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인도불교의 부흥을 이끌다

암베드까르(B. R. Ambedkar, 1891~1956)
현대 인도불교의 부흥을 이끌다

인도를 붓다의 나라이자 불교의 발상지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불교가 현재 인도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11년 실시된 인도의 종교인구 조사에 따르면 현재 인도의 불자 인구는 7,955,207명이며 이는 전체 인구 중 1%에도 미치지 못하는 0.7%에 불과한 숫자이다. 

불교는 발생지인 인도에서 13세기 초에 거의 사라져버렸는데, 그 이유를 두고 많은 주장이 있다. 인도에서의 불교 멸망에는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그중에서도 불교가 당시의 힌두교와 유사한 모습으로 변해 가면서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는 점과 재가자들을 위한 의례 등이 부족하여 신도들의 소속감과 결속감이 부족했던 점 등이 주요 이유로 꼽히고 있다. 이처럼 정체성을 잃어가던 불교가 이슬람의 침공이라는 결정적 타격을 입어 날란다(Nālandā) 대학과 비크라마쉴라(Vikramaśilā) 사원이 파괴당한 후 인도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인도에서 잊혔던 불교는 인도를 지배했던 영국인들에 의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1836년에 제임스 프린셉(James Prinsep)이 브라미(Brahmi) 문자를 해독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인도 전역에 아쇼까(Aśoka)왕이 세워둔 석주의 글씨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불교 성지의 위치 확인과 발굴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룸비니(Lumbini)와 사르나트(Sarnath) 등에 세워진 석주의 비문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국인들의 고고학적 발견이 불교를 다시 종교로서 인도에 되살리는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도에서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던 불교가 다시 신앙으로 살아나게 되고 이전의 인구조사에서는 집계조차 되지 않았던 인도 내의 불자 인구의 수가 그나마 인구 전체의 1%에 가깝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1956년에 있었던 불가촉천민들의 집단개종 행사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암베드까르와 신불교의 탄생

1956년 10월 14일에 열린 이 집단개종식에서 약 40만 명의 사람들이 힌두교를 떠나 불교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개종식의 중심에 암베드까르(B. R. Ambedkar, 1891~1956) 박사가 있다. 이 개종식에서 암베드까르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법랍이 높은 승려였던 미얀마 출신의 우 찬드라마니(U Chandramani) 스님에게 수계를 받았다. 삼귀의를 낭송하고 불상 앞에 삼배를 올린 암베드까르는 군중을 향해 돌아서서 불교로 개종하고자 하는 이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라고 외쳤다. 흰옷을 입고 그곳에 모인 40만 명의 군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암베드까르를 따라 삼귀의와 오계를 낭송하고 불자가 되었다. 다음날 늦게 도착한 10만 명의 군중 역시 같은 의식을 치렀고 이틀 동안 무려 50만 명의 사람들이 불교 신자가 되었다. 이 개종식은 인도에서 고적으로만 남아 있었던 불교가 살아 있는 신앙으로 부활하는 계기이자 ‘신불교(Neo-Buddhism)’로 표현되는 현대 인도불교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집단 개종을 주도한 암베드까르 박사는 현대 인도불교 부흥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암베드까르 박사는 인도의 초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기도 하고 인도에서는 아버지와 같은 스승이라는 의미의 바바사헤브(Babasaheb)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인도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가 널리 알려졌지만 인도의 민중들, 특히 천민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암베드까르는 간디 못지않게 인도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스스로가 인도의 계급제도인 카스트 제도에서 소위 말하는 ‘불가촉천민’이었다. 흔히 알려진 대로 카스트는 브라만(brāh-maṇa), 크샤트리야(kṣatra), 바이샤(vaiśya), 수드라(śūdra)의 네 계급으로 구성된다. 그러면 말 그대로 접촉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의미의 불가촉천민은 그 네 계급 중에서 어디에 포함될까? 그들은 그 카스트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카스트 바깥의 존재들이다. 그 때문에 그들을 영어로 ‘Outcaste’라고도 불렀다. 

현재 인도 정부에서는 흔히 불가촉천민(Untouchable) 등으로 지칭되었던 하층계급에 대응하는 공식 명칭으로 지정계급(Sche-duled Caste)을 사용하고 있으나 언론 등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는 달리뜨(Dalit)이다. ‘핍박받는 이’라는 의미로 하층민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글에서도 불가촉천민이나 하층민들을 지칭하는 표현을 모두 달리뜨로 통칭하고자 한다. 

인도에서 그들은 단순히 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염된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상위계급에 속하는 힌두교도들은 달리뜨들과 접촉하거나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오염이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달리뜨들은 상위계급 힌두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멀리서도 알아채고 고개를 돌릴 수 있도록 목에 방울을 달고 다니거나, 밤에만 외출해야 했다. 또한 그들은 힌두교 사원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마을 공동 우물의 물을 긷거나 마실 수도 없었으며 버스나 기차에 빈자리가 있어도 앉을 수 없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차별은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신분의 높낮이를 규정하기도 하지만 특정 카스트에게 주어진 직업적 세습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에 각각의 카스트에 부여된 직업이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달리뜨들이 종사하는 일은 오염되고 더럽고 위험한 일들, 즉 청소, 동물 사체 처리, 세탁 등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를 계기로 영국군에서 많은 인도 용병들이 필요하게 되자 달리뜨들은 영국의 군대에 지원할 수 있게 되었고, 암베드까르의 아버지도 영국 군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달리뜨로서의 삶

1891년에 태어난 암베드까르는 아버지의 직업 탓에 일종의 군인 거주 지역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린 암베드까르는 자신의 신분이 지닌 의미를 제대로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후 그는 비로소 달리뜨들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교실에서는 다른 학생들과 떨어져 복도나 구석 바닥에 앉아야 했으며, 산스끄리뜨를 배우는 것이 수드라 계급과 달리뜨에게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원하던 산스끄리뜨 대신 페르시아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학교에서 목이 마를 때도 자유롭게 물을 마실 수 없었는데 그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오염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는 학교 급사가 와서 수돗물을 틀어줘야만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은 어린 암베드까르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자녀교육에 열의가 컸던 아버지 덕분에 암베드까르는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고, 이는 달리뜨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어서 축하 모임이 열렸다. 쉬는 시간에도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지만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던 암베드까르를 눈여겨보던 인근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이 모임에 참석하여 바로다(Baroda) 주정부의 장학금을 주선해주었다. 이 장학금으로 그는 대학을 졸업했고 해외 유학까지 떠날 수 있었다. 

1913년 미국의 컬럼비아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고대 인도의 상업(Ancient Indian Commerce)〉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1916년에 〈인도의 국가배당: 역사적 분석적 연구(National Divid-end for India; A Historical and Analytical Study)〉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정경대학에서 정치와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변호사 자격을 얻기 위해 법학협회(Gray’s Inn)에도 입학하였다.

그 후 장학금 지급 기한이 만료됨에 따라 1917년에 인도로 돌아온 그는 장학금 지급 조건에 따라 바로다 주정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해외에서의 폭넓은 경험과 박사학위 소지자라는 신분이 무색하게 여전히 그는 사무실에서 물을 마실 수 없었으며, 사무실의 사환조차 그와 신체접촉을 꺼려 서류를 직접 건네지 않고 멀찍이서 던져주곤 하였다. 또한 달리뜨에게는 누구도 방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으므로 조로아스터교 신도라고 거짓말을 하고 하숙을 얻었다가 나중에 사실을 알고 분노한 조로아스터교 신도들에게 폭행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에 좌절한 그는 결국 몇 달 만에 주정부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후 그는 뭄바이(Mumbai)에 있는 시데남 상과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어 2년간 가르쳤으나 대학에서 그가 겪은 상황은 바로다 주정부의 근무 경험에서 겪은 바와 다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중단한 학업을 마치러 다시 영국으로 떠났다. 1921년에 〈영국령 인도에서 제국금융의 지역적 분산화(Provisional Decentr-alisation of Imperial Finance of British India)〉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다음 해에는 그레이법학원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1923년에는 〈루피화의 문제(The Problem of Rupees)〉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로써 암베드까르는 서른두 살의 나이에 두 개의 박사학위와 변호사 자격을 가진 최고의 지식인이 되어 인도로 돌아왔다. 1924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지만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공부를 끝마치기 전부터 달리뜨들을 위한 잡지인 《침묵의 지도자(Nook Nayak)》를 발간해왔던 암베드까르는 달리뜨들의 인권 향상과 권리보호를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달리뜨 인권 향상을 위한 노력

1924년 7월 하층민복지협회(Bahishkrit Hitakarsani Sabha)를 결성하고 의장을 맡은 암베드까르는 이 단체를 통해 하층민의 교육 기회와 문화 혜택 확대, 경제적 여건의 개선 등을 위해 노력하고 하층민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 고통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리고 1927년 4월에는 〈추방된 인도(Bahishkrit Bharat)〉라는 신문을 제작하여 사원과 우물을 하층민에게도 개방할 것을 호소하였다. 달리뜨들이 공동 우물을 사용해도 된다는 법안은 1923년에 이미 통과되었으나, 상층계급 힌두들은 여전히 달리뜨들이 마을의 공동 우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암베드까르는 이에 항의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하고 뭄바이 근처 마하드 지방의 초다르 저수지로 1,500여 명의 참석자들과 행진하여 자유롭게 공동 우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상위계급 힌두들이 몰려와 남아 있던 참가자들을 심하게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저수지에서 정화의식을 한 후 암베드까르와 그의 지지자들을 고소했고 이후 지역 법원은 달리뜨들이 공용 우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법안을 철회하고 말았다. 

그러자 암베드까르는 다시 회의를 열었고 공개적으로 마누(Manu) 법전을 불태워버렸다. 마누 법전은 힌두교의 전통 법전으로서 인도인의 생활 전체를 규정한 법전이지만 카스트에 따른 차별을 지지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만약 수드라가 베다를 독송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의 귀에 불에 녹인 쇳물을 부어야 한다. …… 만일 그들이 베다를 독송한다면 혀를 잘라내야 한다. 그들이 베다를 외우고 있다면 그의 몸을 두 조각내야 한다.”라는 잔인한 내용들이다. 약 2천 년간 힌두들의 생활지침서가 되어 온 마누 법전을 불태운 것은 달리뜨들에게 자행되는 부조리한 차별을 반드시 철폐하겠다는 암베드까르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이었다. 

이후 그는 ‘평등사회모임(Samaj Samata Sangh)’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달리뜨와 다른 카스트 간의 결혼이나 식사를 주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달리뜨 여성과 결혼하기로 했던 신랑이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는 등의 사건을 겪으며 낙담했고, 달리뜨들이 힌두사원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하려는 운동도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달리뜨 차별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바라보고 있었으며 달리뜨들이 정치적인 힘을 얻는 것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달리뜨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달리뜨 출신 국회의원을 뽑을 수 있도록 달리뜨 전용 분리선거구를 만들고자 했다. 영국 정부가 인도 통치법 개정을 위해 런던에서 열었던 원탁회의(Round Table Conference)에서 암베드까르가 주장한 대로 하층계급들을 위한 분리선거구를 지정하기로 결정하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이에 반발해서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결국 암베드까르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다른 제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힌두교를 버릴 결심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암베드까르는 달리뜨들이 정치적 힘을 얻기도 어렵거니와 그런 정치적인 힘이 달리뜨들의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보장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그는 달리뜨 문제의 새로운 해결책, 즉 종교적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권력을 얻는다고 해도 달리뜨들은 결코 힌두들로부터 동등한 힌두교도로 받아들여질 수 없고, 카스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힌두교 내에서는 카스트로 인한 차별이 결코 철폐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암베드까르는 마침내 힌두교를 떠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1935년 10월 13일 마침내 암베드까르는 욜라(Yeola)에서 열린 집회에서 공식적으로 개종을 선언했다. 이 선언에서 그는 “불행하게도 나는 힌두로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힌두로 죽지 않을 것을 엄숙하게 선언한다.”라고 선포했다. 이 집회에 참석한 1만여 명의 달리뜨들도 암베드까르를 따라 그들에게 평등함을 가져다줄 종교로 개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어떤 종교를 자신들의 새로운 종교로 받아들일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암베드까르는 여러 차례의 연설에서 자신이 힌두교를 떠나 개종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카스트 제도는 인류의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불평등한 제도이며 이 제도에서 기인한 불평등은 자신들이 힌두로 태어났기 때문에 겪어야 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목표는 힌두사회의 개혁이 아니라 자유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힌두교를 떠나 다른 종교로 개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개종을 결심한 그는 그 결정에 대한 상위계급 힌두들의 비난과 싸우며 자신들의 새 종교를 찾기 위한 오랜 탐색을 시작했다. 

힌두교를 떠나서 개종하겠다는 암베드까르의 발언은 인도에 큰 파문을 불러왔다. 많은 상위계급 힌두들의 비난이 있었는데, 특히 마하트마 간디는 매우 격렬하게 개종에 반대했다. 간디는 달리뜨들이 힌두교를 떠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했다. 암베드까르가 제안한 달리뜨 분리선거구를 반대했던 것도 그렇게 되면 달리뜨들이 힌두교에서 분리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 데다가 암베드까르의 개종 선언까지 나오자 간디와 암베드까르 사이의 불화는 더욱 심해졌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제도를 ‘인류에 대한 범죄’ 또는 힌두교가 속죄해야 할 ‘죄’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결코 카스트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했기에 인도 사회가 지금까지 존속해 올 수 있었다고 생각했고, 카스트 제도에서 각각의 계급이 특정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도 옹호했다. 따라서 간디는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면서 달리뜨들이 고통받지 않는 길을 찾으려고 했다. 카스트 제도와 그 계급적 분류는 유지하되 계급들이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라고 간디는 생각했다. 그러나 달리뜨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핍박을 몸소 겪은 암베드까르에게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은 암베드까르의 개종 선언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며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을 유도했다. 이슬람교로부터 여러 제안을 받았지만 암베드까르는 이슬람교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당시 인도의 이슬람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유사한 형태의 불가촉천민제도가 존재했던 점,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차별 등을 이유로 이슬람교는 개종의 대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인도의 기독교에서도 암베드까르는 문제점을 발견했다. 남인도에서 일부 달리뜨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사례가 있었는데 그들은 기존의 기독교인들에게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 그들을 분리하여 앉게 하는 등의 차별을 발견했던 것이다.

게다가 암베드까르는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인도 내에서 발생한 종교 중 하나인 시크교에 큰 관심을 가졌다. 시크교 측에서도 환영을 표하며 달리뜨들에 대한 평등한 대우를 약속했다. 그는 시크교에 관해 연구하는 한편 시크교로 개종하면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모색했다. 그러나 거의 확정된 것으로 보였던 시크교로의 개종은 결국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개종 절차와 새로 생길 조직의 통제권에 대한 이견 때문으로 추측된다. 

암베드까르가 처음 불교를 접한 것은 그가 16세 때의 일이었다. 그에게 장학금을 주선해주었던 교장 선생님이 《부처님의 일생(Life of the Gautama Buddha)》이라는 책을 선물한 것이 계기였다. 암베드까르가 이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고 이것이 불교로의 개종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주장들도 있지만, 개종을 결심한 이후 암베드까르가 불교보다는 다른 종교를 먼저 탐색했고 또한 거의 시크교로 개종할 뻔했던 것을 보면 그것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암베드까르가 처음 공식석상에서 불교를 언급한 것은 개종 선언이 있은 지 1년 후에 있었던 연설이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내용 중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유언을 언급하면서 달리뜨들도 스스로에 의지할 것을 당부했다. 

불교로의 개종 결심

1940년대 들어서야 암베드까르는 본격적으로 불교에 관해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락쉬미 나라수(Lakshmi Narasu)가 쓴 《불교의 정수(The Essence of Buddhism)》라는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고 이 책을 재출판했다. 그리고 불교에 관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인도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은 영국에 있던 유학생의 도움을 받아 구해 읽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가 읽었던 책들은 인도의 저명한 불교학자 무르띠(T.R.V. Murti)의 《불교의 중심철학(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이나 영국의 판사로서 불교 신자가 되어 수많은 불교 서적을 집필한 크리스마스 험프리(Christmas Humphreys)의 《중도에 관한 연구(Studies in the Middle Way)》 등의 불교 교리 관련 서적들과 빨리어 문법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가 공식 석상에서 처음으로 불교로의 개종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1950년이었다. 그해 5월 그는 대각회(Mahabodhi Society)에서 발행하는 《대각(Mahabodhi)》이라는 월간지에 〈붓다와 그의 종교의 미래(The Buddha and the Future of His Religion)〉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그는 “만약 낡은 세상과 다른 새로운 세상이 새로운 종교를 가져야 하고 새로운 세상이 낡은 세상의 종교와 다른 종교를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종교뿐이다.”라고 썼다. 또 스리랑카에서 열린 세계불교협회 회의에도 참석해 생활 속의 불교 예식 등을 살펴보는 한편, 그곳의 하층민들에게 불교로 개종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9월에는 뭄바이에 있는 한 일본 사찰을 방문해 달리뜨들이 고통을 끝내려면 불교로 개종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자신 또한 여생을 인도에서 불교를 재건하고 전파하는 데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힌두교를 떠나 새로운 종교로 개종하겠다는 선언을 한 후 처음으로 그 새로운 종교가 불교라고 밝힌 것이다.

달리뜨 해방을 위해 개종을 선택했던 암베드까르가 불교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사회철학이 자유, 평등, 우애라고 밝히고 있다. 종교 또한 자유, 평등, 박애를 기초로 해야 하는 것인데 이에 부합한 종교가 바로 불교라고 그는 주장했다. 또한 종교는 합리적이며 과학적이어야 하고 불교만이 이러한 조건에 충족된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무엇보다, 달리뜨들을 고통받게 한 원인인 카스트 제도를 이미 부처님이 불교의 출발 당시부터 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그를 매혹시켰을 것이다. 결국 1956년 10월 14일에 있었던 개종식에서 암베드까르와 40만 명의 달리뜨들은 공식적으로 불교 신자가 되었음을 천명하게 되었다.

암베드까르 불교 연구의 결실 《붓다와 그의 가르침》

불교로 공식적인 개종을 준비하면서 그는 쉽고 단순한 불교 교리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새롭게 불교로 개종할 달리뜨들이 방대한 경전을 읽고 불교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1951년에 집필에 착수한 그는 1956년 《붓다와 그의 가르침(The Buddha and His Dhamma)》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사실 암베드까르를 불교학자로 지칭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의 박사학위는 모두 불교와 관련 없는 전공분야에서 취득한 것이며 그의 저서 중에서도 불교와 관련된 저서는 《붓다와 그의 가르침》뿐이다. 그 외 불교와 관련된 발표문들도 학술논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한 권의 책을 통해서도 불교 탐구에 관한 그의 열정과 깊이는 충분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으며 불교 연구가로서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그의 종교관, 불교관, 붓다관 등이 잘 드러나 있는데 그런 그의 견해들은 전통적인 불교 해석과는 다소 차이를 드러내고 있어 기존 불교학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가령 붓다에 대해서도 암베드까르는 정신적 지도자보다는 사회개혁가로서의 모습을 부각하려고 했다. 사회개혁가적인 붓다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전통 경전이나 기존의 연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건들을 기술하기도 했다. 

한 예로 그는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설명되는 전통적인 붓다의 출가 동기를 비합리적이라고 부정하며 매우 색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싯다르타가 28세 되던 해에 붓다의 부족인 샤카(Sakya)족과 콜리야(Koliya)족 사이에 로히니(Rohini) 강물의 사용을 두고 분쟁이 발생했다. 샤카족이 이를 전쟁으로 해결하려 하자 이에 반발한 싯다르타가 출가를 가장한 정치적 망명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암베드까르의 설명이다. 

또한 정각 후에 설법의 여부를 고심하던 붓다가 설법을 결심한 이유 또한 사회개혁을 위함이었다는 것이 암베드까르의 주장이다. 정각 후 붓다는 이 세상에는 많은 불행이 있고 이를 방관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이며 나아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바꾸고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법을 설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서술을 통해 붓다가 사회적 문제에 매우 민감한 인물이었음을 강조하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붓다 역시 부당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싸우는 사회개혁가로 재창조했다. 

또한 불교 교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성제에 대해서도 암베드까르는 다소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고성제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고(苦)를 사고(四苦)나 팔고(八苦)로 분류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고는 고통, 불만족,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등의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암베드까르는 고통의 예로서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같은 필연적이고 근원적인 고통이 아닌 빈곤이라는 사회적 용어를 제시했다. 이는 고통받는 달리뜨들의 현실에 대한 그의 인식이 불교 해석에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고통의 원인 또한 분쟁이나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요인에서 찾으려고 했다. 또한 욕망을 억제해야 할 이유 역시 욕망이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고의 가장 크고 직접적인 원인을 욕망이나 갈애(渴愛)라고 하는 전통적 견해와는 달리 대립 또는 갈등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그는 업 이론이 사회나 국가가 억압받는 계층의 상황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려고 만든 비인간적이며 불합리한 교리이며 이로 인해 하위계층들이 겪는 불평등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따라서 그는 붓다의 업 이론에서 지은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은 현생에서만 적용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현재의 삶이 과거의 업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업 이론은 모든 것이 과거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므로 인간의 노력에 어떤 여지도 남겨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악한 교리’라고 비난하는 등 다소 숙명론적인 업 해석을 보여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암베드까르는 고통의 원인을 갈등, 특히 사회계급 간의 갈등 등으로 보고 있으므로 자신을 포함한 달리뜨들이 당시 겪었던 고통의 원인 역시 개인의 과보, 즉 달리뜨 개인의 행위보다는 사회적 갈등으로 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암베드까르의 불교 연구와 이에 따른 개종은 인도의 하층계급들이 카스트 제도에서 기인한 고통에서 벗어나 평등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는 그의 필생의 목표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인해 자신의 목표에 부합하는 형태로 불교를 해석하려 했기 때문에 그의 불교 해석이 경전이나 전통적 해석과 다소 괴리가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새로 불자가 된 신불교도들에게 쉽게 불교를 안내하고 불교가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종교임을 설득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라는 점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가진다고 하겠다. ■

 

 

우명주

동국대학교(경주) 불교학과, 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졸업(석사 · 박사). 인도 유학 중 ‘한겨레21’ 인도 통신원, 델리대 동아시아학과 강사 역임. 동국대(경주) 불교사회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역임. 주요 논문으로 〈4종성(四種姓) 제도에 대한 붓다의 태도와 암베드까르의 해석〉 〈암베드까르의 사성제 해석과 그 배경〉 등이 있고, 공저서로 《불교와의 첫 만남》이 있다. 현재 동국대(경주), 울산대 강사.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