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란 무엇인가. 선시란 ‘진리의 깨달음이 담겨 있는 시’ ‘깨달음의 노래’로서 그 기원은 불교 경전의 게송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전의 내용이 함축 요약된 선시가 지닌 함의는 매우 깊고 광대하다. 그래서 선시는 일반 시와는 다르게 무언가 어렵고 모호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 언어개념으로는 깨달음을 이룬 붓다나 선사들의 시를 이해하고 공감하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깊이 있는 지혜와 사유로 통찰한다면 선시 속에는 무궁무진한 진리의 가르침이 오롯이 함축되어 있으며, 나아가 그 진리의 가르침은 세속에 사는 우리의 실존적인 삶과 둘이 아닌 하나로 원융하게 합일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선시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것은 곧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를 배우고 체득할 수 있는 최고의 공부이자 수행이 될 수 있다.

선시는 선적(禪的) 사유로 형상화된 시다. 

경전에 기원을 둔 전통적 게송과 당대 선종의 개창과 함께 발달한 선시는 ‘시’보다는 ‘선’을 우위에 두면서, 진리와 깨달음을 전하는 중요한 방편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이후 선사들은 시에 선의 요의를 담아 오도의 체험이나 경지를 표현하는 한편, 시인들은 선의 이치와 묘리를 받아들여 시 창작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선시는 기본적으로 격외시(格外詩)라 할 수 있다. 격외시란 세간의 척도로 고체화된 일체의 언어 규정과 격식을 초월한 선시를 말한다. 깨달음은 얻은 자의 시는 본질적으로 최상승의 도리, 즉 제일의(第一義)의 진실상 세계를 읊고 있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모든 선시는 격외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형식과 격식을 벗어나 궁극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선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성의 관념과 통상적 언어논리를 초월하여 세상의 이치를 상징하는 시 역시 충분히 선시적 표상이 된다. 선적(禪的) 사유와 맞닿아진 시적(詩的) 표현에서 생로병사, 희로애락 인간사의 면면이 드러날 때 광의적 개념으로서 선은 우리의 일상사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이때 선과 시는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관계가 된다. 그래서 비록 불교나 선 사상에 기반한 작품이 아니더라도, 때로 우리는 가슴 뭉클한 무상(無常)과 공성(空性)으로서의 나와 일체 존재의 정체성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붓다의 직접적인 전언에서뿐만 아니라 피어나는 꽃 한 송이에서도,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해 지는 노을에서도, 진창을 기어가는 한 마리 벌레 속에서도 우리는 생의 무상함과 무아(無我)에의 전존재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선의 미덕은 이렇게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며 광대무변하게 확장되는 데 있다. 이 부분이야말로 선과 시의 접합점이자 무한한 영속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선시의 형성은 고려 중엽 무의자 혜심으로부터 시작되어 고려 말 태고보우, 나옹혜근, 백운경한 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후 조선을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선시는 수많은 승려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우리나라 현대시에도 선적 사유와 시적 표현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뛰어난 작품들이 많다. 이러한 시들은 승속을 넘나들며 한국 문단을 풍요롭게 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들의 시에서 우주적 존재의 실상과 궁극적 삶의 진리를 찾아내는 재미는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근대 불교와 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만해 한용운을 들 수 있다. 아래는 만해의 시다.  

 

따슨 볕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 한용운 〈춘화(春畫) 1〉

 

만해 한용운은 일제 강점기 때 승려요 독립운동가이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만해의 중심사상은 이 세상의 혼돈과 무명의 고통을 진리적 깨달음과 둘로 보지 않는 철저한 불이사상(不二思想)에서 비롯되고 있다. 만해에게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바로 이 고통 가득한 삶의 진창에서 피워 올려진 꽃임을 지혜로 간파한 인식 세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따스한 봄날 《유마경》을 읽는다. 그때 흩날리는 봄꽃이 글자를 가린다. 그러나 그 꽃들이 《유마경》에서 전하는 공(空)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구태여 글자에서 다시 길을 찾을 필요는 없다. 

《유마경》은 세속을 떠나지 않고도 대승의 보살도를 성취한 유마힐의 가르침이 담긴 대승불교의 진수를 보여주는 경전으로 꼽힌다. 반야바라밀을 일상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유마는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등의 일체 분별을 떠난 철저한 무집착과 공 사상을 설파한다. 극락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로 가득한 번뇌망상만 벗어나면 이곳이 바로 극락이요, 깨달음의 자리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각은 언어 문자나 사변적 희론이 아닌, 실존의 삶 속에서 증득해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춘화(春畫) 1〉은 그렇게 철저한 공 사상, 반야 사상에 기반하면서도 한가롭고 고고한 정취가 마치 피안인 듯 가득한 선시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나름의 바람을 가지고 산다. 그것을 꿈이라고도 한다. 꿈이 있기에 고단한 현재를 견뎌내고, 꿈이 있기에 발목 접힌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낸다. 그러나 꿈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오직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꿈이 있는가 하면, 나의 욕망은 모두 떨쳐버리고 오직 너를 위해 살고자 하는 꿈도 있다.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를 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 한용운 〈나의 꿈〉

 

〈나의 꿈〉에서 ‘님’이란 사바세계에서 욕망과 사랑과 이별과 죽음의 파고를 건너는 불특정 다수의 모든 이들을 의미한다. 만해의 시에는 거의 다 타자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타자들은 대개 ‘당신’ ‘님’ ‘벗’과 같은 주로 이인칭 대명사로 표현되고 있다. 

시는 시인의 정신과 마음의 거울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시 속에는 시인의 감정 상태와 세계관이 녹아 있다. 따라서 시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바로 그 행간에 숨겨진 시인의 마음을 제대로 간파하고 공감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시에서 만해는 나의 꿈은 ‘나는 사라지고 너만 남는 것’이라 한다. 그것도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를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라도 되겠다는 것이다. 이 시에는 애초부터 ‘나’라는 인식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고통받는 이유를 사람들이 ‘자기[ego, ātman]’라는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원하지 않은 나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그로 인해 끝없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라는 실체, 너라는 실체란 원래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아(無我)’요, ‘공(空)의 체득’이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이 순간 ‘작용’은 하고 있지만 영원한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 바른 사유로 깨달을 때 우리는 곧바로 무상, 고, 무아의 고통을 여의게 된다. 나아가 서로가 서로에게 집착 없는 마음으로 함께 의지하고 공존하면서 무한한 사랑과 자비심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메커니즘을 한용운은 〈나의 꿈〉이라는 단 한 편의 시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당신이 새벽 그늘에 산보를 할 때면 나는 작은 별이 되어 당신을 지키고, 당신이 여름날 낮잠에 들 때면 덥지 마시라고 시원한 바람이 되고, 고요한 가을밤에 책을 읽을 때면 작은 귀뚜라미라도 되어 적적할 당신을 위해 울음 울겠다는, 자신의 전존재를 다 버린 아름답고도 눈물겨운 꿈이다. 이 이상 어떤 지고의 꿈이 더 있을 터인가. 

다음은 조지훈이 월정사에 머무를 때 쓴 시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 조지훈 〈고사(古寺) 1〉

 

조지훈은 혜화전문학교에서 불교를 만난 이후 오대산 월정사 불교전문강원에서 강사를 지냈다. 조지훈은 〈고사(古寺) 1〉에 대해 “이 시는 선사상에서 피어난 것이거니와 …… 시는 생명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요, 대상을 내적 생명에서 감수하는 것이므로 모두 하나의 범생명(汎生命) 또는 범신론(汎神論)의 세계에 절로 통하게 되는 것”이라고 스스로 해설하였다. 

오래된 절에 어린 상좌가 예불인지 기도인지 드리던 중에 목탁을 치다 말고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부처님은 웃으시는데 멀리 서역에선 노을이 지고 목련도 함께 진다. 오래된 절, 부처님, 어린 스님, 서역 만리길, 눈부시게 지는 노을, 스러지는 모란……, 이렇듯 멀고 가깝고, 같은 듯 다른 것들이 사실은 다 하나다. 깨우친 부처도 못 깨우친 중생도, 보이는 이곳도 보이지 않는 저곳도, 붉게 지는 노을이나 소리 없이 떨어지는 모란이나, 다 무상의 법칙에 따라 생멸하는 같은 존재다. 모두 다 공(空)하고 무아(無我)이다. 

위의 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선적 깊이는 깊다. 선시는 화려한 언어나 파격적인 비유, 상징에만 있지 않다. 선시 궁극의 목적은 우리의 상대적 분별의식과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세상의 실상을 바로 보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사 1〉은 모든 중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닌 평등한 존재라는 지극한 선적 사유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폭의 그림처럼 고즈넉하게 ‘시’로 ‘법’을 세웠으니 그 이상의 무슨 사족이 필요할 것인가.

다음은 설악 조오현의 선시다. 

 

나는 부처를 팔고

그대는 몸을 팔고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고……

밤마다 물 위로 달이 지나가지만

마음 머무르지 않고 그림자 남기지 않는도다

— 조오현 〈절간 이야기 25〉

 

설악 조오현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일생 출가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출가의 길을 걸으면서도 속세의 고통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절간 이야기 25〉는 첫 행부터 파격적이다. 출가자인 ‘나는 부처를 팔고’ 중생인 ‘그대는 몸을’ 판다는 1행과 2행은 그 표현이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도리어 우리에게 더 큰 충격과 경이를 준다. 사실 스님으로서 스스로 ‘부처를 판다’고 선언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우리에겐 마치 창부나 노예처럼 몸을 팔며 살고 있다고 한다. 뒤통수가 얼얼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대개 사람들은 선과 행복을 추구하며 바르게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과연 무엇이 바르고 그른 것이며, 무엇이 선이고 악이며, 무엇이 행과 불행인가.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풀지 못한 채 오욕락 속에서 사는 우리이기에 아무리 살아내도 숱한 얼룩과 깊은 상처만 가득할지 모른다.

무상의 법칙에서 보자면 일체 만물에는 차별이 없다. 그저 우리의 끝 간 데 없는 분별심으로 선과 악, 극락과 지옥, 남과 여, 귀와 천 등을 나누고 차별하며 그로 인해 무량한 고통을 서로 주고받을 뿐이다. 이와 같은 착각을 바로잡고 제법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 불이적 사고관이다. 따라서 불이사상(不二思想)은 나와 세상의 존재 이유를 규명하는 근원적 통찰이자,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해탈문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불이법에 대하여 완전한 체득이 있는 자는 달빛이 물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 하나 남지 않듯이, 이 세상 어디를 뒹굴어도 마음엔 고통 한 점 없다. 이 경지가 바로 설악 조오현이 이룬 세계다. 이렇게 조오현 선시 〈절간이야기 25〉의 저 두 행은 우리의 폐부를 찌르며 삶의 본질을, 존재의 실상을 냉혹하게 돌아보게 한다.

설악 조오현의 다음 시 는 아무렇지 않게 서술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래서 그 담담함이 주는 진실과 슬픔은 배가 된다. 

 

그날 저녁은 유별나게 물이 붉다붉다 싶더니만

밀물 때나 썰물 때나 파도 위에 떠 살던 

그 늙은 어부가 그만 다음 날은 보이지 않네

— 조오현 〈인천만 낙조〉

 

이 시를 보며 생사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이 몇이나 될 것인가. ‘밀물 때나 썰물 때나 파도 위에 떠 살던’ 이는 비단 늙은 어부만이 아니다. 인생의 파고에 떠밀리면서도 거기서 떠나지 못하고 ‘떠 사는’ 존재가 우리다. 게다가 그 끝은 행복이나 평화가 아니라, 오직 ‘죽음’뿐이라는 당연한 귀납을 알면서도 밀물에나 썰물에나 한 점 꽃잎처럼 떠서 그렇게 흔들리는 것이 인생이다. 진실은 때로 잔인하다. 어떤 달콤한 말도, 거짓 희망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진실이다. 내 인생에 유난히 바닷물이 붉은 저녁, 문득 그만 다음 날은 보이지 않는 때가 내게도 손님처럼 올 것이기에.

아래는 이승훈의 〈연꽃 옆에〉라는 시다. 한 존재는 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존재하고 있다. 이 시는 그 연기적 상호작용으로 구현되는 것이 바로 나의 실체이며 인생임을 노래하고 있다.  

 

연꽃 옆에 물고기 있고 물고기

옆에 게도 있고 거북이도 있고

거북이가 한 세상이네 거북이 

옆에 개구리도 있네. 바람 자면

바람이 그대로 거북이 바람이

그대로 물고기 저 물고기 하늘

을 나는 물고기 연꽃과 연꽃 

사이에 한 세상이 있네.

— 이승훈 〈연꽃 옆에〉

 

이승훈은 《금강경》을 만난 이후 평생 ‘선(禪)과 아방가르드 정신’을 추구하며 현대적 선시를 개척하는 데 앞장선 시인이다. ‘시의 본질은 없고 절대적 가치도 없다’는 그의 선언은, 우리의 실체는 절대적 자아[ego]가 없는 무아적(無我的) 존재이며, 따라서 모든 개체는 연기적 작용만 있을 뿐 절대적 가치는 없다는 ‘선’에서 전하는 가르침과 합일된다. 

그는 1990년대 말 자아 탐구와 소멸에 관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를 거쳐 새로운 시학을 모색하였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금강경》의 “아상(我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若菩薩 有我… 卽非菩薩)”라는 구절을 접하며 인식의 대전환을 맞게 된다. 이를 계기로 40여 년 동안 자신이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아상 즉 아견(我見), 아집(我執), 아만(我慢) 등의 그릇된 집착에 빠져 있었음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된다. 

이후 이승훈은 자신의 시 세계를 선과 아방가르드에 접합하면서 진정한 현대 선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한다. 기존의 형식과 관념, 유파들을 부정하며 지시적, 묘사적 기능은 가능한 배제한 선적(禪的) 은유와 상징을 차용하면서 선시의 전형을 구축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 〈연꽃 옆에〉는 기존의 의미적 행 가르기를 의도적으로 타파하면서 각각의 단어들을 저마다 자유롭게 춤추게 하고 있다. 

연꽃 옆에는 물고기가 있고, 물고기 옆에는 게가 있고, 거북이가 있고, 그 옆에는 개구리가 있다. 그러다 바람이 그치면 바람이 거북이가 되고, 물고기가 되고, 하늘을 나는 물고기가 된다. 그렇게 연꽃과 연꽃 사이에 한 세상이 피고 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그치므로 이것이 그친다는 연기법의 시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연기적 진리기제 속에서는 나는 너이며, 너는 곧 나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며 더불어 존재하기에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렇듯 나에 대한 집착이 다 사라진 무아에의 자각으로 온 세상과 하나로 담담히 승화되는 시가 〈연꽃 옆에〉다. 

다음은 이성선의 시집 《절정의 노래》에 실려 있는 〈대작〉이다. 

평생 설악산을 사랑하여 설악산 시인이라고도 불리는 이성선은 강원도에서 태어나 고향 고성에 있는 동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숭실대에서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이성선의 시는 말년에 이르면 시의 형식적 길이가 대폭 짧아지는 대신 여백의 미를 듬뿍 살린 선시 경향이 두드러진다. 첫 시집 《시인의 병풍》을 시작으로 2000년 선시집 《우주가 내 몸에 손을 얹었다》를 마지막으로 홀연히 이승을 떠난 시인은 본인의 뜻에 따라 현재 백담사 계곡에 유해가 뿌려져 있다. 

 

술잔 마주 놓고 서로 건네며

산과 취하여 앉았다가

저물어 그를 껴안고 울다가 

 

품속에서 한 송이 꽃을 꺼내 들고

바라보고 웃느니 바라보고 웃느니.

— 이성선 〈대작〉

대작이란 누군가와 마주 대하며 술 마시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성선과 대작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산’이다. 아마도 설악산이 아닐까 유추가 가능한 부분이다. 시인은 산과 마주하여 술잔을 건네며 산과 함께 취한다. 저물도록 대취하여 산을 껴안고 울기까지 한다. 그러다 문득 품속에서 ‘한 송이 꽃’을 꺼내 들고 웃고 웃는다. 

이 짧은 시에는 놀라운 반전이 들어 있다. 1연에는 한 폭의 인간사의 슬픔이 가득한데, 2연에는 부처님과 가섭존자의 염화미소가 오버랩되는 또 한 폭의 경이로운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마음 나눌 사람 하나 없는 허망하고 외로운 세상이기에 시인은 차라리 산과 대작하며 취해 운다. 무상한 삶에 대한 관조가 얼마나 깊기에 그것을 나눌 사람조차 없는 것일까. 때로 우리도 자신의 깊은 속뜻을 다 나눌 사람 찾기가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삶이란 더욱 외롭고 고독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만이 가진 보배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명안의 시인은 진즉 허망함 속에 허망하지 않은 이치를 알고 있다. 또 그 허망함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삶의 유일한 가치임도 또렷이 알고 있다. 바로 시인이 품속에서 꺼낸 한 송이 꽃, 그것이 바로 시인이 이룩한 정신이요, 스스로 빚어 만든 깨달음의 보배다. 

선종에서는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말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진 이심전심의 가르침을 선의 시작으로 본다. 영산회상의 법좌에 오르신 부처님께서 꽃가지 하나를 들고 말없이 대중을 둘러보는데 아무도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였으나, 오직 가섭존자만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로 답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진실한 법은 말로 다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서로 상응함으로써 온전히 전해진다. 말이 아닌 상대의 눈빛이나 몸짓에서 도리어 이심전심으로 깊은 속뜻이 더 잘 전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시인에게는 그 꽃을 들어 보일 사람조차 없는 듯하다. 산과 대작하며 취해 울다가 가슴속 꽃 한 송이 꺼내 들고 바라보며 홀로 웃고 또 홀로 웃을 뿐이니.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 이성선 〈문답법을 버리다〉

 

이 시는 이성선이 작고하기 2년 전인 1999년에 출간한 시집 《산시(山詩)》에 수록된 시다. 한 마디로 이 시는 말년에 이른 이성선의 경지가 어디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인은 산에 와서 문답을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산’은 당연히 물질적인 산이 아니라 정신적인 ‘산’을 의미한다. 현세를 차안((此岸)이라 한다면, 정신적으로 진리에 이르는 것을 피안(彼岸)이라 한다. 미혹과 번뇌의 세계에서 생사유전하는 것이 차안이라면, 번뇌의 흐름을 넘어 깨달음에 이른 상태가 피안이다. 

미혹의 중생 세계는 분별심과 탐심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따라서 중생의 언어체계로는 세계의 실상과 진리상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어떤 언어도 사물이나 일체의 실상 그 자체를 명확하게 지시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의 세계를 전하는 데에 사실상 ‘언어’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선에서는 말로는 진실을 다 전하지 못하므로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다. 

그렇다. 진실은 언어나 문답마저 다 끊어진 그곳에서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길 없는 길, 말 없는 말, 생각 없는 생각, 해탈 없는 해탈, 번뇌 없는 번뇌처럼……, 아무리 글로 표현해도 그 뜻을 전할 길은 아득하다. 그래서일까. 온전한 진리의 세계, 피안의 세계에 든 노시인은 마침내 그곳에서 말과 언어마저 모두 버린다. 그리곤 그저 나무나 바라보다가, 구름이나 쳐다보다가, 말없이 길을 간다. 그러면서 일갈한다. ‘여기 들면 말은 똥’이라고! 

다음은 송기원 시집 《단 한번 보지못한 내 꽃들》에 실린 시이다. 

 

마침내 보았단 말이지?

누구도 보지 못한 캄캄한 나락에서

기어이 너만은 보았단 말이지?

돌아보면 이승과 저승이 함께 먼데

까마득한 거리를 뛰어넘어

끝끝내 너만은 보았단 말이지?

오늘 밤도 벌판 가득히 

망초꽃 흐드러지는데. 

— 송기원 〈망초꽃〉

송기원의 생애는 한마디로 파란만장하다. 시인으로 소설가로 민주투사로 야인의 구도자로, 한평생을 탕아처럼 탕진한 그는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이 경지에 들어섰다. 억압된 본능과 금지된 욕망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파괴의 욕구와 광기 어린 영감으로 들끓던 작가로서의 젊은 시절을 보내던 그는 어느덧 생도 사도 아닌 이곳까지 천연덕스럽게 든 것이다.

욕계의 세계에서 자아를 폐기하는 것, 폐인이 되는 것, 다시 말해 죽음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행위는, 이 세계에서 제 본래의 꼴[本性]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진정성 있는 실현의 길일지도 모른다. 그 험난한 길에 송기원이 있었다. 

1990년대 들어 국선도와 단전호흡을 거쳐 명상의 길로 들어선 송기원은 그때부터 이미 세상과의 절연을 선언하고 인도 뒷골목과 히말라야 언저리, 계룡산 무문관과 미얀마 명상센터 등에서 속세의 경계를 넘는 구도를 이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인간의 삶이 얼마나 가변적이며 부질없는가를, 한 개인이 상정한 초월적 삶의 목표라는 건 또 얼마나 불확정적이며 허망한 것인가를 본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광활한 우주 속을 떠도는 먼지처럼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 시는 그런 여정 속에서 그려진 시인의 마음이다. ‘마침내 보았단 말이지? 누구도 보지 못한 캄캄한 나락에서 기어이 너만은 보았단 말이지?’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캄캄한 삶의 나락에서 도리어 삶의 진실을 환하게 꿰뚫어 보는 사람이 있다. 이 시의 해설은 영가현각 선사의 오도가인 《증도가》에서 찾을 수 있다. 

“무지의 잠에서 깨어 보니/ 원래부터 모든 것 나에게 있었네/ 꿈속에선 지옥도 있고 고통도 있었으나/ 꿈 깨고 보니 한 구슬 빛뿐이네.” 

시인이 이승과 저승을 넘어 그 까마득한 거리를 뛰어넘어 도달하여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지의 잠에서 “꿈 깨고 보니 한 구슬 빛뿐”인 것처럼, 그의 벌판에도 그저 원래부터 있었던 ‘망초꽃 하얗게 흐드러지’고 있을 뿐인가. 까마득한 거리를 뛰어넘어 도달한, 꿈 깬 그곳도 바로 오늘 밤 이곳이리니.  

다음은 송기원의 같은 시집에 실린 시다. 

 

일찍이 한소식 하여

스무 살에 큰스님 되었다는 조실스님

고로롱 팔십이 되도록까지

눈빛 사나는 운수납자(雲水衲子)들에게

딱 한 마디만 가르치네. 

“공부헐 것 없다아.”

오늘도 뼈만 앙상한 갈퀴손을 저어보이네.

“공부헐 것 없어어.”

조실 앞에 피어 있는 어떤 나비난초인들

갈퀴손 손짓보다 가벼우랴. 

— 송기원 〈나비난초〉

 

일찍이 도를 이룬 조실스님의 가르침은 딱 한 마디다. ‘공부할 것 없다!’ 

선에서는 부처가 되려 하고, 도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조차 또 하나의 욕심으로 보았다. 깨달음이란 지금 가진 것 외에 또 어떤 것을 더 가져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순간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 시를 보면 떠오르는 선시가 있다. 태고보우 선사의 〈지나는 구름(過雲)〉이다. 

 

평생토록 자유로워

구하는 것 없으니 어딜 가나 편안하네

천하에 가득하나 그 행위는 자취 없어

오늘도 예전처럼 푸른 산에 누워 있네.

(平生行止大無端 是處無求是處安

  行滿天下沒蹤跡 今日依然臥碧山)

 

진리를 깨치고 난 후, 이른바 한 소식 한 후의 마음은 어딜 가나 편안하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니 마음의 구속 따윈 없다. 비록 ‘행위’는 있어도 그 행위에 대한 집착과 욕망은 다 사라진 지 오래이니, 어제나 오늘이나 푸른 산 위에서 노닐 듯 한가하고 자유롭다. 

송기원의 이 시는 특별히 서슬 푸른 ‘운수납자’, 수행자들에게 들려주는 시다. 비록 물욕은 떠났다 하더라도 도를 구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욕심마저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드러난 삶은 깨끗하고 청빈할지라도 반드시 도를 ‘배워 이루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조차 다른 이름의 탐심이기 때문이다.  

중국 선종의 사상적 개창자라 할 수 있는 육조혜능 선사는 그 어떤 대상에도 무착(無着)과 무주(無住)와 무상(無相)의 마음을 가지라고 하였다. 이 삼무(三無) 사상은 이후 오늘날까지 선종의 기치를 관통하는 중요한 핵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만큼 선에서 요구하는 것은 그 어떤 양변에도 머무르지 않는 철저한 무집착과 불이의 마음이다. 

그래서 조실스님은 오가는 수행자들에게 딱 한 마디만 가르친다. 공부하지 말라고. 아니, 공부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놓으라고 한다. 부처 되겠다는 욕심과 집착이 사실의 너의 진실상을 깨우치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한다. 물질이든 배움이든 지고의 사랑이든 위대한 정신이든 그 어떤 것에든 욕심을 부리는 순간, 자신의 본래면목과는 멀어진다고, 깡마른 갈퀴손을 하염없이 저어 보인다.

조실 앞에 피어 가볍게 하늘거리는 나비난초보다, 무게도 잴 수 없는 저 허공보다, 탐욕과 욕망을 다 버린 한 인간의 공(空)한 갈퀴손이 저리 가볍고 가볍다. 

 

지금까지 선과 진리에 대한 깊은 사유에 입각한 뛰어난 현대시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반드시 불교나 선적 사유로 창작되지 않았더라도 얼마든지 선의 지평과 맞닿아 있는 시들도 있다. 나아가 독자 스스로 우주의 진리와 감흥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어떤 시라도 그 속에서 선을 만날 수 있다. 사실 글은 읽는 이에 의해 완성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읽는 사람의 안목에 따라 선시도 일반시가 될 수 있으며, 평범한 시도 놀라운 선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거대한 자연의 변화에서부터 한 마리 풀벌레에 이르기까지 유정물과 무정물을 막론하고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무상하며 무아이며 연기적 존재로서 세상에 가득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것들이 살아가고 죽어가는 모든 과정, 그 속에서 파도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우리의 희로애락 자체가 다 진리요, 깨달음의 현현일 뿐이다. 

다만 이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반조와 명안의 지혜가 필요할 뿐, 선은 부처요, 자연이요, 몸이요, 꽃이요, 갈퀴손이다. 이처럼 한 편의 시에서 우주의 전언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선이요, 진리의 체득이요, 나아가 시를 선적(禪的)으로 읽는 재미다.  

아래는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미당 서정주의 대표작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국화 옆에서〉

 

미당 서정주의 시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우리말을 가장 능수능란하고 아름답게 구사하는 시인이며, 우리 민족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찬사가 있지만,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다녔던 그의 사상 저변에는 불교적인 인식도 깔려 있다. 그러나 미당은 불교적 사유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보다는 민족적 정서와 서정적 미학을 더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화 옆에서〉는 불교적, 선적 사유로 읽어내기에 충분하다. 시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 속에는 붓다가 깨달은 핵심 진리기제 중 하나인 ‘연기관(緣起觀)’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연기란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緣)’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변화를 의미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은 없으며,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나와 타자 간의 관계 즉 현상계의 모든 존재 형태와 법칙을 말한다. 이러한 연기적 인식은 인드라망처럼 연결된 세상과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을 통해 나와 타자를 분별함으로써 발생되는 나만을 위한 소욕에서 벗어나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평등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만든다. 

이 시에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많은 것들이 동원되고 있다.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나도 잠 못 든다. 이 얼마나 절묘한 연기적 사유인가. 꽃 한 송이는 그저 혼자 핀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힘을 모으고, 또 그 꽃이 피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의 사랑마저 더해져 마침내 핀 것이다. 그러므로 소쩍새가 꽃이요, 천둥이 꽃이요, 무서리가 꽃이며, 마침내 내가 꽃이라는 거대한 연기법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기적 사고는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소중함과 대자대비의 사랑의 마음을 일깨우게 한다.

이것이 바로 ‘선(禪)으로 시(詩) 읽기’라 할 수 있다. 선적으로 확장된 시 읽기는 시를 더욱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자타불이의 소중한 깨달음에까지 이르게 해준다. 이렇게 선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보고 듣고 인식이 닿는 모든 것에 두루 펼쳐져 있으며, 선시는 오늘날까지 알게 모르게 현대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시인과 독자의 정신을 향기롭게 하고 있다. ■

 

박규리 
시인. 동국대 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1995년 《민족예술》로 등단.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와 학술서 《경허 선시 연구》 외 논문 다수. 제비꽃서민시인상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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