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불교에 대한 여러 수준의 담론은 논자의 의도된 소용 이외에 누구를 위해 왜 필요한 것일까. 새삼스러운 자문자답이지만,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 등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삶의 가치와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불교의 두 가지 근본정신인 지혜와 자비를 바탕에 둔 견해다. 

이를 현실적 차원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먼저 현재 불교를 신행하는 사람들을 위함이며, 다음으로는 장차 불교에 귀의하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궁극적으로 불교를 대상으로 하는 담론은, 현재이든 미래이든 불교에 귀의하게 될 모든 사람이 온전한 불교적 삶을 지향하는 데 적절한 도움의 방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다시 논점을 불교 담론의 대상과 내용이 되는 불교와 불교학의 관계를 짚어보기로 한다. 이 경우, 우선 불교와 불교학의 개념적 정립이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동안 이 둘의 개념과 범주에 대해서는 큰 고민 없이 단순하게 생각해온 경향이 없지 않다. 불교는 신앙 · 신행으로서의 종교이며, 불교학은 불교교리와 신행 등의 문제를 논구하는 학문이라는 정도의 이해였다. 불교와 불교학에 대한 이 같은 통념적 인식은 불교의 신행자나 학문적 연구자 어느 편에도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들 각자가 지향하는 바에 따라 어디까지가 불교의 영역이며, 무엇이 불교학인지 그 개념 자체가 막연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한국 불교학 연구의 현실과 불교학의 목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다. 위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몇 가지 문제들도 그 일환인 셈이지만, 이 같은 관심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학의 대상 범위부터 설정할 필요가 있다. 불교학이라 하더라도 그 외연은 뜻밖에 광범위하고 각각의 연구 분야와 세부 분류 또한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 불교학 가운데서 교리와 교학사상 등 불교철학 중심의 범위를 상정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교의 경률론 삼장을 비롯하여 후대에 불교가 전파된 각 지역에서 독특하게 형성 발전해온 불교사상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한국 불교학 연구의 현실 이해와 함께 특히 불교학의 목적과 그 실천을 중심 주제로 한다. 그런 만큼 불교학의 핵심에 해당하는 교리 · 교학사상 전반에 대한 내용은 물론, 그 구체적인 이슈 등은 논의의 주요 대상이 아니다. 이는 불교학 전체의 절대 궁극적 목적의 탐구보다는, 모든 불교 대중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목적 설정과 그 실천의 문제를 숙고해보기 위해서이다.

 

2. 불교 · 불교학, 다름과 같음

불교와 불교학의 상호관계성과 그 선후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이지만, 이는 불교와 불교학을 여러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가령 불교학을 정의하건대 ‘불교에 대한 연구’ 또는 ‘불교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대상으로 한 연구’라고 한다면, 불교를 연구하는 것이 불교학이므로 당연히 불교가 먼저이고 불교학은 그다음이라는 순서가 설정된다. 

그러나 불교와 불교학의 관계가 이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불교의 맨 처음이 어떤 형태의 것이었는지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데서부터 발생한다. 이 때문에 ‘불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불교학의 산물’이라는 단언이 가능하며, ‘우리의 믿음 또한 그것에 대한 것이거나 그와 관련된 상징체계에 대한 것’이라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에서라면, 앞에서와는 반대로 불교보다 단연 불교학이 먼저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일단 불교와 불교학을 하나로 이어진 일련의 형태로 간주하면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런 관점에서 먼저 불교의 출발로부터 각 지역의 불교 전도 및 유입과 교학적 학문 활동의 대강을 통해 불교와 불교학의 상호관계를 짚어보기로 한다.

1) 인도 · 동남아시아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에서 붓다라는 실재적 인물의 활동을 통해 형성된 불교는 붓다의 교화 활동을 통해 갠지스강 중류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까 대왕의 통치 시기에 인도 대부분의 지역에 불교가 전해졌다. 인도 최초로 대제국을 건설한 아쇼까 대왕은, 무력이 아닌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진리의 통치’ 구현에 힘썼으며, 불교의 전도 노력은 바로 그런 통치의 일환이었다. 이렇게 인도에서 정착된 불교는 불멸(佛滅) 후 236년 봄에 비로소 인도 밖의 스리랑카에 전도가 이루어졌다. 이어서 미얀마와 타일랜드에 차례로 유입되었다.

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에 전해진 상좌부불교가 미얀마로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초기 전도 상황은 모두 전설 속에 잠겨 있어 시기 자체는 불분명하다. 미얀마는 4~5세기경의 불교 수용을 거쳐 실제는 11세기 중반 파간 왕조의 아나와라타왕 때, 스리랑카의 상좌부불교를 통일국가의 공식 종교로 지정하였다.

타일랜드는 12세기 이래 상좌부불교를 수용했지만 정치적 혼란 속에서 계속 답보 상태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아유타야 왕조 때인 1361년, 스리랑카에 사신을 보내 상좌부 대사파(大寺派)의 법등(法燈)을 국가적 종교로 받아들여 크게 발전시켰다. 한편 아유타야 왕조 말기에는 스리랑카 상가 부흥을 크게 돕기도 했다. 

이 같은 스리랑카 · 미얀마 · 타일랜드 세 나라 불교의 위상은, 기타 동남아국가들의 불교에 비해 좀 더 원천적 권위를 인정받는 분위기다. 남방 상좌부불교의 정통을 공유해온 이들이, 현재의 시대에도 그 교학과 불교 정신을 더욱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중국 · 동아시아

전설적인 기록으로 보이지만, 중국에 들어온 최초의 전도승은 후한의 명제(明帝, 68~75) 때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낙양에 도착한 가섭마등과 축법란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포함하여 초기 전도승들은 노자와 장자의 도가(道家)와 쉽게 접하였고, 뒤에는 중국의 정치 · 종교적 사상체계인 유교와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이질적인 고유 사상 및 문화와의 잦은 접촉 관계는 이후 중국불교의 전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또 이와 다른 면에서는 언어와 문자 체계가 서로 완전히 다른 산스끄리뜨어 경전의 한문 번역과 이에 따른 새로운 사고 과정 등을 거치며 형성된 ‘불교의 중국화 현상’이 구축된다.

대부분 국가의 주도로 진행된 산스끄리뜨어 경전의 한역 사업은중국 승려는 물론 인도와 서역 여러 나라의 학승들이 참여하였고, 질적, 양적 면에서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우수하고 방대한 한역대장경을 탄생시켰다. 이 같은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은 5~6세기 남북조시대의 교학연구 활동이다. 이에 따라 불교의 학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교학의 연구는 아비담학(阿毘曇學)을 비롯하여 성실(成實) · 반야(般若) · 삼론(三論) · 법화(法華) · 화엄(華嚴) 등 각 경론이 대상이 되었고, 이런 교학연구의 경향이 각각의 학파를 이루며 성장해갔다. 불교의 학파는 종파의 전 단계로 볼 수 있다. 그런 뜻에서 교학연구의 결과로서 대두된 이른바 교판론(敎判論)은 이후 중국불교 변화의 향방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게 한다.

그러한 교학연구를 기반으로 성립된 종파들 가운데 특히 천태 · 화엄 · 정토 · 선과 같은 종파들은 특정한 불교의 원리를 자신들의 사유와 기질에 맞게 재형성해낸 중국인들의 주체적인 불교 수용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만큼 이들 종파는 더 이상 중국에 유입된 인도의 사상체계 그대로가 아니며 오히려 참된 중국불교의 종파라 할 것이다. 

시대에 따라 부침(浮沈)은 있었으나, 교학 이론 및 종교적 실천 신행 등에서 중국불교의 전통은 굳건하게 뿌리를 내려왔고 한국, 일본, 베트남을 포함하여 주변 여러 나라에 불교와 그 문화를 전파하였다. 이런 중국불교는 특히 동아시아 한문 문화권 안에서 남방의 빨리 상좌부에 상응하는 북방 대승불교의 거점으로서 그 역할과 위상을 확고히 지켜왔다.

3) 서유럽 · 북미주

19세기 후반부터, 인도 · 중국 등 아시아권역과는 역사와 종교 등 정신 전통이 전혀 다른 서유럽 사회에 불교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공교롭게도 이는 유럽 열강들의 아시아 지역 식민지 경영과 관련하여 유럽학계의 해당 지역 언어 연구 및 종교문화적 이해의 필요성이 반영된 현실이기도 했다. 

먼저,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영국의 브라이언 호지슨(Brian Hodgson, 1800~1894)과 리즈 데이비스(T. W. Rhys Davis, 1843~ 1992) 등이 적극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갖고, 불교 문헌의 수집과 전파로 문헌 연구의 기틀을 닦았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외젠 뷔르누프(E. Burnouf, 1801~1852)도 본격적인 불교 연구를 시작했다.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에 모두 능숙했던 그는 원전 연구를 기반으로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그는 최초로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를 분명하게 구분 짓고, 동아시아 불교보다 동남아시아 상좌부불교가 훨씬 더 초기불교와 유사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 독일의 불교학자 헤르만 올덴베르크(Herman Oldenbrg, 1854~1920)는 빨리성전협회의 경전 번역 활동에 깊게 관여하는 한편, 붓다를 신화적으로 이해하는 초기문헌 해석의 오류들을 비판하였다. 허무주의자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한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도 스스로를 불교 신자라 일컬었으며,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통해 불교철학과 불교윤리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밖에 뷔르누프의 제자인 막스 뮐러(Max Müller, 1823~1900) 등 동시대의 많은 불교학자들도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 사전 집필 및 초기 경전의 문헌학적 연구에 주력했다. 

19세기 후반까지 유럽에서 불교는 대체로 일반의 종교 신앙적 대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제국주의적 시각이나 오리엔탈리즘의 틀 속에서 연구되는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었다. 그런 가운데 동아시아불교를 향한 서구의 관심은,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를 기점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특히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 1870~1966) 일행이 메이지 시대의 산물인 선(禪) 중심의 일본 ‘신붓쿄(新佛敎)’를 소개한 것이 그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유럽인은 동아시아 불교에 관해서는 주로 일본의 선불교를 연상할 정도이다. 

20세기 초부터는 티베트불교 역시 유럽인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하여 오늘의 성장을 이루어왔다. 또 다른 면으로는 불교에 대한 중산층의 관심에 힘입어 서유럽에 불교 사찰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유럽불교회의, 독일불교협회, 유럽불교연합 등 불교단체의 설립이 가속화되었다. 2000년 이후 아시아 각국 불교의 활동과 함께 유럽 주요 국가들의 불교 신자 수의 증가는,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주요 유럽 국가들의 통계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이 같은 서구 유럽의 ‘불교 붐’에 대해 ‘불교의 기독교화 경향’과 함께 그것이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우려 섞인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편, 북미주를 대표하는 미국의 불교 유입과 전개는 처음부터 유럽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1875년 중국의 노동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처음 불교 사찰을 건립한 것이 그 시작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불교의 내용은 이민자들을 따라 함께 들어온 불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 사회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893년의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로, 회의를 주도한 폴 캐러스(Paul Carus, 1852~1919) 같은 진지한 지식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스리랑카 상좌부불교와 일본 선불교의 대표들도 참석하여 불교의 업설(業說)과 인과법칙 및 선 사상 등을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강조하였다. 이후 폴 캐러스는 스즈키 다이세쓰를 비롯한 일본 불교인들을 미국에 초청하였고, 이로써 선불교를 비롯한 미국의 대중불교가 새롭게 열리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출발하고 성장해온 미국불교를 한두 가지 관점에서 간단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미국의 불교적 경향은 선 중심의 일본불교의 영향 이외에, 의례와 상징 그리고 의식들에서 소위 ‘신성한 영롱함’을 체험하는 티베트불교, 또 대만과 중국의 불교, 태국불교 등의 다양한 불교적 스펙트럼을 전개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만큼 오늘의 미국불교는 삶의 현실과 이상 등 인간과 세상의 많은 문제를 불교 안에서 질문하고 실험 중인 듯한 느낌을 준다. 다만 현재 미국의 불교가 ‘정통성이 결여된 한 아류로서의 불교’에 머물 것인지, 기대하는 바대로 ‘불교의 미래에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인지는 계속 관심 있게 지켜볼 문제이다.

불교학의 목적을 규명함에 앞서, 불교와 불교학을 일련(一連)의 관계로 전제하였다. 이의 방증을 위해 우선 불교의 출발에서부터 세계 각 지역으로의 전파 및 학문 활동의 경향 등을 용어에 구애받지 않고 조망해보았다. 지면 사정 등으로 극히 미흡한 내용일 수밖에 없지만, 이를 통해서도 불교와 불교학의 ‘다르고 같음’을 어느 정도는 가늠해볼 수가 있다. 

불교와 불교학은 그 출발과 과정이 각기 다르지만, 결국 양자는 동일한 지향과 목적으로 함께 수렴되고 있다는 점에서다. 둘은 선과 후로 구분되는 개념으로 처음 전개 과정에서부터 서로 다른 위치에 있으나, 불교 전체의 도정(道程)에서 본다면 둘은 그 목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결국 동질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3. 전통교학과 현대의 불교학

다음의 관심사는 전통교학 및 교법과 현대 불교학과의 관계이다. 교학은 ‘붓다의 교설’로, 교법은 ‘붓다의 깨달음에 근거한 말씀’으로 일단 정리하고, 이들 교학과 교법은 그대로가 곧 불교(붓다의 가르침)라는 사실도 함께 인식할 수 있다. 부연하자면. “결국 불교란 붓다의 깨달음에 근거하여 이룩된 경률론 삼장을 말하며, 불교학이란 삼장을 소재로 한 학적체계를 말한다”는 것이다.

짧은 문면(文面)에서 불교와 불교학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전통교학(불교)에서도 그것대로의 학적체계 또한 없지 않다. 만일 현대의 불교학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전통교학은 그 전체가 학적체계의 선행단계라 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경률론 삼장의 성립과 내용 등이 그러하다. 이들 삼장과 함께, 불교의 전파 및 발전 · 전개의 과정을 근거로 전통교학의 연구 부분을 좀 더 확인해본다. 

불교의 학적체계 전체가 함축된 경률론 삼장은 일시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붓다의 교설과 말씀들을 모아 정리하기 위한 결집(結集, samgiti, 合誦)을 통해 오랜 세월에 걸쳐 차례로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이들 교설 교리는 그 내용의 형태 및 정리 방식에 따라, 9분교(九分敎) 또는 12부경(十二部經)으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형식이 거듭 발전하여 현재의 경전 형태인 남전(南傳)의 5부 니까야(nikāya)와 북전(北傳)의 4아함(阿含, āgama)으로 고정되고, 훗날 많은 대승 경전도 함께 포함되었다.

이들 경장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교리의 내용들이다. 초기불교를 기준으로 말하면, 그 철학사상이 단적으로 나타나 있는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 · 사성제(四聖諦) · 팔정도(八正道) · 연기법(緣起法) · 중도설(中道說) 등이 있다. 수많은 교설을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이들에 대한 학적체계가 이미 이 시대부터 중시되어 왔음을 주목할 수 있다. 마트리카(matrka, 論母 또는 本母)라는 형식도 그중의 하나이다. 경들에서 삼계(三界) · 사념처(四念處) · 오온(五蘊) 등과 같은 법수(法數)의 차례에 의한 분류방식이다. 그러나 보다 본격적인 교리의 정리와 해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 abhidharma-pitaka)으로 불리는 독립된 문헌군에서이다.

다음은 율장의 연구이다. 율장은 승단의 관리 운영 등에 관한 일종의 규정집으로, 이 가운데는 승단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지켜야 할 계(戒)도 당연히 포함된다. 현재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남방 빨리어 삼장에서는 그 순서를 율-경-논으로 하고 있다. 이런 율장에서 출가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 조문을 모은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ātimokkha, 戒本)’는 비교적 일찍 정리되어 ‘경(經, sutta)’으로 불렸다. 따라서 율장은 바라제목차의 해석인 ‘경분별(經分別, sutta vibhaniga)’, 교단의 운영 관리와 의식 규정(갈마, karma) 등을 정리해 모은 ‘건도부(健度部, khandhaka)’와 함께, 이들에 대한 부칙 · 보충설명 등의 기록인 ‘부수(付隨)’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같은 율 체계의 형성과 수행자의 유행 생활도, 정주지(定住地)에서의 집합적인 생활을 조직할 수 있게 된다. 붓다는 자신의 입멸에 앞서 별도의 교주를 지목하지 않았다. 따라서 승단에는 교단을 통제할 만한 절대 권위자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광범한 율 체계 속에서 참회 및 지악수선(止惡修善)의 승가 갈마를 통해 승단의 화합을 잘 유지해갔다. 율장의 초기 형성 노력을 비롯하여 이 같은 율 체계의 조직과 실천 또한 충분히 이 분야의 학적 연구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 논장을 통해서는 불교 각 부파들의 본격적인 교학연구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불멸 후 대략 100년부터 400년 무렵(B.C.E. 4세기~1세기)까지, 불교 교단은 근본분열에 따른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와 대중부(大衆部, Mahāsāṃghika)를 포함하여 도합 20여 개의 부파를 이룬다. 이 시기의 각 부파는 교법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축적해갔는데, 위에서 언급한 아비달마장이 그것이다. ‘아비달마(abhidharma)’라는 말은 남방 상좌부에서 ‘뛰어난 법[勝法]’이라는 뜻으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교법에 대향하는’ 즉 대법(對法)의 뜻으로 해석해왔다. 이는 결국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의 교단적 성격을 가진 각 부파는 자신들의 교법 연구의 결과를 모아 간직하였으며, 이 같은 아비달마 문헌을 논(論)이라 불렀다. 이로써 그들의 성전은 종래의 경과 율에 이어 다시 새로운 문헌군으로 논이 추가된 것이다. 불교의 경률론 삼장이 이렇게 성립한 것으로, 삼장의 완성은 부파불교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대부분의 부파들은 자신들의 교학적 입장에 따라 각각의 삼장을 소유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중 논서는 거의 모두 일실되고, 스리랑카의 남방 상좌부와 부파들 중 가장 유력했던 서북인도 지역의 설일체유부의 논들이 전할 뿐이다. 상좌부의 논으로는 《법집론(法集論)》 등 7종의 논이 빨리어로 기록되어 전한다. 이 7종 논은 다시 5세기경 붓다고사(佛音)가 지은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imagga)》에 이르러 하나의 완성된 사상체계를 형성하였다. 이에 비해 설일체유부의 논은 산스끄리뜨어 원전은 없고, 유부 교학 전체를 조직하는 ‘발지육족(發智六足)’의 7종 논이 한역(漢譯)으로 남아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다시 방대한 백과사전식 주석서 《아비달마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200권에서 더욱 심화되고, 마침내 4세기경 바수반두(世親)의 《아비달마 구사론(俱舍論)》 30권에서 그 핵심을 종합 완성할 수 있게 한다.

청정한 도에 이르고자 하는 《청정도론》은, 계정혜 삼학의 순서에 따라 붓다의 교법을 실천도로서 자세하게 해석하였다. 이런 가운데 존재론이나 심리론 인식론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들을 포함하는 아비달마 특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17) 한편 유부의 근본 입장은 ‘과거 · 현재 · 미래에 걸쳐 항상 존재하는 법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사론》에서는 유부의 이 같은 독자적인 법의 체계를 5위 75법으로 상세하게 분류,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극히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인도불교의 교학연구 경향을 보아왔지만, 그것은 중국불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에서는 특히 5~6세기 남북조 시대에 경전의 한역 작업과 각종 저술 활동을 포함하여 교학의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앞 장에서도 살펴본 대로, 이 시대의 교학연구는 아비달마장과 성실론 등 부파불교적 연구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이 반야 삼론 및 법화와 화엄 등 대승 경전에 대한 연구였다. 종파 이전의 학파적 단계로서 해당 경전의 연구가 진행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다양한 형태로 제기된 교판론(敎判論)들이다. 이후 수 · 당대의 불교는 이 같은 교상판석(敎相判釋)에 의해 각기 독특한 중국불교적 철학과 이념 아래 종파불교를 크게 꽃피워 나갔다.

이와 같은 전통교학의 연구 경향이, 학적체계로 설명되기도 하는 현대의 불교학과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원론적으로 말하면, 이 문제는 우선 전통교학 전반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오늘의 시대와 인간을 견인하고 격려하며 나아갈 가장 적절한 불교의 학적체계 정립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불교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불교의 한 특징이라 할 교상판석의 형식을 원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이는 충분히 완전할 수 없는 옛 교판의 답습을 말함이 아니다. 진정한 불교의 원(願)과 행(行)의 전망을 담은, 이 시대의 새로운 불교학 체계 구성에 대한 간구(懇求)이다.

 

4. 한국 불교학의 현실과 과제

동일한 학문 분야에서도 시대와 지역 또는 사회적 발전단계 등 조건에 따라 그 세부적인 모습은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이는 한국 불교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가령 과거의 전통교학에서라면 상상할 수 없는 현상들이 현대의 불교학에서는 어렵지 않게 확인되고 있음이 그러하다. 이 같은 사실은 근현대의 시대적 변화와 새로운 여건들이 한국 불교학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이 장에서는 그동안의 한국 불교학 가운데 특징적인 몇 가지 현실들을 대상으로, 시대적 변화 요인과 해결의 과제 등 그 요점만을 간략하게 제시해본다.

1) 불교학의 학문적 위상 제고를 위한 현실적 방안 모색

현재 한국 불교학은 공식적인 학문분야로서는 독자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매우 이상한 처지에 있다. 불교학의 이 같은 학문적 위상은 다름 아닌 국가 주도하에 있는 학문분류체계에 의해서이다. 2018년 개정된 현행 ‘국가 과학기술 분류체계’에 의하자면, 불교학은 대분류 속의 ‘인간’ 영역과 중분류 속의 ‘철학/종교’(HB) 분야에는 아예 들어 있지 않다. 다만 중분류인 ‘한국철학 · 동양철학 · 동양종교’ 항목 아래, 소분류로서 ‘한국불교철학’ ‘불교철학’ ‘불교’로 각각 포함되어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소분류 어디에도 ‘불교학’이라는 명목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학문분류의 전체적인 구도는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의 인문학 분야→철학/종교→불교학에 대한, 상대적으로 낮은 인식 수준과 차별적 현실의 반증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를 근거를 할 때 공식적 학문체계상으로 ‘불교학’은 없으며 존재 불가한 학문이 되고 만다. 그러나 현실에서 불교학은 여전히 탐구 연찬되고 있으며, 종립대학 등 이 분야를 전담하는 고등교육기관도 상당수 운영 중이다. 따라서 국가표준분류체계로 인해 초래된 이 같은 불교학의 미미한 위상 문제에 대한 성찰과 대응 방법의 모색에는 먼저 불교학계가 앞장서서 관심과 지혜를 모아야 할 일이다.

바로 그러한 과제 해결의 일환으로 무엇보다도 우선 철저하고 엄격한 인문학적 방법론의 불교학 연구 강화와 확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이래 한국 불교학계 일각에서는 불교학의 위기를 논하면서, 그 원인을 서구의 불교학 연구방법론에서 찾는 경향들이 있어 왔다. 이는 곧 서구의 인문학적 불교학이 불교의 신앙을 훼손하는 등 결과적으로 한국 불교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판단이다. 과연 인문학적 불교학은 불교의 진리를 오도하고 변질시키는 해악적인 연구 방법인가. 서구의 불교학은 처음부터 인문학적 방법론에 의해 개척, 완성해왔다. 또 그러한 연구들이 신부 등 상당수 다른 신앙인들에 의해 지속되었으며, 마침내 그들 스스로의 입장에서 불교의 진리체계를 이해하고 수용하기도 했던 사실을 함께 참고할 수 있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을 포함하여 인간 이성의 보편적 영역을 탐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이 같은 인문학적 불교학이 불교의 신앙을 훼손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유신론 체계의 종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불교의 교리사상적 입장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런 관점에서, 인간 이성 중심의 보편적 학문활동과 그 확장 노력은 불교학의 위상 제고에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 될 것으로 본다.

2) 불교학계의 인적 구성에 따른 학술과 신앙의 문제

불교학계의 전문 학술인들과 그 인적 구성의 내용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우선 불교학계의 범위가 모호하고 학자 및 연구자의 기준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의의 편의상 불교종립대학들과 한국불교학회를 비롯한 불교 관련 각급 학술단체를 함께 묶어 대강의 불교학계로 상정하고, 이들 대학과 학회에 소속된 교강사 및 전문 학술인을 불교학자 또는 불교연구자로 간주한다.

이 같은 불교학계의 인적 구성에서는 일반 학계와는 다른 기준의 특징이 주목된다. 거칠게 말하면, ① 승려 학자와 재가의 일반 학자 ② 일반인 학자 중 불교 신자와 비신자의 유형 등이 그러하며, 이들이 불교 학술 및 신행적 연구 활동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구성의 분포까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 유형에 따라 불교 학술연구의 성향이 서로 같지 않을 개연성은 그만큼 크다고 하겠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가령 일반 불교학자(또는 승려)가 교학(敎學)을 주로 하고, 승려 학자군에서는 종학(宗學)을 선택하는 사례 등이 이에 해당한다.

불교학계의 특징적인 인적 구성과 이에 따른 교학과 종학의 대비되는 두 갈래 현상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한국 불교학계의 학술과 신앙적인 연구 활동인 점에서 지적 · 종교적으로 해석하고 긍정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다만 불교학계로서는, 불교의 진리체계 전반에 대한 연구와 함께 인간과 세상을 향한 지성적 실천 행동을 보다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전 불교학계가 종학 또는 신앙적 연구 활동을 배제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불교학의 학술과 신앙을 효과적으로 구분하고, 또 동행해야 할 새로운 방안의 모색은 불교학계의 새로운 과제가 된다 하겠다.

3) 인간과 세계를 향한 불교학의 확대와 그 실용적 기능 제고

불교의 오랜 역사 및 활동 지역과는 무관하게, 그것이 불교학이라는 하나의 학문 분야로 성립한 것은 근대의 서구사회에서부터이다. 이후 동양의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들어온 근현대의 불교학이 그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로 성장해온 것이다. 그러나 불교학도 시대 여건과 사회적 요구에 상응하여 부상하거나 쇠퇴하기 마련이다. 광복 이후 동국대학교를 중심으로 연구 · 교육해 온 그동안의 불교를 크게 구분하면 불교사학, 불교교학(사상 및 신앙), 불교응용의 세 가지 영역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학제 변동 및 학문 구조의 조정 등에 따라 수많은 분과적 전공들로 분화하고 첨삭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불교학의 이 같은 동향은 요컨대 인간의 현실과 사회 및 세계의 추세에 상응하는 선제적 역할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 형태의 불교학 가운데서도 특히 응용불교학은 그런 역할에 가장 부합하는 분야에 해당할 것이다. 이는 인간과 세상을 위한 불교학의 실용성 측면은 물론, 특히 그 불교사상 및 해석학적 관점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응용불교학은 인간과 세계 현실에 내재된 불교 원리를 해석하는 세간 해석학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 연기하는 불교 원리를 직접 통찰 · 해석 · 조응(照應)하는 법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장 본질적인 목적과 그 실천으로서의 깨달음 혹은 열반의 이상을 제시하고 격려하는 불교학의 역할은 더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보다 많은 인간과 온 세상이 그런 불교의 이상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도 불교학의 확대는 필연적인 과제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응용불교학의 세간 해석학적 이론과 기능은 새삼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4) 이 시대 불교학의 큰 과제-새로운 교판의 수립 

불교학의 오랜 역사에는 언제나 교학사상적 층위와 대립이 있었고, 그것은 다시 새로운 탐구와 해석을 통해 더 큰 조화의 방향으로 전진하는 과정을 반복해온다. 이 같은 현상은 현재의 한국 불교학 안에서도 보다 구체적으로 논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의 강고한 대승불교 전통에 도전하여 현재는 거의 대등한 위치를 확보 중인 초기불교의 약진과, 그 연장선에서 더욱 크게 대비되는 두 가지 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대승불교 중심의 교학체계와 북방 간화선 수행법의 변함없는 자부심, 초기불교 중심의 교학체계와 남방의 사념처(四念處) 등 관법수행의 확산 경향이 그것이다.

넓은 교학의 바다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교법이 항상 출렁이고 그 가운데서 수많은 생명이 삶을 이어간다. 도대체 붓다의 말씀 · 가르침은 무엇이 진제(眞諦)이고 무엇이 속제(俗諦)인가.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가. 앞뒤가 서로 다른 교설을 수용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이 같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불교의 역사, 특히 불교사상사를 통한 불교 전체에 대한 조망과 통합적 이해가 요구됨은 물론이다.

불교는 붓다에서 시작되었지만 붓다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구한 불교 역사에서 수없이 드러났던 불교의 양태들, 근본불교-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 그리고 이들 각 단계의 무수한 교학 사상과 이념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 가운데 선호하는 어느 한 부분만이 불교이고 나머지는 비불교인 것인가. 이들은 모든 단계마다 각각의 진리를 말하고 있음이다. 따라서 그 전체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선택적으로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같은 현실에서, 신행인과 학자 등 불교의 집단지성에 의한 또 다른 결집이 요구되고 있다. 바로 이 시대 불교학의 큰 과제로서 새로운 교판(敎判)을 수립하는 일이다.

 

5. 불교로 보는 불교학의 목적

지금까지 불교와 불교학의 상호관계성, 전통교학과 현대의 불교학, 한국 불교학의 위상 및 그 현황에 대한 제반 문제점을 일별하였다. 이제 이 글의 중심 주제인 불교학의 목적에 대한 고찰의 순서에 이르게 되었다. 먼저, 불교학의 목적 설정과 관련하여 그 목적 설정의 주체는 누구이어야 타당한가 하는 논점을 점검해야 하겠다. 어쩔 수 없이 그 주체는 불교학 연구 활동과 그 성과들을 공유하기 마련인 불교학자 또는 불교 연구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 불교학자는 개별적이든 조직적이든 불교학의 목적 설정에서부터 그 구현에 이르기까지 책임성과 소명 의식을 부여받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들은 우선적으로 불교학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이는 이들 스스로가 매진해온 연구 활동의 성과와 역량에 따라 각자의 견해를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이고 또 보편적이라 할 불교학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일차적으로 정리하지 않고는 논지의 진행이 어렵다. 일단 불교학 범위와 관련해서는 종립대학 학부 및 대학원의 불교학 교과과정 정도를 기준으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불교학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연구영역들로 세분화되어 있으며, 이들 모든 학술 분야는 결국 경률론 삼장 안에 포괄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불교학이란 붓다의 깨달음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 경률론 각각을 소재로 한 학적체계라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23) 이 같은 삼장의 교법 일체는 불교대학의 교과과정으로 말하면 바로 ‘불교 교학’에 해당한다. 불교학 전체 범위 가운데 가장 먼저 손에 꼽히는 이 교학 안에는 초기불교, 아비달마, 대승교학, 율학, 선학, 밀교 등 많은 분류와 이에 속하는 세부 전공들이 배열되어 있다.

불교학의 범위가 이로써 다하는 것은 아니다. 교과과정에서는 다시 ‘불교사학’과 ‘응용불교학’을 차례로 제시하고 있다. ‘불교사학’은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아시아 각 지역 및 유럽과 미주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와 지역의 불교 전개 과정 전반을 교육 연구하는 분야이다. 여기에는 일반적인 불교 역사 및 교단사 외에 불교사상사, 불교문화사, 불교경제사 등 특수분야의 사학도 함께 포함된다.

한편 ‘응용불교학’에 대해서는 앞의 4장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1990년대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서 공식 도입한 불교학의 한 분야이다. 이는 인간 · 사회 · 세계에 대한 불교적 인식을 바탕으로 불교 이외의 다양한 학문 분야와 접목, 조응하는 가운데 새로운 불교적 해석과 그 실천적 가치를 구현하고자 한다. 그런 뜻에서 응용불교학은 곧 실용불교 또는 실천불교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 분야에서는 그동안 불교적 관점에서의 교육학, 사회복지, 심리학, 생태학, 문화콘텐츠 등의 연구 개척과 함께, 그 영역이 계속 확대되고 있다.

이상으로 불교학의 목적을 논하기 위한 배경 설정의 일환으로 불교학의 범위 대강을 열거해 보았다. 특히 ‘불교학의 목적’이라 할 때 그 ‘불교학’은 불교의 교리 · 교학사상(불교철학)이 중심이 된다. 따라서 경률론 삼장에 함축된 사상을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다만 이 글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불교학의 목적에 관해 그 방향을 제한적으로 밝혀 제시한 바 있다. 즉 불교학 전체의 궁극적 목적보다는 불교 대중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의 목적 설정과 그 실천의 탐구 문제에 주안점을 두고자 했다.

따라서 이 같은 목적과 관련하여 다시 필요한 몇 가지 전제를 세워본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즉 ① 불교학의 목적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교학체계 자체가 고정된 하나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연구자에 따라 또 다른 목적을 세울 수도 있다. ② 불교학의 목적들은 저마다의 유용한 의미와 가치가 있음을 인정한다. ③ 불교의 목적과 불교학의 목적은 원칙적으로 동일하다. 이는 불교 · 불교학의 다름과 같음에 통하는 문제이다. 이들 전제는 불교학의 목적에 대한 개념상의 이해이든 혹은 구체적인 성문화(成文化)로든 일정한 원칙으로 삼을 수도 있다.

이제 이 같은 전제 및 원칙을 염두에 두고 불교학의 목적을 개진하고자 한다. 이에 앞서 오늘의 시대에 새삼 불교학의 목적을 거론하게 된 배경을 잠시 언급해야할 것 같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이는 불교 특히 그 학문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언제라도 스스로 확인하고 점검해야 할 문제에 속한다. 그러나 좀 더 사실적인 계기라면 이는 불교학계를 포함한 한국불교 전체의 문제 요소 및 자체 모순의 현실들과 무관하지 않다.

먼저 한국 불교계 일반의 현실부터 예를 들자면, 특정의 어떤 종단이나 사찰을 막론하고 도처에 만연해 있는 비불교적 요소들이다.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승단의 세속화와 질적 저하, 시대와의 소통과 역할 부재, 미신과 기복적 신앙 의례, 교리체계 및 수행의 난맥상 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물론 이와는 구분되는 청정승가의 구도행이나 인간과 세상을 향한 서원과 헌신 등 진정한 불교적 수범(垂範)의 예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한국 불교계 안의 비불교적 요소의 만연이 이로써 상쇄될 문제는 아니다.

이 같은 종단과 사찰 등의 비불교적 요소들과 달리 불교학계 쪽에서는 또 다른 문제적 현상들과 마주친다. 우선 다양한 불교학 전공들이 인문학적 카테고리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학문분류체계의 문제에서부터, 불교학 연구자들의 열악한 활동 여건 등이 눈에 띈다. 또 앞에서 확인했던 불교학계 인적 구성의 특징적 현상도 눈여겨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물론 출가와 재가의 학자들, 그리고 재가 중에 신자와 비신자가 함께하는 현실은 독특하지만 그 자체로서 크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신앙과 학문의 경계 없는 혼효(混淆)는, 학문과 신앙 양편에 어느 정도 부담이 되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연유와 상관된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종립대학이 아닌 일반 대학이나 연구기관 소속의 학자들이 불교학에 관심을 갖거나 연구에 참여하는 경우, 그 학문적 경향은 한결 자유롭고 분방함을 느끼게 한다. 문제는 이런 불교학 연구방법론 및 자기 소신의 편협 또는 과잉으로 인한 학자들 간의 상호갈등과 부작용이다. 이는 소통 부재나 관심의 차이 정도가 아닌, 불교와 불교학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신념의 문제로 보인다.

한국 불교계와 불교학계의 비불교적 요소 및 자체 모순들이 대체로 이와 같다면, 그럴수록 불교학의 목적은 더욱 확고하고 선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철저한 원전 중심의 인문학적인 불교학 연구, 불교를 떠나서 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불교학의 독자적 엄정성, 불교학은 단지 학문의 가치로서만 인정하고자 하는 폐쇄적 지성주의 등의 입장에 대해서는 굳이 반론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불교학은 일반의 학문과는 다른 특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만 진리에 대한 객관적 · 개념적 · 철학적 인식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 실천적 · 종교적 인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이다.

다시 말하지만 불교가 삶의 철학이고 종교라면, 불교학은 그런 불교를 받아들여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불교에서 종교성을 배제하고 소거시켜버리는 불교학이란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불교라는 종교가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전제한다면, 객관주의에 함몰되어 불교 자체의 어떤 오류나 비불교성에 대해 함구해서는 안 될 일이다. 물론 불교에 대한 외부적 비판과 비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의 진리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정당하게 변호하는 의지까지 호교적(護敎的) 프레임의 자기검열에 의해 주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일들은 불교와 불교학을 통해 붓다의 가르침과 그 참정신을 바로 오늘의 현실에서 실천하려는 목적 그대로이다. 어떻게 말하든, 불교학은 결국 불교의 목적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언제라도 불교학에 그 목적의 강화와 쇄신을 요구할 수 있는 당위성을 갖는다.

 

6. 맺는말 

앞에서 전개한 논지의 요점을 다시 정리해 말하자면, 결국 불교는 불교학을 통해 증명되고 불교학은 불교로서 실현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는 불교와 불교학의 관계를, 양자는 분명 서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같은 내용과 모습으로 존재하는 불가분의 상호성으로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이 글은 불교와 불교학의 이 같은 다름과 같음에 유념하면서, 특히 불교학의 목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환기를 위해 시작한 것이다. 

불교에 관심을 갖고 그 탐색과 연구의 길에 매진하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이들은 각자 입론(立論)의 차원에서 불교학에 대한 목적을 설정한다. 그리하여 현재 불교학계의 중심이든 주변부에서든 함께 정진하는 인적 구성원들의 수만큼 각양의 불교학 목적들이 있겠지만, 이들이 반드시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와 불교학에 대한 이해의 정도와 대상을 해석하는 관점이 다르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다르기 때문이다. 한 불교학도로서 이 같은 현실을 냉정하게 인지하면서, 불교학의 목적에 대한 새로운 인식 문제를 제기함은 불교와 불교학에 대한 예의이며 도리라는 생각에서다.

이와 관련한 배경과 이유들을 일일이 적시하는 번거로움은 생략하였다. 오로지 불교학은 불교가 불교다움을 구현하고 실천하기 위한 방법이며 과정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입장에서 접근하였다. 깨달음 · 열반이라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혹은 세상의 모든 사람과 생명들의 참삶을 격려하기 위함에서다. 이 같은 목적을 불교학의 목적으로 동일시하는 설정이라 해도 그렇게 무리한 발상은 아닐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학의 목적 설정은 바로 오늘의 시대, 지금의 현실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절실하게 요구되는 바가 있다. 너무 고답적이고 현학적인 학리적(學理的) 활동과 그 결과만 강조되는 불교학의 목적에 매몰되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이 시대의 대중이 함께 불교의 진면목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즐겁게 동참할 수 있는 불교학으로서의 위상에 부응하는 목적이어야 하겠다. 그 구체적인 방향과 방안도 필경 불교 자체에 내재하는 것인 만큼, 이 또한 불교와 불교학의 긴밀한 상관성 안에서 찾을 수 있음을 확신한다. ■

 

이봉춘
동국대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동국대 불교문화대학(경주) 교수, 불교사회문화연구원장 등 역임. 〈삼국 ·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주체적 수용〉 〈조선전기 불전언해와 그 사상〉 등의 논문과 《불교의 역사》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불교평론 학술상 수상. 현재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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