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서한(西漢)의 무제(武帝)에 의하여 ‘실크로드’라고 칭해지는 서역과의 교통로가 개척되어 상인들이 왕래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신앙하게 된 것은 동한(東漢) 시기에 시작된 일이니, 최소한 백 년 이상의 잠복기를 거친 셈이다. 이렇게 불교가 중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원인에는 선진(先秦) 시기 이전부터 형성된 ‘이하지방(夷夏之防)’의 의식이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척박한 지역에 거주하는 주변 소수민족들의 비옥한 중원을 노린 침탈에 직면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남이(南夷)와 북적(北狄)의 오랑캐들이 서로 번갈아 침입하여 중국이 끊어질 듯한 실과 같았다.”1)라는 표현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까닭에 이미 전국시대 이전에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오랑캐[夷]’의 저급한 문화가 ‘중국 민족[夏]’의 우월한 문화를 망치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는 ‘이하지방’의 의식이 뿌리 깊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맹자》의 “나는 중국이 오랑캐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들었어도, (중국이)오랑캐에 의해 변화되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다.

한편 중국은 전국시대를 맞이하여 열국이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각축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통치이념’의 설정이 중시되었다. 그것은 《주역(周易)》의 ‘풍지관괘(風地觀卦)’에서 “성인(聖人)은 신묘한 도[神道]로써 교(敎)를 세우니, 천하가 그를 따른다.”라는 문구처럼 중국에서 통치이념의 설정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그것은 ‘신도(神道)’라고 칭하듯이 단순히 통치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성인’과 ‘도’의 범주에 속하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라 전국시대에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였고, 그 가운데 진(秦)은 법가(法家)를 채택하여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였지만, 가혹한 법치는 곧 진을 망하게 하였다. 그 뒤를 이은 서한(西漢)에서는 도가(道家)의 황로학(黃老學)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했다. 

이러한 황로학에 입각한 통치는 ‘문경의 치[文景之治]’라는 태평성대가 40년 동안 이어지고, 그에 따라 도가의 사상이 민중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서한의 무제(武帝)는 이른바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의 정책을 통하여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설정하였다. 이렇게 서한 시기에 도가에 속한 황로학과 유학을 통치이념을 설정함에 따라 ‘제자백가’의 사상은 점차 도가와 유가에 흡수되었고, 중국의 전통 사상은 ‘도가’와 ‘유가’의 두 커다란 범주로 포섭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학의 통치이념은 한계를 드러내어 서한은 멸망하였다. 그에 따라 서한을 계승한 동한에서는 새로운 통치이념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는데 진의 법가, 서한의 도가와 유가 사상이 모두 통치이념으로서 한계를 노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한의 황실에서는 이미 서역인들로부터 중국에 전해진 불교가 통치이념에 적합함을 아주 빠르게 파악했다. 그렇지만 불교는 뿌리 깊은 ‘이하론(夷夏論)’의 민족적 정서라는 장벽이 존재했는데, 동한의 황권에서는 이를 불교와 유사한 황로학과의 결합을 통하여 해소하고자 하였다. 더욱이 서한의 황로학에 의한 통치는 ‘문경의 치’의 태평성대를 누렸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러한 불교와 황로도의 결합은 결과적으로 중국에 도교(道敎)를 출현시키는 중대한 작용을 하였지만, 반대로 후대에 도교가 세력을 얻게 되면서 민족적 정서인 ‘이하론’에 입각한 이른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폐불(廢佛)을 맞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고도 하겠다.

동한의 황권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환제(桓帝) 시기에 이르러서 안세고(安世高)와 지루가참(支婁迦讖)을 통하여 본격적인 역경(譯經)을 시작함으로써 본격적인 중국불교의 출발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불교는 중요한 과제를 떠안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하론’의 극복이다. 이하론의 극복은 불교가 중국 땅에 정착되고, 중국인들의 마음을 얻는 데 절대적인 기제(機制)라고 할 정도로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실제로 중국불교의 역사는 유 · 도 양가와의 사상적 교섭사라고 평가할 정도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한 흔적이 여실하다. 흔히 중국불교의 귀숙을 조사선(祖師禪)이라고 칭하는데, 이 조사선은 불교의 사상적 입장에서 유 · 도 양가의 사상을 융합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사선에서 중국의 전통사상과의 결합은 유가의 《맹자(孟子)》, 도가의 《장자(莊子)》를 채택하여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이 두 경전이 불교와 사상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요소들을 함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불교가 중국의 사상적 융합을 이룬 부분을 논할 때, 유가에서는 인성론 · 심성론과의 융합을 통하여 ‘불성론’이 출현하였으며, 도가에서는 수행론과의 융합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조사선의 종전(宗典)인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본다면, 바로 《맹자》가 제시하고 있는 인성론과 심성론의 견지에서 ‘명심견성(明心見性)’이라는 불성론을, 《장자》에서 제시하는 ‘무물(無物) · 무정(無情) · 무대(無待)’로부터 ‘무념(無念) · 무상(無相) · 무주(無住)’의 수행론을 도출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조사선이 이들의 사상과 같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불교가 지닌 본래의 사상과 중국 본토의 사상체계와의 결합을 통해 ‘이하론’을 극복하고, 보다 중국인들에게 불법의 진제(眞諦)를 널리 알려 체득하게 하려는 과정에서 출현한 새로운 불교, 즉 조사선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 글에서는 유가의 대표적인 경전인 《맹자》의 서지사항과 그 핵심적인 사상, 그리고 불교, 특히 조사선의 종전인 《육조단경》과의 사상적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2. 《맹자》의 서지사항과 사상적 핵심

《맹자》는 전국시대의 추국(鄒國) 출신으로 유가(儒家)에 속한 맹가(孟軻, B.C. 372?~B.C. 289?)가 당시의 제후와 제자 등과 나눈 대화와 주장을 담은 책이다. 《맹자》는 처음부터 유가의 경전으로 존숭된 것은 아니지만, 후대에 점차 중시되었으며, 송대(宋代)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하여 《논어(論語)》 《대학(大學)》 《중용(中庸)》과 함께 ‘사서(四書)’로 인정되면서 유학의 중요한 경전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맹자의 생애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어려서 아버지를 잃자 모친이 교육을 위하여 행한 이른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일화가 유명하고, 《사기(史記)》에 따르면, 맹자가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에게 사사하였다고 한다. 40여 세 전후에 학문을 이룬 후에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제후들을 방문하여 유가의 이념을 설파하였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였고, 추국으로 돌아와 84세로 생을 마쳤다.

《맹자》는 〈양혜왕(梁惠王)〉 〈공손추(公孫丑)〉 〈등문공(滕文公)〉 〈이루(離婁)〉 〈만장(萬丈)〉 〈고자(告子)〉 〈진심(盡心)〉 등 7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편이 상하로 이루어져 있어 모두 14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편제는 한대(漢代)에 조기(趙岐)가 찬술한 《맹자주소(孟子注疏)》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맹자》의 서지사항에 대해서는 주희가 찬술한 《맹자집주(孟子集註)》의 〈서설(序說)〉에 비교적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주희는 〈서설〉에서 《사기(史記)》 〈열전(列傳)〉에 기록된 “(맹자는) 물러나 만장(萬章) 등의 문도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을 서술하고, 중니(仲尼: 孔子)의 뜻을 기술하여 《맹자》 7편을 지었다.”라는 내용과 한유(韓愈)의 “맹가(孟軻)의 책은 맹가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요, 맹가가 죽은 뒤에 그 문도인 만장과 공손추(公孫丑)가 맹가가 일찍이 말씀한 것을 서로 기록한 것이다.”라는 설을 소개했는데, 주희 자신이 볼 때는 《사기》의 기록이 더 옳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맹자》는 여러 정황상 맹자의 사후에 문도들에 의하여 편집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역대로 《맹자》와 관련된 주석서들은 상당히 많이 존재하지만, 주희의 《맹자집주》에는 이전의 주석들을 모두 종합하고 있다. 또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조선 선조 23년(1590)에 간행된 성낙수의 《맹자언해(孟子諺解)》를 비롯하여 퇴계 이황의 《맹자석의(孟子釋義)》, 성호 이익의 《맹자질서(孟子疾書)》, 정약용(丁若鏞)의 《맹자요의(孟子要義)》 등 《맹자》와 관련된 유학자들의 수많은 저술이 검색된다. 그에 따라 《맹자》가 우리나라의 유학에 미친 영향이 상당히 중요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맹자》의 사상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주희가 찬술한 《맹자집주》의 〈서설〉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양씨(楊時)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치고 있다.

양씨(楊氏: 楊時)가 말하였다. “《맹자》 한 책은 다만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마음을 보존하여 성을 길러[存心養性] 그 마음대로 하려는 것을 거두려고 하였다.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를 논함에 있어서는 측은(惻隱) · 수오(羞惡) · 사양(辭讓) · 시비(是非)의 마음을 그 단서(端緖)로 삼았다. 삿된 학설의 폐해를 논함에 있어서 곧 말하기를, ‘그 마음에 생겨나서 그 정사(政事)에 해를 끼친다.’라고 하였다. 군주를 섬김을 논함에 있어서 ‘군주의 마음에 잘못됨을 격(格)해야 하니, 한번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으면 나라가 평정해진다.’라고 하였다. 천만 가지의 변화를 다만 마음에 따라 말하였다. 사람이 능히 마음을 바로잡으면, 바로 일은 족히 할 것이 없다. 《대학》에서 말하는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는 그 근본이 다만 정신(正心)과 성의(誠意)일 뿐이다. 마음이 그 바름을 얻은 뒤에야 성(性)의 선(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맹자는 사람을 만나면 바로 성선(性善)을 말한 것이다. …… 이하 생략”

이 글은 양시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만, 이로부터 주희가 보는 《맹자》의 사상적 핵심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맹자》의 사상적 핵심은 ‘성선설(性善說)’로부터 출발한 ‘존심양성(存心養性)’이라고 할 수 있고, 그로부터 사단지심(四端之心)을 제창했으며, 그 최종적인 목적은 바로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라고 하겠다. 또한 ‘군주의 마음’에 잘못됨이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한다는 구절로부터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기치도 도출할 수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맹자》에서는 철저하게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정심’과 ‘성의’를 실현하여 ‘수신 · 제가 · 치국 · 평천하’를 구현하는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므로 유가의 최종적인 귀착점은 ‘용세(用世)’ ‘제세(濟世)’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입장은 또한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대승불교의 정신과 기본적으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라 본고에서는 《맹자》에 보이는 구체적인 구절들을 통하여 불교와 유사점이 있는 측면을 고찰하고자 한다.

우선 《맹자》에는 인간에 대한 평등사상이 엿보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물었다. “사람은 모두 요(堯) · 순(舜)처럼 될 수 있다 하니, 사실입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 “그대가 요임금의 옷을 입고, 요임금의 말씀을 따라 하며, 요임금의 행실을 행한다면 요임금과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대가 걸왕(桀王)의 옷을 입고, 걸왕의 말을 따라 하며, 걸왕의 행실을 행한다면 바로 걸왕과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요 · 순과 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이러한 문답은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을 떠올릴 정도로 불교와 유사하다. 더욱이 행하는 바에 따라 요임금이 되고, 걸주(桀紂)와 같은 폭군이 된다는 말은 불교의 업설(業說)을 생각나게 한다. 이처럼 맹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철저한 긍정을 보이며, 이로부터 평등사상을 도출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석존(釋尊)의 사성평등(四姓平等) 사상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같이 평등한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차별이 나타나는가?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공도자(公都子)가 물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대인(大人)이 되고, 어떤 사람은 소인(小人)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맹자가 답하였다. “그 대체(大體)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그 소체(小體)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 물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그 대체를 따르고, 어떤 사람은 그 소체를 따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하였다. “귀와 눈의 기관은 생각하지 않고서 사물에 가려진다. 사물과 사물이 접촉되면 그것을 끌어당길 뿐이다. 마음의 기능은 생각한다. 생각하면 그것을 알게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이는 천(天)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다.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면, 그 작은 것이 빼앗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대인이 되는 것일 뿐이다.”  

이로부터 맹자는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평등하지만, ‘대체’와 ‘소체’를 마음으로부터 결택(決擇)함에 따라서 대인과 소인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대체’는 바로 ‘심지(心志)’를 뜻하고, ‘소체’는 바로 ‘입과 배’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니, 다만 먹을 것으로 대표되는 욕망만을 생각한다면 ‘소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대체’는 바로 ‘천(天)’이 ‘나[我]’에게 부여한 것이라 한다. 이로부터 맹자는 ‘나’에 대한 본질을 ‘천’이 품부(稟賦)한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맹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와 관련된 언급을 하고 있다.

만물(萬物)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자신’을 반성해 보아 성실하면 즐거움이 더없이 크고, 힘써 너그럽게 행하면 인(仁)을 구하는 길이 더없이 가깝다. 

남을 사랑하는데도 (나와) 친하지 않으면 그 인(仁)을 반성해야 하고, 사람을 다스리는데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그 지(智)를 반성해야 하며, 예(禮)를 다했는데 예로 답하지 않으면 그 공경을 반성해야 하고, (일을) 행하고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반성하여 찾아야[反求諸己] 한다. 자신이 바르면 천하도 바르게 돌아간다.

활을 쏘는 이는 ‘자신’을 바르게 한 다음 활을 당기는데, 쏘아서 적중하지 못하면 ‘자신’을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되돌아 ‘자신’에게 반성해서 찾을[反求諸己] 따름이다.

이를 보면, 맹자는 ‘나’를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萬物皆備於我]” 존재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의예지’를 그러한 ‘나’에 비추어 반성하여 구해야 하며[反求諸己], 만약 그렇게 된다면 “천하도 바르게 돌아가고”, 그렇게 해서 유가에서 제시하는 ‘수신 · 제가 · 치국 · 평천하’를 이룰 수 있으니, 바로 유가에서 강조하는 ‘작성성현(作聖成賢)’을 이루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나’의 핵심은 무엇인가? 맹자는 다시 “군자가 본성으로 지니는 ‘인의예지’는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라고 하여 ‘마음’을 극도로 강조하고 있다. 그에 따라 그 마음의 단서(端緖)를 다음과 같이 논한다.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인(仁)의 시작[端]이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시작이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시작이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시작이다.

이는 《맹자》에서 가장 유명하여 잘 알려진 구절로 이를 ‘사단지심(四端之心)’이라고 한다. 맹자는 이러한 ‘사단지심’의 근거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으로 하여 어린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그를 구하는 것은 칭찬이나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며, 만약 “측은지심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오, 수오지심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오, 사양지심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오, 시비지심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이상과 같은 《맹자》의 사상은 바로 앞에서 주희의 〈서설〉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존심양성(存心養性)’이라고 축약할 수 있으며, 그 사유 양식은 불교와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더욱이 ‘심’을 중심으로 ‘나’를 파악하고, 그러한 ‘나’에 만물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은 중국선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만법유심(萬法唯心)’ ‘심외무물(心外無物)’ ‘도유심오(道由心悟)’ 등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불교에서 ‘마음’과 관련된 논의는 근본불교로부터 부파불교, 그리고 중국에서 불교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최초의 역경에서 수도 없이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동한(東漢) 시기에 지루가참이 번역한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는 “마음이 부처를 짓고[心作佛], 마음이 스스로 보며[心自見],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고[心是佛心], 부처의 마음이 나의 몸[佛心是我身]이다.”와 같이 마음을 지존(至尊)으로 삼은 문구가 지나치게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불교 자체가 ‘마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그러한 모두를 맹자의 ‘마음’과 연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육조단경》에서 《맹자》가 제시하고 있는 인성론과 심성론을 차용(借用)했을 것이라는 점은 많은 학자가 인정하고 있다. 그에 따라 《육조단경》에 보이는 불성론과 《맹자》를 간략하게 비교하고자 한다.

 

3. 《맹자》와 《육조단경》

중국불교에서 ‘이하론’을 극복한 표지(標識)를 《육조단경》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육조단경》이라는 명칭에서 엿볼 수 있는데, ‘육조’는 바로 혜능이 중국선의 정종임을 알려주는 것이고, ‘단(壇)’은 ‘계단(戒壇)’을 의미하며, 또한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佛語]’을 의미한다. 따라서 《육조단경》의 제목으로부터 의미를 메타포 한다면, 인도로부터 발생하여 전래된 불교가 드디어 중국인으로서의 ‘불(佛)’이 나타나 계(戒)를 수여하며, 새로운 교의(敎義) 체계를 가지고 민중을 제도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본래 ‘이하론’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은 바로 불교의 교주인 석존이 바로 인도 출신이라는 점인데, 아무리 중국 전통사상과 융합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였다. 그러나 중국인으로서 ‘불’이 나타난 이상 그러한 공격은 논리성이 약해졌다고 하겠다. 더욱이 사상적으로도 《단경》에는 명확하게 《맹자》의 인성 · 심성론을 차용(借用)한 흔적이 엿보이고, 또한 《장자》의 사상도 개입한 흔적이 여실하다. 그에 따라 《단경》의 어떠한 부분이 《맹자》의 인성 · 심성론과 관련이 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단경》은 무엇보다도 ‘불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 그를 도출할 수 있다.

부처[佛]는 자성(自性)이니, 결코 자신(自身)의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심(自心)’이 중생임을 알고, ‘자심’이 ‘불성(佛性)’임을 보아라.

‘자기의 마음[自心]’이 부처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밖으로는 어떠한 것도 건립될 수 없으며, 모두 본래 마음이 만종법(萬種法)을 생한 것이다.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자심’이 중생임을 알아서 ‘자심’으로부터 불성을 보도록 가르친다.

‘인간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다.

인성(人性)은 본래 청정하지만 망념(妄念)으로 말미암아 진여(眞如)가 가린 것이다. 다만 망상이 없다면 성은 스스로 청정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청정한 것으로 만법은 ‘자성’을 따라 생한다.

이러한 인용문으로부터 《단경》에서 논하는 ‘불성’을 엿볼 수 있다. 《단경》에서는 ‘불성’을 ‘자성’으로 설정하고, 또한 그를 우리의 ‘자심’으로 귀결시킨다. 나아가 ‘불성’을 점차 우리가 늘 접하는 세상 사람들의 ‘인성’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단경》의 불성론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일반적으로 중국불교의 다양한 종파에서는 ‘불성’을 일반적인 인간의 인성 · 심성을 초월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중국학계에서는 이를 ‘육조혁명(六祖革命)’으로 표현하는데, 그만큼 ‘불성론’에서 ‘혁명’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이전에 ‘불(佛)’에 대한 신앙을 ‘심(心)’에 대한 신앙으로 전환할 정도의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경》의 불성론은 그 사유 양식에 있어서 앞에서 고찰한 《맹자》와 커다란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하겠다. “인성은 본래 청정함”은 당연히 ‘성선설(性善說)’의 취지이고, “본래 마음이 만종법을 생한 것”이라는 표현은 그대로 “만물비아(萬物備我)”와 통하며, “결코 자신(自身)의 밖에서 구하지 말 것”은 “반구저기(反求諸己)”와 유사성을 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피안(彼岸)’을 추구하는 불교를 지금 이 자리에 진리가 현현하여 있다는 ‘당하즉시(當下卽是)’와 ‘본래현성(本來現成)’으로 전환하는 조사선의 선취(禪趣)는 바로 현세를 중시하는 유가적 사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단경》이 《맹자》의 사유 양식을 채택한 점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는 말

이상으로 《맹자》의 서지사항과 사상적 핵심, 그리고 조사선의 종전인 《육조단경》에 있어서 사유 양식을 채택한 점을 간략하게 논하였다. 조사선은 인도나 서역의 불교와 사상적으로 상당한 차별이 보인다. 그러한 차별의 근본 원인은 바로 문화적 풍토가 서로 다른 중국의 전통사상들과의 융합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맹자》와 《단경》은 비록 그 사유 양식에서 유사성을 지니지만, 결코 동일한 사상체계는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맹자》는 유학의 경전이고, 《단경》은 불교에 속하기 때문이다. 만약 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현(聖賢)을 이루어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용세(用世)’ ‘제세(濟世)’에 있다고 한다면, 《단경》은 궁극적인 선리(禪理)의 깨달음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물론 깨달음 이후에는 성불(成佛)하여 불국토(佛國土)를 이루므로 결과적으로는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까닭에 후대에 육구연(陸九淵)의 ‘심학(心學)’과 그를 계승한 왕수인(王守仁)의 양명학(陽明學)에서는 《맹자》와 《단경》을 모두 중시하는 학풍을 제시하고 있다.26) 그렇지만 여전히 유학에서는 끊임없이 불교에 대한 공격과 견제를 늦추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불교를 참답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유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필요하다고 하겠다. 중국불성론 연구로 유명한 라이용하이(賴永海)의 《불교와 유학》에서는 “중국불교를 연구하려는 사람이 만약 중국 고대철학, 특히 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가 알고 있는 중국불교도 한 부분일 뿐이다! 그리고 그 진행하는 중국 불교학 연구도 똑같이 깊이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27)라는 말로 책을 마치고 있다. 따라서 유학의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 《맹자》는 불교도로서 반드시 일독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


김진무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 《중국불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조선불교통사》(공역) 《불교와 유학》 《선학과 현학》 《선과 노장》 《분등선》 《조사선》 등이 있다. 현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한국연구재단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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