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봄, 코로나19가 심화하자 우리 대학도 예외 없이 방역을 이유로 주 출입문을 하나만 두고 다 막아버리는 바람에 나의 동선도 바뀌었다. 평소 법학관 옥상과 연결된 다리를 가로질러 마을버스 회차장과 주차장으로 올라 다니던 길을 더 이상 오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부득이하게 대운동장 쪽으로 돌아서 내려오게 되면서 시간도 더 걸리고 불편했지만 그것도 잠시, 오래지 않아 눈 아래 넓게 펼쳐진 비원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북악산의 한 줄기인 매봉 기슭에서 내려다보는 비원의 모습은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우리에게 비원으로 더 잘 알려진 창덕궁의 후원은 사적 제122호로 10만 3천여 평의 조선시대 궁궐 내 정원이다.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이궁(離宮)으로 창건되고 이듬해인 1406년에는 후원 동북쪽에 해온정(解溫亭)을 짓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정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그 이름은 후원(後苑), 북원(北苑), 금원(禁苑) 등 여러 명칭으로 문헌에 보이는데, 비밀스러운 정원인 비원은 광무 8년(1904) 7월 15일 자 《고종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제국주의 열강이 불법을 자행하던 시절 고종이 큰 뜻을 가지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으나,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1904년 2월 성립된 한일의정서와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이란 아픈 역사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후 해방과 6 · 25사변을 거쳐 보존된 창덕궁과 비원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넓은 비원에는 수령(樹齡)이 300년 이상 되는 나무들과 100년도 더 넘은 온갖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자연스러운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인공적인 관상수는 심지 않았고, 전지(剪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매봉의 중턱에서 내려다보는 비원의 숲 풍광은 비원 안을 산책하면서 규장각과 부용정 등 정자와 못 등을 보는 것과는 색다른 정취를 일깨워준다. 특히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따른 변화는 물론이고, 1년 365일 어느 날도 똑같지 않은 변화무쌍함은 그야말로 무상(無常)이다. 인공조림을 하지 않아 다양한 수종이 섞여 있기에 한겨울에도 푸른 소나무는 눈 내리는 설국의 풍치를 선사한다. 최근의 추운 날씨와 쌓인 눈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오고 있는 봄소식이 기다려진다. 봄바람에 따라 앙상한 가지에서 연두색 새싹이 터져 나오는 모습은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신록이 우거지는 여름 풍광은 임해(林海)라는 단어가 적절하다. 휘영청 붉은 달이 비치는 날 비원의 임해를 헤쳐 나가는 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뜻하지 않게 법학관 옥상 출입문 봉쇄로 만나게 된 비원 사계(四季)에 대한 단상은 하루하루 짧아지고 있다. 매봉 기슭에서 내려다본 비원의 감상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임박한 정년이 눈앞의 풍광을 가리는 듯 희미하기까지 하다. 그동안 무심히 바라보던 풍광과 계절의 변화와 생각을 일깨워주던 일상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아쉬움이 더한다.

생각해보면 로스쿨 제자들에게, 30년 이상 남은 삶에 변수가 많으므로 현재의 성적에 초조하지 말고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열심히 해야 한다고 수시로 말해 왔었다. 하지만 정작 정년을 앞두고 있는 나로선 그들의 30년에 비추어 95세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 앞으로 미래 사회가 어떻게 변할 것이며 그 변화를 따라갈 수 있을지? 이런저런 생각에 허전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다가도 용기를 내어 평소 희망인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변호사로 활동하고 싶어 이리저리 알아보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대학을 벗어난 생활전선은 냉엄하다. 60 중반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시작이 불안하기도 하지만, 어느 선배님으로부터 80세까지 일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감을 가지기도 하였다.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새로운 사회가 도래하면 삶의 방식도 바뀔 것이다. 

어려운 인생길을 열심히 살아오신 80대 어른들이 죽기 싫은 이유 중 하나가 어떤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는지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들었던 달나라의 토끼 이야기가 아폴로 우주선으로 사라지고, 손에 들고 다니던 휴대전화가 그 기능을 확장하여 소형 컴퓨터로 바뀌는 것을 보고,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성스러운 생명 탄생의 신비와 환상이 무너지고 노화의 종말을 예측하는 책자도 등장하는 마당이니 그 심정도 충분히 이해되기도 한다.

해마다 100년 이상 된 비원의 느티나무들은 새로운 100년을 향해 시간을 축적해 나갈 것이요, 300년 이상 된 나무들도 그럴 것 아닌가. 이렇듯 세월 속에 비원의 사계는 오고 갈 것이다. 변화무쌍한 비원의 경치를 즐기는 사람들도 바뀌고 또한 세상도 변화해 나갈 것이다. 내가 변하는 건지, 변화에 내가 맞춰가는 건지 생각이 많아지고 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일 뿐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며 함박눈 얹고 선 비원의 오랜 느티나무를 바라본다. 어제의 그 느티나무가 아니다.

 

배병호 / 성균관대학교 로스쿨 교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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