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시아버지는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다. 동시에 가족 중에서 가장 먼 사람이기도 하다. 부모시니까 호적으로는 가깝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조금 다르다. 가족 밥상에서 내 자리와 아버님의 자리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종종 내가 앉는 밥상과 아버님의 밥상은 다르기도 하다. 어머님이 맛나게 드시는 게 무엇인지는 어머님이 직접 말씀해주셨다. 그런데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반찬과 싫어하시는 반찬은 어머님의 입을 통해 건너 들었다. 어떤 옷을 즐겨 입으시는지, 신발 치수는 어떻게 되는지도 직접 듣지 못했다. 아버님은 원래 말씀이 거의 없으시고 하실 말씀은 대개 어머님을 통해 하신다. 나에게는 “왔냐”와 “조심해 가라” 이 두 마디 하시면 다 하신 거다.

처음에는 아버님이 나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다. 새색시 때는 아버님 눈치를 많이 봤다. 내가 우리 아버님을 처음 뵌 건 스물여섯, 상견례 자리였다. 그전에 어머님은 종종 뵈었지만 아버님을 뵙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 남편은 판사로 임명되어 부산 발령을 받았는데 아주 내려가기 전에 식을 서두르게 된 상황이었다.

교대역에 있는 한정식집에서 아버님을 처음 뵈었을 때 나는 식당 바닥에서 바로 큰절을 올렸다. 그때 “음, 그래.” 딱 이 두 마디 하셨다. 아버님의 얼굴을 보니 입꼬리가 내려가 있고 눈초리는 올라가 있어서 화가 난 사람 같았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사천왕상이 떠올랐다. 우리 부모님이 오시고도 별말씀 없으셔서 나는 판사 아들에게 대학원생 며느리라니 성에 안 차시는가 보다 하고 겁을 먹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 아버님은 원래 무뚝뚝한 분이셨다. 누가 뭘 물어도 단답형으로 대답하시곤 했다. 내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는 어머님에게 “큰애 많이 먹으라고 해.” 이렇게 비켜 말씀하셨고, 아이를 낳고 난 다음에 오셔서는 “수고했다.” 이 말만 하시고 휙 돌아서셨다. 처음에는 내가 좀 오해했지만 살면서 점차 알게 되었다. 아버님은 쑥스러우셨던 거다. 이제 아버님의 목소리를 거의 듣지 못해도 집안에서 접점이 별로 없어도 자연스럽다. 우리 아버님은 표현은 안 하실 뿐 자식 걱정이 많고 자상한 분이다. 별장에는 손주들 숫자대로 나무를 심어주시고 여름에는 수영장에 물을 채워놓고 기다리실 정도로 정이 많은 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지난 스무 해 동안 아버님과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가까워졌다. 가까워지는 데에 스무 해가 걸렸으니까 멀어지는 데에도 스무 해가 걸리면 좋을 일이다. 그런데 세상의 일, 특히나 나쁜 일은 꼭 갑작스럽게 생긴다. 스무 해는커녕 아버님과 내가 만날 날은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다.

지금 우리 아버님은 말기암 환자다. 아버님의 칠순 기념 선물로 건강검진을 시켜드릴 때만 해도 건강하셨다. 그런데 그 후 몇 년 후에 갑자기 췌장암이 발견되었다. 췌장과 담낭, 간 일부를 절제할 때만 해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다들 조기에 발견되어 너무 다행이라고도 했다. 우리 아버님은 평생 감기 한번 앓아본 적 없고 건강에 자신 있는 분이셨다. 항암이 필요 없을 정도로 거뜬하게 나으시고는 아버님이 사랑하는 별장으로 돌아가셨다. 매일 잔디에 물을 주고 텃밭에 배추를 심는 아버님은 전원생활을 행복하게 즐기시는 듯했다.

그런데 완치 후 3년이 지났을 때 갑작스럽게 암이 재발했다. 이번에는 간암이었다. 간 전체가 빠르게 암세포로 덮여서 이식을 준비했는데 바로 위와 폐에도 전이가 되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지 말자고 했다. 항암을 하면서 아버님은 이틀에 한 번꼴로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 열이 오르고 배가 뒤틀리는 새벽마다 두 아들은 아버님을 업고 병원으로 달렸다. 나는 주말마다 아버님이 좋아하시던 음식을 싸 들고 갔다. 그렇지만 아버님은 토하는 게 무섭다고 입도 못 대셨다.

그때만 해도 아버님은 재발이라고만 알고 계셨지 정확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 가족들이 쉬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당신의 상태를 알게 되셨을 때는 크게 화를 내셨다. ‘나는 항암을 하지 않겠다. 대신 생을 잘 끝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아버님은 내내 진통제와 링거로 버티셨다. 그러다가 이번 주에는 마지막 준비를 위한 병원에 입원하셨다.

죽는 게 무섭고 싫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아들과 아내, 며느리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다. 대신 손주들을 오래 보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었다고 우셨다. 별장의 나무는 누가 돌보냐고 흐느끼셨다. 나는 아버님이 우시는 것을 처음 보았다. 등허리가 굽어지고 고개를 숙인 모습도 처음 보았다. 그 강인했던 아버님이, 일부러 질문하지 않으면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던 분이 먼저 서러움을 토로하시는 것에 모든 가족의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나는 아버님께 살가운 며느리는 못 되지만 분명 아버님에게 의미 있는 존재이고, 아버님 역시 내게 의미 있는 존재이다. 아버님이 있어서 남편이 있었고, 남편이 있어서 나는 아내라는 이름도 얻을 수 있었다. 아버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부부는 소중한 아이들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고 불교 경전은 말한다. 연기설에서 강조하는 인연이라는 말만큼 가족의 관계를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그야말로 아버님과 나, 아버님과 가족들은 인연으로 연결된 관계인 것이다.

그 인연의 끈을 죽음이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다. 일반적으로 끈은 오래되면 낡고, 세게 잡아당기면 끊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인연의 끈도 그럴까. 우리 아버님과 우리의 인연은 가족이라는 이름과 자식들의 존재 속에서 계속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아버님이 당신의 육신과 연결된 끈, 지상과 연결된 끈을 큰 고통 없이 잘 마무리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 서울대 교수
kaerun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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