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우연한 기회에 이완우 선생이 40여 년 가까이 공들여 수집했다는 임진강 돌들을 보았다. 아마 그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기보다는 오래전 예비해 두었던 하나의 만남이었을 것이 이 또한 어떤 알 수 없는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천태만상의 인간적 형상을 지닌 수십여 점의 돌을 바라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1991년 8월 일본 경도 용안사(龍安寺)의 ‘돌의 정원’에서 보았던 돌들이다. 그 당시 나는 미국에서 한국 현대시 특강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고 오랜 친구의 권유로 잠시 일본 경도를 방문하여 불교사찰을 순례하고 있었다. 이때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곳이 바로 이 정원이었다. 일본인들이 세계 3대 정원이라 자랑하는 이 정원의 방장실 앞에 앉아, 찌는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동안 하얀 모래가 물결치는 열다섯 개의 돌이 상호 조응하는 공간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 돌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머리는 텅 빈 상태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백지상태였다. 무념무상의 몰입 순간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각양각색의 이방인들 또한 이 정원 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을 통해 자연을 넘어선 이 완벽한 조형미는 그 후 어디에서 찾을 수 없었다. 이와 유사한 정원은 경도에 여러 곳 있어도 그와 같이 절대적인 예술적 감각을 지닌 정원석의 배치는 다시 찾기 어려웠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 그러했을까. 나는 이 의문을 오래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고도의 조형미를 가진 예술인이 완성한 탁월한 인공미가 세속을 초월하는 자연미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은 고도의 추상미학의 절대적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훗날 보게 된 이우환의 ‘돌 작업’은 여기서 첫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 짐작한 것은 나의 추정에 불과할지 모른다.

세계적 명성을 가진 예술가 이우환이 여백의 미를 강조하며 창조해낸 돌과 철판으로 구성한 설치미술들은 내가 용안사에서 보았던 ‘돌의 정원’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미적 감각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보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현대미술사에서 기념비적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임진강 돌에서 풍겨 나오는 천태만상의 표정은 그들이 나에게 무언의 호소를 하는 것 같았고, 그러면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지금까지 어깨 너머로 간간이 보아 온 산수석의 형태미와는 다른 돌들이 지닌 인간적 형상은 수천 년 전부터 축적된 어떤 이야기를 나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늘에 하소연하는 것 같은 표정이나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간절히 기도하는 것 같은 형상들은 나를 강한 충격에 빠트렸으며 그들이 나에게 다가와 무언가 말하려고 호소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임진강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피어린 역사를 담고 있다. 북으로는 한탄강에서 발원하여 임진강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들어 한반도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물줄기인 임진강은 바로 이런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석기시대 이전부터 남과 북의 투쟁과 공존을 하나의 물줄기로 만드는 강이라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온갖 역사적 풍파를 보고 듣고 겪은 시련의 강이라 할 수 있다.

이 강물이 형성된 이래 그 시련의 역사를 품에 안고 통곡하고 울부짖던 산과 바위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는 결정체가 바로 임진강 돌들이고, 그 돌에 누적된 역사의 흐름이 축적되어 시간을 초월한 아픔이 거기에 아로새겨져 있다. 거칠고 부드러운 각양각색의 물살이 다듬어 놓은 세월과 인간의 숨소리가 들어 있다는 말이다. 현대의 어떤 조각가도 새길 수 없는 추상 조각이 임진강 돌들이다. 마치 우리가 아프리카인들의 미술에서 최첨단의 현대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형상과 표정으로 임진강 돌들은 지금의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지 모른다.

나의 스승 조지훈 시인은 돌에서 ‘뇌성벽력’을 듣는다고 〈돌의 미학〉에서 말한 바 있다. 비단보다 부드러운 살결을 지닌 임진강 돌의 석질을 만져보면서 나는 쉼 없는 세월을 굽이쳐 간 강물 소리를 손끝에서 실감했다. 거친 표면을 지닌 어떤 돌에서는 버려지고 소외된 역사의 험난한 도정을 읽을 수 있기도 했다. 이 소리들의 반향은 내가 ‘돌의 정원’에서 느낀 무념무상의 것과는 다르다. 인공적 조형미의 절정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그런 미를 초월하여 자연이 만들어낸 돌이 무언가 인간의 얼굴로 어떤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자연이 만들어서 자연이 자연을 뛰어넘는 추상조각의 진정한 예술미를 엿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원시적이면서 가장 현대성을 지닌 자연의 형상이다. 인간이 조형한 예술은 자연미를 표현하려 하고 그 최대치에 도달하고자 한다. 어찌 보면 불가능에의 도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적 표정을 지닌 임진강 돌들은 천지만물이 상호 조응하여 만들어낸 각양각색의 오묘한 조각품이지만 오히려 그것은 자연을 추상하여 인간이 표현하고 싶어도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초월하는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 조형한 그것은 예술 이상의 자연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궁극적으로 구체성을 넘어선 추상예술이라 명명할 수 있는 역설적 의미를 지닌 무위자연의 조형물이다. 강변을 걸으며 돌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수석인이 진귀한 돌을 발견하고 그 돌에 손을 맞잡는 순간, 형언하기 힘든 희열이 넘쳐난다고 한다. 수천 년 풍상의 세월이 형상화시킨 자연미의 극치를 접하는 순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것은 자연미와 인공미의 근원적인 차이일지도 모른다.

이우환은 자신이 찾는 돌을 구하기 위해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고 고백한 바 있다. 아마도 그는 자연의 원시성을 머금은 초현대적 미학을 지닌 돌을 찾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가 임진강 돌들을 보게 된다면 어떨까. 아마 그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기 힘든 자연미의 독창적 형상을 만나게 될 것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임진강 돌들의 독창성과 보편적 예술성을 말해 두고 싶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 중심부에서 산출된 임진강 돌의 조형미에 대해 새로운 현대성을 부여해야 할 중대한 시점에 도달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직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예술미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줄 것이다.

이완우 선생의 40년 가까운 집념 어린 탐석의 과정에서 찾아낸 임진강 돌들의 여러 가지 오묘한 형상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새롭게 인식해야 할 미술사적 과제이다. 이는 한국의 수석을 예술적 명품으로 크게 도약시키는 기회가 될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미적 가치가 새로이 평가될 역사적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동호
문학평론가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cdh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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