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과 친애로 행복을 추구하는 윤리체계

 

1. 머리말

불교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는다 함은, 불교의 관점에서 불교와의 동이점을 고려하여 불교적 해석을 시도하는 작업이다. 이는 불교라는 거산(巨山)에서 어느 길을 선택하여 어떻게 등반할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다소 쉽지 않은 등정이다. 고전 자체만 놓고 분석하면 내용 해석은 가능하지만, 사상이 태동한 심층적 사유에까지 이르기는 어렵다. 사상의 지층에 도달하여 강력한 실천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인물의 삶과 실존적 문제의식을 이해하고 공감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윤리교육의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삶의 지평에 주목하여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이른바 ‘축(軸)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다양한 영역들을 탐구하여 ‘만학의 아버지’라 불렸으며, 서양 학문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를 대개 철학자로만 알고 있지만, 자연학 저술들이 소개된 19세기 이후에는 오히려 자연과학자라 해야 할 정도로 그는 자연 관찰과 탐구에 진심이었다. 형이상학(metaphysics)이란 말도 전집 편찬자가 “자연학 뒤에 오는 글들(ta meta ta physika)”이라고 한 데서 유래할 정도로, 자연학 저술이 전체 저술의 3분의 1 이상에 달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선구자인 이유는 많은 지적 유산과 더불어, 탁월한 인문학적 통찰로 인류에게 현실극복의 지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리케이온의 강의안을 아들인 니코마코스가 편집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행복을 위한 주제들을 현실적이고도 객관적으로 체계화한 윤리학 저술이다. 그로부터 행복 담론이 출발했다고 전해지지만, 사실 붓다는 그보다 이전에 실존적 괴로움을 벗어나 행복에 이르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제시하였다.

불교의 행복 개념은 매우 다양하게 드러난다. 기쁨 · 희열을 의미하는 삐띠(pitī), 행복의 일반적 의미인 수카(sukha, 樂), 즐김 · 향락을 뜻하는 난디(nandī), 행복을 넘어서는 환희의 기쁨인 소마나싸(somanassa), 더불어 함께하는 자비심으로서의 행복인 무디타(muditā), 여러 선업의 결과 얻어지는 행복한 상황을 의미하는 망갈라(maṅgala) 등 세세하게 구분된다. 불교의 행복은 기쁨과 즐거움의 심리상태로, 육체적 욕구도 포함하기는 하지만 주로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정신과 심리상태에 초점이 있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는 무디타와 망갈라 등 행위와 연계된 개념으로 확대되고 있다.

두 위인이 행복 내용과 도달 방법은 다르지만,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중심으로 현실극복의 논리를 전개한 점은 선구적이라 할 만하다. 그들 행복 탐구의 유사점은 현실 경험에서 출발하고, 윤리성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붓다의 행복이 열반이라는 종교적 이상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폴리스 공동체 안에서의 행복으로, 이 때문에 그의 윤리학은 정치학과 만나게 된다. 이는 윤리교육이 철학교육과 더불어 시민교육 측면에서 그의 행복을 조망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2. 경계인으로서의 실존과 플라톤 비판

인간은 사회적 존재 구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 태어난 시대와 환경의 영향 속에서 이상과의 간극을 메우며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은, 현실을 수용하거나 거부하기도 하고 극복하거나 초월하기도 한다. 현실의 거부나 초월에서 자기를 버리는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현실을 수용하고 극복하는 데에도 용기는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이 현실과 타협하여 안주하려 한다면, 선구자들은 극복하거나 초월함으로써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어온 것이 역사이다.

붓다는 브라만교의 아트만을 비판하고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에 기초한 사성제와 연기법,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위한 수행, 궁극적인 행복으로 열반을 제시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경계인으로서 현실극복을 위해 탁월성(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으로서의 행복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종교 창시자와 철학자의 차이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안에 기인한다. 붓다는 구도를 위해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종교적 이상을 추구했다. 아테네 왕족 계열로 모든 조건을 갖춘 플라톤이 현실을 초월한 이데아를 추구했던 반면, 아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현실을 경계인으로서 ‘살아내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변방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다. 양친 모두 의사 집안으로 마케도니아 왕의 주치의였던 아버지 사후, 후견인인 프로크세노스의 도움으로 17세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입학하여 20년 동안 유학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류민 신분으로 상황 변화에 따라 에게해 주변을 오가며 일생을 보내야 했는데, 그리스어 ‘테오로스(theōros)’는 국외자 혹은 관찰자라는 의미로 이러한 그의 삶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다.

그가 평생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고 관찰자 관점으로 살았던 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도시국가들이 합종연횡하였던 어지러운 상황에도 이유가 있었다. 신흥 강국인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넘어 동방 원정을 계획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이후 반마케도니아 정세에서는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친 것 때문에 그는 ‘불경죄’로 고소되어 아테네를 떠나 말년을 보내야만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당시 17세)는 플라톤(당시 60세)을 만나 그에게 학문을 배웠지만 점차 그를 비판하였고, 플라톤 사후 아카데미아를 떠나 아소스를 거쳐, 레스보스섬에서는 자연 관찰과 탐구에 매진하였다. 당시 아테네는 전쟁 노예들에게는 시민권을 주었지만 다른 도시국가 시민에게는 일정한 법적 제한을 두었고, 이 때문에 그는 아카데미아 원장이 될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을 거쳐 13년 후 아테네로 돌아온 그는 리케이온을 설립하여 교육하였는데, 그들을 ‘페리파토스학파’라고 부른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보면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 옆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고 왼손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있다. 불안한 실존에서 그는 스승과는 달리 현실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아야만 했고, 플라톤의 비물질적인 이데아론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좋음’과 ‘탁월성’으로 행복론을 전개하는 서두에서, “모든 학문은 어떤 좋음을 추구하며 그 부족한 점을 채우려 하지만,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는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좋음의 이데아’를 비판하였다. 행복은 실천으로 가능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어야 하며, 실재하지 않는 좋음의 이데아는 행복에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자신을 비판하는 제자에게 플라톤은 “마치 망아지가 저를 낳은 어미를 그렇게 하는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도 나를 차버렸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3. 행복의 의미와 교육

붓다의 가르침이 다양한 시대와 문화, 번역의 과정을 거치며 원의를 파악하기 어려워진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도 영어로, 우리말로 번역됨으로써 의미가 협소해졌다. 논의를 위해 원의 파악이 필요한 개념들을 살펴보자. 선(善, good)으로 번역된 좋음(agathon)은, 한 사물을 사물이게끔 해주는 기능이나 본성의 완성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기능 혹은 본성의 완성은 탁월성(aretē)으로, 아레테는 기존에 덕(virtue)으로 번역되었고 기능 · 본성에 중점을 둔 아가톤에 비해 인간의 ‘품성상태’를 의미한다.

행복인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는 잘(well)의 의미인 에우(eu)와 영적 · 신적 존재인 다이몬(daimon)이란 말의 결합으로, ‘신적인 것이 잘 맞춰주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적 행복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신적인 것의 조력이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인간으로서 실현해야 할 기능 · 본성을 잘 실현한 상태 혹은 활동이 행복이다. 친애(philia)는 우애나 우정(friendship)으로 번역되지만 이보다는 훨씬 넓은 의미를 지닌다.

붓다는 “가을 연못에 들어가 시든 연꽃을 꺾듯,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꺾어버려라. 그리고는 저 니르바나의 길을 향해서, 오직 한마음으로 걸어가거라.”라고 하여, 욕망과 집착을 떠난 니르바나의 행복을 제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이에 대한 논의를 보자. 모든 학문, 선택 · 행위는 좋음을 추구한다. 좋음에는 목적이 존재하며 목적들 간에는 위계가 있으며, 최고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행복이다.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이유이다. 다음으로, 그는 기능(ergon) 개념에 주목하여 존재들이 자기의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을 탁월성(aretē)이라고 하였는데, 인간의 탁월성은 인간의 고유 기능인 이성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품성상태로 그것이 행복으로 연계된다.

그에 의하면, 좋음에는 외적인 좋음, 영혼과 관련된 좋음, 육체와 관련된 좋음의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영혼과 관계된 좋음이 가장 진정하고 으뜸이지만, 행복에는 외적인 좋음 즉 일종의 우연적 행운이나 외적 환경도 필요하다.

 

행복은 명백하게 추가적으로 외적인 좋음 또한 필요로 한다. 일정한 뒷받침이 없으면 고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 이를테면 좋은 태생, 훌륭한 자식, 준수한 용모와 같이 그것의 결여가 지극한 복에 흠집을 내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배움과 노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탁월성(이성)에 따른 영혼의 어떤 활동으로서의 행복이다. 그의 행복론은 결국 이 영혼의 활동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영혼 개념은 초월적이고 영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 존재로서 살아 있는 생명의 활동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이성 있는 부분과 이성 없는 부분으로 나눈다. 이성 없는 부분을 다시 욕구/욕망인 부분과 식물적인 부분으로 나누는데, 그는 즐거움과 고통과 관련되는 욕구/욕망의 부분을 이성이 조절하는 것을 ‘성격적 탁월성’이라고 하였다. 욕구/욕망은 이성의 활동으로 인하여 최선의 것을 선택하여 얻어진 품성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고귀한 것, 유익한 것, 즐거운 것은 선택하고, 부끄러운 것, 해되는 것, 고통스러운 것은 회피해야 한다. 성격적 탁월성은 본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습관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으로, 이러한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성격적 탁월성은 즐거움과 고통에 관련한다. 우리가 나쁜 일을 행하는 것은 즐거움 때문이며, 고귀한 일들을 멀리하는 것은 고통 때문이니까. 그러한 까닭에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어렸을 때부터 죽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에 기뻐하고, 마땅히 괴로워야 할 것에 고통으로 느끼도록 하는 방식으로 길러졌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교육이다. (…) 탁월성은 즐거움과 고통에 관계해서 최선의 것들을 행하는 품성상태인 반면, 악덕은 그 반대의 상태라고 가정한다.

 

그는 행복에는 성격적 탁월성과 더불어 이성 그 자체의 활동인 ‘지적 탁월성’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앎이 실천으로 연계되기 위해서는 숙고(bouleusis)와 합리적 선택(prohairesis)을 통한 실천적 지혜(phronēsis)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하여 그는 행복에는 관조(theōria)와 철학적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행복에는 즐거움이 섞여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들 중 ‘지혜(sophia)’에 따르는 활동이, 동의되는 것처럼 가장 즐거운 것이다. 여하튼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ia)’은 그 순수성이나 견실성에서 놀랄 만한 즐거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앎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앎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그러한 관조에서 더 즐겁게 삶을 영위할 것이라는 점은 당연하다. 더욱이 우리가 논의하는 자족(自足)도 다른 무엇보다 관조적 활동과 관련한다.

 

그는 이성의 활동을 인간의 언어와 사유 활동에서 찾았고, 그것을 다른 어떤 동식물과도 다른 인간만의 능력으로 보았는데, 이 점에서 인간다움은 바로 철학적 지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붓다는 삼매에서 얻은 행복을 지속하기 위한 위빠사나 수행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사제(四諦)와 연기(緣起)의 진리를 통찰한 혜(慧)해탈로, 선정을 통한 심(心)해탈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붓다의 혜해탈로서 통찰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 탁월성과 결부되는 행복과 상통한다 하겠다.

 

4. 폴리스적 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조건으로 완전성과 자족성을 제시하였다. 완전성이란 궁극적 목적으로서 최종적이고 완전한 것을 의미하며, 자족성은 그 자체만으로 선택할 만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는 이를 정치학과 연계시켜 논의하고 있다.

 

완전한 좋음은 자족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본성상 폴리스적(=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족성은 자기 혼자만을 위한 자족성,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자족성이 아니다. 부모, 자식, 아내와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료 시민들을 위한 자족성이다.

 

정치학의 목적은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우리는 정치학의 목적을 최고의 좋음으로 규정했는데, 정치학은 시민들을 특정 종류의 성품을 가진 좋은 시민으로, 고귀한 일들의 실천자로 만드는 데 대부분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추구하는 좋음은 고독한 행복이 아니라 폴리스 안에서 정치학의 목적인 인간적인 좋음과 만나야 하는데, 개인의 행복은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살 때만 자족성을 지닐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행복론은 폴리스 내에서 필요한 덕목들을 구조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은 자기실현을 통하여 훌륭한 시민이 되어 좋음에 이르고, 공동체에서 조화롭게 삶을 영위함으로써 인간적인 좋음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붓다가 “아내와 자식, 그리고 부모도, 친척마저도, 재산마저도, 이 모든 것에 대한 집착마저도 모두 버리고, 저 광야를 가고 있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 가거라.”라고 한 구절과 대비된다.

여성의 지위에 대한 논의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주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여자, 노예, 아이들을 지배할 능력이 없고 지배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한다. 당시 폴리스 사회의 통념 안에서 논의 주체는 남자 시민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위인이라 할지라도 태어난 시대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성에 주목하여 여덟 가지 조건하에 여성의 출가를 허락한 붓다의 선구적 자세와는 대비되기도 한다. 플라톤이 운영한 아카데미아 기록에 두 명의 여성 이름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던 여성들도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5. 중용과 친애를 실천한 생애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의 소유 여부와 관련해서 안다는 것은 아무런 중요성을 가지지 않거나 작은 중요성을 가질 뿐”이라고 하여,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행복에서 실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는 붓다가 “아름다운 저 꽃이 향기가 없듯, 말만 하고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말에는 향기가 없다.”라고 하여 말보다 실천을 강조한 것과 상통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을 위해 강조한 탁월성이 바로 중용(me-sotēs)의 품성상태이다. 중용은 도덕의 황금률로 성인(聖人)들이 주장한 덕목이기도 하다. 붓다는 수행 후 고행주의와 수정주의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말하였고, 실상이 중도(中道)=공(空)임을 알아 유무의 대립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는 중용의 시중(時中)은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으며, 맹자는 상황윤리로서 권형(權衡)을 강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공자의 시중과 맹자의 권형, 붓다의 중도는 삶에서 조화로움과 균형을 잡기 위해 마땅함을 추구한다는 데서 동서양이 강조하는 지혜(智慧)와도 상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과 행위와 관련하여 지나침과 부족함 모두 잘못된 것으로 보고, 무모와 비겁보다 용기, 낭비와 인색보다 자유인다움, 허풍과 자기 비하보다 진실성을 중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간에 속하지 않는 탁월성, 예를 들면 부끄러워할 때 부끄러워하고, 옳지 못한 것에 의분을 느끼는 것은 중간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옳은 것이다.

모든 것에서 중간의 상태가 칭찬받을 만하다는 것이지만, 어떤 때는 지나침 쪽으로 기울어야 하고, 어떤 때는 모자람 쪽으로 기울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가장 쉽게 중간이자 ‘잘함’을 맞출 것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은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이 탁월성에 속하는 것이다.

중용과 더불어 강조한 ‘친애(親愛)’는 폴리스적 행복에 필수적인 탁월성으로, 책의 20%(8권~9권) 분량을 차지한다. 그는 “다른 모든 것들을 다 가졌다 하더라도 친구가 없는 삶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논의를 시작한다. 친애는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시간과 사귐과 신뢰가 필요한 관계,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좋음과 즐거움이 생겨나는, 선의에 따른 쌍방 간의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말한다. 친애는 좋은 사람인 한에서 실천이 가능한 것으로, 나와 상대방이 모두 윤리적임을 전제로 하는 데서 그것의 윤리적 지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자들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평생 경계인으로 살면서도 자신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중용’과 ‘친애’를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이를 주변 인물과의 일화에서 살펴보자. 아버지 니코마코스, 어머니 파이스티스, 첫 부인 피티아스와 딸 피티아스, 두 번째 부인 헤르필리스와 아들 니코마코스, 누나 아림네스테와 동생 아림네스토스,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이자 후에 자형이 된 후견인 프로크세노스와 그의 아들 니카노르 등이 가까운 가족인데 이들과 평생 친애의 관계를 유지한 듯하다. 절친이자 제자였던 테오프라스토스는 레스보스섬에서 자연 관찰을 할 때도 옆에 있었고, 그의 사후에는 리케이온을 물려받아 교육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익히 알려진 애마 부케팔로스 일화에 드러난 것처럼 용맹하고 제어되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민감한 청소년기를 교육하는 동안 많은 일화가 있었을 텐데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대신 제자의 기질에 맞추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편집하여 영웅적 서사를 가르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호메로스를 추방해야 할 첫째 인물로 보고 영웅주의를 비판한 것과는 대조적이어서 중용을 실천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33살의 나이로 열병으로 죽자 아테네에서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났고,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았던 것과 같은 ‘불경죄’로 그를 고소했다. 아테네 시민으로 독약을 받은 소크라테스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인들이 철학에 두 번 잘못을 저지르게 하지 않겠다.”라고 하며 아테네를 떠나 모친의 고향에서 여생을 보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찰자적 입장을 견지한 삶이어서 사적 기록이 거의 없는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유언장이다. 거기에서 중용과 친애를 실천하였던 그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앞에서 여자, 노예, 어린아이에 대한 그의 평가를 보았는데, “영혼이 없는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친애가 성립하지 않고 정의 또한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나 소에 대한 친애도 없을뿐더러 노예인 한에서 노예에 대한 친애도 없다. (…) 노예는 살아 있는 도구(organon)이며, 도구는 생명이 없는 노예이니까.”라고도 하였다. 그럼에도 유언장에서는 노예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론하며 관대하게 대하고 자유민으로 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을 설립한 나이가 50세로 12년을 교육하고 62세에 삶을 마감하였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리케이온 시절의 저술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삶과 인생철학을 정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 마리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여, 행복은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배움과 교육, 관찰과 연구로 점철된 부초(浮草) 같은 인생에서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제시한 행복의 관건인 중용과 친애를 실천하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였다.

 

6. 맺음말

아리스토텔레스는 62년, 붓다는 80년의 생을 살았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붓다만큼 살았다면 현실초월의 통찰을 제시했을지도 모른다. 이상과 현실은 《주역》의 궁즉통(窮則通)의 논리처럼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며, 대승불교의 출현은 이상에 치우쳐진 불교의 현실화라고 볼 수 있다. 붓다가 종교적 이상인 열반을 통한 현실초월의 방법으로 행복을 제시하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시국가의 현실을 잘 살아내며 ‘탁월성(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으로 행복을 제시하였다. 현실을 초월하는 것도 현실을 수용하여 극복하는 것도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

모두 10권으로 이루어진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폴리스 안에서 훌륭한 인간 혹은 좋은 사람으로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내용으로, 당시의 자기계발서라고 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붓다는 행복을 위해 명상을 통한 심해탈과 지혜를 통한 혜해탈 수행의 조화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에 대한 이성의 조절과 중용을 강조했는데, 이는 오늘날 감정과잉의 시대에 모두 의미가 있는 행복 추구의 방법이다.

최근 윤리학에서는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와 칸트 의무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품성상태인 아레테를 핵심으로 삼아 현실의 고귀한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인 행복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획득되는 능력이라고 보았고, 이성을 통한 감정의 조절과 중용과 친애의 품성상태들은 일상적 현실에서 실천이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도덕교육에서 지속적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관심을 가져온 까닭이다. ■

 

장승희 ethics21@daum.net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 박사).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수학,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저서로 《유교와 도덕교육의 만남》 《유교사상의 현재성과 윤리교육》 《불교사상의 현재성과 윤리교육》 《전환기의 미래세대를 위한 동양윤리와 도덕교육》 등이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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