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오랜만에 안동 도산서원을 찾았다. 일찍이 겸재 정선이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에 담았던 고즈넉한 산수풍경이 가을 단풍으로 반짝이고 있다. 도산서원에 들어서자 초입에 이황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도산서당(陶山書堂)과 함께 농운정사(隴雲情舍)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농운정사는 퇴계의 제자들이 공부하며 기숙하던 공간이다. 퇴계는 농운정사의 구조에 대해 직접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舍)가 모두 여덟 칸인데, 재(齋)의 이름은 시습(時習)이요, 요(寮)의 이름은 지숙(止宿)이요, 헌(軒)은 관란(觀瀾)이라 하고, 합(合)하여 농운정사(隴雲情舍)라 한다.” 과연, 농운정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른쪽 마루는 공부하던 시습재(時習齋)이고, 왼쪽 마루는 휴식을 취하던 관란헌(觀欄軒)이며, 마루 뒤쪽은 잠을 자던 지숙료(止宿寮)이다.

나는 관란헌(觀欄軒)이란 현판에 숨결이 멈췄다. 관란헌의 관란(觀瀾)은 《맹자》의 〈진심상(盡心上)〉 편에 나오는 “관수유술 필관기란(觀水有術 必觀其瀾)”, 즉 ‘물을 보는 법이 있으니 반드시 물결치는 이치를 살펴볼지어다.’에 출처를 둔다. 물결의 이치를 바라보는 집이라니. 물결도 이치에 따라 흐르는가!

나는 관란헌 마루에 걸터앉았다. 배우고 익히다가 지친 유생들은 여기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길지 않은 휴식을 취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강 위로 축대를 올리고 담을 높이 쌓아 앞마당 건너 흐르는 강물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탓일까? 나의 상상력은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물고기 비늘처럼 일렁거리는 낙동강 물결을 마주하고 있는 유생들을 떠올린다. 유생들은 여기에서 강물 속에서 뜨고 지는 해와 달의 움직임들을 보고 느꼈을 것이다. 퇴계의 다음 시편은 관란하는 강물의 정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해 준다.

 

활활양양이약하  (活活洋洋理若河)
여사증발성자차  (如斯曾發聖咨嗟)
신연도체곤자견  (辛然道體困玆見)
막사공부간단다  (莫使工夫間斷多)

— 《퇴계집(退溪集)》 권 3

 

순차적으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넘실넘실 흘러라 저 이치 어떠한가. 흐르는 건 저 물과 같다고 공자는 말하셨네. 다행히 도의 전체를 이로써 보았으니 잠시나마 공부의 틈새가 없게 해다오,” 넘실넘실 흐르는 낙동강 물결 속에서 고요한 중심의 질서, 이(理)를 응시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과연 강물을 넘실거리게 관장하는 이(理)는 무엇일까?

이(理)에 대해 주자보다 더 깊이 고심한 것으로 알려진 퇴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면 다음과 같다.

“지극한 무(無)이지만 동시에 모든 유(有)를 가능하게 하는 지극한 유이고(至無而至有), 만물을 움직이게 하면서도 스스로 운동하지 않고(動而無動) 만물을 스스로 고요하게 하면서도 스스로는 따로 고요함이 없(靜而無靜)으며 음양과 오행 그리고 만사와 만물의 근본이 되면서도 음양오행과 만사만물의 가운데에 갇히지 않는다.”(《퇴계전서》 2권 22)

이토록 신묘한 근원의 본체를 물결에서 감지하고 향유하는 것이 관란(觀瀾)의 참뜻이다. 관란헌에서 유생들은 물결의 아름다운 현상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본질을 직시하고 터득하는 기쁨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거기에 그들의 진정한 휴식과 놀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결 하나에도 그 근원의 이치가 있음을 일상 속에서 찾고 향유하고자 하는 장면이다. 성리학에서 학문하는 태도의 기본을 강조하는 거경궁리(居敬窮理)(《대학》)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다. 거경궁리는 겸허한 자세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통해 터득하는 궁극적인 이(理)의 세계의 구현이다. 이를 깨우치면 활연관통(豁然貫通), 즉 막힘이 없이 두루 통한다고 한다. 이는 모든 사물에 두루 관통하는 존재 원리이며 우주의 이법이기 때문이다. 송나라 주자의 유학이 불교와 경쟁하면서 세련되어 가는 시기의 어법이다.

불가에서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했다. 작은 티끌 하나에도 우주의 존재 원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깨우치면 얻게 되는 활연대오(豁然大悟)를 강조한다. 나는 성리학의 이와 《화엄경》의 법신(法身)이나 비로자나는 근원 동일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자는 영성한 우주적 자아라는 가르침이다.

도산서원 앞마당으로 나왔다. 겸재 정선이 〈계상정거도〉에 담았던 고즈넉한 산수의 골법이 아직 그대로이다. 낙동강 물결이 그윽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후기산업사회의 중심으로 진입하면서 현란한 이미지와 부유하는 현상에 매몰되는 감각적인 세태로 몸살을 앓고 있지 않은가. 관란(觀瀾), 물결의 이치를 보라. 퇴계 이황 선생께서 일러주는 우리 시대의 죽비 같은 소중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홍용희
문학평론가 · 경희사이버대 교수 h2002@khcu.ac.kr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