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잡지의 문화사적 의의 탐구한 역저 

근대 불교잡지와 만남

근대 불교잡지를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1996년 민족사에서 《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韓國近現代佛敎資料全集)》(전 69권)이 영인 출판되면서였다. 자료집은 대부분이 불교잡지로 이루어졌다. 물론 해방 이후의 잡지도 일부 포함되었지만, 대다수는 해방 이전의 근대 불교잡지였다. 이는 1995년 《한국불교 근현대사 사료집 Ⅰ, 신문으로 본 한국불교 근대사(상, 하)》(선우도량 한국불교 근현대사연구회)와 더불어 근대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과 내용을 1차 사료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들 신문과 잡지를 통해 근대불교사와 일제하 사찰령 체제에 대한 문제 인식을 하게 되었고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이 글을 통해 뒤늦게나마 자료집 발간에 관여한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린다.

근대 불교잡지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방대한 분량의 《불교(佛敎)》가 우선이었지만, 내용적으로 유용하게 활용된 것은 1910년대 불교잡지였다. 몇 권으로 합권된,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의 1910년대 불교잡지는 제목이 생소한 만큼 관심도 또한 높았다. 이들 1910년대 불교잡지들은 마지막 부분에 짧게 〈관보초록(官報抄錄)〉과 〈잡보(雜報)〉를 실었다.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에서 불교 관련 주요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관보초록〉과 불교계 주요 소식을 전하는 〈잡보〉는 분량은 적었지만 흥미롭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1911년 사찰령(寺刹令)을 통해 조선 불교계를 통제하기 시작한 소위 ‘사찰령 체제’를 이해하는 주요한 도구였던 셈이다. 일제 식민지불교의 기본 틀인 사찰령에 대응하는 다양한 주체의 길항 관계를 볼 수 있었다. 이는 1920년대 〈불교소식〉 〈휘보(彙報)〉 등을 통해 조선불교 중앙교무원 등 중앙 불교계의 소식과 전국 각지의 사찰 등의 동향과 불교계 내부의 문제와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근대 불교잡지를 불교사적 관점에서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근대 불교잡지의 내용은 불교사, 불교사상, 기행문, 교리문답, 시, 소설, 희곡, 광고 등 온갖 정보를 망라하고 있다. 특히 한국 근대불교의 근대성과 고유한 정체성을 담고 있는 불교잡지는 당대의 인물, 단체, 사건, 불교사상, 종교 일반, 사찰, 문화재, 문학, 예술 등을 연구할 수 있다. 따라서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잡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연구가 가능한 것이다. 이를 김종진✽의 《근대 불교잡지의 문화사》가 잘 보여주는 셈이다.

 

분석 대상과 방법의 치밀함

저자는 근대 불교잡지의 연구 대상으로 1910년대 발간된 잡지 6종(조선불교월보, 해동불보, 불교진흥회월보, 조선불교계, 조선불교총보, 유심), 1920년대 발간된 잡지 7종(축산보림, 조음, 금강저, 불교, 불일, 일광, 회광), 1930년대 발간된 잡지 7종(불청운동, 선원, 금강산, (신)불교, 룸비니, 탁마, 홍법우) 등 20종을 들고 있다. 이 가운데 1930년대 발간된 《탁마》 《금강산》 《(신)불교》 등 3종을 제외한 17종의 잡지를 실제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근대 불교잡지를 크게 시기적으로 분류하여 분석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에 1910년대는 〈제1부 교단 형성의 기제와 국학연구의 장〉, 1920년대 초 · 중반은 〈제2부 학술의 다변화와 문화잡지 지향〉, 1920년대 말 이후는 〈제3부 발간 주체의 분화와 역동성〉으로 구성하였다. 시대적 순서에 따라서 잡지를 분류하고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가장 간편한 분류방식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잡지 자체의 속성과 전재 과정을 살피는 문화사적 탐구 방식을 택함으로써 이 책은 ‘잡지의 문화사’를 내세우는 분석 틀에 성공하고 있다. 특히 문화사적 탐구는 근대의 새로운 매체인 잡지의 내재적 속성과 전개 과정을 학술 담론 및 문예활동을 통해 조명하고자 하였다. 이에 잡지의 전개사, 학술사, 문예사(문화사)를 분석의 틀로 만들어 다양한 근대 불교잡지를 분석, 기술하고 있다. 특히 잡지 발간의 주체인 편집인, 기자, 필진 등을 정리 분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잡지의 주도 세력을 명료하게 정리함으로써 잡지의 성격과 잡지의 전개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잡지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 학술 담론과 문예작품과 활동에 착목함으로써 잡지의 문화적 기능을 추출하였다. 

이러한 큰 틀에서 근대 불교잡지들을 꼼꼼히 읽고 분석한 결과를 70개에 이르는 다양한 표로 정리한 것은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이자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시간과 공력이 드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근대 불교잡지를 통해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한눈에 잡지의 성격과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표는 근대 불교잡지를 대상으로 각종 기사를 분류, 정리하고 필진과 투고자 등 집필진과 문학작품 등 장르별 목록을 작성하였다. 예를 들면 〈《조선불교월보》 불교청년(학생)의 투고 목록〉은 투고자의 이름과 제목, 소속 사찰 등으로 투고 목록을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함으로써 투고자들이 불교청년(학생)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또한 《조선불교총보》의 경우, 〈필진 분포〉 〈시론 목록-필자별〉 〈학술 논설 목록-필자별〉 〈불교사 기사 목록-필자별〉 〈출판 기사 목록〉 등을 표로 제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불교진흥회월보》 논설기사 목록〉 〈《금강저》 일본 유학생 졸업논문 목록〉 〈《불교》 1928~1929년 중반 문학작품 목록〉 〈《불교》 1930년도 도시 포교 작품 목록〉 〈《불교》 1930년도 기행문 목록〉 〈《회광》 학인 논설 목록〉 〈《불청》 주요 필진의 명단과 활동 이력〉 〈《선원》 선회와 법어 목록-필자별〉 〈《룸비니》 중앙불전 학생회 학예부원 명단〉 〈《홍법우》 재학 학인 논설 목록〉 등이 주목되는 표 내용이다. 

이러한 표를 통해 해당 잡지의 매체적 특징과 종교적 역할 및 문예적 성격을 잘 부각시키고 있다. 

 

근대 불교잡지의 종합적 분석 필요성

만해 한용운은 《원종》(2호) 이후 《조선불교월보》(19호), 《해동불보》(8호), 《불교진흥회월보》(9호), 《조선불교계》(3호), 《조선불교총보》(22호), 《불교》(108호) 등이 차례로 나왔고, 이러한 불교잡지가 7차에 걸쳐 제호는 바뀌었지만 조선불교 전체의 기관지였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기관지의 기본적 성격이 ‘보도’와 ‘교리 선전’이 주요한 기능이지만, 동시에 불교계의 정상적인 모습을 보도하는 것과 더불어 교리선전에서 벗어나 불교 행정에 대한 비판과 일반 불교도의 정신 진작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노력이 근대 불교잡지의 다양성과 이에 따른 분석을 통한 《근대 불교잡지의 문화사》라는 저작물이 나올 수 있는 근거라 할 수 있다. 당시 조선불교 1,500년의 역사와 1천에 가까운 사찰과 1만에 가까운 승려 및 수백만 신도를 지닌 조선불교 전체의 기관지로서 내용의 빈약과 휴간과 복간을 반복하는 잡지 발간의 현실을 아파하였다. 이는 단순히 재정난이 문제가 아니라 잡지 발간 주체들의 비판적 현실인식과 다양한 의견들의 수렴이 일제 당국과 본산주지들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과의 길항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책의 결정적 아쉬움은 저자가 언급한 대로 시간의 제약에 따른 불완전한 구성에 있다. 1930년대 발간된 《탁마》 《금강산》 《(신)불교》 등 3종을 제외한 것인데, 보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발간한 잡지 《탁마》는 소재를 확인할 수 없고, 금강산 표훈사 발간의 《금강산》을 제외한 것은 부차적인 것이지만, 1927년 복간한 《(신)불교》가 연구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치명적인 대목이다. ‘불교청년의 성장 서사’를 부제로 한 이 책이 온전히 일제 감정기를 관통하고자 한다면 1944년까지 발간된 《(신)불교》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분석한 바대로 《불교(佛敎)》는 1924년 발행되어 1933년 7월까지 거의 10년 동안 불교계를 대표하는 잡지였다. 이후 휴간되어 4년 동안 발간되지 못하다가 1937년 3월 다시 《불교》라는 이름으로 속간되었다. 이에 앞서 나왔던 《불교》와 구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신)불교》로 불렸다. 《불교》가 휴간되면서 불교계는 정식적 보도기관이 없어진 상태가 되었다. 물론 1935년 《불교시보(佛敎時報)》가 발간되었으나 교계의 기관지는 아니었다. 

불교계의 공식적 보도기관이 하나도 없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신)불교》가 속간되었는데, 발행 주체는 재단법인 중앙교무원이 아닌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등 경남3본산협회였다. 이들 협회는 사찰행정과 각종 의식을 일치시키고 포교와 교육을 위해 해동역경원 설치와 《(신)불교》를  속간함으로써 조선 불교계의 숙원을 풀었다. 이에 《(신)불교》는 1937년 3월 1일에 속간 제1집을 내고 1944년 12월 1일에 간행된 67집까지 나왔다. 편집의 원칙은 이전 《불교》와 거의 같았다. 1941년 10월호인 31집부터는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의 기관지로 전환되었다. 이는 불교계 통일운동으로 조선불교조계종이 불교계 대표기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계종의 기관지로 1940년대 불교계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군국주의화된 일제 당국과 친일을 강요받은 시기의 불교계 사정과 불교 지성과 불교청년들의 현실인식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불교청년의 성장서사’의 마지막 시기(1937~1944)를 연구 기간의 제약으로 방기한 것은 논지 구성의 완결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치명적 약점이라 할 수 있다. 

시기별 단위로 묶어 개별 근대 불교잡지를 분석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방법론적으로 명료하지만 종합적인 분석이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통도사의 《취산보림》(1920), 금강산 표훈사의 《금강산》(1935), 보현사의 《탁마》(1938)와 봉선사의 《홍법우》(1938) 등 개별 사찰이 발간한 잡지들을 개별적으로 분석하였지만 역량 있는 개별 사찰의 잡지 발간이라는 큰 틀에서 분석도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불교월보》 《해동불보》 《불교진흥회월보》 《조선불교계》 《조선불교총보》 《불교》 《(신)불교》로 이어지는 중앙 불교계의 잡지 계보를 종합적인 시각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매우 어려운 작업이지만 자세한 나무의 세세한 분석과 함께 큰 숲의 웅장함을 함께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후 시간 관계로 생략한 연구 대상을 추가한 수정 증보판이 나오길 간절히 기대해본다. ■

 

한동민 

중앙대 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 《‘사찰령’ 체제하 본산제도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주요 관심 분야는 지역사와 한국근대불교사이다. 저서로 《경기도 전통사찰을 찾아서》 《수원을 걷는다-근대수원 읽기》 《수원야사》 《불교계 독립운동의 지도자-백용성》 등이 있다. 현재 수원화성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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