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학 연구의 지평을 확대하다

만해 한용운의 인적 관계망 그리기

세상의 어딘가에 만해도서관이 있다면 서가의 정중앙에 꽂힐 만한 연구서 한 권이 출간되었다. 한용운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나 더 나아가 한국 근현대불교사 연구자라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책이다. 김광식 선생이 펴낸 《만해 한용운의 기억과 계승》은 한용운의 동지와 제자의 면면을 조명하면서 그동안 학계에서 간과해 왔던 한용운의 인적 관계망을 촘촘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용운이 이들 관계망의 그물코를 쥐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한용운만을 연구의 중심에 두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이 책은 한용운과 동시대를 살아내며 정신적 유대를 이어갔던 동지들과 한용운으로부터 정신적 영향을 크게 받은 제자들을 초점화한다. 따라서 책의 주된 탐구 대상은 한용운을 증언하고 기억하는 기억자와 계승자, 즉 한용운의 동지들과 제자들이다. 한 사람을 알고자 한다면 그와 인연을 맺은 친구들을 보라는 옛사람의 말을 저자는 한용운 연구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기존의 한용운 연구가 대체로 한용운이 쓴 저술들을 중심 텍스트로 삼아 진행된 것에 비해, 이 책은 연구의 시각을 그와 정신적 친연성을 보이는 인물들로 확장하고 있어서 만해학의 지평 확대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한용운 연구를 역사학적 관점에서 견인하고 있는 대표적 연구자로 김광식✽ 선생을 꼽는 데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근현대불교사 전반에 관한 연구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한용운 연구로 한정 지어 놓고 보면, 그는 새로운 자료 발굴을 통해 기존 학계의 시각을 수정하고 정교화하면서 한용운의 실상을 오롯하고 엄밀하게 규명해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 20년 동안 저자가 펴낸 한용운 관련 저작들만 보더라도 이러한 평가는 쉽게 입증 가능하다. 한용운에 대한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집필한 《만해 한용운 평전-첫키스로 만해를 만나다》(2004)를 필두로 《우리가 만난 한용운》(2010)과 《만해 한용운 연구》(2011)로 이어온 기존 연구의 족적은, 저자가 한용운이라는 인물을 우리 근현대의 역사적 공간 안에 정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저자는 명실공히 이천 년대 이후 한용운 연구를 견인하는 견인차 역할을 감당해 왔고, 이 저서 또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김광식 선생은 역사학계에서 만해 한용운을 본격적이고도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거의 유일한 역사학자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해 한용운의 기억과 계승》에는 이러한 그간의 학문적 온축이 한용운의 인적 관계망을 통해 다채롭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관계망 그리기의 실마리는 한용운의 항일정신 또는 독립 의지의 발현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용운의 민족 독립 열망을 생동감 있게 포착해내고 있어 이채롭다.

이 책에서는 만해의 동지로 만공, 이고경, 박광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만해의 후배 혹은 제자로는 경봉, 백성욱, 조종현, 김어수, 강석주, 화산, 허영호, 박영희, 조영암, 김법린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한두 분을 제외하고 이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인물은 한국 근현대불교사의 중심에서 활동하던 분들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를 가로지르며 저자는 한용운이 우리 근현대 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방대한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돌올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증언과 해석, 역사의 내면에 가닿는 길 찾기

이 책은 저자가 증언의 사료적 가치에 주목함으로써 한용운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증언’이라는 프리즘을 활용한 연구에는 의미 있는 증언자를 발굴하고 해당 증언을 교차검증하는 섬세한 분별력과 판단력이 요구된다. 한용운이 불교계를 대표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분별과 판단은 한국 근현대불교사에 대한 역사적 조망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우리 근현대불교사를 연구해 왔고, 이러한 연구가 바탕이 되었기에 ‘증언’을 통한 연구가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증언의 사료적 신뢰성은 해석의 진실성과도 연결된다. 인물 간의 교유와 영향에 대한 연구는 어느 입장에서 해당 인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증언의 사실성과 정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이런 부분을 인지하면서 증언자의 담론적 위치를 잡아나간다. 증언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저자는 가능한 많은 증언을 확보하고 비교 검증하면서 타당성을 추론하고 있으며, 관련 증언자들의 입장을 마치 퍼즐을 맞추듯 하나씩 덧붙여 나간다.

또한 한용운 추모사업이나 선양사업을 추진해온 많은 단체들의 진행 과정까지도 관계망에 넣고 세세하게 추적하며 역사적 진실을 추적해 나가고 있다.

객관적 근거를 앞세운 비판적인 관점에서만 역사를 이해한다면 역사의 내면에 있는 진실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배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관련 자료는 지속적으로 수집해야 하겠지만, 진실에 대한 개연성을 바탕으로 역사적 맥락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료를 보완해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28쪽)

역사학은 객관적 사실과 그 증거가 확보될 때만이 비로소 연구의 발자국을 뗄 수 있는 학문이다. 하지만 객관적 증거에만 집착할 때 오히려 삶의 진실은 협소해지고 희박해질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진실에 대한 개연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고자 한다. 따라서 저자가 이 책에서 취하는 태도는 가급적 신뢰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을 종합함으로써 역사의 내면에 가닿으려는 길 찾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저자는 객관적 자료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인간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젖히고자 증언이라는 방식으로 한용운과 연을 맺은 여러 인사들의 삶을 추적해 들어간다. 이 과정에 동참하다 보면 이들 뭇 인연들의 삶이 어떻게 한용운이라는 매듭을 통해 서로 얽히고설키는지를 목도하게 되고, 한용운과 그의 시대를 통람하는 재미를 맛보게 된다.

 

세 개의 빛나는 지점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은 그동안 온전히 빛을 보지 못한 한용운의 독립운동 혹은 저항운동과 관련된 내용이다. 3 · 1운동 주도로 옥고를 치른 이후에 한용운이 구체적으로 독립운동가들과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는지, 또 어떤 저항의지를 구체적으로 표출했는지는 추측과 상상의 영역에 놓여 있었다. 이 책에서는 한용운과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접촉 가능성을 면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가능한 연결고리를 복원하고 추정함으로써 그동안 구체화되지 못했던 한용운과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연관성이 실감 있게 드러난 점은, 이 책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만공을 중심에 두고 만해와 김구가 독립자금을 통해 연결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추적하면서, 저자는 일제 강점하에서 불교계가 도모한 독립운동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불교계와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연결 루트를 밝힘으로써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만당(卍黨)’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 단체가 비밀리에 항일투쟁을 전개했다는 여러 증언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로는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던 만당 관련 자료를 만해의 사상적 계승자들의 삶과 활동 속에 녹여내고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 앉힘으로써 이 단체의 활동을 실감 있게 복원해내고 있다. 한국 근대불교사 연구자가 이 책을 만난다면 향후 ‘만당 연구’라는 단행본의 저술로 후속 연구를 전개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여기에 더하여 구술사적 접근의 연구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언어가 끊어진 자리를 참구하는 불교계를 연구할 때 직면하는 난관을 극복하고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적절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한 권의 책이 갖는 진정한 값어치는 그 속에 새롭고 다르게 읽어낼 무수한 가능성을 얼마나 감추고 있느냐에 달렸다고 본다면, 이 책은 후속 연구의 불씨를 넉넉하게 담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 담긴 저자의 탐색이 모쪼록 눈 밝은 독자들을 만나 계속 성장하기를 바라며, 근현대불교를 중심에 두고 역사, 문학, 철학 공부에 힘쓰는 동학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

 

이선이 budatree@khu.ac.kr
경희대학교에서 한용운 문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저서로 《근대 문화지형과 만해 한용운》 《만해시의 생명사상 연구》 《생명과 서정》 《상상의 열림과 떨림》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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