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과 실천 겸비, 불교 위상 높인 승려학자

1. 생애

월폴라 라훌라(Walpola Rāhula, 1907~1997)는 1907년 5월 9일 스리랑카 남부, 갈레(Galle) 지역의 월폴라(Walpola)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헷띠고다 가마게 돈 헨드릭 드 실바(Hettigoda Gamage Don Hendrick De Silva)였다. 그는 어린 시절 마을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서 장난쳤다고 체벌을 가하겠다는 선생님과의 의견 차이로 학교를 떠났다. 교장은 체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어떤 체벌도 거부해서 그의 학교생활은 끝났다.

그 후 13세 때인 1920년, 부모의 격려와 승인을 받아 마을에 있는 불교 사원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는 출가 후 삐리웨나(pirivena, 사원 교육기관)에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는 당시 전통적인 사원 교육 제도에 따라 싱할라어, 빨리어, 산스끄리뜨어, 불교 및 불교사를 배웠다.

얼마 동안 그는 마따라(Mātara)의 만띤다 삐리웨나(Mantinda Pirivena)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빠라고다(Paragoḍa)에서 스승과 함께 두타행(頭陀行, Dhutaṅga)을 실천하기로 서약하고, 몇 년 동안 은둔 승려의 삶을 살았다. 그는 배움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으로 콜롬보로 돌아와, 히나띠야나 담마로까(Hīnaṭiyana Dhammāloka) 장로가 이끄는 ‘다르마 두타 사바와(Dharma Dūta Sabhawa, 傳法會)’에서 연수생으로 훈련받았다. 나중에 그는 텔왓떼 아마라왕사(Telwatte Amaravaṃsa) 장로로부터 산스끄리뜨어를 배웠고, 레루까네 짠다위말라(Rerukane Candavimala) 장로로부터 아비담마(Abhidhamma)를 배웠다.

한편 월폴라 라훌라는 전통적인 승가 교육을 마친 후, 20세 정도의 나이에 영어와 일반 중등학교 교과 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에 그는 강사였으나 나중에 대학 영문학 교수였던 루도위크(E. F. Ludowyk) 박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또 그는 콜롬보(Colombo) 세인트요셉칼리지(St. Joseph’s College)의 수학 및 과학 강사였던 탕가라자흐(S. Thangarajah)의 집에서 몇 년 동안 같이 살면서 수학과 과학을 공부했다. 라훌라의 학문적 경력에 도움을 준 두 사람은 스리랑카인도 아니었고 불교도도 아니었다. 그는 종교적 · 국가적 경계에 국한하지 않고, 전문가로부터 관심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했다.

1930년대 초반 월폴라 라훌라는 유명한 설교사였다. 그는 일부 대중적인 불교 신행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를테면 스리랑카에서 널리 성행되고 있던 보리수 신앙이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위댜랑까라 삐리웨나(Vidyālaṅkāra Pirivena)를 중심으로 정치활동을 했는데, 그때 함께 활동했던 이들과 평생 친구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한 붓다의 가르침을 대중들에게 설명하고자 《사뜨요다야 빠뜨리까(Satyodaya Patrikā, 진실이 담긴 팸플릿)》(1933-1934)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널리 배포했다. 이 소책자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이 책자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는 불교 승려들이 직접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1930년대에 라훌라의 사회적 · 경제적 복지에 관한 관심은 그를 자유를 위한 정치적 투쟁으로 이끌었다. 1940년대에는 노동계급 운동과 노동계의 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법과 질서’를 위해 3일 동안 콜롬보의 구치소에 투옥되기도 했다(1947). 그는 불교 승려들에게 고대 역사적 전통에 따라 수도원에 은둔하는 여가를 떠나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그들의 에너지를 바치라고 격려했다. 이 시기에 라훌라는 그의 운동 선언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에 대한 응답으로 싱할라어로 된 《비구의 유산Bhikṣuvagē Urumaya》(1946)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젊은 승려들뿐만 아니라 젊은 사회복지사와 정치인들을 위한 지침이 되었다. 이 책은 나중에 영역되어 Heritage of the Bhikkhu(1974)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불교 승려의 정치 참여에 관한 특별한 주장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스리랑카의 승가는 물론 전 세계의 불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정치활동을 하던 시기에 라훌라는 1947년 뉴델리에서 열린 ‘국제 아시아 관계 회의’에 참석했고, 판디트 자와할랄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 라젠드라 프라사드(Rajendra Prasad),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쉬난(Sarvepalli Radhakrishnan), 자이 프라카시 나레인(Jai Prakash Narain), 아차리아 나레드라 데바(Arharya Naredra Deva), 암베드까르(Ambedkar) 박사 등 많은 인도의 지도자들과 접촉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라훌라는 전통적인 승가 교육에 만족하지 않고 서양의 과학적인 학문의 정신과 방법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어를 공부하여 그는 1936년 실론대학교(University of Ceylon, 현재의 University of Peradeniya)에 입학했다. 실론대학교는 1921년부터 1942년까지 영국 런던대학교의 분교로 운영되었다. 그래서 그의 학사 학위는 런던대학교로 되어 있다. 그는 실론대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승려였다. 당시 일부 보수적인 승려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론대학교에 입학했기에, 뉴스가 되기도 했다. 그는 실론대학교에서 루도위크(E. F. C. Ludowyk), 말라라세케라(G. P. Malalasekera), 아디까람(E. W. Adikaram) 등 여러 학자와 교류하며 학문적 실력을 쌓아 나갔다.

라훌라의 학문적 경력 또한 뛰어났다. 그는 말라라세케라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1941년 런던대학교 인도-아리안학 우등학사(B.A. Honors Degree) 학위를 받았다. 그는 실론(스리랑카) 정부 장학금을 지원받아 대학원 과정을 교육받기 위해 인도 캘커타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그의 학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나중에 말라라세케라 교수의 지도로 실론대학교에서 〈실론의 불교 역사(History of Buddhism in Ceylon)〉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취득 후 그는 전통적인 교육 기관 중 하나인 위댜랑까라 삐리웨나(Vidyālaṅkāra Pirivena)에서 강의했다. 얼마 동안 그는 이 존경받는 교육 기관을 운영하는 ‘위댜랑까라회(Vidyālaṅkāra Sabhā)’ 사무총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1950년 대승불교에 관한 추가 연구를 위해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연구하는 동안 그는 아상가(Asaṅga, 無着)의 《아비다르마 사뭇짜야(Abhidharma Samuccaya, 阿毘達磨集論)》를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그는 소르본대학교에서 몸담고 있을 때인 1950년대 후반, 《붓다의 가르침(What the Buddha taught)》(1959)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불교에 관한 입문서로 널리 읽힌 그의 대표적 저서 가운데 하나다.

1964년 라훌라 박사는 미국 일리노이주 에번스턴에 있는 노스웨스턴대학교의 종교사와 문헌학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이로써 북미 대학교에서 강의하는 최초의 불교 승려가 되었다. 에드먼드 페리(Edmund F. Perry) 교수와 노스웨스턴대학교의 종교사와 문헌학과 교수진은 라훌라 박사가 10년 동안 매년 한두 학기를 이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그는 1965년 불교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스리 깔야니 사마그리 다르마 마하 상가 사바(Śrī Kalyāṇī Sāmagrī Dharma Mahā Saṅgha Sabhā, 스리랑카의 승가회)’로부터 ‘뜨리삐따까 바기쉬바라짜르야(Tripiṭaka Vāg-iśvarācārya, 삼장에 정통한 최고의 스승)’라는 명예 학위와 ‘스리(Śrī, 至尊者)’라는 칭호를 받았다. 

라훌라 박사는 스리랑카 정부의 초청으로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스리랑카 위됴다야대학교(Vidyodaya University, 현재의 Uni-versity of Sri Jayewardenepura)의 부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나중에 다시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 1974년 영국 런던으로 옮길 때까지 그곳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런던에 거주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평의회 회원으로 봉사했던 ‘빨리성전협회(Pāli Text Society)’에서 여러 빨리 텍스트를 편집하고 번역하는 작업을 도왔다. 스리랑카 안팎의 여러 대학에서는 불교학 연구에 대한 그의 헌신을 인정하여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91년 미얀마 연방정부에서 그에게 ‘악가마하빤디따(Aggamahāpaṇḍita, 最上大賢者)’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라훌라 스스로 가장 영예스럽게 여기는 칭호이기도 했다.

라훌라 장로는 1981년 스리랑카 정부를 도와, 불교학 연구를 촉진하기 위한 ‘스리랑카불교빨리대학교(Buddhist and Pali Univer-sity of Sri Lanka)’ 설립에 참여했고, 수년간 이 대학교 고문으로 봉사했다. 그는 1978년에 켈라니야대학교(University of Kelaṇiya) 총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97년 10월에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계속 유지했다.

1987년 라훌라는 꼿떼(Kotte)의 께뚜마띠(Ketumati)에 불교학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그곳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나중에 불교학 진흥을 위한 장학금을 지급하기 위해 ‘월폴라 스리 라훌라 재단(Walpola Sri Rahula Foundation Trust)’을 설립했다. 1997년 10월 18일, 짧은 투병 끝에 그는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현재 켈라니야대학교 역사학과 조교수이자 월폴라 스리 라훌라 재단 신탁 회장인 갈깐데 담마난다(Galkande Dhammananda) 스님을 비롯하여 불교학 연구에 전념하는 헌신적인 제자들을 많이 남겼다.

 

2. 저서

월폴라 라훌라 박사는 다수의 중요한 저술들은 남겼다. 그의 저술들은 싱할라어와 프랑스어로 쓰인 것도 있지만 주로 영어로 쓰였다. 아마 그의 책이 영어로 쓰였기 때문에 전 세계 독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각국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는 널리 유통되었고, 일부는 관련 분야의 고전이 되었다. 여기서는 싱할라어로 저술한 책을 제외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비구의 유산(The Heritage of the Bhikkhu)》(1946/1974)

이 책은 라훌라 스님의 초기 작품이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은 대략 다음과 같다. 스리랑카의 초대 총리 세네나야께(D. S. Senenayake)와 몇몇 사람들이 1946년 1월 초순 불교 승려는 국정, 즉 정치활동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것은 스리랑카 불교사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스리랑카의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와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고, 승려들이 직간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리랑카의 승려들은 이러한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같은 해 1월 26일, 꼬따헤나의 프린스칼리지에서 공식적인 모임을 열었다. 이 모임에서 젊은 월폴라 라훌라 스님은 ‘비구와 정치(Bhikkhus and Politics)’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세네나야께 총리와 그의 추종자들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 후 많은 사람이 그의 연설문을 다시 읽고자 원했기 때문에, 불교의 대사회적 역할에 관한 자신의 평소 지론을 급히 작성하여 1946년 6월에 싱할라어로 된 《비구의 유산(Bhikṣuvagē Urumaya)》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출판한 지 3주 만에 매진되었다. 그 후 2년 뒤인 1948년 수정본을 내놓았다. 이 책은 나중에 영어로 번역되어 The Heritage of the Bhikkhu(New York: Grove Press, Ins., 1974)로 출판되었다.

2) 《실론 불교사(History of Buddhism in Ceylon)》(1956)

월폴라 라훌라 스님은 실론대학교에서 〈실론의 불교 역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1956년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인데, 실론 불교사 연구에서 획기적인 업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책은 스리랑카 불교사 연구를 위한 필독서로 평가되고 있다. 

3)《무착의 아비달마집론역주(Le Compendium de la Super doc-trine(Abhidharma-samuccaya) d’Asaṅga)》 

이 책은 프랑스어로 쓰인 것이다. 라훌라 박사는 실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인도의 캘커타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다. 그러나 당시 캘커타대학교에 재직 중이었던 저명한 교수들로부터 대승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교파를 초월한 식견을 넓히기 위해서 티베트어와 중국어로 쓰인 경전들을 배우기로 하고,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프랑스의 폴 데미빌(Paul Demieville) 교수 문하에서 대승의 유명한 철학자 아상가(Asaṅga, 無着)를 연구했다. 그때의 연구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원래 무착의 아비달마집론은 범어로 쓰였으나 유실되고, 한역과 티베트어 역만이 남아 있었는데, 라훌라 박사가 최초로 서양어(프랑스어)로 번역 소개했다.

4) 《붓다의 가르침(What the Buddha Taught)》(1959)

이 책은 서양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불교의 기본 교리들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인 불교의 개론서이다. 라훌라의 대표적인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으며, 한국어로도 번역 출판되었다. 이 책은 지금도 불교학 입문서로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5) 《선(禪)과 목우(Zen and Taming of the bull)》(1978)

이 책은 그가 여러 지면에 발표했던 에세이와 연설문, 강의록 등을 엮은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선과 목우’는 그가 1975년 4월 9일 런던의 불교도협회와 1976년 10월 13일 도쿄 고마자와대학교에서 연설한 내용이다. 그는 이 책에서 선의 기본적인 원리는 이미 상좌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6) 《빨리 문헌의 유머와 다른 논문들(Humour in Pali Literature and Other Essays)》(1998)

이 책은 월폴라 라훌라 박사의 유고집(遺稿集)이다. 그가 생전에발표한 빨리어와 빨리 문헌에 관한 논문 다섯 편과 다른 논문들을 모아 사후 3개월을 기념하여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은 빨리어와 빨리문헌에 관한 월폴라 라훌라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그의 학문적 지향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3. 불교관

월폴라 라훌라의 불교관을 엿볼 수 있는 책은 《비구의 유산》 《선과 목우》 《붓다의 가르침》 등이다. 라훌라의 저술에 따르면, 그는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진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현실주의적 종교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직시하라’라고 가르친 붓다의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현실주의적 가치관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하고 독창적인 수행관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붓다의 초기 경전에서 언급한 수행법을 바르게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수행법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상좌부의 전통에 따라 사성제가 붓다의 근본 교설이라고 파악하고, 이 사성제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수행법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사성제에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이라고 말하고, 이 열반은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실현해야 함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것을 현법열반(現法涅槃, diṭṭhadhamma-nibbāna)이라고 하는데, 이 현법열반을 이생에 실현하고자 노력하지 않고, 내생을 기약하는 안이한 수행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월폴라 라훌라 박사는 불교는 ‘삶의 방법’ 혹은 ‘생활 방식’이라고 말하고, 팔정도(八正道)를 바르게 실천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는 팔정도와 삼학(三學)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계학(戒學), 즉 윤리적 규범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 기초가 없이는 어떠한 정신적 발전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불교가 염세주의적 종교가 아니라고 강하게 어필했다. 그는 불교에서 고(苦)를 강조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불교는 비관주의 혹은 낙관주의의 문제가 아니지만, 인생을 완전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생의 즐거움은 물론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자유에 관해서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비로소 진실한 해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생활에서의 모든 즐거움을 절대로 비난하지 않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실로 종교적 · 도덕적 · 정신적 · 지성적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행복하고 즐거울 것이다. 불교는 분명히 우울하고, 슬프고, 어두운 마음가짐에 반대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오히려 진리 실현에 장애가 된다. 반대로 희열은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열반의 실현을 위해 계발해야 하는 본질적인 특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라훌라 박사의 현실주의적 불교관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는 불교가 사회봉사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붓다는 인간의 행복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붓다에 따르면, 진실한 행복은 도덕적 · 정신적 원칙에 기초를 둔 선도적인 청정한 생활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물질적 · 사회적 조건이 나쁘면 그러한 삶으로 이끌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불교는 물질적 복지 그 자체를 목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교에서 궁극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더욱 높고 숭고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것이 곧 물질적 복지이다.”

이러한 그의 철학과 신념은 곧 불교의 정치사회 철학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직접 투쟁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잘못된 정치로 말미암아 많은 대중들이 고통받으며, 또한 많은 사람이 물질적 · 경제적 고통을 받는 한 정신적 · 도덕적 안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인 열반과 불교의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없으므로 승려의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다음과 같다.

“불교는 권력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이 없는 사회, 정복과 패배를 넘어서 평화와 안정이 널리 퍼져 있는 사회, 무고한 자에 대한 박해가 비난받는 사회, 자신을 이기는 자가 군사적 · 경제적 힘으로 남을 정복하는 사람보다 더욱 존경받는 사회, 선이 악을 정복하는 사회, 원한 · 질투 · 악의 · 탐욕이 사람의 마음을 물들이지 않는 사회, 자비가 행동의 추진력이 되는 사회, 가장 작은 생명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이 공정 · 이해 · 사랑만으로 취급되는 사회, 평화롭고 조화 있는, 물질적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추구하면서도, 가장 고결한 목표인 궁극적인 진리인 열반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사회를 창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이 상좌불교에서 강조하는 불교 사회철학의 목표이다. 그는 이러한 불교의 이상사회 건설에 장애가 되는 것이면, 그 부당함을 과감히 말하고 시정을 위해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는 침묵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 

한편 라훌라 박사는 상좌부 소속의 승려로서는 드물게 대승불교 철학에도 귀를 기울였던 사람이다. 그는 비록 상좌불교가 붓다의 원형적인 불교임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상좌부의 정통성과 우월성만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붓다의 근본적인 교설에는 상좌와 대승에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대승불교도들이 상좌불교(Theravāda)를 소승(Hīnayāna)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는 빨리 문헌은 물론 대승의 많은 문헌까지 섭렵하여 상좌불교가 소승이 아니라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그는 상좌불교는 소승도 아니며 대승도 아닌 붓다의 원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상좌부불교 국가에는 보살이 없다거나, 모든 보살은 대승불교 국가에만 있다고 믿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지적하고, 성문, 연각, 보살은 어떤 특정한 지리적인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회통을 시도했다. 당시 스리랑카의 학승이었던 빤디따 삠부레 소라따 장로(Pandita Pimbure Sorata Thera)가 발의하여 1966년 5월 9일 세일론에서 ‘세계불교승가회(WBSC)’가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967년 1월 27일 제1차 회의가 세일론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상좌불교와 대승불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본적인 9개 항의 헌장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 헌장을 초안한 사람이 바로 월폴라 라훌라 박사다. 그는 이 헌장을 통해 상좌불교도들이 대승불교를 비난하고, 대승불교도들이 상좌불교를 소승이라고 하여 경멸하는 편견을 떠나, 전 세계의 불교도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4. 평가

월폴라 라훌라 박사는 출가 비구로서 싱할라의 민족 종교인 불교의 발전을 위해 온 정열을 바쳤다. 그는 학문적으로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 철학 모두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학문을 통해 확인된 신념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과 실천정신으로 말미암아 불교도는 물론 비불교도까지 그를 흠모한다. 

월폴라 라훌라 장로는 20세기에 스리랑카의 불교도는 물론 전 세계의 불교도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불교 승려 가운데 한 명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현대의 가장 이상적인 승려상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생존해 있을 때부터 전 세계 지성인들의 우상이었다. 

켈라니야대학교의 언어학 교수인 까루나띨라께(W. S. Karuna-tilake)는 추도사에서 “월폴라 라훌라 스님은 불교철학의 일인자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서거로 인한 공백은 아마 절대 메울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후 라훌라의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의과대학의 실습용으로 기증되었다. 그는 자신이 이 땅에 가지고 왔던 육신마저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사회에 환원하고 사바를 떠났다.

그는 남방 상좌부의 비구 신분으로서 학문과 실천을 겸비했던 이 시대의 대표적인 불교 지성이었다. 붓다의 가르침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교육과 포교에 일생을 바친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었다.

또한 라훌라 스님은 그가 배워 알고 있는 붓다의 교설에 어긋나거나 장애가 되는 것이라면, 승단 내부에 속한 일이든, 국가의 정치적인 문제이든 가리지 않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직접 투쟁에 앞장섰던 행동가이기도 했다. 

월폴라 라훌라 스님은 일반적으로 세계적인 석학 혹은 학승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의 학문적 업적과 활동으로 보아 그러한 평가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학문은 결코 명예나 학위 혹은 학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출가자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구도의 결과로 얻어진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출가자로서의 본분과 사명을 포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관되게 붓다가 비구들에게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에 대해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전도의 길을 떠나라고 당부했던 그 말씀대로 실천했던 스님이었다. ■  
 

마성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석사(M.Phil). 태국 마하출라롱콘라자위댜라야대학교 박사과정 수학,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철학박사(Ph.D).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사캬무니 붓다》 《잡아함경 강의》 《초기불교사상》 등이 있으며, 6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2021 불교평론 뇌허불교학술상 수상.현재 팔리문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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