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 연구》로 2022 불교평론 뇌허불교학술상을 수상한 필자가 수상 연설을 위해 집필한 원고이다(시상식 2022년 12월 22일, 불교평론 세미나실).

 

1.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 연구》의 구성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 연구》는 조선시대 지배층에서 발원한 불상을 연구한 것이다. 조선시대는 억불숭유로 불교의 침체기라는 인식이 강하고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와는 다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불교는 고려를 계승하면서도 독특한 조선불교의 성격을 갖고 있다. 억불숭유 정책을 표방한 조선시대이지만 조선 전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왕실에서는 끊임없이 사찰의 불사에 참여하였다. 그 가운데 본 연구는 조성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는 불상의 조성 · 중수 등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왕실발원 불상의 불사 주체 범주에는 국왕 · 왕비 · 세자 · 대군 · 왕자 · 공주 · 옹주 · 부마 등 왕실의 인물뿐만 아니라 종친, 왕실과 관련된 상궁 등의 시주도 모두 포함시켰다. 즉, 왕실의 안녕이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만든 것 등 왕실 인물과 관련된 불상 가운데 기록이 있는 불상 위주로 다루었다.

조선시대 왕실 인물이 불상을 조성한 목적은 억불숭유 정책의 이면을 보여 준다. 즉, 왕실 인물들은 불교를 통해 생로병사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조선 초부터 말까지 불상을 조성했던 것이다. 왕실 인물의 생전 안녕과 사후 극락왕생은 그들이 불상 조성을 주도하는 이유였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복장 기록이 있는 불상 가운데 왕실과 관련된 존상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본문은 크게 제1부 총론과 제2부 각론으로 구성했다. 제1부 총론은 조선시대 왕실 인물이 발원한 불상을 조선 전반기와 조선 후반기로 나눈 후, 조선 후반기는 다시 제1기와 제2기로 세분해 살펴보았다.

제2부는 필자가 조사한 불상의 복장 유물을 분석해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으로 구성했다. 총 9편의 논문 가운데 제2장 상원사 제석천상, 제4장 완주 송광사 삼세불상, 제9장 화계사 불교미술은 선행 자료를 분석한 것이다. 나머지 6편은 새로운 자료 발굴 성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2. 제1부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시대 구분

1) 조선 전반기(1392~1608) 왕실발원 불상

조선 전반기 왕실발원 불상은 복장 기록이 있는 총 9건의 불교 존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연구 대상은 보령 금강암 석조미륵보살상(1412년), 대구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상 중수(1447년), 견성암 약사삼존상(1456년),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1458년), 평창 상원사 문수동자상(1466년), 경주 왕룡사원 아미타불상(1466년), 해인사 법보전과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 중수(1490년),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불상 중수(1492년), 남양주 수종사 불상(1493년) 등이다. 보령 금강암 석조미륵보살상은 사찰에 전하는 비편(碑片)을 통해 조성 시기와 주체를 알 수 있었고, 나머지 존상은 모두 복장 기록이 있었다. 조선 전반기 왕실발원 불상 가운데 대구 파계사 관음보살상과 해인사 법보전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은 왕실 인물이 참여해 중수한 경우이다. 견성암 약사삼존상은 실물은 남아 있지 않고 복장 기록만 있지만, 조선 전반기 왕실 인물 가운데 활발하게 불사를 행한 광평대군 부인 신씨가 발원한 불상 자료이기 때문에 자세히 고찰했다.

조선 전반기 왕실발원 불상의 시주자는 대비, 왕비, 후궁, 대군과 왕자 부부, 공주 부부, 후궁의 자녀들이었다.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는 친정 부모와 함께 1412년(태종 12)에 보령 금강암 미륵보살상을 조성했고, 1458년(세조 4)에는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을 제작했다. 의빈 권씨는 일찍이 딸 정혜옹주를 잃고 세종의 아들 금성대군을 아들처럼 양육했다.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의빈 권씨가 단종 복위 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금성대군의 영가천도를 위해 조성한 불상으로 해석했다. 이로 인해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이 소재했던 원봉안처 정암산 법천사를 경기도 광주 일대로 추정했다. 의빈 권씨가 금성대군과 함께 1439년(세종 21)에 수종사 사리탑을 건립했고, 묘적사 · 현등사 등 남한강 일대에는 조선 전기 왕실 원찰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조선 전반기 불상 가운데 현재 불상과 복장 유물의 소재는 알 수 없지만 발표된 연구 논문을 중심으로, 견성암 약사삼존상(1456년)의 복장 기록 3점을 동일 불상의 것으로 해석했다. 즉, 본고에서는 이 복장 기록 3점을 광평대군 부인 신씨, 영응대군,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와 자녀들, 효령대군 등이 조성한 봉은사의 전신인 견성암 약사삼존상의 것으로 분석했다. 

광평대군 부인 신씨는 1456년(세조 2)에 견성암 약사삼존상의 대시주자였고, 1490년(성종 21)에 해인사 법보전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을 중수할 때도 시주자로 참여했다. 조선 전반기 왕실 인물 가운데 불상 조성뿐 아니라 불화 제작과 경전 간행까지 가장 활발하게 불사를 한 왕실 인물은 광평대군 부인 신씨였다.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는 세종과의 사이에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은 어머니 신빈 김씨와 함께 대구 파계사 관음보살상 중수(1447년)와 견성암 약사삼존상 조성(1456년)에 참여했다.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는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을 양육했기 때문에 영응대군과 함께 파계사 관음보살상 중수와 견성암 약사삼존상 조성에 함께 참여했던 것이다.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가 금성대군과 함께 수종사 사리탑을 건립했듯이, 신빈 김씨는 영응대군과 함께 불사에 동참했다. 신빈 김씨 아들 밀성군과 익현군의 부인들은 1490년에 실시된 해인사 법보전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 중수에 시주자로 참여했다.

조선 전반기 대군 가운데 가장 호불적인 인물은 효령대군이다. 그러나 효령대군이 시주자로 참여한 불상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1458년)과 경주 왕룡사원 아미타불상(1466년)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공주 가운데 독자적으로 불상을 조성한 인물은 세조의 딸 의숙공주 부부이다. 오대산 상원사 문수동자상 조성발원문(1466년)에는 의숙공주 부부가 동자상을 조성한 목적이 기록되어 있다.

흔히 상원사 문수동자상은 세조의 병 치유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선행 연구에서는 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상원사 문수동자상 조성발원문의 내용을 참조해 의숙공주 부부의 득남(得男)이 주목적이었음을 강조했다. 조성발원문에서는 삼전하에 대한 축원을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속히 지혜로운 아들 얻기를 바란다[亦願己身速得智惠之男]”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에는 의숙공주 부부가 얻고자 한 지혜로운 아들의 이미지가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이 득남 신앙과 관련된 것은 이미 고려 말 공민왕이 문수 기도를 통해 아들을 얻고자 했던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려 말 조선 초 왕실에서 득남과 관련해 문수신앙이 유행했던 것을 상원사 문수동자상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은 1599년(선조 32)에 중수되었다. 중수발원문(1599년)에는 발원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필자는 1599년이 선조와 인빈 김씨 소생인 정숙옹주가 신익성과 혼인한 해이기 때문에 이들의 혼인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정을 했다. 상원사는 정숙옹주 부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들 부부가 의숙공주 부부처럼 지혜로운 아들 얻기를 바라면서 상원사 문수동자상을 중수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의 중수발원문과 강릉 보현사 문수보살상의 중수발원문은 모두 1599년에 작성되었다. 두 중수발원문에서는 ‘동자문수(童子文殊)’와 ‘노문수(老文殊)’를 언급하고 있다. 즉 상원사 문수동자상 중수발원문에서는 ‘동자문수’를 앞에, 강릉 보현사 문수보살상 중수발원문에서는 ‘노문수’를 앞에 기록하고 있다. 중수발원문의 동자문수와 노문수를 반영하듯 상원사 문수상은 동자 모습을, 보현사 보살상은 노승 모습을 하고 있다. 향후 조선시대 동자문수와 노문수 도상을 연구하는 데 두 존상의 중수발원문은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조선 전반기 왕실발원 불상 가운데 탑 속에 봉안한 불상의 시주자로 왕실 인물이 참여하고 있는 점도 주목했다. 금산사 오층석탑 중수와 불상 봉안은 세조의 서자 덕원군에 의해, 수종사 오층석탑 중수와 불상 봉안 및 중수는 성종의 후궁과 자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금산사 오층석탑을 중수하고 불상을 봉안한 덕원군과 수종사 오층석탑을 중수하고 불상을 봉안한 성종의 후궁과 자녀들은 1490년(성종 21)에 이루어진 해인사 법보전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 중수에도 동참했다. 덕원군은 해인사 법보전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을 중수하는 데에 어머니 근빈 박씨, 아들 연성군 · 덕진군과 함께 참여했다. 

조선 전반기 왕실발원 불상으로 필자가 주목한 불사(佛事)는 해인사 법보전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의 중수였다. 두 불상은 쌍불로 불릴 정도로 유사한 양식 특징을 갖고 있으며 통일신라 후기 목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이 불상의 중수발원문을 주목한 이유는 성종 때 이루어진 왕실 불사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인사 법보전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 중수와 관련된 복장 기록은 조선 전반기에 이루어진 불사 가운데 가장 많은 왕실 인물이 참여한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인수대비 · 인혜대비 · 정현왕후를 비롯한 선왕의 후궁, 성종의 후궁과 자녀 등 다양한 왕실 인물이 참여했다. 또한 성종의 유모인 봉보부인 백씨와 남편, 내관까지 참여한 불사라는 점이 특징이다. 

해인사 법보전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 중수발원문은 조선시대 선왕의 후궁이 머물던 자수궁(慈壽宮) · 수성궁(壽城宮) · 창수궁(昌壽宮)의 면모를 파악하게 한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수궁에는 예종의 후궁이, 수성궁에는 문중의 후궁이, 창수궁에는 세조의 후궁이 거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조선 후반기 제1기(1609~1724) 왕실발원 불상

조선 후반기 제1기 왕실발원 불상은 총 10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대상은 서울 지장암 비로자나불상 · 서울 칠보사 석가불상 · 안동 선찰사 석가불상(1622년), 남양주 수종사탑 불상군 23존(1628년), 구례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1634년), 완주 송광사 삼세불상(1641년), 평창 상원사 제석천상 중수(1645년), 서울 봉은사 약사 · 아미타불상(1651년), 순천 송광사 관음보살상 · 석가불상(1662년), 구례 화엄사 각황전 3불4보살상(1703년), 서울 봉원사 명부전 존상(1704년), 서울 미타사 아미타불상(1707년)이다.

조선 후반기 제1기에 조성된 왕실발원 불상 시주자는 왕비, 세자, 왕자, 부마, 옹주, 궁중 나인 등이다. 왕비로는 광해군 비 유씨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있다. 광해군 비 유씨는 서울 지장암 비로자나불상, 서울 칠보사 석가불상, 안동 선찰사 석가불상을 1622년(광해군 14)에 조성했다. 인목대비는 1628년(인조 6)에 23존의 금동불을 조성해 수종사탑에 봉안했다.

선조와 인빈 김씨 소생의 의창군은 구례 화엄사 비로자나불상(1634년)을 조성하는 데 대시주자로 참여했다. 이때 부마 동양위 신익성과 소현세자가 동참했다. 소현세자는 1625년(인조 3)에 왕세자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 조성에 참여했을 당시에는 이미 세자 신분이었다. 소현세자는 완주 송광사 석가여래삼세불상(1641년)을 조성하는 데도 황금을 시주했다. 소현세자가 1645년 세상을 떠나자 그의 어린 딸들은 오대산 상원사 제석천상을 중수하면서 아버지 소현세자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소현세자의 3자인 경안군은 1662년(현종 3)에 나인 노예성과 함께 송광사 관음보살상을 조성했다. 조선 후반기 제1기 불상 가운데 소현세자와 관련된 불상은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 완주 송광사 삼세불상, 평창 상원사 제석천상 등이고, 그의 아들이 시주자로 참여한 존상은 순천 송광사 관음보살상이다.

조선 후반기 제1기 불상 가운데 궁중 나인 노예성은 서울 봉은사 약사 · 아미타불상(1651년)과 순천 송광사 관음보살상 · 석가불상(1662년)의 시주자로 참여했다. 

조선 후반기 제1기 불상 가운데 구례 화엄사 각황전 3불4보살상(1703년), 서울 봉원사 명부전 존상(1704년), 서울 옥수동 미타사 아미타불상(1707년)은 숙종 때 조성되었다. 세 불상은 숙종의 제1 계비 인현왕후와 후궁 소의 유씨의 영가천도와 관련되어 있다. 화엄사 각황전 존상과 봉원사 명부전 존상은 인현왕후 민씨의 극락왕생을 위해 왕실 인물이 시주자로 참여해 조성한 것이다. 특히 화엄사 각황전 존상이 봉안된 각황전을 건립하는 데 대시주자로 참여한 왕실 인물은 연잉군과 그의 생모 숙빈 최씨였다. 

서울 봉원사 명부전 존상의 원봉안처는 양평 용문사로 1858년(철종 9)에 봉원사로 옮겨진 것이다. 이 존상은 구례 화엄사 각황전 존상이 조성된 1년 후에 조각승 색난(色難)에 의해 제작되었다. 전라도 조각승 색난은 구례 화엄사 각황전 존상과 봉원사 명부전 존상을 조성하는 데 수조각승의 지위로 참여했던 것이다. 화엄사 각황전 존상 조성발원문에는 인현왕후 민씨의 극락왕생을 발원한 내용이 있고, 봉원사 명부전 존상 조성발원문에는 구체적으로 인현왕후 영가를 천도하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두 존상에 참여한 궁중 나인이 중복된 점으로 보아 봉원사 명부전 존상 역시 인현왕후 민씨의 영가천도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했다. 

조선 후반기 제1기 왕실발원 불상은 조선 후기 불교계를 주도했던 부휴선수계 승려들에 의해 조성되었다. 부휴선수의 제자인 벽암각성과 그의 문도들이 왕실과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광해군 비 유씨가 발원해 인수사 · 자수사에 봉안했던 서울 지장암 비로자나불상, 서울 칠보사 석가불상, 안동 선찰사 석가불상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 벽암각성이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 완주 송광사 삼세불상을 조성하는 데 의창군 · 신익성 · 소현세자가 시주자로 동참했다. 

조선 후반기 제1기 왕실발원 불상에서 필자는 서울 지장암 비로자나불상과 서울 칠보사 석가불상의 원봉안처를 규명하고자 노력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 제출된 두 불상의 이전에 관한 문서와 선행 연구를 참조하여 두 불상의 소재지를 현 성남 봉국사 대광명전으로 확정했다. 즉, 두 불상은 1939년까지 성남 봉국사 대광명전에 봉안되어 있다가 비로자나불상은 서울 지장암으로, 석가불상은 서울 칠보사로 이동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조선 후반기 제1기 왕실발원 불상 가운데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의 복장 조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복장에서 조성발원문인 〈시주질(施主秩)〉이 발견되어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 목적과 제작 연도, 불상을 만든 조각승, 왕실 인물이 시주자로 동참한 사실 등이 구체적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화엄사 비로자나불상 조성을 주도한 승려는 조선 후기 왕실발원 불상과 관련 있는 벽암각성이었다.

서울 옥수동 미타사는 왕실과 관련이 깊은 비구니 도량이다. 미타사 주불전인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삼존상 가운데 본존 아미타불상이 1707년(숙종 33)에 후손 없이 사망한 숙종의 후궁 소의 유씨의 영가천도와 관련된 것이다. 상궁 김귀업을 비롯한 왕실 인물들이 후손 없이 사망한 소의 유씨를 위해 이 불상을 조성했다. 미타사 아미타불상은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난 왕의 후궁을 위해 그녀를 모시던 상궁이 불상을 조성한 예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3) 조선 후반기 제2기(1725~1910) 왕실발원 불상

조선 후반기 제2기 왕실발원 불상은 총 10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조선 후반기 제2기에 실시된 왕실발원 불사는 불상 조성과 중수 및 개금으로 구분된다. 대구 파계사 관음보살상(1740년 중수), 남양주 불암사 석가불상(1743년 중수), 서울 사자암 아미타불상(1744년 중수), 보은 법주사 비로자나삼신불상(1747년 중수), 서울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 관음보살상(1862년 중수) 등은 왕실에 의해 중수된 경우이다. 이 시기에 새로 조성된 존상은 서울 봉은사 사천왕상(1746년), 인제 백담사 아미타불상(1748년), 서울 미타사 관음보살상(1769년), 화성 용주사 삼세불상(1790년), 서울 흥천사 약사불상(1829년) 등이다. 

조선 후반기 제2기에 왕실이 발원한 불상 조성과 중수에 참여한 시주자는 왕, 왕비, 후궁, 세자 부부, 옹주 부부, 나인 등이다. 영조는 조선시대 왕 가운데 유일하게 불상 중수에 직접 참여했고, 정조는 용주사 삼세불상을 조성한 발원자였다.

조선 후반기 제2기에 새로 조성된 화성 용주사 삼세불상과 서울 흥천사 약사불상은 왕과 왕비에 의해 조성된 예이다.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 가운데 왕이 조성한 것으로는 용주사 삼세불상이 유일하다. 서울 흥천사 약사불상은 순조 비 순원왕후 김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조선 후기 선정인 상태에서 약기(藥器)를 든 약사불 도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후반기 제2기 왕실발원 불상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왕실 인물들에 의한 중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대구 파계사 관음보살상 중수를 들 수 있다. 이 보살상을 중수하는 데 영조가 직접 참여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영조는 왕자 시절인 1702년(숙종 28)과 1703년(숙종 29)에 구례 화엄사 각황전 중건과 불상 조성에 생모 숙빈 최씨와 함께 대시주자로 동참했다. 1740년(영조 16)에는 직접 상의 1점을 복장물로 시주해 대구 파계사 관음보살상을 중수했다. 이때 왕비 정성왕후 서씨, 후궁 영빈 이씨,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와 화평옹주 부부가 시주자로 동참했다.

화평옹주와 남편 박명원은 1743년(영조 19)에는 남양주 불암사 석가불상을 중수했고, 1747년(영조 23)에는 법주사 비로자나불상 중수에도 동참했다. 사도세자는 1740년 대구 파계사 관음보살상 중수와 1747년 보은 법주사 비로자나불상 중수에 참여했다. 1747년에는 혜경궁 홍씨와 혼인한 이후이기 때문에 부부가 동참한 것이다.

영조의 딸 화완옹주와 낙천군 부인 서씨는 1769년(영조 45)에 서울 옥수동 미타사 관음보살상을 조성했다. 이때 상궁 2명도 동참했다. 숙종의 제3자 연령군의 양자는 낙천군으로, 그의 부인인 서씨는 1744년(영조 20)에 서울 사자암 아미타불상을 중수했다.

조선 후반기 제2기에는 종친이 사천왕을 조성하는 데 시주자로 동참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서울 봉은사 사천왕상은 1746년(영조 22)에 조성되었는데, 이때 선조와 정빈 민씨 소생 인성군의 증손자인 능창군 부부가 시주자로 참여했다. 봉은사 사천왕상은 조선 전기 유입된 《제불보살묘상명호경주》(1431년)에 삽입된 새로운 사천왕도상을 계승하고 있다. 즉, 비파를 든 북방천왕, 검을 든 동방천왕, 용과 여의봉을 든 남방천왕, 보당을 든 서방천왕 도상이 그것이다. 능창군은 중국에 사신으로 세 차례나 다녀왔기 때문에 중국 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봉은사 사천왕 도상은 명나라 초기 선덕제에 의해 새롭게 정비된 사천왕 도상을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를 보인다. 이것은 사천왕상 조성 당시 대시주자로 참여한 능창군의 안목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조선 후반기 제2기에 이루어진 불상 중수 가운데 신정왕후 조씨에 의한 것으로 서울 미타사 금보암 관음보살상이 있다. 신정왕후 조씨는 19세기 왕실 인물 가운데 사찰 불사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1862년(철종 13)에 미타사 금보암 관음보살상을 효정왕후 홍씨와 함께 중수했는데, 이때 신정왕후의 친정 조카인 조영하 부부가 동참했다. 

신정왕후 조씨는 1877년(고종 14)에 황해도 배천 강서사 명부전 존상을 서울 화계사로 옮겨 왔다. 서울 화계사 명부전 존상의 이운은 조선 후반기 제2기에 왕실 원찰에서 또 다른 원찰로 불상이 이동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5. 제2부 복장유물과 조성 · 중수발원문 분석

제2부 제1장에서 살펴본 강릉 보현사 보현당 목조문수보살좌상의 복장 유물 조사는 승원 스님의 의뢰로 실시되었다. 2011년에 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 문화부에서 조사한 복장 조사로 수습된 자료 가운데 후령통을 재조사하게 된 것이다. 황초폭자 안에는 중수발원문(1599년)이 후령통을 감싸고 있었다.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과 함께 1599년(선조 32)에 노문수보살상을 중수했다는 중수발원문의 내용은 필자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조선시대 노문수보살상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은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과 함께 노문수보살상으로 중수되어 1599년에는 동일 장소에 봉안되었을 것이다. 황초폭자에 시주자로 추정되는 ‘왕비 윤씨(王妑 尹氏)’가 기록된 것은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이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이 조성된 1466년에 중수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에서 수습된 복장 유물은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과 유사한 것이 많아, 향후 두 존상의 복장 유물을 좀 더 체계적으로 비교 검토해야 하는 과제를 남기고 있다.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은 왕실발원 불상으로 새로운 ‘노문수보살’의 도상을 발굴하게 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제2부 제2장에서 살펴본 상원사 문수전 목조제석천상의 복장 조사는 2008년 9월에 이루어졌다. 이때 복장 전적, 원문(1645년)과 중수기(1862년), 후령통 유물 일부, 다라니 등이 수습되었다. 필자는 월정사성보박물관의 의뢰로 2020년 7월에 2008년에 수습되어 보관 중인 상원사 목조제석천상의 복장 유물을 재조사해 분석하였다.

상원사 목조제석천상은 목조문수동자상의 조성발원문(1466년), 조선 초의 복장 전적, 17세기 상원사 중수 기록, 양식 특징 등을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1466년에 목조문수동자상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판단했다. 2008년에 수습한 원문은 1645년(인조 23) 중수 때의 중수발원문으로 해석했다. 또한 중수발원문의 분석 결과 상원사 목조제석천상의 17세기 중수는 소현세자의 극락왕생 기원과 깊게 관련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조사 결과는 2021년 6월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제2부 제3장에서 살펴본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상의 불상조성기 〈시주질(施主秩)〉의 분석은 2020년 7월 복장 조사의 결과물이다. 노사나불상의 복장 조사는 화엄사와 사찰문화재보존연구소 주관으로 2020년 7월 10~11일에 실시되었다. 이 조사에는 화엄사와 사찰문화재보존연구소 관계자, 문화재청 손영문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송일기 교수, 덕성여자대학교 최성은 교수, 동국대학교 이수예 교수, 화엄사성보박물관 강선정 학예실장, 동국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 대학원생, 필자 등이 참여했다.

이때 노사나불상 복장에서는 복장 전적, 불상조성기인 〈시주질〉, 후령통, 다라니 등이 수습되었다. 사찰문화재보존연구소가 2014년에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노사나불상 대좌 안쪽 면의 묵서 자료와, 2015년에 화엄사성보박물관에서 수습해 보관해 오던 석가불상의 〈시주질〉은 2020년 7월 노사나불상의 복장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비공개로 보관되어 왔다.

2020년 7월 노사나불상의 복장 조사로 수습한 불상 조성기인 〈시주질〉에 의해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상이 1634년(인조 12)에 조성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상을 조성하는데 왕실 인물인 선조의 아들 의창군 이광, 부마 신익성,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부부가 시주자로 참여한 사실이 밝혀져 2021년 6월 23일에 국보로 승격되었다.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복장에서 수습된 복장 유물은 2021년 9월에 불교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특별전에서 소개되었고, 필자는 불상 조성기인 〈시주질〉과 복장 유물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지리산대화엄사》 특별전 도록에 기고한 논문을 수정 보완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행하는 《미술자료》 100집에 발표했다.

제2부 제4장은 완주 송광사 삼세불상에 관한 것으로 2013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송광사법당초창상층화주덕림(松廣寺法堂初創上層化主德林)〉 문서 발견이 계기가 되었다. 이 자료는 문화재청 · 완주군청 · 송광사에 의해 발주된 《완주 송광사 대웅전 주변 종합정비계획 수립 보고서》 작성을 위한 기초 자료 수집의 결과물이다.

1725년(영조 1)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송광사법당초창상층화주덕림〉은 〈법당초창상층화주덕림〉 〈법당중창상량문(法堂重創上樑文)〉 〈불상화주행적(佛像化主行蹟)〉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불상화주행적〉에 소현세자가 송광사 석가여래삼세불상 조성에 필요한 금을 시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완주 송광사 석가여래삼세불상의 조성 복장기(1641년)에 기록된,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빠른 귀환을 바라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17세기 완주 송광사 불사와 관계된 왕실 인물로 의창군 이광, 신익성, 소현세자를 들 수 있다. 이들이 불교와 인연을 맺게 한 인물로는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던 벽암각성을 들 수 있다. 제2부 제4장의 내용은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기인 〈시주질〉이 발견되기 전에 작성했기 때문에, 벽암각성과 왕실 인물 간의 관계를 완주 송광사 불사를 중심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 가운데 제2부 제4장은 송광사 석가여래삼세불상 조성과 벽암각성의 역할, 그리고 왕실 인물을 중심으로 수정했다.

제2부 제5장은 서울 봉원사 명부전 존상(1704년)의 복장 유물과 발원문을 분석한 것이다. 봉원사 명부전 존상의 복장 조사는 2019년 7월에 실시되었다. 이 조사는 봉원사와 미술문화연구소가 주관했으며, 조사 결과는 《봉원사 성보문화재 조사보고서》에 수록되었다. 필자는 봉원사 명부전 존상, 대방 석조여래좌상, 칠성각 소조여래좌상 등의 복장 유물 조사에 참여한 후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신촌 봉원사는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1748)의 극락왕생을 위해 영조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이건된 사찰이다. 영조는 세손 의소세자(懿昭世子, 1750~1752)를 위한 의소묘의 재각(齋閣)을 봉원사에 설치했다. 봉원사 명부전 존상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1667~1701)의 영가천도를 위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명복을 기원했던 구례 화엄사 각황전 존상을 조성한 조각승 색난이 봉원사 명부전 존상을 제작했고, 화엄사 각황전 존상의 조성에 참여한 왕실 여성들이 봉원사 명부전 조성에도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엄사 각황전 존상과 봉원사 명부전 존상은 인현왕후 민씨의 영가천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봉원사 명부전 존상을 1858년(철종 9)에 왕실 원찰이었던 양평 용문사에서 옮겨온 것은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1주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봉원사 명부전 존상은 18세기 초 왕실의 지장신앙과 시왕신앙을 고찰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제2부 제6장은 서울 옥수동 미타사 아미타삼존불상의 복장 유물 분석과 양식 특징을 다룬 것이다. 옥수동 미타사 극락전 아미타삼존상의 복장 조사는 2020년 8월에 미타사 성보문화재보존위원회 주관으로 실시되었으며, 복장 조사 내용은 《彌陀寺 성보문화재 조사보고서》에 수록되었다.

미타사 아미타삼존상은 본존 아미타불상과 좌협시 관음보살상에서 조성발원문과 중수발원문이 수습되었다. 아미타불상에서는 각기 다른 조성발원문(1707년 · 1757년) 2점, 중수발원문(1744년 · 1917년) 2점이 발견되었고, 관음보살상에서는 조성발원문 1점(1769년)이 수습되었다. 조성과 중수에 관한 여러 점의 복장 기록이 발견된 점이 주목된다. 후령통 내부 물목까지 상세하게 조사했던 미타사 아미타삼존상 복장 유물 조사는 18세기 왕실발원 불상의 복장 납입법을 알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점에서 옥수동 미타사 아미타삼존상의 복장 유물은 향후 조선시대 복장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제2부 제7장은 오대산 상원사 영산전 존상의 복장 기록을 연구한 것이다. 상원사 영산전 존상의 복장 조사는 평창군 · 월정사 · 다올건축사무소의 주관으로 2020년 6월부터 12월까지 실시된 ‘상원사 영산전 석가삼존 · 십육나한상 및 권속 복장유물 실측조사’ 사업으로 이루어졌다. 복장 조사는 서진문화유산과 월정사성보박물관 관계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필자는 참관했다. 이 사업의 결과물은 《평창 상원사 영산전 석가삼존 · 십육나한상 및 권속 복장유물 실측조사보고서》(2021년)에 수록되었다.

상원사 영산전 존상의 원봉안처는 경상도 예천 운복사 영산전인데, 소조상과 목조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조상은 16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목조상은 1711년(숙종 37)에 새로 조성된 것이다. 1886년(고종 23)에 신정왕후 조씨가 하사한 내탕금으로 예천 운복사에서 오대산 상원사로 옮겨져 중수된 후, 현재의 영산전에 모셔졌다. 상원사 영산전 존상은 19세기 왕실 불사의 단면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즉, 왕실 원찰에 새로 존상을 조성하지 않고 예로부터 영험담이 있는 왕실 관련 사찰에서 옮겨 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제2부 제8장은 서울 흥천사의 조선 후기(1829년) 석조약사불상을 연구한 것이다. 흥천사 노전에 봉안 중인 석조 약사불상 · 아미타불상 · 지장보살상 3존의 복장 조사는 2016년 6월에 실시하였다. 세 존상 가운데 석조약사불상에서만 조성과 개채(改彩)에 관한 발원문 3점이 수습되었다.

석조약사불상은 1829년(순조 29)에 순원왕후에 의해 조성되어, 1853년(철종 4), 1871년(고종 8)에 중수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흥천사 석조약사불상 · 아미타불상 · 지장보살상이 1829년에 조성된 것은 순원왕후 주변 인물과 관계가 깊다. 석조약사불상은 순조 · 효명세자 · 세손의 치병을 위해 조성되었고, 석조아미타불상과 석조지장보살상은 순원왕후 김씨의 어머니 청양부부인 심씨와 영온옹주의 영가천도와 관련된 것이다. 이 논문은 한국미술사연구소에서 2018년에 개최한 ‘600년 왕실 원찰 서울 흥천사 불상’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 · 보완한 것이다.

제2부 제9장은 화계사 불교미술의 성격과 시주자를 다룬 것이다. 화계사는 ‘궁(宮)절’로 불릴 만큼 조선 말기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왕실 인물로는 신정왕후 조씨와 흥선대원군이 대시주자로 19세기 중창에 참여했다. 필자가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화계사 불교미술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참여하면서부터이다.

화계사 사지(寺誌)를 편찬하고자 했던 화계사는 2013년 12월에 제2차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필자는 이때 〈화계사 불교미술의 재조명: 명부전 불교미술과 왕실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다. 화계사 명부전 존상은 1649년(인조 27)에 조성된 것으로, 세조의 원찰로 알려진 황해도 배천 강서사에 봉안되어 있었다. 당시 영험하기로 이름이 나 있어, 1877년(고종 14)에 신정왕후 조씨가 화계사로 이운(移運)해 명부전을 건립하고 봉안했다.

화계사 명부전 존상을 배천 강서사에서 옮겨 온 것은 요절한 왕실 자손의 영가천도와 관련이 깊다. 화계사의 19세기 불사는 대부분 고종 때 이루어진 것으로 불화 조성, 명부전 존상의 이운, 범종 · 운판 등 불교 공예품의 이운과 조성 등에 왕실 관련 인물들이 시주자로 참여했다.10)

화계사 불교미술은 19세기 서울 · 경기를 비롯한 왕실 원찰의 불사 경향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새로 불상, 불화, 범종 등을 조성하기보다는 왕실과 관련된 다른 사찰의 유물을 옮겨오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화계사 외에도 남양주 흥국사 영산전 존상, 남양주 불암사 관음보살상, 오대산 상원사 영산전 존상 등이 대표적이다.

이상으로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을 살펴보았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실 인물이 참여한 불사 활동이 축소된다는 필자의 기존 인식은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수정되었다. 조선시대는 초기부터 후기까지 왕실 인물의 불사 참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복장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본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 연구가 향후 조선시대 불교조각 연구에도 기여하는 바가 있기를 기대한다. ■

 

유근자 yoobool@daum.net

덕성여대 사학과,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석사, 박사). 한국미술사연구소 연구원, 일본 류코쿠대학 수탁연구원 등 역임. 주요 저서로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기록 연구》 《부처님이 들려주는 효 이야기》 《간다라에서 만난 부처》(공저) 등이 있다. 현재 강원도 · 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 동국대 예술대학 미술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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