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유학을 마치고 1999년 귀국하여 쉼이 없는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충전과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여 사무실과 집을 광화문 부근으로 옮겼다. 작년에 다시 광화문을 떠났는데 지나고 보니, 광화문에서 산 기간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말하는 ‘해와 바람과 비와 여름과 겨울의 자연’을 느끼며 문화, 역사, 자연이 어우러진 환경 속에서 참 행복하게 보낸 시간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앞만 보며 바쁘게 살았던 지난날에는 알지도 못했고 느끼지도 못했던 행복한 삶이었다. 아스라한 어린 시절의 시골 정취가 남아 있는 곳이 많아서 좋았고, 마치 전생에 살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장소도 있었으며 마치 다른 시간대에 온 듯한 삶을 체험하기도 했다. 

광화문광장에서 북쪽을 보면 광화문과 경복궁 근정전 너머 하얀 보석처럼 빛나는 보현봉이 보인다. 북한산의 최고봉 백운대는 한양도성 안에서는 멀어서 도성 안에서 잘 보이는 북한산 남단의 주봉 보현봉에 일직선이 되도록 광화문과 근정전,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을 배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두대간이 이어진 북한산의 정기를 잘 받아 국운을 융성하게 하고자 한 뜻이라고 한다. 부산에서 짧은 판사 생활을 그만두고 서울로 와서 광화문의 어느 로펌에서 일하던 젊은 시절에는 거의 매일 이 경치를 보았음에도, 경치를 감상할 여유도 없었고 이런 의미를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50대 후반에 광화문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삶의 템포를 늦추자 이 모든 것이 보이고 느낌도 달랐다.

삼국시대에 북한산과 한강 일대는 오랜 기간 백제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새롭게 와 닿는 역사적 사실이다. 동명왕의 아들 온조가 남으로 와서 북한산에 올라 보고 한강 유역에 세운 나라가 백제다. 678년의 백제 역사에서 현재의 북한산과 서울을 무대로 한 기간이 무려 493년간 지속되었다. 온조왕이 북한산에 오른 후 약 600년 뒤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에 올랐고, 그때 세운 비석이 비봉의 진흥왕순수비이다. 이성계도 무학 대사와 함께 북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는 조선의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으니 이 땅은 우리 역사에서 그 중요성이 남달랐던 곳이다. 

북한산을 다니면서 비봉 능선 아래 있는 승가사와 고려 왕건, 진관사계곡의 진관사, 고려 현종과 강감찬 이야기, 세종의 소헌왕후와 맹사성 대감 이야기, 북한산성과 숙종, 성능 대사 이야기, 도선사와 도선국사, 청담 스님 이야기 등 북한산은 유구한 역사의 현장이자 이야기의 보물창고임을 새삼 느꼈다. 헐버트 박사, 언더우드 등 구한말 조선을 방문하였던 외국인들도 북한산을 무척 사랑한 기록이 남아 있다. 구한말 외국인에게 인기가 많았던 행궁터에도 가 보았고 비봉 능선에서 문수봉 올라가는 난코스도 다녔으며, 의상봉 능선, 칼바위 능선, 형제봉 능선도 거뜬히 넘나들었다. 숨은벽 능선의 단풍이 숨넘어갈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하 20도의 혹한에도 비봉을 올랐으니 지금 생각하면 어떤 정신력으로 그렇게 다녔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북한산과 더불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도봉산에는 천축사, 망월사, 오봉산 석굴암, 우이암 원통사 등 사찰 순례를 주로 하였다. 우이암 원통사 가는 길에서는 순례자가 된 느낌을 받곤 했고, 노년이 되면 독서와 수행 생활에 매진해야겠다는 결심을 다지곤 했다.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에서 노년에는 학문과 미덕 실천이 가장 좋다고 했는데, 여기에 마음 닦는 수행도 함께하는 생활을 영위하고 싶다. 

때로는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을 펼쳐 자신의 직업에 투철한 사명감으로 헌신한 사람들, 지구와 인류를 위해 숭고한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마음을 가다듬곤 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산천을 뛰어다니며 자라서인지 책을 읽는 장소도 흙과 자연, 햇빛 가득한 자연환경을 선호하는데 내가 즐겨 찾았던 독서의 공간을 말하고 싶다. 사무실에서 일하다 쉬고 싶을 때는 경복궁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었다. 파란 하늘이 뚫려 있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즐비하고 인왕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궁궐 안에서 옛날의 왕과 왕비가 누린 호사를 누리는데도 돈이 거의 들지 않는다.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의 디지털정보도서관은 1층에 있어 앞마당 잔디를 보면서 책을 읽으면 대저택의 서재에서 책 읽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북촌에는 한옥으로 된 마을서재가 있는데 그 한옥 서재는 방바닥에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다. 한겨울에는 시골집에 살 때의 따끈따끈한 구들목 체험을 하면서 책을 읽었던 추억도 새롭다. 삼청공원의 숲속도서관은 아름드리 소나무 숲 속에 있고 건물도 예쁜 데다 책 읽으면서 숲까지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내가 즐겨 독서했던 곳은 북악산과 북한산에도 있다. 북악산의 말바위, 북한산 평창계곡 등. 이곳에는 주말에 아침 식사 후 커피를 보온병에 담고, 간식거리와 읽을거리를 챙겨 가곤 했다. 말바위에 올라 너럭바위에 돗자리 깔고 앉으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책 읽기에 그만한 곳이 없다. 평창계곡의 동녕폭포 근처 바위에 앉으면 경치도 일품이고 겨울에는 바람을 막아주며 햇살도 따뜻하고 흘러내리는 계곡 물소리도 들려와, 독서하면서 하늘과 형제봉 능선을 바라보면 한나절이 금방 지나간다. 

광화문에 살면서 즐긴 산책코스로 고궁을 빼놓을 수 없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궁궐 산책으로 최고의 코스인 것 같다. 경희궁은 입장료가 없고 사시사철 개방되어 있으니, 경희궁을 앞마당으로 둔 내가 살았던 아파트 주민들은 밤에도 경희궁 산책을 즐긴다. 경희궁은 아카시아꽃 피는 계절에 가면 꽃향기에 취할 정도이고, 겨울철 밤새 눈이 내린 날에 가면 수북하게 쌓인 눈 위에 첫 발자국 내며 뽀드득 소리를 들으면서 궁궐 안을 걷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덕수궁은 정동 길을 지나며 늘 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봄철 살구꽃이 피어 있을 때가 유난히 좋았다.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보배로운 법비가 온 우주에 충만한데, 중생들은 자기 그릇 따라 이익을 얻는구나.”라는 의상대사의 〈법성게〉의 가르침이 실감된 힐링과 충전, 수행과 영혼을 맑게 한 체험이었다.   

 

배금자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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