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강은 흐른다(Der Nord-Han fließt). 운길산 수종사 아래에 나 있는 북한강변길을 따라서 3시간 정도 걷는 일은 요즘 나의 중요한 일과의 하나다. 길을 걸으면서 수천 년 전 북한강 변에서 조개와 작은 물고기를 채취해서 운길산의 나무 열매와 함께 주식으로 삼고 살았던 선주민을 생각해 본다. 

나는 걷기 · 산책에 빠져 있는 거의 산책중독자다. 하루도 걷기 위해서 집을 나서지 않는 날이 없다. 초등학교 때는 왕복 8km를 걸어서 다녔고, 중 · 고교 때는 팔공산 · 가야산을 수시로 오르내렸고, 대학 이후에는 숙소 또는 근무처의 인근 길을 주로 새벽 시간에 많이도 걸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도, 티베트 카일라스 트레킹도, 부탄의 탁상 곰파를 찾는 걷기도, 봉정암 순례길 트레킹도 다녀왔다. 골프도 걷기 위해서 하는 운동이다. 계속 걷기에만 집중하면서 골프를 하니 스코어는 좋을 수가 없다. 

오래전 지방의 검찰지청장으로 일하고 있을 무렵에 〈아침 산책 이야기-상행삼매〉라는 글을 법조 관련 잡지에 쓴 일이 있다(그래서 이 글의 제목도 ‘상행삼매 Ⅱ’라고 붙였다). 나에게 있어서 산책은 참선과 같은 수행의 하나이다. 나의 걷기는 일상의 공적 · 사적인 연(緣)을 떠나 잠시라도 내면의 자성(自性)에 접근해 보려는 시도다. 지속적인 걷기는 심폐기능을 올려주고 다리 근육을 강화시켜 주는 것은 부수적인 효과다. 

당나라 중종 무렵 선승 영가현각 선사는 〈증도가〉에서 “움직여도 선이요 앉아도 선이니, 어묵동정에 본체가 편안함이라(行亦禪 坐亦禪 語默動靜 體安然)”라고 했다.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히 있는 그 모두가 선 아닌 것이 없다는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도 선은 있었고, 보리달마가 남인도 칸치푸람에서 동(東)으로 오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선은 있었다. 나는 보리달마의 흔적을 찾아본다는 생각으로 남인도 타밀라두주의 주도인 첸나이와 칸치푸람을 방문해서 며칠씩 걷기에 나선 일도 있다. 선은 바로 정(定)이므로 좌선이 가장 효과적인 선택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은 자세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증도가〉에서 지적한 것처럼 어떤 태도를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종삼매(四種三昧)의 하나인 상행삼매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서 불상 주위를 돌아서 수행하는 방법이다. 나는 언제나 나의 걷기 · 산책을 상행삼매 즉 선수(禪修)라고 생각하면서, 거의 평생을 이어오고 있다.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 사이에 아프리카 남부 칼라하리에서 모잠비크, 케냐,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등에 걸쳐 있는 동북 대지구대(Great Rift Valley)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약 10만 년 전에서 6만 년 전 무렵 아프리카를 떠나는 이동을 시작해서, 아라비아를 거쳐 아시아, 유럽, 태평양의 각 도서들, 더 나아가 남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약 1만 년 전에는 남극대륙을 제외한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오래전에 무슨 수단으로 이동했을까. 대부분은 걸어서, 보행으로 그 넓은 공간을 이동하고, 오늘날의 문명을 이룬 것이다. 걷기·산책은 이만큼 위대하다.

걷기는 위대한 사상가를 만들기도 한다. 루소(J. J. Rousseau)는 《고백록》에서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나의 걸음이 멈추게 되면 나의 생각도 멈춘다. 나의 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라고 하였다. 헨리 소로(Henry Thoreau)는 《월든》에서 “걷기에 대한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역사나 사회문제, 가치와 외경의 문제로 들어가게 된다”고 했다. 

나는 헌법재판관으로 일할 때 자주 동료 재판관들과 점심 식사 후에 같이 헌법재판소의 경내나 인근 북촌의 한옥길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헌법재판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 기본권 존중 국가인 우리나라의 헌법적 가치를 찾아내어서 각 공권력 행사가 헌법에 부합하는가를 판단해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다. 재판관들은 주로 평의실에 앉아서 토론과 평의를 하지만, 때로는 오찬 후의 산책에서 좋은 헌법적 가치를 논의하기도 한다. 걷기 · 산책은 이때 최선의 결론에 도달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헌법은 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행복추구권(right to pursue happiness)으로부터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 하는 여부의 일반적인 자유인 일반적 행동자유권, 계약의 자유,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권, 개인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 등이 도출된다. 그러니까 나의 걷기 · 산책도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에서 나오는 권리인 셈이다. 자유의지로 마음껏 걸으면서 수행을 하고, 우리 사회의 가치를 정리해 보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가. 

흔히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고, 행복은 누구나 다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서 편안하고 만족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욕망과 미움, 무지(貪瞋痴)를 고통의 원인으로 알고 긍정적이고 건강한 마음을 찾아가는 나의 걷기 · 산책은 진정한 행복 찾기의 가장 좋은 수단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걷는다. 근래에 유행하는 기운동이나 호흡법, 요가 등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나의 상행삼매 즉 걷기 · 산책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 상행삼매는 맑은 머리와 몸을 유지시켜 주고, 언뜻언뜻 정혜체일(定慧體一)의 다르마를 일깨워 준다. 

북한강은 흐른다(Der Nord-Han fließt).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로 상징되는 Amita-bha, Amitayus의 일광(日光)은 언제나 비추고, 힘차고 내면이 뒷받침되는 나의 걷기 · 산책은 바로 선(禪), 즉 식심견성(識心見性)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의 상행삼매, 즉 걷기 · 산책은 오늘도 계속된다.  

 

김희옥 / KBL 총재, 전 헌법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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