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고전

1. 불교와 마르크시즘, 공통점과 차이

2015년 필자는 고 백기완 선생께 졸저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와 대화》의 추천사를 부탁드리러 초고를 가제본하여 병문안을 하였다. 선생은 앉은 채로 그걸 무릎 위에 놓고는 표지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꽤 오랜 시간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병실에 침묵이 흘렀다. ”도대체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는가를 한참 생각한 게야.”라고 말씀한 후에야 표지를 넘겼다. 이때의 생각을 추천사의 서두에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라는 이름으로 갓 꾸린(가본) 글묵(책)을 손에 든 때는 매우 무더운 한낮, 나는 단 한 장도 들추질 못하고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어야만 했다. …… 그들을 쉽사리 마주 앉게 할 수가 있는 것일까. 더듬는 시간이 한동안 흘렀다.”라고 밝혔다. 

백 선생은 삶 자체가 《자본론》이었던 분이자 종단 개혁운동을 할 때 ‘지붕 없는 절’에 대해 말씀할 정도로 불교에 대해서도 잘 알던 분이다. 그런 분조차 그리 표현할 정도로 불교와 마르크시즘은 멀다. 대개의 불자들은 《자본론》을 좌파, 혹은 빨갱이들의 혁명 교과서로 생각하고, 대부분의 좌파는 불교를 유물론과 대척점에 있는 관념론의 정수(精髓), 더 나아가 민중을 혹세무민하는 인민의 아편쯤으로 간주한다. 대다수 대중과 언론,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비롯한 우파 지식인들은 소련의 해체 이후 마르크시즘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며 종언을 선언하였다. 과연 그런가? 《자본론》을 불교와 대대(待對)의 논리로 읽어보자. 

그 출발로 공통점과 차이를 간단하게 살펴본다. 자세히 보면 붓다와 마르크스는 공통점이 많다. 양자 모두 신적 존재를 부정하고 이 세계를 쉼 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무상(無常)의 관점에서 파악했으며, 기존 질서와 논리는 물론 기존의 텍스트에 대해 비판적이고 해체적인 입장을 취했다. 각자의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고 이타적이고 대자적인 실천을 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이 세계와 인간 사회를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의 사유로 바라보았다. 붓다는 인간은 물론 삼라만상이 서로 연기 관계임을 갈파했고, 마르크스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다른 인간, 토대와 상부구조,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엇보다도 붓다와 마르크스는 신분과 계급의 차별 없이 만인이 평등한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그럼에도 차이는 분명하다. 붓다는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며 유심론의 입장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깨달음에 따라 새로 구성하고자 했고, 마르크스는 이제 철학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며 유물론에 입각하여 세계를 바라보고 인간 주체의 실천에 의해 변화시키고자 했다. 붓다는 모든 것이 무상하여 연기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는 모든 존재가 모순을 갖고 있고 이 모순에 따라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붓다에게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인간해방의 장애물이었고, 마르크스에게는 노동이나 경제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을 물신화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인간해방의 장애물이었다. 그러기에 불교는 수행자에 의한 인정투쟁을 통해서 이상사회에 도달하려고 한 반면에, 마르크시즘은 노동자의 계급투쟁에 의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

 

2. 아직도 마르크시즘이 유용한 이유

소련의 해체 이후 마르크시즘은 수명을 다했는가? 21세기 ‘지금 여기에서’ 이것이 갖는 가치와 의미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공산주의로 이행한다고 말한 것과 달리 자본주의가 번성하고 있으므로 이 자체가 마르크스의 오류를 입증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존속하는 한, 이 체제의 모순을 분석하는 교과서로서 《자본론》은 유용하다. 자본주의 체제가 외적으로 번성하고 있지만 “평균이윤율이 1869년의 46%에서 이제 10%이하에 이를 정도로 내적으로 붕괴하고 있으며,” 많은 모순과 역기능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21세기 인류는 6대 위기를 맞고 있는데, 이 위기의 근본적이면서 핵심인 원인은 모두 자본주의 체제다. 

이 체제는 인류의 공동자산인 자연을 사유화하고 이를 개발하고 착취하여 자본으로 전화한다. 자본은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하여 자본으로 축적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환경파괴 등 자본의 야만을 규제하던 것을 해제하고 철도, 수도, 교육 등 공공영역을 사영화/민영화하고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이름 아래 비정규직화와 대량해고를 단행하고 있다. 

이 체제는 선과 악, 이타와 이기의 혼합체인 인간이 후자에 더욱 기울어지도록 유혹하고, 개인이 신과 인간보다 돈을 더 섬기면서 서로 경쟁하고 욕망을 증식하며 더 많은 소비를 하도록 조장한다. 탐욕과 이기심, 경쟁심을 견제해야 할 이성마저 도구화하면서 모든 시스템과 과학기술을 계산이 가능한 목적에 종속시킨다. 자본은 물질계에 이어서 정신과 무의식의 영역까지 시장으로 전환하고, 사물 · 자연 · 인간의 가치를 배제하면서 이를 교환가치로 대체하여 물화(物化, reification)와 소외를 심화하고 공동체를 파괴한다. 자본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살인, 쿠데타, 인간과 생명의 대량학살, 전쟁도 불사하며 이를 수행하고자 국가와 동맹을 맺는다. 소련 해체 이후에도 《자본론》은 이런 자본의 속성과 기능을 가장 잘 분석할 수 있는 교과서다. 때문에 이것 없이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이 위기를 만들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는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없다. 

마르크시즘은 유토피아를 제시한다. “유토피아의 오아시스가 말라 버리면 진부함과 무력함의 사막이 펼쳐진다.” 어두울수록 별이 맑게 빛나듯, 이렇게 인류의 미래가 암울할수록 유토피아는 절망한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제시한다. 길이 아무리 어둡고 험해도 별이 반짝이는 한 별빛을 따라 걷는 나그네의 가슴이 목적지를 향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듯, 유토피아는 현재를 분석하는 동시에 지향해야 할 길을 제시한다. 유토피아는 현실의 행복에 만족해 있는 이들에게 유토피아와 괴리를 보여주면서 불행과 진부함을 드러내고 새로운 삶을 살 활력을 가져다준다. 마르크시즘은 우리에게 현재의 삶이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으로서 공동체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으며 이를 향하여 어떻게 나아갈지 알려준다.

마르크시즘은 약자들의 관음보살이다. 인류 역사상 종교가 아닌 한 사상에 매료되어 정의를 추구하거나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적이 있던가? 왜 21세기 오늘에도 수많은 좌파 노동자와 활동가, 지식인들이 고문, 구속, 사형, 배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마르크스의 교리나 원칙들을 따라 빈민이나 노동자,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투쟁하는가? 불평등이 극대화하고 민주주의가 붕괴하면서 더 많은 이들이 난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빈민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 사상은 노동자 · 민중을 중심으로 약자의 편에 서서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라고 말한다.

《자본론》을 비롯한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현실의 구체성을 담보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전이다. 인간 사회와 의식의 세계에는 이데아와 그림자, 물질과 정신, 주인과 노예, 생산력과 생산관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의 대립물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정(正)과 반(反)의 대립과 지양을 거쳐서 종합되고 다시 정의 위치에 선다. 우리의 몸은 육체와 정신의 결합체다. 우리의 발은 땅을 디디고 있다. 물질 없이 사유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유 없이 물질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선한 인간이 선한 짓을 행하는가? 아무리 선한 자라도 자식이 굶어죽을 위기에 놓이면 빵을 훔친다. 노동자는 선악과 관계없이 노동자의 의식을 형성하며 자본가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그 의식의 각성을 보인 주체들의 실천에 따라 세계는 변화한다. 이 저작들은 구름 위에서 내려와서 땅 위에 굳건하게 발을 디딘 채 인간이 마주치고 있는 구체적 조건과 현실을 돌아보게 하고 그에 내재하는 변증법의 원리를 깨우치게 한다.

 

3. 《자본론》을 연기론으로 읽다

붓다와 마르크스 모두 실체론을 해체하고 연기법적 사유를 펼친다. 다음 《자본론》의 한 대목을 보자.

자연은 노동자의 노동이 나타나고 활동이 이루어지고, 그것에서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생산하는 소재이다. …… 자연은 노동에 생활수단을 제공하며, 그에 따라 다른 한편으로 자연은 더 좁은 의미의 생활수단, 즉 노동자 자신의 육체적 생존의 수단도 제공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중심 대도시에 인구를 계속 집적시켜감에 따라, 한편으로는 사회의 역사적 동력을 쌓아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양과 인간 사이의 물질대사를 방해한다. 즉 인간이 식품과 의류의 형태로 소비하는 토양 성분이 토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는다. 다시 말해 토양의 비옥도를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자연조건을 훼손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또한 도시 노동자의 육체적 건강과 농촌노동자의 정신생활을 파괴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물질대사를 지속시킨 자연적 성장 조건을 틀어지게 만드는 반면에, 인류의 전반적인 발전에 적합한 형식 하에서 사회적 생산의 규제 법칙으로서,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자연을 복원할 것을 거만하게 요청하기도 한다. (……) 자본주의적 농업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와 토지를 약탈하기 위한 기술의 진보이고, 주어진 임대 기간 동안 토지의 수확을 높이는 모든 진보 또한 토지생산력의 지속적인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기도 하다.”

대개의 경우 상단의 인용문과 같은 말들에 귀를 기울이며 마르크스가 실체론적 사유를 하고 자연을 인간의 생존과 노동을 위하여 착취하고 개발하는 대상으로 간주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하단의 인용문에 잘 볼 수 있듯이, 마르크스는 연기론적이고 생태론적 사유를 하였다.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원리는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하며 이를 늘리기 위하여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는 것이다. 투여한 자본보다 산출한 매출과 수익이 한 푼이라도 더 많아야, 이윤이 나야만 자본은 움직인다. 그래서 기업과 국가는 매년 2∼3% 이상의 성장을 목표로 한다. 이를 순조롭게 하려면 대도시에 본사, 공장, 노동자, 소비자가 몰려 있어야 비용을 덜 들이고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다. 자본주의는 도시화를 촉진한다. 실제로 자본주의 체제 이후 도시 인구는 급속하게 늘어나, “1776년에 베이징 인구가 세계 최초로 100만 명을 넘어서고 런던, 파리, 뉴욕, 이스탄불, 도쿄 등이 그 뒤를 따랐으며,” 2008년에는 세계 전체 인구에서 도시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이는 토양과 인간 사이의 물질대사를 방해한다. 중세의 봉건 농업생산체제에서는 인간이 먹고 입고 한 것들이 인간에게 살아가는 에너지를 공급하고 남은 것은 대소변이나 쓰레기로 배출되고 이것은 땅으로 되돌려지고, 이를 미생물들이 분해하면 식물들은 이를 영양분으로 취하여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이 순환이 끊기면서 땅은 비옥도를 상실하였다. 땅이 병들자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이에 기반을 둔 인간의 마음과 육체 또한 따라서 병들게 된다. 이를 자본이 주도하고 기술이 촉진한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땅, 인간, 자본, 기술, 노동이 상관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12연기설처럼 서로 조건과 인과(因果)를 형성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비단 위의 인용문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후기 저작들은 사회와 인간을 연기적으로 인식한다. 《자본론》의 핵심 개념인 상품은 스스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무’가 스스로 의미를 갖지 못하고 ‘풀’과 이항대립 관계 속에서 ‘목질의 줄기를 가진 여러해살이의 식물’이란 의미를 드러내듯, 상품 또한 시장체제에서 화폐를 매개로 교환되면서 교환가치를 갖고,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가격을 형성한다. 마르크스는 플라톤 이래 실체론으로 인간을 인식하는 서양의 주류 철학을 넘어서서 인간을 ‘사회관계 속에 있는 개인(individual social relation)’으로 규정한다. 그는 인간과 사회를 실체론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인간이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형성한 토대 위에서 노동과 교환을 매개로 다른 인간, 계급,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와 이것이 왜곡/억압되고 있는 구조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마르크시즘을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 곧 토대가 상부구조를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기계론적 마르크시즘(mechanical Marxism), 표현론적 마르크시즘(expressional Marxism), 구조론적 마르크시즘(structural Marxism)으로 나눌 정도로 마르크시즘의 핵심 개념인 토대와 상부구조, 생산력과 생산관계 개념도 연기적이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IMF 사태를 맞자 “정치가 잘못되어 한국경제가 망한 사례에 잘 나타나듯이 토대인 경제가 상부구조인 정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라면서 마르크시즘의 중대한 오류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꽤 있었다. 

이는 토대를 실체론적으로 인식한 탓이다. 토대는 ‘경제 일반’이 아니다. 토대는 주어진 사회발전단계에서 인간이 물질적 부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맺어진 사회의 경제제도―주어진 사회에서 지배적인 경제의 틀, 사회적인 생산관계의 일정한 틀―를 형성하고 있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연기적인’ 총체를 의미한다. 생산력은 인간이 자연과 노동과 생산을 매개로 맺고 있는 관계로 재화를 생산하는 인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능력의 총체로서 노동력, 기계나 원료처럼 재화의 생산에 필요한 물질적 요소인 생산수단을 종합한 것이다. 

생산관계는 생산이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하는가, 공동으로 소유하는가? 구성원 각각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 특히 활동의 상호교환이 잉여노동력을 착취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그렇지 않은가? 생산수단의 분배 형태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가? 그 관계는 지배와 종속관계인가, 상호 협력의 관계인가? 등등의 서로 상관관계를 맺고 조건과 인과로 작용하는 총체를 뜻한다. 이처럼 토대는 주어진 생산양식 안에서 노동과 생산을 매개로 사람과 자연이,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도구가, 사람과 사회가 맺고 있는 관계의 총체를 뜻한다. 이에 대해 상부구조는 주어진 경제적 토대가 조건과 인과로 작동하면서 결정하는 정치, 법, 이데올로기, 문화를 의미한다.

4. 《자본론》을 사성제로 읽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간의 물질대사를 매개하는 인간의 생산활동 일반으로서, 모든 사회적 형태나 성격 규정을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단순한 자연적 존재(사회와 관계없이 모든 사회와 분리된)에서도 이런 매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며, 또 생명의 발현이자 생명을 확인해주는 것으로서, 아직 사회적이지 않은 인간에게나, 이미 어떤 형태로든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인간에게나 모두 공통된 것이다.

식물은 광합성작용을 통하여 햇빛을 에너지로 삼아 대기 중의 탄소와 흡수한 물을 결합하여 포도당을 만든다(6CO2+12H2O→ C6H12 O6+6O2+6H2O). 동물은 이를 먹고 탄소를 태워 에너지를 내고 단백질을 합성하여 몸을 만들고 남은 것은 배출하며, 이는 대지와 식물의 양분이 된다. 인간 또한 도구를 이용해 노동을 하여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고, 이로 삶을 영위하고 남은 것은 자연으로 되돌린다. 마르크스가 볼 때 생명이란 이렇게 서로 관계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물질대사를 하여 생을 지속하고 자기복제를 하며 생명성을 발현하는 것이다.

흙집을 지어 겨울을 나고자 흙을 삽으로 퍼 날라 물과 짚을 섞어 흙벽돌을 만들 듯, 노동은 인간이 목적을 구현하기 위하여 도구를 매개로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능력을 동원하여 자연을 변화시켜 새로운 생산물로 만드는 인간의 행위다. 흙이 원래 가졌던 부드러운 알갱이로 이루어진 속성이 물을 붓고 반죽을 하여 사각형으로 빚어서 말려 흙벽돌을 만들어 쌓아 벽을 조성하면 추위와 비를 차단하는 속성이 새롭게 생기듯, 노동은 낡은 가치를 보존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밭으로 바꾸어 콩을 심는 순간, 인간은 자기 앞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이자 부지런한 본성을 구현한다. 

이에서 보듯 노동은 진정한 자기실현 행위다. 노동을 하는 사람끼리 서로 유대를 맺게 되기에 노동은 인간을 유적(類的) 존재로서 실존하게 한다. 노동을 하여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그 순간이 현재이고 낡은 가치로 있던 것이 과거이고, 이렇게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여 달라지는 것이 미래다. 그처럼 노동은 시간을 구현한다. 더 나아가, 보리를 다섯 가마 생산한 농부가 세 가마를 가족이 먹고, 한 가마를 팔아 아내의 꽃신과 자식들의 옷을 사고, 또 한 가마로 굶주리는 이웃을 구제한다면 타자를 자유롭게 할 때 느끼는 희열감인 대자적 자유(freedom for) 또한 실현하며 이것이 바로 보살행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을 기계 부품으로, 노동을 소외의 양식으로 전락시킨다. 노동자는 자신의 목적이 아니라 자본가와 관리자의 목적에 따라 자발적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능력을 팔아 상품을 생산한다. 그가 노동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만, 그 가치 가운데 잉여가치의 몫은 그의 것이 되지 못한 채 자본에게 착취당한다. 세계를 새롭게 변화하는 주체는 자본가나 부르주아에 국한되고, 노동자는 그들이 짜놓은 틀 안에서 자신의 본성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계획과 명령에 따라 일하는 기계가 된다. 노동은 진정한 자기실현이 아니라 돈벌이 수단으로 변한다. 노동을 하는 사람끼리도 경쟁하기에 유대를 맺지도, 유적 관계를 형성하지도 못한다. 시간은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노동자는 자본가나 관리자들이 짠 시간에 자신의 행위를 종속시킬 뿐이다. 무엇보다 모두가 교환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물화(reification)하고 이는 사람과 관계에서 소외로 전이한다. 모든 이들이 물신화하여 서로 경쟁과 이기심과 탐욕을 증대하면서 ‘만인이 만인을 위한 투쟁’을 한다.

소외된 노동이 고(苦)라고 한다면 집(集)은 자본주의 체제다. 박경준은 연기설을 상의적(相依的)으로 해석한 것을 비판하며, “12연기설은 우리의 현실고(現實苦)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무명에 의해 나타나 있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연기(緣起)와 연멸(緣滅)이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고통의 원인이 무명(無明)이라면 이에서 벗어나면 고통이 사라지고 환희심이 일듯, 원인을 변화시키면 결과가 달라진다. 말 그대로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어진다.” 소외된 노동의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라면, 이를 변화시키는 실천을 행할 경우[道] 진정한 자기실현으로서 자유로운 노동[滅]을 복원할 수 있다. 불교 또한 사회적 고(social duhkha)와 정치적 고, 문화적 고, 환경적 고를 고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깨달음의 사회화를 추구한다면 붓다와 마르크스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워지리라.  

5. 《자본론》을 보살론으로 읽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직접적인 언술로 자유나 해방, 혁명을 설파하지 않는다. 《자본론》이 하도 방대한 저술이라 놓쳤는지는 모르지만, 필자가 이에 가까운 문장으로 읽은 것은 다음 문구다.

사실 자유의 나라(Reich der Freiheit)는 궁핍과 외적인 합목적성 때문에 강제로 수행되는 노동이 멈출 때 비로소 시작된다. 즉 그것은 사태의 본질상 본래적인 물적 생산영역의 너머(즉 彼岸-옮긴이)에 존재한다. 미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즉 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서] 자연과 격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명인도 그렇게 해야만 하고, 더구나 어떠한 사회형태 속에서도[즉 모든 가능한 생산양식 아래서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인용의 뒷부분까지 다 읽으면, 마르크스는 이 대목에서 혁명을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적합한 조건에서 물질대사가 가능한 생명의 노동을 수행하자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말년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가 상품을 매개로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하여 이윤을 창출하고 이를 자본으로 축적하고 다시 다양한 자본으로 전화하는 원리와 속성에 대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구조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데 주력하였다. 자유, 해방, 혁명에 대해서 마르크스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자본론》을 읽으면 각성하게 된다. 노동자들이 어떻게 착취당하는지,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노동자 독자들은 《자본론》을 통해 철저히 인식하기에 의식의 각성을 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해체를 지향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청년의 열정에 불탈 때 쓴 글에서 해방과 혁명을 향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노동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한 조건은 모든 계급의 폐지이다. 노동계급은 그 발전 과정에서 낡은 부르주아적 사회를, 계급 및 계급대립을 배제한 연합체로 바꾸어 놓을 것이고 이제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치권력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이란 정확하게는 부르주아적 사회 내에 있는 계급 대립의 공식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간의 대립은 계급에 대한 계급의 투쟁이며 그것의 최고의 표현은 총체적 혁명이다. 실제로 계급 대립에 토대를 둔 사회가 무자비한 모순으로까지 치닫고 그 마지막 해결책인 인간에 대한 인간의 충돌로 치닫는 것이 놀라운 일이겠는가? 사회운동이 정치운동을 배제한다고 이야기하지 말라. 모든 정치운동은 동시에 사회운동이기도 하다. 계급과 계급 대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만, 사회적 진화는 정치적 혁명이 되기를 중단할 것이다. 그때까지 사회의 모든 전반적인 전환의 전야에 사회과학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투쟁이냐 죽음이냐: 피로 얼룩진 투쟁이냐, 사멸이냐, 이것이야말로 냉혹하게 던져진 문제로다’.

마르크스가 꿈꾼 것은 모든 계급이 폐지된, 모든 인간이 다 같이 존엄한 사회, 개인이 서로 다른 개인을 좀 더 자유롭게 하도록 노력하는 사회, 각자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합한 꼬뮨이다. 이는 정치혁명을 포함한 사회혁명으로 가능하다. 

붓다는 “나의 제자는 종성(種姓)이 같지 않고 출신도 각각 다르지만 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출가하여 도를 닦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종성을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나는 사문 석가모니 종성의 아들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처럼 붓다는 만민의 평등을 추구한다. 

세친은 《불성론(佛性論)》에서 “지혜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애착은 버리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어나게 한다. …… 지혜로 말미암아 열반을 버리지 않고, 자비로 말미암아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나의 악업을 모두 씻었다 하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이 지은 공업(共業)까지도 내가 짊어져야 한다. 설혹 팔정도를 지키고 불에 달군 돌을 입에 물고 수행정진하여 오늘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미루고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병처럼 아파하며 중생구제에 나선다. 이것이 진속불이(眞俗不二)이다.

 

6. 맺음말

우리는 지금 절체절명 속에 있다. 필자가 〈코로나 이후 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길〉(《불교평론》 2021년 가을호)에서 천명한 대로 우리는 지금 기후위기와 생명과 환경의 위기, 불평등의 극대화와 사회 붕괴의 위기, 지정학적 상황과 전쟁의 위기,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변화와 노동의 위기, 간헐적 팬데믹의 위기, 공론장의 해체와 민주주의의 위기 등 6대 위기에 처해 있다.15) 이들 위기는 사회개혁과 개인의 개혁 종합이 이루어져야 극복이 가능하다. 이 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도 바꾸어야 하지만, 우리 또한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전자에 필요한 것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라면 후자에 필요한 것이 불교다. 양자를 잘 종합하되, 두 가지 전제를 먼저 실천해야 한다. 하나는 불교의 초역사적인 관념에 역사적 구체성을 종합하고, 마르크시즘을 실체론에서 탈각시켜서 연기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난하고 죽어가는 생명을 위한 편애적 해석과 자비적 실천’을 행하는 것이다. 이는 시혜적으로 자비를 행하자는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 생명, 난민,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현재의 모순이 가장 첨예화한 이 사회의 고리이자 퓨즈이기에, 그들의 아픔에 대해 동체대비심을 안고 “머리나 가슴이 아닌 아픈 곳이 우리 몸의 중심이다”라면서 달려가는 것은 나와 이 사회를 가장 빠르고 올바르게 구제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앎의 해방과 삶의 해방을 대대(待對)의 원리로 화쟁(和諍)을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인류에게 아직 희망은 있다. ■

 

 

이도흠

한양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등 역임. 주요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18-19세기 한국문학, 차이의 근대성》 등이 있다. 현재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백기완노나메기재단 부설 노나메기민중사상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