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불교학 한계, 도전적으로 비판하다 

깔루빠하나(David J. Kalupahana, 1936~2014) 
서구불교학 한계, 도전적으로 비판하다 

깔루빠하나(David J. Kalupahana)는 1936년 스리랑카 남부 갈레(Galle) 지역에서 태어났다. 1959년 실론대학교(University of Cylon)에서 문학석사를 받은 후 영국으로 유학하여 1966년 런던대학교(University of London)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학위논문은 〈빨리 니까야와 중국 아함경에 구현된 초기불교 인과론의 중점 분석(A Critical Analysis of the Early Buddhist Theory of Causality as Embodied in Pali Nikayas and the Chinese Agamas)〉이다. 이 학위논문은 이후 확대 수정을 거쳐 1975년 하와이대학에서 《인과성: 불교의 중심철학(Causality: 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1975)이라는 저서로 출간되었다. 2014년 1월 1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그는 붓다의 본의를 밝힌다는 사명감으로 수많은 저서를 펴냈다.

깔루빠하나의 저서는 영어권 불교학자의 저작들 가운데 한국어로 가장 많은 번역이 이루어진 역서 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글이 번역자들이 번역하기 쉽게 쓰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렇게 쉽게 읽힌다는 것은 그가 불교의 철학적 성격을 매우 명료하게 이해하고 기술했다는 말도 된다. 저술의 명료성과 더불어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불교 이해가 그동안 우리 한국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접했던 서구 불교계의 불교 이해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앤드루 턱(Andrew P. Tuck)은 그의 저서 《나가르주나 문헌의 서구적 해석을 중심으로 살펴본 비교철학과 연구 방법 철학의 문제점 고찰(Comparative Philosophy and Philosophy of Scholarship: On the Western Inter-pretation of Nagarjuna)》에서 깔루빠하나를 불교 내적 논리로 불교를 설명하기 시작한 현대 불교학자로 지목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깔루빠하나의 불교 이해방식이 기존 서구인들의 철학적 관심에 따라 이루어진 불교 이해와는 다른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턱(Tuck)과 같은 학자의 깔루빠하나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실제 서구 불교계에서 깔루빠하나의 불교 이론은 주류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비주류성이 그의 이론에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가르주나(Nagarjuna)와 바수반두(Vasubandhu)의 저작을 붓다의 철학적 통찰 산물인 초기불교의 무아와 연기 이론의 심화 재현이라고 보는 깔루빠하나의 후기 불교철학 이론은 사실 오랫동안 무반성적으로 유지되어온 많은 불교 연구방식 혹은 여러 불교 종파의 교리에 대한 강한 비판, 더 엄격하게 말하면 포기를 요구하는 도전적인 공격이었다. 더구나 스리랑카, 영국, 미국의 학계를 거치면서 다져진 깔루빠하나의 학문적 바탕, 즉 불교뿐만 아니라 서구 철학 그리고 산스끄리뜨, 빨리 고전 언어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은 기존의 학자들이 무시하기 어려운 견고한 수준이어서, 그의 도전적 비판은 매우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깔루빠하나는 자신의 이러한 이론 전개로 학계의 몇몇 동료들과는 인간적으로까지 멀어진 경우도 있다고 제자인 필자에게 안타까움을 말하기도 하였다. 

사실 자신의 뿌리인 남방불교 전통과 거리 두기가 시작된 그의 후기 불교철학 이론은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이기도 한 그의 스승 자야띨레께(Jayatileke)와의 이론적 결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지적하듯이, 나가르주나와 바수반두가 진정한 붓다의 적자라고 옹호하는 그의 주장, 즉 소승 전통에서 대승 전통으로의 이러한 자신의 변환을 대승불교 전통에 있는 기존의 중국, 한국, 티베트 또는 일본불교 전공학자들이 반기는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 턱(Tuck)과 같이 기존의 불교 해석에 의문을 품는 학자들과 젊은 신진 불교학자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동서 구별할 것 없이 많은 학자가 그가 붓다를 괴물로 만들고 있다고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할 정도로 깔루빠하나는 학계에서도 매우 외로운 위치에 있다. 그는 학술회의에 참가할 때 전투하러 간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입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이 신념으로 인해 그를 반대하는 이들은 그를 부정적 의미에서 불교근본주의자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깔루빠하나는 이를 역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긍정적 의미에서 불교근본주의자라고 자임한다.

자신을 불교근본주의자라고 자부하는 자신감에 기반하여 그는 자신과 다른 불교적 관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해왔는데, 이는 서구 학계에서 깔루빠하나 자신의 입지를 스스로 좁히게 되는 현실적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자신과 다른 관점에 대한 그의 철저한 비관용적 태도는 비판 상대들에게는 그가 매우 공격적인 인물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이 이해한 붓다의 철학적 종교적 입장만이 옳고 당신과 다른 나는 사이비란 말이냐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자초한 것이다. 사실 자신도 그러한 상황을 몰랐을 리 없었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령 없이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공격적으로 밝혀 외로움을 자처한 학자이다. 

그의 불교관은 앞서 언급한 바처럼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그는 1976년경까지만 해도 그는 테라바다(Theravada) 전통의 불교관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전통적 견해는 이후 완전히 바뀐다. 그는 자신의 저서 《인과성: 불교의 중심철학(Cau-sality: 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1975)과 《불교철학: 역사적 분석(Buddhist Philosophy: A Historical Analysis)》(1976)의 내용을 수업시간에 언급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나의 저서가 아니라고 말했는데, 그 까닭은 바로 그의 전기 불교관이 후기 불교관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1971년 하와이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초빙되었을 때부터 점차 시작되었을 것이다. 동서 비교철학으로 특화된 그곳에서 많은 학자의 다양한 견해를 접하면서 차츰 그는 자신의 불교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자신의 불교관 변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연구의 시작은 나가르주나와 바수반두 저서의 분석이었다고 말한다. 이 연구에서 초기불교의 정신이 이 양인에게서 회복됨을 발견하고 《나가르주나: 중도의 철학(Nāgrājuna: The Philosophy of the Middle Way)》(1986)과 《불교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Buddhist Psychology)》(1987)라는 두 책을 통해 그 내용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와 같은 연구결과에 입각한 불교철학사를 서술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철학사: 연속과 불연속(A History of Buddhist Phil-osophy: Continuities and Discontinuities)》(1992)이다. 

이 책에서 그는 붓다에서 목갈리풋타 팃사(Moggalīputta-tissa), 나가르주나, 바수반두를 통해 복원되는 초기불교의 철학적 통찰력, 즉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의 본래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붓다 이후 불교 이론은 발전이라기보다는 실체론적이고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지닌 인도의 전통 종교, 철학의 영향 또는 여러 후기 불교학파들이 스스로 구성한 실체론적 불교 이론들에 의해 왜곡되는 길을 걸어왔다고 본다. 따라서 위에 거론한 이들에 의해 다시 붓다의 견해가 잠시 바로 서지만 또 다른 왜곡과 오해가 잇따르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한다. 즉 불교철학사는 뿌리 깊은 인간의 실체론적 사고와 형이상학적인 사고 경향이 끊임없이 붓다 본래의 이론을 왜곡시켜 나가는 역사이며, 수백 년의 간격을 지니고 나타나는 위와 같은 천재들에 의해 붓다의 철학적 통찰력이 잠시 복원되는 그러한 과정의 기술이라고 본다. 아마도 깔루빠하나는 본인 자신을 이 시대에 붓다의 철학적 통찰력을 다시 복원하는 학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불교 이해방식에 매우 배타적인 이유는 아마도 불교의 본의를 자신이 바로 세우고 있다는 이와 같은 자신감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이 담긴 많은 저작 중에 앞서 언급한 세 저서와 더불어 우리가 보다 더 주목해야 할 책은 《붓다의 언어철학(The Buddha’s Philosophy of Language)》(1999)이 아닐까 필자는 생각한다. 그 까닭은 이 책에서 붓다의 언어 쓰임 방식의 독특성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적 해석을 그가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은 깔루빠하나가 불교가 왜 다른 전통의 철학과는 완전히 다르게 다루어져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총 16장에 짧은 결론을 부가한 이 책은 134쪽의 적은 분량이지만, 이 책에는 동서의 구분을 뛰어넘는 다양한 철학적 논의가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흐트러짐 없이 유지된다. 그 일관성은 그의 저서 《불교철학사: 연속과 불연속》에서 활용된 전통 인도철학(Vedic-Upanisadic Philosophy)과 반베딕(Anti-Vedic)으로서의 불교라는 대립 구도를 변함없이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깔루빠하나는 이 책에서 그 대립 구도를 그들의 언어관에 다시 적용한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언어(Language of Existence)와 생성의 언어(Language of Becoming)의 대립이다. 그는 사실 베딕 전통의 존재의 언어가 처음부터 그렇게 경화된 형태로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제계급의 언어로써 경직화되고 추상화되고 배타적인 형태를 띠며 발전할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발전은 그들 계급의 이익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계급적 이해를 정당화해주는 그들 철학의 중심 개념인 브라흐만 또는 아트만은 바로 불변의 그 무엇이 되어야 하며, 그들의 사유방식은 그것의 본질을 찾는 방향으로 결정된다고 본다. 이에 따라 그들의 언어 쓰임 방식도 그러한 사유방식을 강화하는 형태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제 그들이 쓰는 말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며, 변화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그 자체가 신비한 힘을 지니는 실체적인 그 무엇으로 발전한다. 깔루빠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베딕 전통 철학이 실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즉 현실과 유리된 초월적인 경향을 지니게 된다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초월성 때문에 그들이 언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는 점이다. 

깔루빠하나는 이에 반해 불교는 매우 언어 친화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일반적으로 불교에 대해 갖고 있던 우리의 선입관을 뒤엎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의 바탕에는 세계와 자아에 대한 붓다의 독특한 설명 방식인 연기론이 깔려 있다. 그는 붓다의 연기론을 철저한 경험론(A Radical Empiricism) 혹은 붓다의 경험론(The Buddha’s Empiricism)이라고 표현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앞서 언급한 베딕 전통 철학을 철저히 극복하고 있는 붓다의 세계관이 그들과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렇듯 다른 세계관을 가진 불교는 당연히 언어에 대한 이해, 언어 쓰임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깔루빠하나는 불교의 독특한 언어 쓰임 방식은 붓다가 인간의 개념(Conception) 작용을 적절히 이해함으로써 시작된다고 본다. 그는 붓다가 인간이 지닌 개념화 작용을 부정적으로만 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붓다는 다만 개념화 기능에 의해 지칭되는 것이 구체적 사태와 무관하게 고립적으로 경화되어 추상적 실체화하는 것을 철저히 회피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붓다의 입장은 불교 경전의 다음과 같은 언어 쓰임 방식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즉 존재한다(exist)에 해당하는 동사들(atthi, santi, bhavati)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도, 그것의 추상적 형태인 ‘존재(existence)’에 해당하는 용어(atthi-tā)는 매우 절제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붓다가 개념이라는 용어보다는 ‘개념작용이 일어난다(conceiving(s) occur 또는 reckoning(s) take place 즉 saṁkhyaṁ gacchanti)’와 같은 표현을 많이 쓰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붓다는 베딕 전통 철학이 보여준 개념의 실체화 기제를 잘 인식하고 그것을 회피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에 대한 이해 즉 개념에 대한 매우 유연한 붓다의 태도는 개념이라는 것이 감각 경험과 이론을 잇는 매개물일 따름이라는 바른 이해에 기인한다. 이러한 이해는 물론 붓다의 연기적 세계관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세계관은 실제 경험 대상과 그것을 설명하는 개념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간극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는 언어 쓰임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면 우빠니샤드 전통에서 심(心)과 신(身) 즉 nāma, rūpa는 두 개의 구분되는 존재로 이해되어 양수형인 nāmarūpābhyām으로 표현되는 데 반해, 붓다는 이를 심신 일체(一體)의 인격체로 보아 단수형인 nāma-rūpāṁ을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깔루빠하나는 이러한 언어 쓰임 방식이 한두 번의 예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 경전 전반에 걸쳐 침투해 있음을 지적한다. 깔루빠하나는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어 수업 중에 종종 기존 서구의 빨리, 산스끄리뜨 경전 번역이 총체적으로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서구적 언어 쓰임 방식에 따른 습관적 경전 번역은 독자의 경전 이해를 심각하게 오도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실제 그는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초기 불교 문헌 자료집(A Sourcebook Of Early Buddhist Philosophy)》(2007)과 《후기 불교 문헌 자료집(A Sourcebook on later Buddhist philosophy)》(2008)을 출판하게 되었다.

깔루빠하나가 파악한 이와 같은 붓다의 언어 쓰임을 설명하는 가운데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대목은 붓다가 비개념적 지식(non-conceptual knowledge)을 부인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철저한 경험론으로서의 불교라는 그의 생각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인식 작용과 사고 작용의 뚜렷한 구분 즉 viññāna와 citta 또는 mano의 구분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시 말해 viññāna는 연속적인 감각자극을 수용하는 기능이며 이를 분석하여 단순화된 형태로 개념화하는 것은 citta 또는 mano의 기능으로 본다. 다만 (역사적 경험의 결과로서의) 인간의 육체적, 언어적, 정신적 경향성(disposition)이 viññāna와 citta 또는 mano를 연결할 따름이다. 이렇게 보면 지식이란 이미 사고 작용의 산물로 ‘비개념적 지식’이란 우리의 경험 내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즉 붓다는 유연한 경험과 고정화 경향을 지니는 지식의 분리 파악을 통해 자신의 연기론적 경험주의 철학과 기존의 형이상학적 철학(개념적 존재를 경험의 차원에 정위시키는)의 차별성을 분명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깔루빠하나는 이러한 구분을 바탕으로 기존의 존재론적인 참(true)과 거짓(false)의 이가논리(二價論理)를 대체할 참(true), 반대(contrary), 모순(contradictory)이라는 범주를 지닌 생성의 논리(Logic of Becoming)를 제안한다. 이것은 마치 인간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 이분적 참과 거짓의 세계를 미리 단정적으로 전제한 존재의 논리(Logic of Existence)의 부적절성과 비실재성을 비판함과 동시에, 앞서 언급한 인간의 기질 또는 경향성이 개입되어 이루어지는 경험적 세계만이 실재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에서의 대상에 대한 인간의 판단은 참(true), 혼동(confusion), 거짓(false)의 삼가(三價)로 나타난다. 그는 이러한 인간이 개입되어 성립된 세계 즉 인간과 대상의 상호침투적 연기적 세계를 설정함으로써 사실과 가치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불교윤리, 경험에 근거한 유연한 해석이 가능하여 항상 새로운 목표를 향해 실천되는 윤리를 주창하게 된다. 즉 “윤리적으로 살라, 그러나 윤리적 덕목에 갇힌 삶을 살아선 안 된다(Be virtuous, but made of virtues)”는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의 경구는 바로 이러한 불교윤리의 정신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 된다.

깔루빠하나의 글쓰기 방식은 특정 주제를 매개로 하여 자신이 파악한 붓다 세계관의 독창성 또는 우월성을 설득하기 위해 동서의 많은 철학가의 견해와 대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방식은 자칫 자신의 견해를 부각시키기 위해 타 철학자들의 논의를 지나치게 단순화 또는 왜곡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론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깔루빠하나의 불교관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비판 가운데 깔루빠하나가 종교적 신비주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라는 비판은 그의 불교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필자는 그에게 이메일을 통해 ‘기존의 많은 학자들이 당신이 미국식 실용주의의 잣대로 불교를 경박하게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한 적이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한 비판에는 중대한 두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 저의 불교해석을 대중적인 의미의 미국식 실용주의 관점의 산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저의 실용주의는 오히려 미국 학계에서는 그동안 오해하고 등한시했던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 철학 노선에 가깝습니다. 물론 저는 윌리엄 제임스의 철학은 제가 주장한 불교적 세계관으로 볼 때 비로소 그의 진의가 파악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저의 불교관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미국식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멀며, 문자 그대로 근본불교적 세계관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지요. 둘째, 그들의 비판에는 종교적 신비성이 초월적인 세계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작용합니다. 마치 제가 주장하는 불교관에는 종교적 신비경험이 제거된 것처럼 이야기하지요. 왜 신비한 것은 초월적이어야만 하나요? 종교적이기 위해서 그런 초월성이 꼭 있어야만 합니까? 제가 본 불교의 연기관은 그러한 초월성을 전제하지 않고도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의 구체적 신비경험을 설명합니다. 구체적 삶에 녹아있는 신비성, 경건성, 도덕적 요청이 바로 부처님이 설명하신 연기적 세계의 내용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붓다가 구체적 삶을 강조하고 있다는 깔루빠하나의 붓다관 또는 불교관은 분명 과거의 것들과 대비되는 독특함이 있다. 필자는 이러한 깔루빠하나의 견해를 단순히 특이한 견해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불교의 현대적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깔루빠하나의 불교 이해방식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의 불교관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동안 각인되었던 불교 지식을 새롭게 재정립하도록 요청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어, 특히 기성 학자들에게는 오랫동안 쌓아왔던 자신의 지식체계를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부담을 안겨주게 된다. 이 부담이 개별 학자의 지적인 고민이 아니라 오랜 세월 구축되어 온 불교학파의 집단 부담이 될 경우 깔루빠하나의 불교관은 더욱 수용되기 어려워진다. 실제로 깔루빠하나에게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 자신의 저서들을 문제없이 출판해오던 출판사 편집인들의 구성이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한 불교학파의 학자들로 집중되자 그의 새로운 원고들은 더 이상 그 출판사에서 채택되지 않는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깔루빠하나의 말년의 저서들이 이를 계기로 미주가 아닌 스리랑카 혹은 인도 쪽 출판사에서 발행되게 되는 이런 상황은 단순히 학계 간의 배타성 문제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그가 제3세계 학자가 아니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화이트헤드가 서구의 전통적인 존재론에 반하는 비주류 이론을 전개하고 있지만, 누구도 그의 이론을 없는 듯 대하지 못하며, 그의 학적 지위는 이해 여부를 떠나 확고하고 영향력도 매우 크다는 사실과 대비된다. 필자는 깔루빠하나의 이론이 보다 더 널리 수용되고 보편화되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곧 그런 시기가 오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제3세계 학자로서 더구나 자신의 불교관에 대한 확신에 따른 완고함 때문에 배타성이 더 커진 면이 있지만, 선입견이 적은 젊은 학인들에게는 그의 불교 이해방식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에 더해 역동적 연속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데 있어 추상적 개념적 사고의 산물인 언어가 지닌 특성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문제, 즉 개념이 유연성을 잃고 경화된 형태로 사용될 때 나타나는 현상을 깔루빠하나가 매우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기적 관점에서 언어 현상을 설명하는 그의 통찰력은 단순히 불교 이해뿐만 아니라 동서를 불문하고 나타나는 실체론적 사고, 형이상학적 사유의 난제들을 해소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가 서구에서 습관적으로 사용되었던 많은 실체론적 철학적 용어들을 자신의 과정철학에 적합하게 새롭게 의미를 부가하려는 노력을 통해 보여주었던 철학적 문제의식, 즉 연속적이고 역동적인 구체적인 세계를 담아내지 못하는 서구의 형이상학적 세계 이해의 한계와 그 극복 방법을 깔루빠하나는 붓다의 연기론이 이미 오래전에 설파했다고 보고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현대적 용어로 보다 더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비주류 철학이라는 불리는 철학들은 합리성의 결여로 비주류가 된다기보다는 공감의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그렇게 자리매김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가 본래 비주류가 아니었던 것처럼, 필자는 이러한 깔루빠하나의 철학이 주류 비주류의 차별을 넘어서 머지않아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적절한 이해의 도구로 일반화될 것으로 믿고 있다. 마치 한국의 K콘텐츠가 많은 세계인의 호응을 얻는 것처럼. ■  

 

 

허인섭

연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철학과 졸업(M.A.). 하와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졸업(Ph.D.). 덕성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역임. 주요 논문으로 〈초기 중국불교의 성격 이해를 위한 쿠샨제국 시대 전후 중앙아시아의 종교적 상황과 불교 특성 고찰〉과 〈당대(唐代) 경교(景敎) 일신(一神) 개념의 중국적 변용 연원 고찰〉 등이 있고, 저서로 《초기 중국불교 형성사-초기 중국불교 담론 특성 연구》 등이 있다. 현재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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