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한용운의 삶과 문학‐당신을 보았습니다》(동국대 출판문화원, 2022, 344쪽)
《한용운의 삶과 문학‐당신을 보았습니다》(동국대 출판문화원, 2022, 344쪽)

폭염이 연일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코로나19 재유행 시기가 예상보다 빨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삶. 당연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만해의 삶과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환희의 선정(禪定)과 망국의 통한(痛恨) 사이에서 운명의 형식을 완성했던 만해. 그러나 우리는 그를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안다. 

정년 퇴임 후 평전 집필 계약서를 놓고 이런저런 구상에 잠겼던 작년 가을 어느 날, 문득 집으로 찾아온 제자들과 함께 1차 자료 위주로 만해의 삶과 문학을 대담 형식으로 살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評)과 전(傳) 사이에서 객관적 거리를 지키지 못하는 평전에 회의가 많았던 터였다. 출가에서 입적까지 다루기로 하고, 대화 주제는 다음과 같이 정했다. 

제1장 ‘시대의 불운과 운명의 행운’에서는 해방적 관심과 혁명적 정열의 소유자인 그가 출가하면서 자아와 세계의 혁명을 기획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에게 출가란 초월적 결단이자 일본의 정책적 배려로 재편되고 있던 불교계에 입문한 세속적 선택일 수도 있음을 주목했다. 그 역시 “나의 입산한 동기가 단순한 신앙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때 비로소 출가 시점과 세계 만유 등 그를 둘러싼 여러 논의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1908년 9월, 만해는 단기간이었지만 조동종대학에서 열정적으로 문화 자본과 사회 관계 자본을 축적하고 귀국했다. 그가 ‘학식이 섬부(贍富)한’ 승려로 소개(〈사문신숙(沙門新塾)〉 〈매일신보〉 1910.11.27)된 것은 이런 경력과 일본에서도 인정받았던 한학적 소양과 무관할 수 없다. 

제2장 ‘식민지 적자의 격분과 슬픔’에서는 당시 인구증산론의 일환이자 과열된 유신론이었던 승려 결혼 문제 그리고 비록 좌절은 했지만, 정신적 제왕으로서의 자부심을 품게 되는 임제종 운동을 살펴보았다. 재편된 불교계에 실망하고 만주로 떠났던 그가 총상의 후유증에도 《조선불교유신론》(1913)과 《불교대전》(1914)을 간행했던 것은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광문회와 신문관, 각황사, 조선선종 중앙포교당이 밀집한 중부 일대로 시선을 돌릴 때 만해의 위상은 더욱 뚜렷해짐을 확인했다. 한편, 신비 체험 이후 꽃은 그의 삶과 문학에서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으며, 사제관계를 맺었던 석전과 육당의 후원으로 언론에서 각광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는 없다. 

제3장 ‘행동적 수양주의와 문체개혁’에서는 박한영의 소개로 오세창을 만나 1,291인의 고서화를 배관하고 역사의 정통성과 정신문화의 우월성을 확인한 만해가 〈고서화의 삼일〉(〈매일신보〉 1916.12.7~16)을 발표하면서 지식인 사회에 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때 합석했던 지인들 대부분이 《유심》(1918)의 필자가 되고 3 · 1운동의 주역이 된다. 이후, 만해는 《정선강의 채근담》(1917)을 간행하고 정신수양 운동에 앞장서고, 《유심》을 통해 행동적 수양주의를 주장하게 된다. 《유심》은 만해가 문체 개혁을 통해 시인으로 출발했던 발판인 동시에 3 · 1운동으로 이어지는 정신사적 교두보 역할을 했던 불교 교양지로서 그 의미가 있다. 

제4장 ‘3 · 1운동과 민족적 자존심’에서는 만해가 불교계 대표로 활약하게 되는 과정과 공약삼장 추가설의 진위를 살펴보았다. 당시 최남선이 공약삼장을 작성했다는 것은 3 · 1운동 관계자료에 수록된 심문조서나 판결주문 및 사건의 경과로 볼 때 명백하다. 더구나 만해는 자신이 작성했다고 말한 적도 없다. 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오히려 만해가 육당의 독립선언서에 대한 불만을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1919)로 해소하고, 당당한 최후진술(1920.9.25)을 통해 민족의 사표가 되었으며, 초지일관 비타협 원칙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제5장 ‘이별의 의미와 재회의 환희’에서는 미발표작 〈죽음〉(1924)과 선화 게송집 《십현담주해》(1926) 및 《님의 침묵》(1926)의 상관성을 살펴보았다. 인간의 도덕적 본질을 제시해서 당시의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풍조를 바로잡고 싶었던 만해는 〈죽음〉에서 이상적 사랑의 실체를 보여주었고, 《십현담주해》에서는 깨달음의 과정을 불교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간결한 시적 언어로 형상화했다. 그리고 《님의 침묵》에서는 이별과 재회라는 원형적 상황에서 시적 화자에게 절대적인 사랑의 힘을 부여함으로써 세계의 자아화라는 서정시의 본령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십현담주해》와 《님의 침묵》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의 두 편이라 할 수 있다.

제6장 ‘운명의 형식과 유산의 계보’에서는 신간회(1927)에서의 활약상과 심우장 시절에 발표한 《흑풍》(1935)과 《박명》(1938)의 주제를 살펴보았다. 만해는 《흑풍》에서 참사랑이 독립정신의 원천임을 확인했고, 《박명》에서는 모든 것의 포기와 희생을 전제로 한 참사랑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만해는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랑, 자발적 의지에 의한 정조, 여기에 신식과 구식은 따로 없으며, 조선 사회에는 도덕적 인격과 근대적 주체의 자율성이 결합한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 《님의 침묵》 《흑풍》 《박명》은 참사랑의 의미를 추구한 4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44년 6월 29일, 이 작품들의 주인공처럼 초지일관했던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의인이며 지사인 만해는 우리 곁을 떠났다.

번뇌를 끊고 영혼의 해방을 추구했던 만해. 훼손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개혁의 길로 뛰어들었던 만해. 그리고 낡은 의미의 껍질을 벗겨내고 새로운 감성의 언어로 현대시의 지평을 열었던 만해. 이는 불교를 통해 자아와 세계의 혁명을 기획했던 한 사람의 세 얼굴이다. ‘님’이 침묵하는 시대가 베푼 운명의 행운으로 출가했던, 그리하여 고통의 쾌락 속에 학문과 생활과 예술의 행복한 일치를 이룩했던 만해의 보이지 않는 유산을 바로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재석 /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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