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선교론(禪敎論)의 수립을 위하여 

1. 지눌과 성철의 대조적 안목

지눌(知訥, 1158~1210)과 성철(性徹, 1912~1993)은 같은 선문(禪門)의 우뚝한 거봉이면서도 깨달음(悟)과 관련하여 매우 대조적인 안목을 보여준다. 그리고 양자의 차이는 성철의 지눌 비판에 의해 전면적으로 부각되었다. 성철이 아니면 불가능하였을 ‘선문 돈오의 깨달음 논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눌은 화엄과 선문의 접점 모색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선문과 화엄의 소통적 관계를 집요하게 천착해 가는 지눌. 화엄적 해오(圓頓信解/稱性圓談/華嚴禪)가 이해의 장애[解碍]를 안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선문 안에 화엄적 해오를 포함시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지눌. —그의 심중에는 당대 선종의 현실과 사상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기존의 사유와 이론체계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성찰을 ’비판철학‘이라 부른다면, 지눌은 당대의 선종 선불교에 대한 비판철학을 제기하여 그 비판철학으로 한국 선불교의 새로운 장을 연 분이다. 

성철에 의하면, 지눌이 말하는 돈오에는 ‘지적 이해를 내용으로 하는 깨달음(知解인 解悟)’이 본령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지적 이해[知解]’는 분별 알음알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므로 선문의 최대 금기이자 돈오의 최대 장애물이다. 지적 이해에 의거한 깨달음은 여전히 분별에서 풀려나지 못한 것이므로 ‘점수’를 요청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돈오점수는 ‘교가(敎家)의 수행 방법인 해오점수(解悟漸修)’일 뿐 선문의 돈오견성이라 할 수 없다. 

그리하여 성철의 돈오 바로잡기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돈오점수적 화엄 해오가 돈오일 수 없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 하나이고, ‘오직 그리고 철저한’ 화두 참구를 통한 돈오돈수의 천명이 다른 하나이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넘나들 수 없는 경계선을 선명하게 획정하고, 선문 안에 돈오점수적 화엄선과 돈오돈수적 공안선이 결코 공존/양립할 수 없음을 가장 강력하게 천명한다. 성철 역시, 이미 주류가 된 지눌의 돈오점수에 대한 근원적 수준의 비판철학을 제기하여 한국 선불교의 새로운 장을 연 분이다. 

 

2. 새로운 독법의 요청

기존 선학과 교학의 용어와 논리 안에서 돈점 논쟁을 다루면, 지눌과 성철의 비판철학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어느 순간 제자리를 뱅뱅 돌게 된다. 성철과 지눌의 문제의식과 안목이 지닌 각자의 타당성과 기여분을 제대로 발굴하여 포섭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독법이 지속적으로 등장해야 한다. 두 분의 안목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다. 필자 나름대로 이 새로운 독법의 수립을 위해 돈오를 두 유형으로 구분하는 ‘돈오 유형구분론’을 제시하고 그 철학적 논거를 제시한 바 있다. 

근자에는 ‘이해와 마음의 의미 · 차이 · 상호관계’에 대한 성찰이, ‘돈점 깨달음 쟁론’을 비롯한 불교철학의 오랜 난제들을 풀어낼 수 있는 핵심 실마리라 여겨 관련된 생각을 가다듬고 있다. 원효와 선종 선불교를 나름대로 탐구하면서 품게 된 ‘이해와 마음’에 대한 문제의식은,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붓다의 ‘육근수호 법설’을 만나는 순간, 가두어 두었던 봇물이 터지는 듯 통쾌함을 맛보았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를 연발하며 붓다의 위대함에 거듭 머리 숙였다. 교학과 수행론에 누적된 철학적 난제들을 풀어갈 실마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희열이 전율처럼 관통했다. 

성철과 지눌의 비판철학은 ‘이해와 마음’에 대한 시선과 초점의 차이로 다룰 수 있다. 그리고 두 분의 안목은 ‘선과 교의 차이와 관계에 대한 이론(禪敎論)’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해와 마음의 의미 · 차이 · 관계에 관한 성찰’에 의해, 성철과 지눌의 돈점론뿐만 아니라 ‘선교론의 새로운 수립’을 전망할 수 있다. 

기존의 선교일치 · 선교합일 · 사교입선(捨敎入禪)의 논리로는 이 새로운 선교론을 감당해 내기 어렵다. 이 새로운 선교론은, 니까야 · 아함과 대승경론, 붓다 법설에 대한 남방 해석학과 북방 해석학을, ‘서로 통하게 하고(通)’ ‘서로 끌어안게 하는(攝)’ 화쟁의 통섭이론이 될 수 있다. 

무엇이라 부르건 간에 ‘변화 · 관계의 현상’ 이면에 있는 ‘불변 · 순수 · 완전의 궁극실재’를 설정하여 세계를 설명하거나, 그 궁극실재와의 합일을 마치 경험 가능한 것인 양 설득시키려는 논리 및 수행론이 불교의 옷을 입은 것을 통틀어 ‘변형 아트만 이론’이라 불러보자. 마음 현상 내면에 불변 본질이나 완전한 궁극실재의 주소지를 설정하고 그곳으로 귀환을 목표로 삼는 ‘마음 신비주의’도 한 유형이다. 이 변형 아트만 이론은, 아비담마를 비롯하여 대승불교와 선종의 도처에 자리 잡아 불교철학을 오염시키면서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현대 학인들에 의해서도 무분별하게 채택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선불교, 지눌과 성철, 원효의 언어를 읽는 시선들 가운데서도 쉽사리 목격된다. 성철 탐구에서도 반드시 유념해야 할 문제다. 

‘변형 아트만 이론’의 불교 내 존재와 문제점을 인지하는 학인들도 적지 않지만, 대안을 품은 비판이론이 아닌 ‘비판적 발언’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불교의 의상을 걸친 ‘변형 아트만 이론’이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려면 불교학 탐구방법론에서 ‘철학적 탐구’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원전 언어와 문헌학적 소양에 의거한 교학적 탐구는 불교학 방법론으로 정착되어 나날이 풍성하게 발전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불교 이론에 관한 철학적 탐구’는 아직 취약하다. 철학적 문제점은 철학적 성찰로 대응해야 한다. ‘이해와 마음의 의미 · 차이 · 상호관계에 대한 성찰’은 ‘변형 아트만 이론’을 제대로 비판하고 그 대안적 사유를 제시하는 데 유효하다.  

 

3. 《정독 선문정로》 : 친절하고 유익한 《선문정로》 통역서

한글세대 한국인들에게 성철의 법문은 대부분 외계어처럼 낯설다. 불교 용어와 교학 이론, 난해하기만 한 선어(禪語)들이 현토형 한문과 뒤섞여 있기에 난감하기만 하다. 꾸준히 진행된 후학들의 한글화 작업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부분의 글 자체가 낯설고 어렵다. 대화를 이어주는 ‘통역으로서의 번역’이 필요하다. 번역은 ‘대화의 자리’를 펼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번역은 일종의 통역이다. 좋은 통역일수록 좋은 대화가 이루어진다. 통역의 방식과 수준 및 내용에 따라 대화의 수준과 내용이 결정된다. 

《선문정로》는 성철 선사상 탐구의 입문서이자 교과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한글 문장의 저술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의 전문성과 현토형 한문 문장들로 인해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읽어가기가 어려운 책이다. 그런 만큼 학인들을 위한 좋은 통역서가 절실했던 책이다. 강경구 교수✽가 이 요청에 답하였다. 《정독 선문정로》(장경각, 2022)는 친절하고 유익한 《선문정로》 통역서이다. 이 책에는 개인의 구도자적 진정성과 학문적 철저성이 성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선문정로》 원문에 대한 현대어 재번역과 인용문 분석, 상세한 해설은 유익하고 친절한 통역이다. 

《정독 선문정로》는 그 학문적 기여분도 돋보인다. 성철이 인용하고 있는 경론과 어록들의 원문을 일일이 찾아 성철의 인용구와 원전 내용과의 차이를 꼼꼼하게 대조한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그 차이들의 의미 분석이다. 차이가 발생한 이유에 대한 강경구 교수 나름의 분석은 성철 연구사의 결함 내지 결핍을 메워주는 것이기에 중요하다. 

기존의 성철 연구에서는 성철의 인용 문구들이 원본 내용과 다른 부분이 상당하다는 점을 성철 사상의 결함으로 간주하는 비판적 시선도 있었다. 강경구 교수의 분석은 이러한 비판이 부당한 억측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입증한다. 성철이 시도한 인용구문의 변형은 실수나 결핍이 아니라 의도적 선택이라는 점, 그 의도적 변형은 의미의 명료한 전달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성철 자신의 관점을 입증하기 위한 해석학적 선택이라는 점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에 주체적 안목을 결합하는 독특한 인용 방식이라는 것이다. 성철이 시도하고 있는 ‘인용의 의도적 변형’은 그의 실력과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을 보면서 원효(617~686)를 떠올린다. 원효는 그의 저술에서 당대에 유통되던 거의 모든 방대한 경론을 적재적소에 종횡무진 인용한다. 지금이야 컴퓨터만 있으면 전자불전 DB를 활용하여 필요한 내용을 얼마든지 손쉽게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도서 보관과 관리가 어려웠을 당시의 환경을 고려하면, 원효의 인용 능력과 그 내용은 불가사의하다. 한 번 읽은 내용을 그대로 머릿속에 입력해 두었다가 필요한 대로 출력해 쓰는 것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주목되는 것은 원효의 인용 방식이다. 원효는 원문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물론, 필요에 따라 원문을 과감하게 축약하거나 재배열하면서 자신의 이해와 관점을 전달하기 위한 전거로 삼는다. 경론의 권위가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지는 때에, 웬만한 실력과 자신감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성철의 인용 방식이 원효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대중 학인과 전문 학인 모두에게 《정독 선문정로》는 유익한 통역 가이드 역할을 할 것이다. 성철 탐구의 길을 넓혀주고, 나아가 ‘새로운 선교론’ 수립 작업에도 기초가 될 것이다. ■

 

박태원 

불교철학자. 울산대 철학과에서 불교철학, 노자 · 장자 철학을 강의하였고 현재 울산대 명예교수이다. 퇴임 후 영산대 화쟁연구소 소장으로 화쟁인문학 수립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 《원효의 통섭(通攝)철학-치유철학으로서의 독법》은 한국연구재단 우수학자 지원사업의 성과물이며, 토대연구 지원사업으로 완료한 원효 전서 번역은 교육부 주관 ‘학술연구지원사업 우수성과 50선’에 선정되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