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오늘 아침 꿈은 어지럽고도 사나웠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어떤 꿈이었는지 가늠해볼 겨를도 없이 대전 병원에 전화를 했다. 동생이 근무하는 병원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코로나에 걸린 채 같은 병실에 입원해 계셨다.

며칠 전 병원 입원해 계신 아버지를 간병하시던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던 노인이 열이 높아 코로나 검사를 했는데 확진으로 나왔다고 하셨다. 그분은 서둘러 다른 데로 옮기고 어머니, 아버지도 코로나 검사를 받으셨다고 했다.

하루 반을 기다린 끝에 결과가 나오기를, 두 분 다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장 격리 병실로 옮겨야 한다고 하셨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버지 연세가 아흔, 어머니는 다섯 살 아래로 팔십 하고도 다섯이나 되시는데, 코로나에 걸리신 것이었다.

사실은 나 자신도 한 열흘 전에 코로나에 다시 감염된 상태였다. 이번에는 오미크론 증세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난해에 델타바이러스 유행 때 생사를 오갔기에, 진행이 또 무서울 수도 있었다.

다행히 이번 증세는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부모님을 찾아뵐 수 없었다. 찾아뵙지 못한 그 사이에 두 분 모두 병원 감염으로 코로나에 걸리신 것이었다.

3년 가까이 겪은 코로나 유행은 나이 많은 사람일수록 무서운 법이었다. 큰일이었다. 오미크론이라 해도 아버지나 어머니같이 연로한 분들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이번에 병원에 입원하신 것은 요관내암이라는 새로운 암의 발견 때문이었다. 작년에 대장암 3기로 수술을 받으셨는데 그 후 쭉 누워만 계셨다. 구순 연세에 수술은 무리였지만 장출혈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최근 사흘째 빨간 혈뇨를 보신다는 얘기를 듣고 서둘러 검사를 받으시도록 했는데, 그 결과가 또 다른 암이었다.

십수 년 전, 70대 중반경에도 아버지는 암을 겪으셨다. 위암으로 위를 떼어내셨고 신장암이 겹쳐 콩팥도 하나를 떼어내셔야 했다. 전이가 아니라 다발성이라고 해서 불행 중 다행이었고, 선배의 소개로 분당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으셨다.

지독한 고통이 수반되는 항암치료를 아버지는 잘 버텨내셨다. 매일 아파트 옆 초등학교 운동장을 열 바퀴씩 도시며,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발톱이 새까맣게 타는 것을 버텨내셨다. 항암치료 이후 손발가락의 말초신경이 죽어 회복되지 않으신다고 했다.

대장암 수술로 누워 계신 아버지 옆에서 나는 당신의 인생에 관해 조금이라도 더 들어두려 했었다. 1933년생, 일제 말에 소학교에 들어가 해방 직후 졸업한 아버지는 집에서 상급학교를 안 보내주는 바람에 물지게 지고 밭일을 하며 몇 년을 보내셨다. 학교에서 못 쓰게 된 책상, 의자를 얻어다 밤에 공부를 계속하자 동네 사람들이 왜 이석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느냐고들 했단다. 남들보다 3년을 늦게 들어간 중학교에서 6개월 만에 3학년으로 월반하고 담임 선생님이 학적부를 만들어 주셔서 인천의 공고에 시험을 봐서 진학하셨다. 태안 사람들은 뱃길로 인천에 가서 생활을 개척한 사람들이 많았다. 학교에 들어간 첫날 럭비부 선배들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반강제로 당신을 럭비부 선수로 만들었다고 하셨다.

병석에서, 당신은 종이 줍는 사람들을 예사로 보지 않는다고 하셨다. 고등학생 때 폐지를 주워다 팔면 하루 먹을 수 있으셨다고 했다. 하루 한 끼가 예사였고 반찬도 없어 맨밥에 새우젓으로 배를 채우기 예사이셨다.

친구 부모님들의 배려로 부천에서 얻어먹고 지내며 서울사대 체육과에 시험을 치셨다. 사범대학 운동장에 붙은 벽보에 당신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친구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사실인지 모르겠어서 다시 학교에 가셨다고 했다. 운동장 바닥에 떨어진 벽보에서 다시 한번 당신 이름을 확인하고서야 안도를 하셨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대학 생활도 그 시절을 산 많은 분들이 그러시겠지만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가난의 연속이었다. 그런 중에도 원고지에 소설을 써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내셨고 영(英)소설을 읽으신 것이 내 대학생 시절까지 집에 책들이 남아 있었다. 펄벅의 《북경에서 온 편지(Letter from Peking)》는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덕산고등학교 시절, 체육교사 책상에 늘 영문 잡지가 있는 것을 보고 교감 선생님이 영어 실력이 진짜인지 영단어 테스트를 가끔 해보셨다고 했다. 나중에 이분이 대전고 교장이 되어 공주고에 가 계시던 아버지를 부르러 오셨다고 했다.

공주 시절, 아버지는 공주사대 체육과에 원서강독 강의를 나가셨는데, 그 시절의 아버지를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아랫목에 앉은뱅이 탁자를 펴놓고 영어 원서를 밤늦게 공부하시곤 했다. 그때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만 하면 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자식들 셋 공부시킬 생각에 대전고로 전근을 결심하셨다고 했다.

지금 하는 이 이야기는 아버지 자랑이 아니요, 한 사람의 일생을 내가 한번 추억해 보려는 것이다. 이 글의 제목도 처음에는 ‘아버지’가 아니라 ‘생의 마지막 국면’이라 했었다.

어려서 보면, 아버지는 늘 어머니 등쌀에 시달리셨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미 한 번 결혼했다가 이혼하신 데다 딸까지 하나 딸린 처지에 새장가를 드셨기 때문이었다. 이 첫 번째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상세한 말씀을 들어볼 수 없었다. 이복 누나는 내 외갓집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살았고, 친모에게도 가서 살았는데, 우리 집에서 살 때 폐결핵을 앓아 아버지가 매일 직접 커다란 주사를 놓아주시는 것을 보았다.

한배 아래서 난 아버지의 친동생, 곧 나의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이나 되었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당신 삶의 마지막 국면에 다다라 계신 것을 느낀다.

전화를 해보니, 다행히 오미크론은 구순이나 되시는 아버지를 심하게 괴롭히지 않는 것 같다. 어머니도 목이 잔뜩 잠겨 계시지만 다른 데는 아무렇지도 않으시다고 한다.

이 글을 조금씩, 너무나 느리게 쓰는 사이에, 아버지 어머니의 격리 일주일이 다 끝나간다. 어머니를 쉬시게 하려면 내가 단 며칠이라도 코로나 검사를 다시 받고 간병을 해야 한다. 남의 손 타는 것을 유난히 싫어하시는 아버지에, 어머니까지도 간병인 두는 것을 극히 싫어하신다.

그 사이에 이종사촌 형이 고관절 수술을 받아 무슨 일인지 폐가 갑자기 상해서 돌아가시고, 이태원에서는 무려 156명이나 되는 아까운 젊음이 덧없이 스러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바야흐로 죽음을 바로 옆에 두고 살아간다. 어느 한 사람도 태어나 살다 죽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이 철리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긴다. 법정께서는 죽음은 ‘우레와 같은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셨다.

아버지는 병석에서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말라고 하셨다. 당신은 괜찮다고, 누구나 한 번 겪는 일이라 하셨다. 몸조심하고 명랑하게 살라고 하셨다. 이 명랑이라는 말이 참 새삼스럽다. 이미 마음에 각오가 되어 계신 것이다.

 

방민호
문학평론가 · 서울대 교수  rady@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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