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독실한 기독교인인 대학 시절의 은사는, 내가 불교를 신봉한다는 것을 아시고, “불교는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주의야.”라고 말씀하셨다. 인생을 고해(苦海)로 보고, 세상을 무상하다고 하니, 허무주의 아니냐는 말씀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적지 않다.

명철한 사회학자였던 내 매형은, 말년에 노인 우울증이 오자, 죽음의 공포와 앞날에 대한 불안 때문에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말씀하셨다. 평소 기독교에 비판적이었던 분이라, 원불교 교당에 나가보시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분은 가톨릭 성당에 나가셨다.

뜻밖의 결정이라 그분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분의 대답은 이러했다. “불교는 내가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기독교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게 해준다니 편하잖아. 내가 늙어 기력이 없으니 편한 길을 택했지.” 명철한 사회학자답게 자력 신앙과 타력 신앙의 차이를 인식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불교가 노력해서 깨닫는 종교라면 허무주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정신 바짝 차리고 깨달음의 길로 가야 하는데 허무주의가 어떻게 끼어들겠는가.

불교에서 삶을 고통으로 보는 것은 세상이 불행의 연속이라는 뜻이 아니다. 불교의 세 가지 진리[三法印]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다.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기도 하는데, 나는 이것이 허무주의라는 의혹에 맞서려는 후세의 부연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변하는 대상에 불변의 실체가 없으니, 생이 괴롭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대상이 그대로 존재하거나, 변하더라도 불변의 그 무엇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서 생이 괴로운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세상의 불행을 뜻하는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고통을 의미한다.

세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했던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가 6년의 수행 끝에 터득한 진리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다. 이것이 일체개고의 원인임을 알아낸 것이다. 이 세상이 실체 없는 그림자와 이미지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림자 세상의 발견,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 유명한 《금강경》 끝 구절에는 “일체 모든 현상이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응당 이것을 꼭 알아야 한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세상이 그림자와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어찌 그뿐인가. 같은 경전에 “모든 현상은 실체가 없으니, 모든 현상이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임을 알면, 곧 진리를 아는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도 나온다.

널리 인용되는 《화엄경》의 유명한 사구게(四句偈)는 “누군가가 삼세 모든 부처의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현상 세계가 모두 마음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말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끝없이 변화하는 현상만 있으니 그것을 그림자, 이미지라고 본 것이다. 그림자에 매달려 헛된 망상에 빠지지 말고 현상을 똑바로 보라는 뜻이다.

이미지와 그림자를 강조하는 것을 보면 불교가 허무주의로 오인될 소지도 있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무질서하게 조합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에 의해 연결된다. 인과(因果) 연기(緣起)의 관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이 인과 연기를 믿어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가장 먼저 성찰한 것이 연기의 12가지 과정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연기의 과정에 의해 생성 소멸함을 성찰한 것이다. 연기에 의해 고정된 실체 없이 끝없이 변하는 현상의 모습을 후세의 대승불교에서는 공(空)하다고 했다. 실체 없이 이미지로 구성된 현상계(色)의 모습을 공(空)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공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다채로운 이미지가 가득한데, 그 다채로운 형상이 계속 흘러갈 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실체 없는 세상은 온갖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다(空卽是色).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이미지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각각의 이미지들이다. 우리는 이미지 세상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미지 세상의 논리에 충실해야 한다. 인과 연기의 원리를 숙지하고, 있는 힘을 다해 좋은 이미지를 구성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좋은 이미지를 만들면 좋은 세상이 펼쳐지고, 나쁜 이미지를 만들면 악몽과 같은 세상이 전개된다. 이것이 인과응보의 이치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좋은 세상을 꿈꾸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금강경》에 “응당 머무르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以生其心).”라는 구절이 나온다. 전후의 문맥을 보면 감각의 세계에 좌우되지 말고 깨달음의 마음을 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뜻을 본받아 실천하면 생활에 도움이 된다. 순간순간 명멸하는 이미지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이미지를 향하여 나아가면 된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다가 너무 집착한다는 느낌이 들면, 모든 것이 이미지와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집착에서 오는 번뇌가 사라진다.

사람은 세상 떠날 때 유언을 잘 남겨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남기고 싶은 유언이 있다. 나의 죽음을 지켜보는 가족들에게 “한바탕 좋은 꿈 잘 꾸고 간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 꿈이 다음 세상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윤회가 사실이라면, 그 꿈을 다음 세상에 갖고 가고 싶다.

 

이숭원
문학평론가 · 서울여대 명예교수
nanan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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