 수 있다. 《중용》에서는 ‘천명(天命)’을 ‘성(性)’으로 설정하고, 그 성을 따름[率性]이 바로 ‘도(道)’라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도를 따르게 하는 것이 바로 교(敎)라는 것이다. 또한 성인(聖人)은 바로 ‘도에 알맞음[中道]’이니, 이러한 ‘중도’에 도달하는 방법은 이른바 ‘성을 따라 행함[率性而行]’을 ‘자성명(自誠明)’이고, ‘도를 닦고 교화함[修道而敎]’을 ‘자명성(自明性)’이라고 하여 두 측면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궁극적인 경지는 바로 ‘지극한 성[至誠]’에 이르러야 완전한 ‘복성(復性)’을 이룬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양숙의 ‘지관이란 실제를 회복함’은 바로 ‘자명성(自明性)’과 ‘지성(至誠)’을 통하여 ‘천명(天命)’의 ‘성(性)’에 도달하려는 《중용》을 원용하여 천태학의 ‘지관’과 융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당대(唐代) 양숙 이후 불교에서 《중용》을 직접적으로 논하고 있는 이는 송대(宋代) 명교대사(明敎大師) 설숭(契嵩, 1007~1072)을 들 수 있다.

송대는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모든 권력을 중앙 황권(皇權)에 집중시키기 위하여 ‘중유(重儒) 정책’을 채택하였고, 모든 관리를 유학의 경전을 통한 과거로 선발하였기 때문에 유학에 능통한 사대부들이 권력을 차지하였던 시기이다. 그에 따라 송대 초기에는 수많은 유학자가 대표적인 배불론자인 한유(韓愈)를 추종하여 불교를 비판하였고, 유학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불교를 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운문종(雲門宗)의 설숭은 불교를 비판한다는 소문을 들으면 직접 찾아가 설득하거나 편지를 보내어 설득하다가 결국은 저술을 통해서 불교를 지키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으로 수많은 저술을 찬술하였다. 사실상 ‘명교대사’라는 칭호는 설숭이 자신의 저술들을 들고 수도인 경사(京師: 開封)로 올라가 중앙의 고위관료를 설득하였기 때문에 당시 황제인 인종(仁宗)이 감동하여 대장경(大藏經)에 그의 책을 입장(入藏)시키면서 내린 호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폐불’이 중지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승상인 한기(韓琦)로부터 구양수(歐陽修), 부필(富弼), 문언박(文彦博) 등의 유학자들이 대거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설숭의 현존하는 저술들은 《전법정종기(傳法正宗記)》 9권, 《전법정종정조도(傳法正宗定祖圖)》 1권, 《전법정종론(傳法正宗論)》 2권과 그의 사후에 편집된 《심진문집(鐔津文集)》 19권이 대장경에 실려 있다. 그러나 《심진문집》 권19에 실린 석회오(釋懷悟)의 〈서(序)〉에 따르면, 설숭이 찬술한 글이 모두 60만 자(字)가 넘지만, 현존하는 것은 단지 30만 자 정도밖에 없음을 탄식하고 있다. 여기에서 설숭의 《심진문집》을 언급하는 까닭은 권1에서 권4는 《보교편(輔教篇)》 상중하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보교편》 하권에 〈중용해(中庸解)〉 5편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숭의 〈중용해〉에 나타난 불교의 《중용》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설숭은 그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혹 어떤 이가 묻는다. “《중용》과 《예기》는 아마도 다른 듯합니다. 《예기》는 서열의 등급 차이로 제도를 규율한 것이고, 《중용》은 성명(性命)에 관한 바른 설일 뿐입니다. 여러 예경(禮經)과 또한 다르지 않습니까?” 늙은이가 따라서 분별하여 말한다. “공자가 어찌 저 《중용》을 모르겠는가? 《중용》이란 대체로 예(禮)의 극진함이요, 인(仁), 의(義), 지(智)의 근원이다. 예(禮), 악(樂), 형(刑), 정(政), 인(仁), 의(義), 지(智), 신(信) 그 여덟 가지는 《중용》에서 하나가 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용》은 본래 《예기》 제31편에 수록되었던 것을 별도로 독립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기》는 전문적으로 ‘예’를 논한 것이고, 《중용》은 ‘성명’의 철리(哲理)를 논한 것으로 차별이 있다는 인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설숭이 〈중용해〉의 시작에 이를 논한 것은 당연히 자신이 《중용》의 근원과 유학에 대하여 상당히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라 하겠다. 이에 이어서 설숭은 다음과 같이 논한다.

‘중용’이란 사람의 도(道)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장차 할 바가 있거나, 갈 곳이 있다면, 반드시 ‘중용’을 닦은 연후에 실행하여야 한다. 음식은 끊을 수 있으며, 부귀와 숭고한 권세도 양보할 수 있지만, ‘중용’은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 마음을 성(誠)하게 하고, 그 몸을 닦으며, 그 집안을 바르게 하고, 그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에 덕(德)을 밝히는 것은 ‘중용’을 버리고 어찌 이루겠는가? 나라가 망하고 자신을 망침은 반드시 ‘중용’을 잊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중용’을 ‘사람의 도’를 세운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나아가 《대학(大學)》에서 강조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중용’과 연계하여 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이어서 각 편에 중요한 문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대저 ‘중용’이란 하지 않음[不為]이요, 그릇이 되지 않음[不器]이니, 해와 달보다 밝아서 볼 수 없으며, 귀신(鬼神)보다 아득하여 헤아릴 수 없도다. 오직 군자(君子)여야만 능히 ‘중용’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

중용은 도(道)이다. 도라는 것은 만물에서 나오고, 만물에 들어 있는 까닭에 ‘도’로써 중(中)으로 삼는다.

‘중용’의 도는 고요함[靜]에 천지와 그 도리를 함께 하며, 움직임[動]에 사시(四時)와 그 운행을 합하니,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중용’으로 예(禮)를 삼았으니, 바로 군신(君臣)의 위(位)요, 부자(父子)의 친(親)이며, 남녀(男女)의 변(辨)이다.

‘중용’은 고요하고 씀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따르면 바로 변하고, 변하면 바로 통한다. 절도는 그 변함을 바로잡는 것이고, 배움은 그 통함을 실행하는 것이다. 변하되 의를 따르므로 군자가 되고, 통하되 가르침을 잃으므로 소인이 된다. 그러므로 ‘중용’이란 배움을 바로 함에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배울 것인가? 예를 배우고, 악(樂)을 배운다고 말한다. 예와 악을 닦으면 ‘중용’에 이르는 것이다.

이로부터 설숭은 《중용》의 문구를 자신의 이해로 재구성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중용’을 유학에서 강조하는 ‘예악’과 연계시키고 있음은 설숭의 독특한 관점이며, 나아가 〈중용해〉 첫머리에 “예, 악, 형, 정, 인, 의, 지, 신 그 여덟 가지는 《중용》에서 하나가 된다.”라는 제시와 호응하는 결론이라고 하겠으며, 이러한 논술을 통하여 “나는 ‘중용’이 지극함을 아니, 천하의 지극한 도이다.”라고 《중용》을 극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송대에 설숭 이외에 《중용》을 지극히 중시한 이는 바로 고산지원(孤山智圓, 976~1022)이다. 지원은 자호(自號)를 ‘중용자(中庸子)’라고 할 정도로 《중용》을 중시하였는데, 그가 찬술한 《한거편(閑居編)》 51권 가운데 권19에 〈중용자전(中庸子傳)〉 상중하 3권을 싣고 있다. 여기에서 무엇 때문에 불교의 승려가 유가의 ‘중용’을 자호로 사용하는가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유교와 불교는 말은 다르지만, 이치는 일관되는 것이다. 백성을 교화하지 않음이 없으며, 착함을 권하고 악함을 멀리함이다. 유교는 몸을 단정히 하는 가르침인 까닭에 외전(外典)이라 한다.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가르침인 까닭에 내전(內典)이라 한다. 몸과 마음이기에 바로 안과 밖의 다름이다. 중생이 어찌 몸과 마음 벗어나겠는가? 두 가르침이 아니면 어찌 교화하겠는가? 희(嘻)라! 유교와 불교는 함께 겉과 속을 이루고 있도다!

이로부터 지원이 불교와 유교를 모두 긍정하고 있지만, 유교는 “몸을 단정히 하는 가르침인 까닭에 외전”이고,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가르침인 까닭에 내전”이라는 차별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차별이 오히려 서로에게 도움을 주어 “함께 겉과 속을 이루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원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며, 가정이 평안할 수 없으며, 몸이 편안할 수 없음을 어찌 알겠는가? 나라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가정이 평안하지 못하고, 몸이 편안하지 못하면 석가의 도는 무엇을 말미암아 행해질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유교로써 몸을 닦고, 석가의 가르침으로써 마음을 다스려, 행동마다 간절히 본받아 감히 게으름 없이 하여, 오히려 도(道)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어찌 감히 버리겠는가! 오호라! 유교를 좋아하고 불교를 싫어하고, 불교를 귀하게 여기고 유교를 천하게 여긴다면, 어찌 ‘중용’에 머물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도 유교는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의 공능이 있고, 불교는 ‘마음을 다스림’의 공능이 있어 ‘중용’의 입장에서 이 둘을 모두 닦아야 함을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원의 주장은 오히려 설숭의 ‘유불융합’ 제창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지원의 출생 연도가 31년 빠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불교에서 《중용》에 대한 이해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당대에 양숙은 《지관통례》에서 천태학의 ‘지관’을 《중용》의 사유 양식과 융합해서 논했다고 한다면, 송대의 설숭과 지원은 직접 《중용》을 이끌어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송대의 ‘중유정책’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상 송대 이후 원, 명, 청은 모두 유학을 중시하여 ‘억불정책’을 채택했으며, 특히 1905년 공식적으로 과거를 폐지할 때까지 과거의 주요 과목은 모두 이학(理學)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경전이었으므로 불교는 생존을 위해서 ‘유불융합’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송대 이후에 불교에서 《중용》을 비롯한 유교의 경전을 인용하여 논하는 경우와 직접 유교의 경전을 불교와 융합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대체적 현상이었다고 하겠다. 《중용》을 예로 들자면, 명대의 유명한 고승인 감산덕청(憨山德淸)과 우익지욱(蕅益智旭)은 모두 《중용직지(中庸直指)》를 찬술하고 있는 바와 같다.

 

4. 나가는 말

이상으로 간략하게 《중용》의 서지사항과 그 핵심적인 사상, 그리고 불교에서 《중용》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았다. 사실상 머리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중용’과 불교의 ‘중도불성’은 상당히 소통될 수 있는 바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는 심층적인 사유 양식으로 행간에 스며 있어 그를 논증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에 따라 글쓰기의 방향을 바꾸어 표면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부분으로 한정하였다. 또 지면의 한계로 인하여 당대 양숙의 《지관통례》와 송대 설숭의 〈중용해〉, 그리고 중용자 지원의 〈중용자전〉의 일부만을 논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한 내용 이외에 중국불교에서 《중용》과 관련된 논술들은 이루 제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존재한다. 다만 이 글에서는 필자가 접근할 수 있는 부분만을 한정적으로 논했음을 밝히며 글을 마치기로 하겠다. ■

 

류화송 rhsnanjing@daum.net 

충남대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가차문자연구〉로 석사학위를, 중국 남경대학 중문과에서 《朱熹詩集傳注釋詩通假字硏究》(中文)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서로 《조선불교통사》 1~8, 《불교와 유학》 《도해 금강경》 《도해 운명을 바꾸는 법》 《철학자의 불교공부 노트》 등의 공동 번역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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