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내가 김성동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 말 여의도 홍기삼 선생님 댁에서였다. 내가 선생님 댁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크게 취해 있었다. 술잔을 들고 꾸벅꾸벅 졸다가 문득 눈을 뜨면 술을 마셨고,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어 했다. 그런 김성동을 홍 선생님은 잘 다독이다가 택시를 불러 집에 보냈다. 김성동은 서라벌고등학교 재학 시절 홍기삼 선생에게 배운 제자였다. 홍기삼 선생은 가끔 고교 시절의 김성동을 떠올리며 그의 재주를 아까워했다.

얼마 뒤 인사동에서 홍기삼 선생과 함께 김성동을 마주쳤다. 놀랍게도 그는 나를 기억했고, 또 술판이 벌어졌다. 그와 대작할 만한 술꾼이 못 되는 나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술자리가 길어지자 그는 또 취했고, 홍 선생님이 잘 달래 택시를 태워 보냈다. 그리곤 다시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김성동이 고등학교를 마치지도 않은 채 도봉산 천축사를 찾은 것은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프로급의 바둑 실력자로 인정받았으나 프로 기사가 되지 못했다. 아버지의 좌익 활동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의 마지막 선택이 출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1975년 〈주간종교〉 종교소설 부문에 당선한 〈목탁조〉가 불교계를 악의적으로 비방했다고 하여 그는 종단으로부터 제적당했다. 그 뒤 〈목탁조〉를 중편으로 개작한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1978년)을 받고, 다시 이 소설을 장편으로 개작한 《만다라》로 일약 한국 문단의 기린아로 떠오르게 되었다.

한국 소설가 중에는 아버지의 좌익 활동 때문에 고생을 한 이가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제일 널리 알려진 작가가 이문구 · 이문열 · 김성동이다.

이문구는 소설에서 부친 얘기를 극히 아꼈다. 《관촌수필》 연작의 하나인 〈공산토월(空山吐月)〉에 젊은 아버지가 석공의 혼례식에 참석해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는 삽화 외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석공의 의리 이야기로 이해하고 있으나, 실은 그를 통해 아버지의 인간 됨됨을 보여주려 한 작품이라 보는 게 옳다. 이는 구름을 그려 달을 드러내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의 동양화 기법을 소설에 원용한 흥미로운 사례다.

젊은 시절 이문열은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부친 얘기를 소설화한 《영웅시대》가 일종의 반공소설로 읽힌 것만으로도 아버지에 대한 작가의 애증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북한의 이복형제와 만나는 등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김성동은 〈고추잠자리〉에서 아버지 얘기를 적극적으로 그렸고, 〈멧새 한 마리〉 〈민들레 꽃반지〉에서는 모친의 혹독한 삶을 소설화하여 연좌제를 비판했다. 그가 《민들레 꽃반지》로 요산 김정한 문학상을 받고 대성통곡한 것도 아버지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문구와 김성동은 모두 충남 보령 태생이다. 이들의 소설 문체는 치렁치렁하고 질펀하다. 마치 판소리 가락을 듣는 것 같은 이들 소설은 날 선 풍자가 숨어 있어 단순하지 않다. 특히 이문구는 서구 번역체 문장이 유행하는 문단에 거부감을 보이며 자기만의 문체를 계발했다. 보령 출신 작가의 소설 문체가 특이한 것이 지역 탓인지 개인 기질 탓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문희(李文熙)나 김종광 소설 문체도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게 흥미롭다.

《만다라》는 지산과 법운 두 수도승의 상이한 수행방식을 대비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지난함을 일깨운 소설이다. 이 소설이 파계승 지산의 언행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파계(破戒)가 곧 지계(持戒)라는 역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계율에 얽매이지 말라는 경계의 의미이지 수도승의 음주와 끽연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지산이 스승에게 받은 화두는 ‘병 속의 새’다. 병을 깨뜨리지 말고 자유롭게 풀어주라는 게 그가 해결해야 할 숙제다. 하지만 그는 화두를 풀지 못해 방황하다 끝내 눈(雪) 속의 시체로 발견된다.

불교의 ‘불립문자(不立文字)’는, 참된 진리(깨달음)는 말이나 글로 전할 게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以心傳心) 전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말과 글의 불완전성, 또는 위험성에 대한 경계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말은 듣는 이의 감정이나 언술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까 하노라”란 우리 속담도 말의 다의성과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다.

지산은 ‘병 속의 새’라는 화두를 받고 언어의 감옥에 갇혔다. 죽을힘을 다해 날갯짓을 하며 병 밖으로 탈출하고자 애쓰는 새는 바로 지산 자신이다. 그는 화두를 받고 그 화두를 의심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그 순간, 그의 의식과 정신은 병 속에 갇힌 새처럼 자유를 잃는다.

잠시 생각을 바꾸면, 병 속에 새가 갇혔다는 상황은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가능한 상황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오해하고 형식논리에 갇혀 문제를 풀려 한다.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말 그대로 도로(徒勞)에 지나지 않는다.

잘 아는 것처럼, 불교에서는 중생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중생이 본래 자유 존재라는 의미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생은 본래의 불성을 깨우치지 못한 채 탐진치의 고해(苦海)에서 허우적거린다. ‘병 속의 새’란 화두는 그런 중생의 어리석은 모습을 압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병 속의 새를 꺼내려 헛수고할 게 아니라, 병 그 자체를 부정하면 새는 자유롭게 하늘로 비상할 수 있다. 지산은 그 점을 깨닫지 못해 병 속에서 날개를 파닥이다 끝내 자멸한 것이다.

《만다라》는 비단 불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문단에도 큰 충격과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소설은 《원효대사》(이광수)나 〈등신불〉(김동리) 같은 작품을 정통 불교소설이라 이해했던 우리 문학계를 단숨에 뒤엎었다. 그래서 원효나 경허의 무애행을 흉내 내며 그러한 행위만이 올바른 수행이라 주장하는 사이비 수행자나 소설이 등장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만다라》의 문학적 의미와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달포 전 김성동의 부음이 전해졌다. 2022년 9월 25일, 암투병을 하던 그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새처럼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그에게 현실은 두꺼운 병(甁)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부터 그 병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다. 그리고 비로소 육신을 벗어던지고 완전한 자유를 찾았다. 그의 명복을 빈다.

 

 

장영우
문학평론가 · 동국대 명예교수
cywoo@dongguk.edu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