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불교는 세상과 불화하기 위해 태어난 종교다. 불교의 가르침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필요하지만, 세상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불교는 도리어 더 적극적으로 불교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불교에 짐 지워진 역사적 사명이다.

불교가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기 좋을 대로만 살려고 한다. 욕심내고 화내고 집착하는 이른바 삼독에 물든 무명의 삶을 원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편하고, 그렇게 해야 자기 좋을 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살아 있는 한 적당한 욕망과 분노와 집착은 삶의 활력소다. 문제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것이다. 욕심의 문제만 해도 동물은 먹이를 쌓아두기 위해 사냥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인간은 경전의 표현대로 ‘히말라야를 황금으로 바꾸고 그것을 다시 배로 늘린다 해도 만족하지 못한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못된 짓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 결과 오늘의 세계는 불안과 절망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적 생태학자 제인 구달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숲은 사라지고 수면은 말라가고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굶주림, 질병, 가난과 무지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함, 폭력, 질시, 복수, 타락이 있다. 세계의 대도시는 범죄, 약물, 갱, 폭력이 있고 수천의 집 없는 사람들은 살림을 등에 지고 다니면서 문 앞에서 잠을 자고 죽기고 하고 살기도 한다. 종족갈등과 학살이 일어나고 평화협정이 깨지고 수백만 명이 총칼에 지뢰에 목숨을 잃고 있다……."

생존을 위한 조건을 넘어서는 무한탐욕은 인간을 늑대로 만든다. 만인은 만인의 적일 뿐이다. 적과 적은 만나면 싸워야 하고 싸움은 한쪽이 굴복해야 끝난다. 인류가 경험한 수많은 전쟁과 약탈은 탐욕과 이기주의가 팽창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파멸의 방법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불교는 그 원인을 사람들이 죽기 전까지 좋아하는 탐욕과 분노와 집착에서 찾는다. 어떻게 해야 어리석음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을 설득할 것인가. 부처님이 종교적 명상과 성찰을 통해 찾아낸 방법은 인생의 현실을 정직하게 직시하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영원하기를 바란다. 청춘과 사랑과 권력과 재물에 집착하는 것도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집착하는 것치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욕망의 주체인 나 자신조차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데 그 밖의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래서 부처님은 삶의 무상성을 깨닫는 것이 불교 수행의 요체라고 가르쳤다. 증일아함 31권 〈역품(力品)〉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대들은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것이 덧없고 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 삼계에 가득한 모든 욕망을 끊고 무명과 교만을 없애게 된다. 욕심이 없어지면 법을 잘 분별하여 근심과 걱정과 미혹이 없어진다. 수행자들은 반드시 모든 것이 덧없고 무상하다는 생각을 닦기를 게을리 말아야 한다."

또 다른 경(상응부 22권 97 《손톱 끝 경》)에서는 손톱 위에 흙을 올려놓고 “이 흙만큼이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내 가르침은 성립할 수 없다”고도 했다. 이는 불교적 인생관과 세계관의 바탕이 무상의 인식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지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단초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사실 인간이 극복해야 할 것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이 욕심과 어리석음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영원불변할 것이라고 환상하고 집착한다. 인간이 겪어야 하는 불행의 뿌리는 여기에 있다. 모든 다툼과 부조리의 원인이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지적이다.

불교에서 수행이란 이 점을 외면하는 중생의 오류적 인식을 전환하려는 노력이다. 이 전환의 결과가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 성문 아라한들은 이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래된 낡은 습관과 잘못된 선입견을 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사람들이었다. 부처님은 더 많은 사람에게 욕망과 어리석음으로부터 해탈과 행복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집요할 정도로 존재의 무상성을 강조하는 설법으로 일관했다. 부처님의 육성을 비교적 충실하게 전하고 있다는 초기의 경전들은 어디를 펼쳐도 무상과 무아의 설법이 중심이다. 이른바 초기불교 시대의 중요 교리인 삼법인(三法印), 사념처(四念處), 오정근(五精勤),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 등은 오로지 무상의 진리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은 마이동풍이다. 부처님이 45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설법을 해야 했던 이유도 그만큼 무상과 무아의 진리에 대한 적극적 동의가 없었음을 반증한다. 경전은 부처님이 진리에 반대하고 엇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때로는 성의를 다해, 때로는 한숨을 쉬면서 설득하는 장면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출가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데바닷타 같은 사람은 교단을 분열시키고 부처님을 해치려는 음모까지 꾸몄다. 이 모두가 무상의 진리를 눈 밝게 이해하지 못하고 욕망의 확장에만 마음을 둔 탓이었다. 증일아함 〈권청품(勸請品)〉은 왜 사람들이 불교의 가르침을 힘들어하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내가 얻은 이 법은 알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이 법은 삼독과 번뇌가 사라지고 미묘한 지혜를 가진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이 법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길(逆流道)이다. 이치를 분별하여 배우기를 게을리하면 깨달음의 기쁨을 얻을 수 없다. 이처럼 미묘한 법을 사람들을 위해 설법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이 법을 받들어 행하지 않으면 나는 헛수고만 하게 된다. 나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수고로이 설법하지 않으리라. ……범천이 지금 나에게 와서 그래도 가능성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설법해 주기를 간청하는구나. 그렇다면 내 이제 감로의 문을 열겠다. 귀 있는 사람은 듣고 법의 요지를 잘 분별하여 낡은 믿음을 버리도록 하라."

요약하면 불교는 욕망의 물결에 휩쓸리는 세상의 흐름에 거슬리는 가르침(逆流道)이라는 것이다. 역류도란 다른 말로 하면 끝없이 나쁜 쪽으로 치닫는 세상과 불화하는 종교라는 뜻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바른말은 귀에 거슬리고 좋은 약이 입에 쓰듯 불교의 역할은 거꾸로 가는 데 있는 까닭이다. 세상의 흐름에 역류하다니, 이는 분명 어렵고 힘든 길이다. 하지만 만약 불교가 이 길을 포기하거나 나태해지려 한다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부끄럽게도 불교는 외형적 성장에만 매몰돼 본래의 종교적 목적을 왜곡하거나 상실한 적이 없지 않았다. 역사에는 그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역사의 잣대는 과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적용된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항상 발밑을 살피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삶의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무상의 현실을 인식하고 욕망의 크기를 줄여야 한다. 기후 위기, 환경 재앙, 전쟁과 폭력, 갈등과 대립 같은 현대세계의 모든 문제는 욕망의 크기를 줄이고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한 공생의 길로 나가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어떤 종교를 믿든 무슨 철학을 주장하든 싫어도 귀찮아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멸할 수밖에 없다. 불교가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에 귀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불교가 이러한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는가는 별개로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불교가 아니다.

이번 호 특집은 이런 신념으로 현대사회를 일깨우고 가르쳐온 불교의 스승들을 한자리에 모셨다. 그분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가는 현대불교가 어떤 길로 가야 할 것인가를 시사한다. 한국불교에 큰 자극이 되었으면 좋겠다.

 

2023년 3월

홍사성(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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