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흔히 불가에서는 언어를 통해 진리를 계시할 수 없다고 한다. 물론 이는 현묘한 진리의 세계에 대한 가없는 신뢰를 표현하는 일종의 역설적 사유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언어 너머의 언어를 통해 가닿는 진리 체계 곧 말을 한없이 삼가고 줄이면서 그 너머의 참의미에 도달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된다. 말을 공부해가는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규정은 무릎을 칠 만한 언어의 본질론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는 모든 경계가 지워진 마음 곧 ‘무위심(無爲心)’을 통해 이르는 경지야말로 일체의 분별이나 호불호가 사라진 상태임을 강조한다. 가령 어떠한 형상도 짓지 않는 이 청정한 상태가 자비심을 일으키는 최적 상태가 되는데, 이는 바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새로운 빛을 발할 수 있는 최적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 이르려는 이러한 상태는 윤리적으로나 실존적으로나 최상의 인간 조건으로 상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지는 ‘지혜’와 ‘사랑’으로 수렴되어간다.

부처님은 지혜야말로 세상 이치를 깨닫게 해주고, 사랑이야말로 타인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윤리적 능력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궁극적 무위심에 이르는 불가피한 유일의 방편이 된다. 또한 그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잘 사는 길이 되는데, 이는 외따로 떨어져 홀로 궁구하지 말고, 더불어 세상 이치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도(道)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우리가 단독자로 태어나 고독하게 살아가지만, 서로 만나 사귀고 소통함으로써 공동체의 충실한 일원이 될 것을 강조한 말씀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꽃으로 인해 열매를 본다는 ‘인화견실(因花見實)’이라는 말을 환기해본다. 꽃이 없는데 열매가 맺힐 리 없고, 복을 짓지 않고 베풀지 않았는데 복이 찾아올 리 없지 않은가.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을 먼저 하라는 이 말씀은 부처님이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을 구분하는 기준을 ‘행위’ 여부에 두었다는 의미심장한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이때 행위는 사람이 쌓아온 ‘업(業)’에 따라 그 차원이 정해지는데, 즉 좋은 업을 쌓아야 귀하고 성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기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는 비린내가 난다는 말이 있다.”는 《법구경》의 전언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지혜와 사랑이라는 균형추가 움직여가는 지상의 원리일 것이다.

《법구경》은 부처님이 행복하고 훌륭하고 깨닫는 사람이 되기 위해 가져야 하는 마음, 행위, 태도 등을 가르쳐주신 말씀의 집성이다. 여기서 부처님은 고통을 떠나 즐거움을 얻는 ‘이고득락(離苦得樂)’, 번뇌 없고 윤회 없는 ‘적정열반(寂靜涅槃)’의 길을 가르쳐주셨다.

가령 “진정한 사랑이란 자기 안에 기쁨을 샘솟게 하고 이유나 동기 없이 그저 나누어주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미움은 미움을 낳고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거짓을 거짓으로 보고 진실을 진실로 보라. 마음을 다스리면 행복이 오고, 잘 다스려진 마음에 의해 행복은 발견된다.”는 말씀이 그러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무주상(無住相)’이라는 개념과 만나게 된다. ‘무주상’이란, 크고 작음이 끊임없이 생멸하는 우주처럼, 어떤 특정한 이미지에 긴박되지 않는 대자유를 함의한다. 이때 지혜와 사랑은 이러한 항심(恒心)을 가능케 하는 적합한 실천적 항목이 된다.

그 안에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곧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라는 지혜가 담겨 있다. 결국 이는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말하고 행함으로써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를 지칭한다. 이때 ‘머무름[住]’이란 마음의 집착을 은유하는데, 그 집착을 끊고 미혹을 지나 진정한 사랑에 이르라는 것이 불가의 본원적 가르침이다.

부처님이 강조하신 훌륭한 사람은 ‘중도(中道)’를 삶의 본질로 삼는다. 중도의 사람은 스스로 절제하고 삼가고 겸손하면서 항상 밝고 맑고 향기 나는 정서적, 윤리적 세목을 거느린다. 물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지혜’와 ‘사랑’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섭법(四攝法)’은 남에게 베푸는 보시(布施), 사랑스러운 말인 애어(愛語), 나의 일처럼 여기는 동사(同事), 남을 이롭게 하는 이행(利行)인데, 이 모든 것이 ‘무주상’을 바탕으로 한 지혜와 사랑의 실천 항목이 된다. 또한 이는 기독교의 ‘사랑과 공의’처럼,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중용’처럼,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지극한 삶의 지남(指南)이 된다.

불교와 기독교,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하나로 만나 전하는 메시지는 다름 아닌 ‘사랑’이다. 그 안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도 있고, 타인을 먼저 생각하라는 이타행(利他行)의 시선도 있다. 이렇듯 깨달음의 세계에서 사랑은 대자유를 구가하게끔 하는 과정이자 본질이 된다. 그것은 시공간으로부터의 자유, 번뇌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환희와 평화를 누리는 자유를 품고 있는데, 누가 이런 빛의 세상에 상주할 수 있겠는가. 그런 분을 우리가 부처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성불’은 불가 최후의 가르침으로서 가장 성스럽고 위대한 일대사가 된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그곳이 모두 진리라는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처럼, 가는 곳마다 향기를 남기는 ‘수처여향(隨處餘香)’의 삶을 사는 이가 무주상의 성불을 구현하는 이가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향원익청(香遠益淸)’이라고 했거니와 지혜와 사랑의 균형추를 통한 향기가 지상을 가득 채우길 소망해본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
한양대 국문과 교수  anniee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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