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톨릭 성지화사업을 보는 불교의 시각

그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온 불교와 가톨릭 관계가 최근 심상치 않은 모양새다. 갑자기 불거진 갈등은 아니다. 조짐을 보인 건 천진암 · 주어사 ‘성지화’가 시작이었다. 천진암 · 주어사는 조선 후기 서학(西學)을 연구하던 유학자들을 숨겨주다 폐사되었다고 전해지는 터다. 하지만 천진암이 아닌 천진암성지로 유명하다. 최근 연구성과에 따르면 천진암 성지화는 가톨릭 신자 남상철(1891~1978)이 1962년 1월 《경향 잡지》에 〈한국천주교의 요람지인 주어사 발견됨〉이란 글을 게재하면서 비롯됐다고 한다. 1975년부터 수원교구의 변기영 신부가 천진암 터 매입을 시작하면서 성지화가 본격화됐다. 물론 천진암 실제 위치를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천진암대성당 건립 100년 계획이 확정됐고, 땅 30만 평에 2079년 완공을 목표로 ‘국내 최대 규모 대성당 세우기’가 진행되고 있다. 대성당 터에는 ‘천(天)’ ‘진(眞)’ ‘암(菴)’ ‘대(大)’ ‘성(聖)’ ‘당(堂)’이 적힌 6개의 커다란 돌이 놓여 있는데, 이 중 ‘암’ 자는 사찰 ‘암(庵)’이 아닌 풀이름 ‘암(菴)’ 자로 적혀 있다. “한자 표기까지 바꿔가면서 ‘불교색 지우기’에 여념 없는 모양새”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묵은 ‘천진암 · 주어사’ 갈등이 다시금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지난해 8월이었다. 신동헌 광주시장과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가 “천주교 관련 역사적 명소인 남한산성 순교 성지와 천진암 성지를 잇는 광주 순례길의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고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기 위해 ‘천진암 성지 광주 순례길’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협약에 따라 광주시는 순례길 조성과 유지 관리, 성지순례 활성화를 위한 행정적 지원을 하고 수원교구는 광주 지역의 천주교 역사를 추가로 발굴하는 데 힘쓰겠다는 것이다. 두 기관은 이를 위한 실무위원회도 구성하기로 했다.

불교계는 분노했다. 천진암 ‘불교사’를 묻어버린 가톨릭이 남한산성 역사마저 매장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광주시도 진지한 고민 없이 일을 추진했다. 천진암이 천주학을 공부하던 이들을 보호하려다 스님들이 핍박당하고 폐사에까지 이른 곳이라면,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스님들이 청나라와 맞서기 위해 직접 돌을 옮겨 축조한 호국불교의 구심점이었다. 여기에 불교계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조성한 나눔의 집까지 오로지 천주교 ‘순례길’로만 안내되던 상황이었다.

〈법보신문〉의 잇따른 보도로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교계가 가톨릭 순례길 사업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다. 그러자 수원교구 관리국장 황현 신부는 “이번 협약은 광주시의 제안으로 시작됐다”고 한 발 뺐다. 신동헌 광주시장은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을 찾아, “역사를 세세히 살피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사업은 조정됐고 명칭은 ‘남한산성-천진암 순례길’에서 ‘광주 역사 둘레길’로 바뀌었다.

비단 광주만이 아니다. 가톨릭의 대한민국 국토 성지화는 때로는 은밀하고 때로는 공격적이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가 2019년 6월 30일 발간한 〈한국천주교 성지순례〉는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성지화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이 ‘가톨릭 성지’라며 점 찍어둔 곳은 모두 167곳. 이곳들은 어떻게 ‘성지’로 거듭났을까.

 

2. 가톨릭 성지화사업 어떻게 전개해왔나

가톨릭 성지 조성의 ‘중심축’은 한국천주교가 낳은 성인(聖人)이다. 이는 로마 교황청과의 협업으로 이뤄진다. 한국천주교의 성인은 모두 103명, 여기에 교황청이 현재 한국천주교가 제출한 253명의 시복 문서를 심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만간 더 많은 복자(福者)가 탄생할 전망이다. 이렇듯 한국천주교회는 성인 만들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석만은 “성인의 새로운 탄생이 여러 측면에서 교회 성장에 이롭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첫째,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한국천주교회의 위상을 높일 수 있고, 둘째 한국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양할 수 있으며, 셋째 여기서 수반되는 ‘실제적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교단의 재정적, 물질적, 제도적 기여이다.

성인화가 완성됐다면 이를 토대로 ‘성지화’가 일어난다. 성역화를 위한 성지 조성 작업은 ‘순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천주교의 성인화가 로마 교황청 도움 없이 이뤄질 수 없다면, 성지화는 정부 협조 없이 이뤄질 수 없다. 사업 성격이 도중에 바뀌긴 했지만, 광주시와 수원교구의 협력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면 서울시와 서울대교구의 ‘서울순례길’ 조성 과정과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이들은 성지를 점으로 이은 순례길을 기획하고, 이를 ‘산티아고에 버금가는 국제 관광지로 만들겠다’고 선포하고 있으며, 시와 한국천주교의 구성원이 함께 TF(전담 조직팀)를 꾸린다. 이 성지화는 ‘관광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혈세를 사용해 조성된다. 현재 상황으로 보면 ‘서울시-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서울순례길 프로젝트는 성공적이다. 이는 앞으로도 지자체의 본보기로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

〈법보신문〉은 올해 8월부터 서울의 가톨릭 성지화를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서울 성지화는 크게 ‘서울순례길’ ‘광화문광장’ ‘서소문역사공원’으로 살펴볼 수 있다. 성지화 현황을 장소별로 구분해 정리했다.

1) 서울순례길

서울시와 서울대교구가 만든 ‘서울순례길’은 2013년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만든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이 원형이었다. 당시 교구장이던 염수정 대주교는 2013년 4월부터 천주교 성지순례길 조성위원회를 결성,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의 3코스를 개발했다. 자체 운영하던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은 2017년 7월 서울시와 결탁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지 두 달만이었다. 서울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지지부진하던 ‘성지순례길’은 날개를 단다.

이들의 공조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서울시 관광사업과가 2017년 9월 28일 결재받은 ‘서울 속 순례길 관광 활성화 종합계획’이다. ‘순례길 종합계획’에 따르면 서울시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가 12억 8천만여 명으로 잠재 관광 수요가 크다”며 “서울을 산티아고, 루르드, 나가사키 등 순례지처럼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서울시 관광체육국과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2017년 7월 11일 순례길 활성화 민관 합동 TF를 구성, 2018년 10월까지 1년간 서울시를 답사하며 가톨릭 성지순례 코스를 만들고 이를 활성화했다. 이들은 시 예산으로 2018년 3월 20~27일 일주일간 가톨릭 성지를 답사, 스페인 산티아고와 바르셀로나 등 유럽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당시 여행 경비는 비공개로 처리됐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서울시는 “앞서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만든 서울순례길은 가톨릭 정체성이 부족하고 성지 표지물 ‘주목도’도 부족하다”면서 “순례길 인지도를 제고하고 성지를 활성화할 스토리텔링과 브랜드 아이덴티티(B.I)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가리비 문양처럼 가톨릭 순례길 이정표를 나타낼 마크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서울시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가톨릭 의미를 함축하면서도 타 종교 거부감이 없는 방향으로 B.I를 개발해보라”며 이정표 마크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다. 이는 가톨릭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내되 십자가나 예수상이 아닌 표식으로, 타 종교인들이 알 수 없도록 은밀하게 추진하라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서울시는 시비 98억 3,500만 원을 투입해 ‘가톨릭 성지 마크’를 개발하도록 도왔다. 이후 서울의 보행도로, 방향 안내간판, 지주형 안내 간판마다 이 마크를 새겼다. 서울순례길 안내 책자에도 “순례길 곳곳에 공식 마크가 숨어 있다”면서 “공식 마크가 이끄는 길로 순례길을 즐겨보라”고 권하고 있다.

보행도로 곳곳에 설치된 ‘바닥 안내 시안’(성지 마크)은 언뜻 보면 일반 관광지를 안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지와 전혀 상관없는 서울 남산타워와 한옥 · 빌딩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새겨진 글자도 ‘서울 도보 관광’ ‘SEOUL CITY WALKING TOURS’뿐이다. 서울의 유명한 관광지를 걸어서 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초록색 발자국 위로는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개발한 매듭으로 만든 하트 모양이 있다. 서울시는 이 디자인이 화합과 포용을 상징한다고 써 놓았지만, 이는 단순한 매듭이 아닌 포승줄로 조선 후기 가톨릭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자들의 박해를 상징한다고도 풀이하고 있다. 이 마크는 현재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의 상징이다. 또 이 밧줄은 서울 서소문역사박물관 입구에 설치된 ‘순교자의 칼’ 조각상에서도 볼 수 있다.

서울시는 ‘순교’의 상징인 이 마크를 보행도로 1,105곳에 설치했다. 도로마다 25~50m의 짧은 간격으로 성지 마크를 설치한 것에 대해, 서울시는 “1분에서 1분 30초 간격으로 성지 안내가 있어야 순례자들이 심리적 편안함을 느낀다”라고 보고서에 적고 있다. 서울시는 2018년 3~7월까지 종로구 266개, 중구 110개, 용산구 181개로 순례길 구간 17.8㎞에 사업비 3억 550만 원으로 557개를 설치했으며, 2019년 6월부터는 동작구 49개, 관악구 155개로 7.7㎞에 1억 1,000만 원을 들여 201개를, 2020년 4~10월에는 3,750만 원을 투입해 종로구 · 중구 구간 12㎞에 75개를 조성했다. 그해 5~12월에는 종로구 · 중구 구간 18.7㎞에 다시 252개를 설치, 363만여 원을 추가 집행했다. 최근까지도 ‘서울 속 순례길 관광 활성화 보행환경 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시비를 투입해 추가, 보수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뿐만 아니라 보도블록까지 ‘붉은색 십자가’로 바꾼 것으로 드러났다. 보도블럭을 십자가로 바꾼 것에 대해 도시디자인위원들이 “현재 5㎞가 넘는 구간에 순례자를 모티브로 한 보도블록 패턴을 전체 순례길 구간에 적용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보인다.”고 지적했음에도 서울시는 여전히 개선하지 않고 있다.

보행도로에 교묘히 숨어 있는 하트 모양 매듭은 방향 안내 표지와 지주형 안내 간판에도 새겨져 있었다. 서울시는 보도의 성지 마크 외에도 가톨릭 성지를 안내하는 표지를 500m 간격으로 설치하고, 사람 눈높이에 맞도록 지주형 안내 간판을 설치해 가톨릭 역사를 설명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문제는 조선시대 주요 유적마다 세워진 이 성지 안내 간판이 고증이나 발굴 없이 추측만으로 세워진 곳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청계천 다리 한가운데 설치된 ‘이벽의 집 터’는 “청계천 건너편으로 ‘추정’되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어 청계천 다리 한가운데 설치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범우 집 터’ 역시 “신앙 공동체 명례방을 알리는 표석은 없지만 장악원 터 표석 앞쪽을 집터로 보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서울시가 제대로 된 확인도 거치지 않고 순례길 일부라며 성지로 내세우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벽의 집 터는 세종 23년(1441) 청계천 수량을 측정해 홍수에 대비하던 기둥인 수표(水標)가 세워진 다리이다. ‘김범우 집 터’도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 및 무용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장악원(掌樂院)이 있던 장소다. 하지만 서울시는 한국천주교 신자들의 집터로만 둔갑시켜 안내하고 있었다.

조선 사법기관도 오로지 한국천주교 신자들이 문초 · 형벌 받은 성지로만 소개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왕명에 따라 반역이나 왕실 관련 사건 등 일반적인 수사가 어려울 때 중대한 범죄를 다루는 특수기관 ‘의금부’, 서울 일대 치안 담당을 주 업무로 한 일종의 경찰 기관 ‘포도청’, 법률 관리, 범죄 심리, 소송 판결 등의 사무를 담당한 중앙 관청 ‘형조’, 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을 관할한 민정 · 군정 · 사업 기관 ‘경기감영’ 등의 터를 한국천주교의 ‘순교’ 역사로 설명하고 있다. 조선의 중요 행정기관으로서 오랜 역사가 한국천주교에 매몰된 것이다.

서소문(소의문)에 이어 광희문(光熙門)도 ‘성지’로 둔갑했다. 한양 도성 성곽의 4개의 작은 성문 가운데 장례 행렬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은 소덕문(서소문)과 광희문이었기에 가톨릭 신자 외에도 일반 백성은 물론 경빈 김씨, 명온 공주, 희빈 장씨 등 수많은 왕의 친척들 시신이 통과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가톨릭 신자의 시신이 나간 곳”이라며 이곳을 성지로 규정하고 있었다. 심지어 광희문 앞에는 2014년 8월 설립된 천주교 광희문 순교자 현양관까지 세워 놓았다.

서울시는 서울순례길을 안내하기 위해, 서울시 문화관광해설사 가운데 ‘가톨릭 신자’를 별도로 선발, 2017년 하반기부터 가톨릭 순례길만 안내할 해설자를 양성했다. 이들은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한 팀당 최대 10명씩 맡아 순례길을 다니며 한국 가톨릭 교회사를 설명했으며 이 프로그램은 현재도 서울시 재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외에도 성지순례길을 안내할 어플리케이션을 비롯해 홍보물(팸플릿), 스탬프 투어 책자, 예약 페이지도 서울시가 구축, 배포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서울시가 사업비를 전액 지원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공동 개발 · 출시한 ‘서울순례길’ 어플리케이션은 명칭에선 가톨릭 색채가 드러나지 않지만 어플에 접속하면 가톨릭 역사와 순례길만 안내하고 있다.

 

2) 광화문광장

(1) 프란치스코 교황의 124위 시복터

광화문광장도 서울 순례길의 일부다. 광화문광장에 가톨릭 성지 관련 설치물은 모두 4개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124위 시복터 지주형 안내 간판과 바닥돌, 형조 터 지주형 안내 간판과 바닥돌이다. 10년도 되지 않은 가톨릭의 시복식이 광화문광장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이 4개의 설치물은 올해 8월 광화문광장이 새롭게 개장하면서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광장 개장 다음 날짜의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서울시와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광장 재구조화 과정을 모니터링했다.

서울순례길 ‘광화문 124위 시복터’ 지주형 안내 간판이 세워진 장소는 광화문광장 확장 공사가 한창이던 2021년 5월 삼군부의 외행랑 기초가 발굴돼 화제를 모았던 장소다. 조선시대 관리 감찰기구였던 ‘사헌부’의 유구로 추정되는 문지, 행랑, 담장, 우물 등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세워진 간판은 육조거리나 주요 관청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2014년에 열린 가톨릭 시복식이다.

지주형 안내 간판과 불과 60m 떨어진 북측 바닥엔 광화문광장이 시복터임을 한 번 더 명시하는 바닥돌이 설치돼 있다. 이 바닥돌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4년 8월 16일 이곳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여기에 새깁니다”라는 문구가 영어 · 중국어 ·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마치 조선 개국 이래 지금까지 최대 역사적 사건이 프란치스코 가톨릭교 교황의 시복인 것 같은 모양새다. 더구나 복자 대표인 윤지충은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의 신주를 불태우며 조선왕조의 질서에 정면으로 맞선 ‘진산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김선필은 “2014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식은 국가폭력에 희생된 순교자들, 나아가 천주교회가 국가권력에 승리했다는 점을 자축하는 행사였다. 그들의 순교는 ‘잔인한 국가’ 폭력에 의한 것이었고, 순교자들은 ‘신앙’을 무기로 그것에 맞서 승리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광화문광장의 역사를 설명하는 유일한 설치물이 윤지충의 시복식이라는 게 매우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2) 역사물길

〈법보신문〉이 광화문광장 성지화에 문제 제기를 하게 된 건 이 광장을 관통하는 역사물길 연표석 때문이었다. ‘역사물길’ 연표석은 김대건 사망을 ‘순교’라고 명시해놓고, 조선 중기 불교중흥을 위해 헌신하다 제주에서 입적한 보우 스님을 ‘처벌’로 써놓으면서 공공의 장소에서 가톨릭 중심 역사관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법보신문〉은 조선시대(1392~1910) 역사가 새겨진 광화문광장 연표석 501개를 분석했다. 그 결과 유교 · 불교 관련 서술은 대폭 축소 · 왜곡하고, 기독교 역사는 과도하게 할애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 관련 내용은 모두 9건이었다. 반면 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한 나라임에도 이와 직접 관련된 것은 16건에 불과했다. 유교가 국가 통치 이념으로 조선 500년을 이끌었음에도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1885)과 이화학당(1886)의 설립 기록은 있지만, 태조가 세운 조선의 고등교육기관이자 최고학부인 성균관(1398) 이전 기록은 없다.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 탄압받으면서도 꿋꿋이 견뎌낸 불교는 기독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불교교단 정비(1424) △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편찬(1447) △사족 여성, 승려 됨을 금지(1473) △문정왕후 사망, 보우 처벌(1565)로 단 4건이다. 그나마 표기된 기록도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고려시대 활발했던 불교 종파들을 강제 통합한 아픈 역사를 ‘불교교단 정비’로 표현하는가 하면 불교 탄압 일환으로 사족 여성의 출가를 금지시킨 것도 굳이 명시하고 있다. 1626년 연표석에는 ‘남한산성 쌓음’이라고 적혀 있지만 정작 남한산성 축성의 주역이자 산성 수비 역할을 담당한 승군의 존재는 빼고 있다. 불교를 옹호했던 문정왕후를 ‘승하’나 ‘서거’가 아닌 ‘사망’이라고 명시한 것도 의도적이라는 지적이다.

더구나 김대건은 ‘순교’로 명시하고 있었다. 노골적인 차별이 아닐 수 없다. 김대건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1846년 5월 잠입 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에서 체포, ‘염사지죄반국지율’로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한강 새남터에서 처형된 인물이었다.19)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자가 된 김대건 신부가 한국천주교의 개척에 선구자적 기여를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김대건 순교가 부각될수록 신부를 순교로 내몬 19세기의 조선 정부는 그저 사악한 박해자로 비칠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의 관점에서 이를 ‘순교’로 기록할 수 있을지 인식상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광장 한복판에 설치된 ‘윤지충’의 시복터 안내판처럼 역사물길 연표석도 가톨릭을 확대 · 미화해 공공 역사 왜곡을 자행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3) 서소문역사공원 · 박물관

서소문역사공원은 가톨릭 성지화에 가장 성공한 사례다. 서소문역사공원 조성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2011년 7월경 천주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겸 총대리였던 염수정 주교가 최창식 당시 중구청장을 만나 서소문 공원을 가톨릭 순교 성지로 개발해줄 것을 요청하면서부터다. 2011년 9월 30일 중구청은 서소문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 추진 계획을 밝혔다.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염수정 대주교는 2012년 5월 제19대 국회 가톨릭신도위원회 창립총회에 참석해 국회의원들에게 서소문 성지개발의 필요성과 계획안을 담은 유인물을 배포, 서소문역사공원 조성사업에 대한 의원들의 협조를 요청했다. 국회의원 42명은 ‘서소문역사공원 조성 사업에 관한 청원서’를 서울시에 제출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방한해 서소문공원에 설치된 순교자 현양탑에 참배, 기도하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성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해 11월 ‘서소문역사공원 바로 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가톨릭이 이 지역에서 처형된 다른 사람들의 역사, 특히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들을 지워버리고 있다”면서 항의 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2016년 2월 17일 염수정 추기경과 박원순 서울시장, 최창식 중구청장의 정계 인사들은 항의 농성장 반대편에서 기공식을 열었다.

‘역사 매장’ ‘역사 독점’ 등 반발이 이어지자 서울 중구의회가 2017년 6월 서소문역사공원 조성 예산안을 부결시켰다. 이에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신자 15만 명의 공사 촉구 서명을 받아 의회에 제출하는 등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결국 그해 12월 구의회가 사업예산 87억 원을 승인하면서 공사가 재개됐다. 서울대교구는 2019년 5월 29일, 개관(6월 1일)을 앞두고 공원 지하 3층 콘솔레이션홀에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의 주례로 50여 명의 사제와 1,000여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축성 · 봉헌 미사’를 거행하면서 성지화 성공을 알렸다.

하지만 김선필은 “서소문 일대는 천주교 순교나 여타 ‘처형’의 역사만이 아니라 교통 요지인 만초천과 의주로, 1970년대까지 서울 물류센터 역할을 했던 시장의 역사로도 기억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소문 일대는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도시화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로 손색이 없다는 점과 조선 후기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었지만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가장 쇠락한 지역으로 변화됐기 때문이다. 서소문 일대는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입지 조건이 좋다. 서울역에서 채 1㎞ 거리가 되지 않는다. 연면적 4만 6천여㎡의 94%가 국유지에, 국비 · 시비 · 구비 596억 원이 투입된 지상 1층~지하 4층 규모의 서소문역사공원은 예산 문제만 놓고 보면 사실상 국가사업이다. 중구청은 이곳을 ‘공원(公園)’으로 만들면서 ‘공공(公共) 역사’는 완전히 묻어버렸다.

서소문역사공원의 조성 과정에서 불교계와 가톨릭의 직접적인 마찰은 없었다. 하지만 〈법보신문〉이 광화문광장 성지화에 문제 제기를 하게 된 건 서소문역사공원 내부 박물관에서 일어난 ‘불교 왜곡’ 때문이었다.

(1) 화엄일승법계도 왜곡 나전칠화

이곳의 제2 상설전시실의 한 벽을 가득 채우는 초대형 나전칠화(9.6m×3m)가 있다. 서소문 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도 이 나전칠화가 서소문역사박물관의 대표작으로 소개되고 있다. ‘일어나 비추어라’는 제목의 이 나전칠화는 순교 정신을 담아 한국 가톨릭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형상화 것으로 안내되고 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가톨릭 교황 방한 당시 순교자 124위 시복을 기념해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를 주축으로 ‘시복 기념 작품 제작 추진위원회’를 결성, 최기복 여주 옹천박물관장이 기획해 김경자 한양대 명예교수의 지도 아래 김의용 소목장, 강정조 나전장, 손대현 옻칠장이 1년 이상 공들여 제작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2017년 9월 9일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특별전 ‘한국천주교회 230년 그리고 서울’의 주요 전시품으로 소개됐으며, 애초 기획 단계부터 바티칸의 ‘봉헌’을 염두에 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나전칠화에 〈화엄일승법계도〉가 들어가 있다. 〈법계도(해인도)〉는 신라 의상 스님이 668년 《화엄경》의 핵심 교의를 담아 지은 게송인 〈법성게〉를 그림 모양으로 만든 도인(圖印)이다. 화엄의 오묘한 경계를 드러내어 자기 마음이 곧 부처님 마음이고 자신이 바로 부처님임을 깨닫게 하는 고도의 상징체계인 동시에 불교 수행법이다. 〈법성게〉가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1,351년간 수많은 사찰에서 매일 수지독송하고 있으며, 그것이 담긴 〈법계도〉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각별한 문양으로 여겨져 왔다. 해인사, 고운사, 백양사, 직지사 등 교구본사들을 비롯해 전국의 많은 사찰이 〈법계도〉를 활용해 불자들의 불교 이해와 신앙심 고취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법계도가 뜬금없이 가톨릭 나전칠화 오른편에 큼직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더욱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맨 위의 가톨릭 성화 아래 작은 원들로 표현된 법계도는 중간중간에 여백을 줘 마치 가톨릭의 묵주처럼 만들어놓았다. 원래 〈법계도〉가 중앙에서 시작해 54각을 돌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오지만 나전칠화 법계도는 변형을 가해 종착점을 아래쪽으로 만들었고, 그곳에 가톨릭 상징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얼마 전까지 모호한 십자가 모양이었으나 근래 다시 뚜렷한 십자가 모습을 보인다. 여하튼 맨 위의 성화로 시작해 중간에 법계도를 거쳐 결국 십자가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작품 기획자 최기복 옹청박물관장은 이에 대해 “강강술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묵주를 중심으로 태극기와 6 · 25전쟁 당시 한국을 도운 국가의 국기를 그려넣어 통일에 대한 염원과 함께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되어 하늘에 올라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표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대표적 상징체계인 〈법계도〉를 버젓이 그려넣고도 법계도가 아니라 강강술래라는 것이다. 작품 왼쪽에 등장하는 천진암과 주어사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스님들이 천주교도들에게 강학 장소를 제공했다가 폐사가 됐다고 알려진 사찰이다. 그럼에도 가톨릭계는 이곳의 불교 역사를 지운 채 자신들의 성지로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오고 있다.

합천 해인사가 10월 13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소문역사박물관, 여주 옹청박물관 3곳에 과거 발언에 대한 사과와 〈법계도〉 왜곡 나전칠화 철거를 요구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해인도의 형상은 우리 전통문화 중 하나”라며 “나전칠화는 해인도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통해 새로운 작품을 제작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특히 옹청박물관은 “해인도는 어느 한 종교의 유산만이 아니라 한국 민족 전체 더 나아가 인류의 정신 유산이요 문화유산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해인도가 신라 의상 스님의 것임은 인정하겠지만, 불교 유산만으로는 주장할 수 없다는 속내를 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2) 이이의 《율곡집》 〈논요승보우소〉 전시

법계도 왜곡 칠화의 반대편 전시실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척불론자인 율곡 이이(1536~1584)의 저술을 내세워 보우 스님(1509~ 1565)을 ‘요승’으로 폄훼하고,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한 뒤 조선을 바로 세우려는 의도로 쓰였다고 안내하고 있다. 조선불교의 중흥조 보우 스님의 순교를 ‘처벌’로 인식하는 광화문광장의 왜곡된 역사관이 가톨릭이 점유한 ‘서소문역사공원’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서소문역사박물관은 가톨릭만의 성지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이에 박물관은 가톨릭 서적 외에도 조선 후기 사상계 흐름을 보여주겠다는 취지로 다른 종교와 사상 관련 유물들도 일부 소개하고 있다. 이곳에 불교 전적도 3점 소개하고 있다. ‘불교’로 적힌 구간 중 첫 번째로 전시되고 있는 것이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 요망스러운 보우를 논박하는 상소문)〉이다. 이 책은 성리학 이외에 불교 · 양명학 등 거의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간주했던 율곡이 보우 스님을 ‘요승’으로 규정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율곡은 젊은 시절 어머니를 잃고 봉은사에서 불경을 읽은 뒤 입산까지 했으나 훗날 가장 대표적인 척불론자로 불교 탄압에 앞장섰다. 문정왕후 서거 후 불교계와 백성들에게 크게 신뢰받던 보우 스님에 대한 처벌 논란이 불거졌을 때 퇴계 이황조차 ‘소문만으로 보우 스님을 처벌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던 것과는 달리, 율곡은 일방적인 처벌을 요구하며 쓴 것이 바로 〈논요승보우소〉였다. 문정왕후의 아들로 보우 스님을 감쌌던 명종도 대유학자였던 율곡이 전면에 나서자 어쩔 수 없이 스님을 유배 보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제주도에서 목사(牧使) 변협에 의해 순교하게 되었다.

그런데 가톨릭이 운영하는 역사공원 박물관에서 불교를 소개하는 대표 전적으로 〈논요승보우소〉를 버젓이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측은 이 책에 대한 설명으로 ‘승려 보우와 함께 불교를 중흥시켰던 문정왕후 사후 1565년 8월에 율곡 이이가 명종에게 올린 상소문인 논요승보우소’라며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유교 국가로서의 조선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의도로 쓰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 ‘상소문의 결과 보우는 제주로 유배를 갔으며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심지어 〈논요승보우소〉에 빨간 줄까지 그어가며 눈에 띄게 안내하고 있었다. 가톨릭이 조선시대 억울하게 이단 취급받으며 순교를 당했다고 독점한 공간에서 보우 스님은 50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여전히 이단 취급을 받으며 조선을 바로 세우고자 처형당해 마땅한 요사스러운 승려로 소개되고 있다. 보우 스님과 조선불교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확산시킨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박물관 현장에선 〈논요승보우소〉가 첫 번째 불교 유물로 강조되고 있음에도 정작 박물관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불교 관련 서적으로 《백곡집》(대각등계록)과 《인악집》만 안내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논요승보우소〉가 불교계로서는 가슴 아픈 조선의 탄압 역사를 드러내는 저술임을 박물관 측도 인지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논요승보우소〉를 전시하는 것은 이곳을 찾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보우 스님은 당시 유생들의 비판과 모함을 받았더라도 현시대 관점으로 보면 전통문화의 전승자이며,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조선을 구한 임진왜란 영웅들을 양성한 ‘애국자’이다. 그럼에도 광화문광장의 ‘보우 처벌’과 같은 왜곡된 관점이, 공공의 역사는 매장되고 가톨릭만의 순교 성지로 전락한 서소문역사공원에서 〈논요승보우소〉로 이어지는 것이다.

반면 90여 건의 전시 서적 가운데 ‘조선의 가톨릭’을 부정 평가하는 설명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운영자인 서울대교구는 조선 후기 천주교 탄압에 대한 조선 정부의 공식 입장을 천명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전시하며 “(이 책은) 어린 헌종을 앞세운 풍양 조씨 세도 정권이 1839년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을 내린 것”이라며 “이로 인해 조선교회 재건의 중심 인물이던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이 체포돼 처형됐고 300명이 넘는 순교자를 배출한 기해박해는 척사윤음으로 막을 내린다”고만 소개하고 있었다.

빨간 줄을 그어 문서의 골자를 안내하는 부분도 율곡 이이의 관점을 가져와 ‘보우 스님’을 논요승보우소(요사스런 승려)로 설명하는 것과는 대비된다. 조선시대 가톨릭을 표현하던 ‘절륜패상지교(絶倫悖常之敎)’ ‘황탄괴설 불경지외도(荒誕怪說 不經之外道)’ ‘패륜멸법 자함어이적금수지교(悖倫滅法 自陷於夷狄禽獸之敎)’나 가톨릭 신자를 ‘무부무군지도(無父無君之徒)’ ‘금수지도(禽獸之徒)’ ‘패륜난상지도(悖倫亂常之徒)’로 규정한 부분과는 상반된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높인다 하니”를 강조했다.

 

3. 한국 땅이 가톨릭만의 성지는 아니다

도 넘은 역사 독점으로 일각에선 “하나의 성지(聖地)에서 종교들이 ‘공존’할 방안을 찾아보자”라는 의견도 나온다. 이른바 ‘공공성지’의 개념이다. ‘공공적(公共的 · public)’이란 건 배제되지 않음에 특성이 있다.23) 하지만 가톨릭 성지화에 공존의 의지가 있을지 회의적이다. 가톨릭은 서울순례길과 천진암 · 주어사는 물론, 전주의 승암산을 치명자산으로, 서산 해미읍성을 해미순교성지로, 서소문역사공원을 서소문순교성지로 바꾼 전력이 있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기억과 전승에만 몰두하고 있다. 로마 교황청은 천주교 서울 순례길과 해미를 2018년 9월, 2021년 12월 각각 ‘한국 국제성지’로 지정했다. 국제성지 지정에 가톨릭 신자들은 ‘영광’으로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일반 시민에게는 ‘성지를 건들지 말라’는 압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듯 성지화의 성립 조건은 ‘배타성’이다. 성지 조성에는 ‘경계선’ 설정이 따르고 ‘가톨릭과 비가톨릭’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 등 이분법 도식에 영향을 받으며 고난 끝 영광이라는 영웅 서사적 성격을 띠게 된다. 우리가 가톨릭 성지화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이 성지의 선을 긋는 순간, 선 바깥 영역의 역사는 매장된다.

김선필은 한국 교회의 역사 인식을 ‘야만적’이라고 꼬집은 적이 있다. 또 이것이 조선 사회에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들로부터 비롯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 확장 정책을 정당화했다. 사회진화론도 적극 수용했다. 이들은 서양문화를 문명(civilization)으로, 이외의 지역 문화를 야만(barbarism)으로 구분했는데, 실제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낸 서신 가운데는 조선 사회를 야만스러운 상태로 묘사하고 있는 내용도 다수 발견된다. 이런 배타적 인식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선교사들은 조선왕조 멸망과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 통치로 겪게 될 한국인의 고통에도 무감각했으며, 오로지 교회의 성장을 통한 한국사회의 복음화를 우선으로 추구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활동한 교회 구성원은 도리어 탄압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암살한 안중근 열사이다. 신자들이 3 · 1운동에 참여하려고 할 때 선교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통제도 했다. 김선필은 “특히 한국인 최초의 주교 노기남의 행보는 선교사들의 배타적인 역사 인식이 한국 교회에 완전히 이식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관공서는 ‘관광자원 개발’과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명목에 숨어 별다른 역사 검증 없이 그들의 성지화를 돕고 있다. 광화문광장에 새겨진 거의 유일한 이름이 1791년 12월 전남 풍남문 밖에서 신주 소각 사건으로 참형돼 5일 동안 효수된 진산사건 주인공 ‘윤지충’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관공서의 가톨릭 추앙 사업은 역설적이다. 이창익이 설명하는 ‘순교’를 바라보는 안팎의 관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순교’가 국가와 종교의 대립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종교를 ‘선’의 입장에 두는 순간 국가는 자연히 ‘악’의 자리를 선점한다고 본다. 국가의 관점에서 바라본 신유사옥은 가톨릭에 신유박해로, 병인사옥은 병인박해로 그려지는 이유다. 이 때문에 순교는 종교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지극히 종교적인, ‘인사이더’ 시각을 품은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이들의 죽음은 서양을 침공을 도와 국가의 해를 끼친 혐의로 발생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은 이들의 죽음을 가톨릭 신자의 인사이더 관점에서 다시 기념할 만한 가치로 새기고 있다. 추앙으로부터 발생한 이 역설적인 딜레마를 관공서들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올해 10월 17일 충북 제천은 2019년부터 2021년까지 19억 5천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황사영이 백서를 쓴 토굴을 ‘배론성지’라는 이름으로 개발했다. 황사영은 프랑스가 군함을 보내 이 나라의 조정을 쓰러뜨려 달라는 비밀 편지를 보낸 인물이다. 창원의 현양 사업인 ‘세스페데스 공원’도 마찬가지다. 스페인 출생 신부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1551~1611)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 우리 땅을 밟았다. 그가 온 목적은 왜군의 조선 침략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그는 1593년 12월 조선 침략의 왜군 선봉장이자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진해 웅천으로 건너와 1년 정도 왜성에 머문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창원시는 조선 영토를 유린하고 학살을 자행한 왜적을 위해 예산을 들여 웅천왜성 아래 세스페데스 공원을 조성한 상태이다.

불교는 가톨릭이 박해당했던 세월과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500년 세월을 탄압받았고, 백성들이 따른다 싶으면 모함받아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월심, 계엄, 지성, 상명, 의철, 학선, 죽변, 해초, 각돈, 학전, 설준 등 수많은 스님이 불법을 펴다가 혹독한 고문을 받거나 참수됐다. 이 중 해초 스님은 교종판사를 거쳐 판교종도대사(判敎宗都大師)를 지낸 고승이며, 각돈 스님은 진관사를 중창하고 1,470개의 ‘화엄경판’을 완성한 학승이다. 또 설잠 김시습의 스승이었던 설준 스님은 유생들의 표적이 되어 변방으로 끌려가 참사를 당했다. 보우 스님은 조정 대신과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와 온갖 음해 속에서 꿋꿋이 선 · 교 양종을 다시 세웠으나 결국 제주에서 순교했으며, 조선 후기 선과 화엄의 대가였던 환성지안 스님도 법을 지키고 펼치려다 제주로 유배돼 입적했다.

조선시대 내내 사찰들도 수탈의 대상이었다. 산성축조와 수비 등 온갖 잡역을 떠맡겨 국가와 지방재정 보충에 동원됐다. 사찰들은 관아와 서원에 종이를 비롯한 각종 공물을 상납하느라 빈궁했고, 스님들은 잇따른 잡역에 연일 등골이 휘었다. 유생들이 절에 와 고기와 술을 요구하고, 사찰 재물을 약탈하거나 불 지르는 일도 수시로 자행됐다. 조선 초 스님들의 도성 출입 금지가 시행된 이후 구한말까지 스님들은 함부로 도성 땅을 밟으면 곤장을 맞고 평생 노비로 지내야 했다. 불교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불온한 사상이었으며, 스님들은 더 이상 조선의 백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시대 500년 전 국토 어디엔들 스님과 불자들의 피눈물이 스미지 않은 곳이 있을까. 불교가 이렇듯 핍박받았다고 해서 가톨릭처럼 전국 방방곡곡을 성지화하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현재 가톨릭이 진행하는 성지화 사업은 정도를 넘어섰다. 자신의 종교를 선양하기 위해 기존 역사의 폄하 왜곡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왜곡된 역사는 또 다른 왜곡을 초래한다. 무기력하게 당하고 애써 이해하려는 게 자비는 아니다. 가톨릭의 성지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종교 간 평화를 지켜내는 것이며, 역사의 기준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

 

정주연
jeongjy@beopbo.com 동국대(경주) 불교학부 졸업, 동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 현재 법보신문 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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