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오지랖’과 ‘금도(襟度)’라는 그 좋은 말이 오남용되고 있다. 오지랖이나 금도는 겉저고리 옷자락에서 나온 말로 감싸는 포용력, 도량이 넓다는 뜻. 그런데 요즘은 ‘오지랖이 넓다’는 ‘주제넘게 이일 저일 간섭하려 든다’는 뜻으로, 금도는 ‘벗어났다’는 비난으로만 잘못 쓰이면서 사회가 날로 강퍅하고 무서워지고 있다.

정치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오지랖이나 금도가 넓은 사람보다는 좁은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 같다. 상대방은 아랑곳없이 목소리가 송곳 같은 사람만이 득세하며 우리네 가없이 넓고 깊은 삶을 둘러볼 여유를 못 갖게 하는 것 같다.

서정주와 고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던 두 시인의 현 상황을 떠올리면 땡감 씹은 듯 아리고 떫다. 야박하고 무섭다. 우리 시대와 사회의 오지랖이 이것밖에 안 되어야 하는지 묻고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1968년에 펴낸 서정주의 다섯 번째 시집 《동천(冬天)》에 실린 시 〈내가 돌이 되면〉 전문이다. 법계 무진연기가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흐르고 있는 시다. 신라 정신과 불교, 즉 영통(靈通)과 영교(靈交), 그리고 윤회전생(輪廻轉生)으로 이어지는 진경(珍景)을 보여주는 시집이 《동천》이다.

그 시집 뒤에 실린 글에서 서정주는 “불교에서 배운 특수한 은유법의 매력에 크게 힘입었음을 여기 고백하여 대성(大聖) 석가모니께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고 밝혔다. 그래서인가,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다’는 고승(高僧)의 어법처럼 자연스럽고 훤한 시다. 그래 번역, 소통으로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이 불교 문법의 시를 외국인들도 무척 좋아하고 있다.

서정주는 19세 때 석전 박한영 대종사한테 서울 동대문 밖 개운사에서 머리를 빡빡 깎고 중이 됐다. 석전은 유불선(儒佛仙)에 두루 통달한 대학자로 오랫동안 종정을 역임했고 그 문하에서 이광수, 최남선 등이 수학했다. 한용운도 석전을 스승으로 모시며 적잖은 헌시(獻詩)를 짓기도 했다.

아침저녁 예불도 올리고 《능엄경》도 부지런히 읽으며 개운사에서 겨울과 봄을 난 서정주는 여름이 되자 석전의 허락을 얻고 여비도 타서 참선하러 금강산 장안사로 갔다. 그 절에 주석하던 만공 선사를 찾으니 “중이 되려면 여간 각오로 안 되는 것이니, 뒤에 후회 안 하겠는지를 많이 생각해보라”란 말만 한 뒤 본체만체하고 예쁘장한 여승들과만 어울리더란 것이다. 그래 이튿날 “후회할 것 같아 그냥 가겠습니다.” 하고 돌아왔다.

절을 떠나 서정주는 부지런히 시를 써서 우리 민족시의 전통을 흐르는 강심수(江心水)가 됐다. 민족의 정한(情恨)을 모국어의 혼과 가락으로 풀어내 반만년을 살아온, 앞으로도 민족의 가슴속에 살아갈 시인이 됐다. 서정주 시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우리 민족혼과 모국어의 깊이와 넓이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시인들은 물론 많은 국민이 잘 알고 있다.

 

다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
이때가
가장 한심하여라
칼로 쳐라

다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
소가 소고기가 되는 동안

 

고은이 1991년 펴낸 신작 시집 《뭐냐, 고은 선시(禪詩)》에 실린 시 〈소고기〉 전문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새로운 길로 들어서듯 머물러 무엇이 되려 하지 말고 바람처럼 떠돌라는 시다. 무엇이 되려는 집착으로 한 세계에 머물면 소가 생명을 접고 소고기가 되는 것과 무에 다르겠는가.

“존재란 없어. 행(行)이 있을 뿐이지. 내 생이 동사(動詞)이듯이 내 죽음도 동사일 거야. 요컨대 이 세상의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 떠돌고 흐르고 돌고 돌지. 무엇이 무엇이 되고 또 무엇이 되지.”

고은은 동사의 삶이고 동사의 시인이다. 머묾도 떠남도 생사도 없는, 윤회를 완전히 벗어난 ‘무여열반(無如涅槃)’이 아니라 머묾 없이 떠나고 또 떠나는 ‘무주열반(無住涅槃)’을 꿈꾼다. 무엇이 무엇이 되고 또 무엇이 되는 전화(轉化)로서의 행이 삶과 우주의 본질 아니겠는가.

고은은 18세에 출가, 효봉 스님 밑에서 ‘일초’라는 법명으로 10년간 수행했다. 일초(一超)는 “단번에 뛰어넘어 부처의 지경에 이른다(一超直入如來地)”는 말이다. 그런 법명답게 시인은 한순간도 한 세상에 머묾 없이 활동하고 시를 써 시집만도 시인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시 세계가 거침없이 호방해 리얼리즘이니 서정이니, 선시니 민중시니 따지는 것을 하찮은 소인배 짓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 넓고 깊은 세계를 호방하게 묶고 있는 것은 불교다.

그런 서정주, 고은 시인이 지금 우리 시대의 질타를 받는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 좋은 시편들이 삭제되고 매장당하고 있다. 시류(時流)에 휩쓸릴 수 없는 우리네 마음자리, 어떤 한 면만으로 재단되어서는 안 되는 다층적 삶의 깊이와 자존을 위해 사회와 시대의 오지랖과 금도가 좀 더 넓었으면 한다.

 

이경철
문학평론가 ·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
abkc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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