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계묘년이 밝았다. 새해를 앞두고 찾아온 절기 소한(小寒)에는 비가 내렸다. 옛말에 ‘대한(大寒)이 소한(小寒) 집에 갔다가 얼어 죽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소한은 추운 절기의 대명사다. 그런데 이번 소한에는 비가 내려서 추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봄이 일찍 오려는 것일까.

그런데 정작 지난 연말에는 강추위가 연일 계속 매섭게 이어져 주위가 온통 얼어붙을 정도였다. 원경 스님이 대표로 계신 서울 종로의 ‘원각사 무료급식소’에서 탑골공원을 찾는 노인들께 방한(防寒)용품을 나눠드린 지난해(2022) 12월 14일에는 영하 14도의 추위가 맹위를 떨쳐 방한(防寒)이 아니라 피한(被寒)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의 마지막 일요일이자 크리스마스였던 12월 25일에는 금당천(金堂川)의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7도일 정도로 동장군(冬將軍)의 위세가 대단했다. 당시에 북아메리카에는 기온이 영하 50도 밑으로 떨어진 곳도 있었다고 하니, 그에 비하면 금당천의 추위는 양반이라고 해야 하나. 목하 인간이 자초한 기상이변으로 인해 24절기로 날씨를 예측하던 시절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배고픔에는 휴일이 없기에’ 연중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급식을 하는 원각사 무료급식소는 이런 추운 날씨에는 배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12월 24일은 기온이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데다 마침 크리스마스 전날인 토요일이어서 걱정이 더했다. 14년째 무료 급식에 참여해 온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설, 추석, 크리스마스 같은 이름 있는 날에는 자원봉사자들도 가족과 함께 보내느라 참여도가 낮아 배식에 애를 먹는다. 그런데 이날은 명절에 더하여 하물며 주말에 그것도 모자라 강추위라니!

궁리 끝에 일손 부족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지인(知人) 한 분께 동참을 요청하는 어려운 부탁을 드렸다. 이분은 연말 대목이라 개인 사업으로 바쁜데도 불구하고 기꺼이 동참하시면서, 더 나아가 별도로 자비를 들여 백설기와 단백질 음료를 400인분이나 보시해 주셨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급식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추운 날씨 때문에 여전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자원봉사자가 적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막상 급식소에 도착해 보니 기적처럼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급식을 위한 자원봉사자가 10명 정도만 되어도 충분한데 13명이나 오신 것이었다. 이날 나오신 봉사자 중에는 아들과 며느리를 대동하고 오신 분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요가 수련을 지도하고 있는 인도인도 한 분 있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남을 돕고자 나오신 분들이었다. 한마디로 감동이었다. 따뜻한 곳에서 크리스마스 명절을 즐길 시간에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이렇게 봉사하러 나오시다니. 급식을 진행하는 동안 엄동설한을 녹이는 따뜻한 인정에 오히려 추위를 잊었다. 

그래, 세상은 아름답다! 추운 겨울에도 우리 사회가 따뜻하게 돌아가는 것은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강추위를 녹여주는 착한 사람들이 있는 덕분이다. 이름 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훈훈한 인정이야말로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다. 

계묘년 새해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날로 각박해지는 어려운 경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생은 도외시한 채 자나 깨나 정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위정자들의 행태를 보노라면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나라가 굳건히 지탱되는 것은 어려운 곳에서도 묵묵히 자기 소임을 다하면서 어려운 이웃에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민초(民草)들이 저변에 포진해 있는 덕분이다.

눈 덮인 들판을 갈 때는 모름지기 함부로 걸음을 내딛지 말라고 했다. 뒤에 가는 사람이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앞사람이 똑바로 간다면 뒷사람도 역시 똑바로 갈 것이다. 앞으로도 명절날이 되면 오히려 원각사 무료급식소에 자원봉사자가 쇄도하여, 급식 인력이 부족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한낱 기우(杞憂)에 그치기를 기대한다. 다가올 봄을 기다리면서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의 시를 떠올려본다. 

 

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不須胡亂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遂作後人程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민일영 /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전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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