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통천(一氣通天)과 기통화평(氣通和平)

매년 정초에 나는 만년필로 한자 덕담을 써서 지인과 제자에게 보내곤 한다. 올해의 덕담은 ‘기통화평(氣通和平)’이다. 검은 토끼해의 역동성으로 기의 흐름이 원활하고 만사 화평한 한 해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의미이다. 토끼해라 기(氣)를 택했는데, ‘끼가 있다’라고 할 때의 끼가 바로 기(氣)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지만, 불혹(不惑)을 넘기면서 문사철(文史哲)에 관심을 갖고 전공 서적 이외의 다양한 책을 읽고 있다. 약 10년 전에는 아들이 군에 입대하였는데, 그 시기에 나는 산간마을 옆집의 강아지와 약 1년 동안 함께 보낼 기회가 있었다. 땅의 기운인 지기(地氣)를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 오래된 농가에 ‘동하재(東河齋)’라는 서재를 만들어 독서하며 지내곤 하였다. 그 당시 나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무소유의 사상적 뿌리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서처럼 도회지가 아닌 조용한 자연 속의 한적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백거이가 40대 중반 무렵 지방으로 좌천되어 관직과 은둔을 적절히 결합한 중은(中隱) 철학으로 한적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듯이 나도 그런 유의 삶을 보내고 싶었다.

친구처럼 지내던 아들이 군에 입대하여 허전하던 어느 날, 이웃집에서 기르던 진돗개 잡종견인 어린 강아지가 서재가 있는 마당 울타리 밑으로 자주 넘어와서 가까이 사귀게 되었다. 이웃집 주인이 풀어놓으면 우리 집 앞마당으로 놀러와 주인이 불러도 가지 않을 정도로 나와 친해졌다. 이웃집 주인보다 나를 더 좋아해서 무안했는데, 나중에는 그 강아지를 아예 양도받아 눈치 보지 않고 키우게 되었다. 나는 그 개를 산책시킨다고 아침마다 동네를 데리고 다녔지만, 오히려 그 개가 운동이 부족한 나를 이 마을 저 마을로 데리고 다닌 셈이다. 

그 개를 키우던 어느 날 ‘일기통천(一氣通天)’이라는 네 글자가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한 사람의 기는 초끈으로 연결되어 대우주인 하늘과 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과 같은 발상이다. 결국 개와의 인연이 나의 기통철학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통은 기가 통한다는 말로 ‘기똥차다’라고 말할 때의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기통(氣通)의 반대는 기절(氣絶)이다. 즉, 기가 막히는 것이다. 하나의 개체의 기가 우주의 기와 통하고 인간 사이는 물론 인간과 동물 심지어 일체의 사물에 내재된 기의 감응이 있다고 할 것이다. 기가 막히는 것은 자연의 흐름에 장애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기(氣)는 자연과학적인 차원에서도 우주의 본질이고 개체와 우주에 공통적으로 있는 요소라고 할 것이다. 산에 가면 기가 느껴지고 모든 물체 심지어 동물은 물론 무생물인 바위에서도 기가 나온다. 이러한 자연으로부터 우리는 생명의 에너지를 충전하기도 한다.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라는 화두도 있지만, 그 당시 나는 함께 지내는 개를 불교와 인연을 닿게 해주려고 인근 절에 갈 때 함께 가기도 하였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찰에서 반려견을 동반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당시는 이러한 제한이 없어 여러 번 절에 데리고 다녔다. 언젠가 그 개가 환생하여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친구처럼 지냈다. 

그 당시 개와 관련하여 하나의 딜레마가 있었다. 개의 행복을 생각하면 줄을 풀어주어 자유롭게 다니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줄을 풀어줄 경우 개와 사람의 안전이었다. 대부분 시골에 있는 개의 역할은 군인이 불침번을 서는 것처럼 집을 지키는 것이었다. 아들이 군 입대 후 부대 인근 절에서 일요일에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 그 절에 보시를 조금 하였더니 그 부대에서 답례로 건빵을 한 상자 보내왔다. 당시 받았던 건빵 대부분을 나의 서재를 지키는 개에게 주었던 기억이 있다. 아들이 나라(國)를 위해 군대에서 보초를 서듯이, 나의 서재인 집(家)을 지키기 위해 불침번을 서는 개는 건빵을 먹을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관심을 쏟던 개였는데 어느 주말 서울 갔다 온 사이에 사라져버린 일이 생겼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이상한 것은 처음에 그 개가 우리 집 담 밑으로 넘어오던 곳에 장미가 크게 자란 것이다. 그 개가 나의 곁을 떠났지만 크게 자란 장미를 보면서 이것은 그 개가 나에게 준 선물이 아닌가 싶다.  

우주는 모두 하나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화장세계(華藏世界)요 세계일화(世界一花)라 할 수 있다. 우주와 세계가 하나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니체가 말한 초인(Übermensch)이라고 할 수 있다. 기의 세계는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기도 한다. 기를 통하여 소통하는 것을 기통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은 의사표시를 매개로 하지만 기통은 언어가 없이 침묵 속에서도 미소만으로 의미의 전달이 가능하다. 이처럼 기통의 경지는 불교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묘법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휴일이면 가까운 산에 자주 올라간다. 산에 있는 나무와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대개 나무를 지나치고 숲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그러나 나는 특정 나무에 관심을 기울이며 친해지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어떤 나무에 관심을 갖고 대하면 그 나무는 자신이 지닌 생명의 기운을 우리에게 전해준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산에 가면 자주 가는 나무 곁에서 팔로 포옹하기도 하고 기대어 하늘을 쳐다보며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과의 친밀함은 자연과 일체가 되는 기통의 과정이다. 이처럼 기통은 의기투합(意氣投合)할 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친구처럼 지내는 개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과도 가능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나무와 꽃과 같은 식물은 물론, 바위와 강의 경우에도 그곳에서 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각 개체는 다른 개체와 에너지의 환류가 이루어지는데, 바로 기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소통은 형식적 대화만이 오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개체와 개체 간의 말 없는 교감과 생명의 순환인 기통의 원리는 개인의 내적인 마음챙김(mindfulness) 차원을 넘어 국가사회의 운영 원리가 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사회 안에서 억울하거나 기가 막히는 일이 없고 기의 흐름이 치우치거나 경색되지 않으며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화평한 사회가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용섭 / 전북대 로스쿨 교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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