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며칠 전 시집 해설을 쓴 일이 있다. 작품은 “소녀가, 18, 저만의 시니피에를 던지고 간다.”라고 시작되고, “면은 공간의 프레임을 만든다. 때론 어설픈 말보다 한 컷의 눈이 불립문자를 이룬다 해도.”라며 끝을 맺는다.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형상을 ‘기호’라고 한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다. 언어적 기호에 있어서 기표는 말의 소리고, 기의는 그 말에 의해 의미 되는 개념을 말한다. ‘18’이라는 아라비아 숫자는 민족과 국가를 떠나 누구에게나 ‘열여덟’이라는 수를 나타내는 기의를 갖는다. 그러나 이를 한국식으로 발음하면 ‘시팔’이 되고 이는 욕설로 작동하며 또 다른 기의로 변화한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왜 이 기호가 ‘열여덟’이 되고 ‘시팔’이란 욕설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관습 말고는 다른 내재적 이유란 전혀 없다. 따라서 “18”이란 기호는 얼마든지 한국 소녀에게 저만의 기의, 즉 시니피에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이 발화는 올바른 언어 구사라 할 수 있다.

면은 어찌하여 공간의 프레임을 만드는가. ‘프레임(frame)’은 원래 ‘창틀’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인간의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의 ‘직관적 틀’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사용된다. 이는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대상의 해석이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나 밤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한 여대생이 있다 하자. 사람들은 밤에 남자들에게 서비스하는 이 아가씨를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러나 이 아가씨가 낮에 학교를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이라고 한다고 하면 그 반응은 달라질 것이다. 술집 아가씨라는 상황은 같지만 어떠한 프레임을 갖고 보느냐에 따라 상황의 해석은 달라진다.

프레임에 따라 공간 형상의 기호도 달리 보일 수 있고 물론 의미도 달리 해석될 수도 있다. ‘불립문자’는 도의 깨달음을 문자나 말로써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의 불가(佛家)의 말이다. 그렇다. ‘한 컷의 눈’, 즉 하나의 이미지로 조감하여 보는 풍광이 ‘어설픈 말’보다는 오히려 감각적으로 육박해오고 더 잘 전달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기의’에 따라서 혹은 ‘관점’에 따라서 말이라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쉽게 변모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인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말은 “모든 불법의 오묘한 이치는 문자에 매여 있지 않다”라는 혜능 선사의 말씀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이 말씀은 글자를 모른다는 선사에게 ‘글자도 모르면서 어찌 뜻을 이해할 수 있느냐’ 묻자 그 대답으로 한 말이다. ‘불립문자’나 이런 말씀은 선가의 책을 뒤적여본 사람이라면 낯선 언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법의 실제 세계는 도대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 길이 없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실제’는 ‘허망한 환(幻)’에서 떠나는 ‘궁극’이라고 설명한다. ‘환’은 없음에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계, 즉 환상과도 같은 세계가 될 것이다. ‘허망한 환’을 떠나면 궁극이고 그것이 실제가 된다고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환의 세계를 떠나는가 하는 데 있다. 왜냐면 환이 환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가 없는 그것은 마치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뿐 실제로는 있을 리도 없고 보일 리도 없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환’에서 어떻게 떠날 수 있는 것인지 머리가 갸우뚱해진다.

원효는 이어 부처가 설명하는 것은 의를 나타낸 말(義語非文)이요 문자가 아니지만, 중생이 설명하는 것은 의가 아니고 문자만 나타나는 말(文語非義)이라고 설파한다. 공허한 문자만 있을 뿐 여실한 의가 없다면 그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어비문’에 담긴 말조차 우리가 그 뜻을 알아듣기 어렵다는 데 있다.

나는 ‘기의’에 따라서 또는 ‘관점’에 따라서 언어의 의미가 얼마나 변모될 수 있는가 하는 명제로 글의 물꼬를 트고, 선사의 말씀들을 인용하며 그것에 담긴 의미를 고구해 봄으로써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말씀들을 언급하다 보니 솔직히 필자 자신이 헷갈리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의지할 수 있는 다른 말씀들도 있으니 내친김에 가던 길을 계속 가 보자.

문익(文益) 선사는 문하의 제자에게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다만 시절인연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본적(本寂) 선사는 “검은 고양이나 흰 암소는 부처도 모르고 조사도 모른다. 배고프면 풀 뜯어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실 뿐이다. 이럴 수만 있다면 이루지 못할까 근심할 것도 없다.”라는 법문을 남겼다. 이런 말들은 ‘수연임운(隨緣任運)의 평상생활’이 바로 수행이라는 가르침과 다름없다. 즉 출세간적 해탈이나 피안세계의 신앙에서 벗어나 마음을 현세당하(現世堂下)에 두라는 말이다.

이는 계절의 운행에 따라 농사짓는 농민의 삶과도 같다. 그들이야말로 분수 지키며 ‘시절인연’에 맞추어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에게 자연은 삶의 조건인 동시에 그들 자신이다. 바로 ‘천인합일’의 정신이다. 해 뜨면 나가 일하고 해 지면 돌아와 쉬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원시적 계합이었으며 대표적인 천인합일의 체현이었다. 농민은 교육받지 못했고 글자도 몰랐다. 경험의 축적과 즉각적인 체감으로 자연에 순응하며 살 뿐이다. 그들에게 검은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온다는 것은 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얻어진 ‘직관적 통찰’이다. 다시 말하자면 불가의 ‘돈오(頓悟)’다.

추우면 불 쬐고 더우면 바람 쐬는 임운자연의 삶은 확실히 제왕의 권부를 능가하는 정신적 초월이 있다. 불법대의란 번쇄하고 난해한 경전 설법도 형이상학적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봄이 오면 밭둑에서 만나는 파릇파릇한 풀들에게 감도는 생명, 바로 그 생명철학이다. 농민의 천인합일의 생활방식은 ‘자아해탈’이라는 생동하는 생명철학을 만들었다. 선은 생명의 각성이며 그 가치에 대한 절대 긍정이다. 그것이야말로 지혜의 획득이고 보리(菩提)의 파악이 아닐 것인가.

어쭙잖은 토를 달면 군더더기가 되기 십상이다. 선사의 한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봄이 오니 풀이 스스로 푸르구나!(春來草自靑)”(《경덕전등록》)   

 

호병탁
문학평론가 · 전 원광대 초빙교수
bt-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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