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종교화의 대안으로

 * 이 글은 지난 4월 26일 유튜브 생중계로 진행된 불교평론/가톨릭평론 합동세미나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종교’에서 발표한 원고이다.

 

 들어가며

심층종교에 대한 글을 쓰라는 부탁을 받았다. 귀한 기회를 준 《불교평론》에 감사한다. 현재 종교계에 불어닥치는 탈종교화는 종교계를 위해 일종의 위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 속에는 기회가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이런 탈종교화 시대에, 특히 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종교가 심층종교로 환골탈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전화위복이 아닌가 하는 심정으로 평소 생각하던 바를 개진해 보고자 한다.

 

탈종교화 시대

주지하다시피 근래에 들어와서 종교계에 일어나는 현상 중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탈종교화 현상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종교’는 이제 여러 면으로 설득력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실질적으로 ‘신 없는 사회’로 규정되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산업화한 나라들 중 그래도 지금까지 가장 종교적인 국가라고 알려진 미국에서마저도 이런저런 이유로 종교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어느 보수 기독교 목회자가 쓴 책 제목이 지금이 바로 《마지막 기독교 세대(The Last Christian Generation)》라는 것이었다. 저자에 의하면 지역에 따라 미국 고등학생들의 68%에서 94%가 졸업과 동시에 교회도 졸업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미국의 아이들만(Shane Idleman)이라는 보수 목사에 의하면 미국에서 매년 4천 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매일 3천5백 명씩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셸비 스퐁(John Shelby Spong) 신부는 이런 현상을 빗대어 미국에서 제일 큰 졸업 동창회는 “교회 졸업 동창회(The Church Alumni Association)”라는 말까지 할 정도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많은 목사들마저 늦게나마 교회 졸업 동창회에 가담하고 있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2015년 통계에 의하면 무종교인 수가 전체 인구의 56.1%였는데, 그 이후 계속 증가하여 2021년 한국 갤럽 통계에 따르면 무종교인이 60%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탈종교화 현상에서 특징적인 것은 젊은이와 교육 수준이 높은 이들 사이에서 종교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18세에서 29세까지의 젊은 층에서는 윤리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한가 하는 질문에 80%가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물론 통계를 그대로 믿을 수 없기는 하지만, 개별 종교 현상을 보면 개신교의 경우 2011년 880만 신도가 2021년 700만으로 10년 동안 180만, 즉 20%가 줄었다. 한국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이나 불교의 경우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최근의 통계를 찾지는 못했지만 근래 가톨릭 신도 중에 120만이 가톨릭을 떠나고 남아 있는 신자들 중 대략 80%가 냉담자라고 한다. 불교도 신도 수가 많이 줄었는데,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 지홍 스님이 2016년 포교원 연찬회에서 “우리 불교 또한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있으며 농어촌 사찰은 신도들의 발길이 끊겨 텅 비어가는 중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거의 불교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한 말에서 불교의 현실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신도 수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성직 지망자 수도 급감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의 종교적 변화

이처럼 코로나19 발발 이전에도 종교 인구가 줄어들고 있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엄청난 사태로 이런 탈종교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변화가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향 전환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표피적이고 형식적인 종교에 함몰되어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이 시대를 위한 일종의 경종이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서 코로나 이후의 종교적 변화를 크게 네 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 네 가지는 1) 사상적 변화, 2) 윤리적 변화, 3) 종교 아닌 종교의 등장, 4) 종교의 심층화이다. 

 

1) 사상적 변화 

첫째, 기복신앙이 줄어들 것 같다. 종래까지의 대부분의 한국 종교는 주로 기복적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초자연적인 힘에 빌어 봐도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고, 따라서 나의 이기적인 욕심을 근거로 빌기만 하면 무조건 들어준다고 믿던 기복 일변도의 종교에 대한 신뢰심이 크게 퇴조될 것이라 본다. 

어느 면에서 이런 위기에 직면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들이 믿는 신이나 초자연적인 힘에 더욱 매달리고 헌신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그 믿음을 그대로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물론 많은 종교인이 어머니가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아들이나 딸이 대학에 당장 합격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 병이 낫기를 아무리 지극정성으로 기도해도 그 덕분에 병이 나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 남편의 사업 성공을 위해 아무리 기도해도 그 때문에 반드시 성공이 따르지 못한다는 사실 등등을 통해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번 코로나19 확장 앞에서 초자연적 힘에 빌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 계통 어느 목사의 주장처럼 자기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이 보호해주시므로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지도 않고, 비록 감염되더라도 성령의 불로 깨끗이 씻어 낫게 되리라고 장담했지만 스스로도 감염되었듯이, 신이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교회에 모여 코로나바이러스를 물리쳐 달라고 합심기도를 했는데, 놀랍게도 그 기도 모임 때문에 코로나가 더 확산되는 어이없는 결과를 보기도 했다. 불교계는 코로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사찰을 일시 봉쇄하는 모범을 보였지만, 이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초자연적 힘이 코로나를 방지하는 데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도들에게 각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거듭 말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는 손을 잘 씻느냐, 마스크를 하느냐, 사회적 거리 두기를 잘 지키느냐 하는 위생과 방역에 관계되는 문제이지, 종교적 열성이나 기도와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둘째, 초자연적 힘에 의한 인과응보 사상이 힘을 잃을 것 같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윤리적으로 선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를 가리지 않는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감염될 확률은 동일하다. 따라서 착한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그에 따른 죗값을 받는다는 율법주의적 상벌 사상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실 천박하게 이해된 대로의 인과응보 사상이 완전한 철칙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대략 알고 있었다. 착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잘살지 못하고 오히려 악한 사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이 더 잘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현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보면서 경제적인 면만이 아니라 건강의 측면에서도 통상적 인과응보나 율법주의적 상벌 사상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된 셈이다. 

 

인과응보, 상벌 사상이 희박해지면 사후 상벌 사상도 흔들릴 것이다. 인과응보로서의 천국 혹은 극락, 지옥도 설득력이 더욱 떨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티베트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도 그의 최근의 책 《종교를 넘어》에서 인간의 선행이나 악행에 따라 극락 지옥행을 말하는 불교의 전통적 가르침은 이제 ‘넘어서야 할’ 대상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학자 중 한 명인 고(故)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 1942~2015)의 경우도 ‘종래의 기독교(conven-tional Christianity)’가 “천당/지옥(Heaven/Hell) 종교”였다면 이제 ‘새로 등장하는 기독교(newly emerging Christianity)’는 이런 옛 패러다임을 청산하고 ‘변화(transformation)’를 강조하고 그것을 중심 목표로 하는 종교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비틀스의 존 레넌마저도 1971년에 발표한 그의 가장 유명한 노래 〈이매진〉을 통해 “천국이 없다고 상상하라, 해보면 쉬운 일이다. 우리 밑에 지옥도 없다. 우리 위에는 창공이 있을 뿐(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이라는 노랫말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평신도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인과응보 사상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 명동이나 심지어 인천공항에서마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글이 쓰인 팻말을 들거나 몸에 띠를 두르고 다니는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불교 전통에서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한국 조계종의 창시자 지눌(知訥)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준 당나라 승려 종밀(宗密, 780~841)은 그의 저술 《원인론(原人論)》에서 불교의 교의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그중 ‘인천교(人天敎)’를 제일 하급으로 취급했다. 인천교란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나느냐 천상에 태어나느냐, 육도 중 어느 한 가지로 태어나느냐를 궁극 관심으로 삼는 태도를 말한다. 기독교 용어로 고치면 죽어서 천국에 가느냐 지옥으로 떨어지느냐가 종교의 궁극 관심이 된 형태의 종교적 태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종밀에 의하면 이런 인과응보적 태도는 ‘내 속에 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최고 제5단계 ‘일승현성교(一乘顯性敎)’의 가르침과 너무 먼 율법주의적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나 평신도들 중에는 아직도 상당수가 천당 지옥을 문자 그대로 믿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나 종교 사상가들은 천당/지옥 혹은 극락/지옥 사상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기복신앙이나 인과응보 사상은 성실한 초보 신도들의 신앙생활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종교가 이런 것만을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에 몰입한다면 새로운 시대에 크게 어필하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져 가던 기복신앙이나 인과응보 사상이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일반 신도들 사이에서마저 더욱 강력한 직격탄을 맞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이런 사상적 변화는 자연스럽게 신관(神觀)의 변화로 이어진다. 기독교의 경우 코로나19 이전에도 저 위 높은 보좌에 앉아 낮고 천한 저희 인생들을 굽어살피시며 우주 전체의 흐름은 물론 각각의 사회와 개인의 생사화복, 일거수일투족을 주관하는 주재자로서의 신, 이른바 ‘관여하는 신(interventionist God)’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선한 신, 인간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신이 어찌 이렇게 몹쓸 병을 허락할 수 있는가? 더구나 그를 위해 세워진 성전에서 그를 굳게 믿고 함께 그를 찬양하고 그에게 기도하는데 그의 추종자들의 고통을 보고도 어찌 눈과 귀를 막고 못 본 체할 뿐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병이 더 크게 퍼지게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유신론적 신관(theism)은 오래전부터 도전받거나 거부되어 왔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 이런 신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거니와, 유신론의 종언(demise of theism)을 피부로도 느낄 수 있는 현실이 되었다. 물론 불교의 경우도 부처님이나 불보살의 가피로 만사형통하리라는 생각이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현재 2년 반 가까이 정기적인 종교 모임이 중단되어 신도들이 정기적으로 함께 모이지 못하고 집에 머물고 있는데,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정규적인 모임이 회복되더라도 그냥 집에 있는 습관이 계속될 수도 있는데, 사실 이런 습관이 고착되는 데는 2,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따라서 정규적인 모임이 없어지면 여러 가지 종교 활동도 줄고 헌금이나 보시 액수도 줄 뿐 아니라 초자연적 힘에 대한 믿음마저 증발될 수 있다. 그럴 경우 현재 많은 교회나 절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보수 기독교 단체의 주장에 의하면 정부에서 대면 예배를 금하기 때문에 그동안 전국적으로 만 개 이상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주장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상당수 의학 분야 전문가들에 의하면 코로나바이러스가 언제 종식될지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바이러스가 계속 등장해서 코로나 이전과 같은 대면 접촉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성경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어디서 예배해야 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하면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한복음》 4장 23절)라고 하였다. 교회에서 모두 모여 예배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지금이야말로 다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보다 조용히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여겨야 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두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예수님도 같이 하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불교도 지금처럼 일요일 정기 대중법회에 모이는 것을 강조하는 대신 예전같이 필요할 때 절을 찾아 혼자 조용히 예불하거나 참선이나 깊은 명상에 잠기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자각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럴 경우 언제나 듣던 일방적인 설교나 설법을 듣는 대신 다양한 시각을 접하게 되고, 더욱이 나 홀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많아지리라 여겨진다. 그러면 자연히 절대적인 존재가 저 위에 계시는 초월자로서만 이해되기보다, 내 속에 내재(內在)하면서 나의 육체와 정신을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전통적인 용어를 쓰면 내 속에 신성(神性), 불성(佛性), 인성(人性) 혹은 도(道)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뜻이고, 동학의 용어를 쓰면 시천주(侍天主)요, 현대적 용어를 쓰면 내가 내 속에 잠재력으로 가지고 있는 우주의 근원적 생명력이 꿈틀거린다는 사실에 눈뜰 것이라는 뜻이다. 신이 초월만이 아니라 내재라는 것을 서양 용어로는 ‘theism’과 대조적으로 ‘panentheism’이라고 한다. 옥스퍼드대학의 존 맥쿼리(John Macquarrie) 교수는 ‘Dial-ectical Theism’이라 부른다.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혹은 범재신론(汎在神論)이라 옮기기도 한다.

 

2) 윤리적 변화

코로나 팬데믹이 불러올 변화 두 번째로 윤리의식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왜 그런가? 첫째, 코로나바이러스의 근본 원인은 자연 파괴로 인해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이 인간 세계로 들어오면서 생기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지금껏 서양을 중심으로 하던 기독교 사상은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에서 신이 인간을 창조한 다음 그들에게 명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하는 말을 자기들 편리한 대로 믿고 땅을 정복하고 물고기와 새들을 함부로 포획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그 결과 땅과 바다와 공중에 오염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고 이런 생태계와 환경파괴 결과의 하나가 바로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면 신이 인간을 향해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한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자연히 자연에 대해 함부로 하는 대신 자연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경외심’이라고 하니 슈바이처 박사가 주장하는 ‘생명 경외(Reve-rence for Life)’라는 말이 연상된다. 슈바이처 박사는 인간은 살려고 하는 의지에 둘러싸인 생명 의지이기에 모든 생명이 가지고 있는 천부적 권리를 존중하여 함부로 해를 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의 동학(東學)에서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간다. 동학은 삼경(三敬)이라고 하여 하늘을 공경하는 경천(敬天), 사람을 공경하는 경인(敬人), 사물을 공경하는 경물(敬物)을 강조하고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 이렇게 하늘과 사람뿐 아니라 동물, 식물, 무생물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는 계기가 이르지 않을까. 

특히 일부 기독교에서는 세상의 종말이 임박하여 곧 멸망하게 되었는데 환경 같은 것에 신경 쓸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 태도를 보이기 쉬운데,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 종말이 오더라도 우선은 숨 쉬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의식의 전환을 통해 자연과 환경에 더 큰 경외심을 가지는 계기를 발견할 수 있으면 한다. 이른바 종말론(eschatology)에서 생태학(ecology)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느 면에서 위대한 일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마치 미세먼지의 피해를 몸소 경험하게 되면서 좀 더 많은 사람이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의식하게 되고 환경 보호에 그만큼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미세먼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비대면 사회가 되면서 교회나 성당이나 사찰에 함께 모여 예배를 보거나 찬양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것을 계기로 기계적으로 정해진 형식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종교의식에 참여하던 것을 일단 중지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나의 종교적 의식이나 행동 양태가 올바른가 한번 점검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성직자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어느 특정 정치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우를 범하기 십상인데, 이런 군중심리에 휩싸이는 일이 없이 독립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3) 종교 아닌 종교

그러면 앞으로 어떤 종류의 종교가 나타나게 될까? 앞에서 인용한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은 《종교 없는 삶(Living the Secular Life)》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21세기 종교는 재래종교가 아니라, 땅을 뚫고 나오는 연약한 풀잎에서부터 광대무변의 우주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에 대해 신기함과 그 신비스러움에 놀라워하고 외경(畏敬, awe)의 마음을 가지므로 즐겁고 밝고 올바른 삶을 사는 종교 없는 삶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는 이런 ‘종교 아닌 종교’를 영어로 ‘Aweism’이라고 불렀다. ‘awesom’ 할 때의 ‘awe’이다. 

필자는 이를 좀 더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도록 ‘아하이즘(Ahaism)’이라 부르고 싶다. 연어의 모천회귀(母川回歸), 철새가 그 멀리 갔다가 다시 때가 되면 돌아오는 것, 겨울 동안 앙상한 가지가 죽은 것처럼 보이다가도 봄이 되면 파릇파릇 잎을 내는 것, 아기가 태어나는 것,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무아 상태,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산들바람과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얼굴의 살갗, 물이 그 높은 나무 끝까지 올라가는 것 등등. 양자물리학이나 DNA 구조나 천체물리학 같은 깊고 오묘한 신비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주변에서 조금만 눈여겨보면 모든 것이 신기하고 묘할 뿐이다. 그야말로 신묘막측(神妙莫測)이다. 

매 순간 우리가 접하는 사물의 더 깊은 면을 발견하면서 계속 “아하(Aha)!”를 외치는 경험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경험이 되고 이런 경험을 통해 삶이 더욱 윤택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것, 이것이 넓은 의미의 종교적 눈뜸이나 깨달음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을 ‘종교 아닌 종교’라고 했지만 사실 이런 것이 참된 의미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 대표자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다. 그는 우주에 편만한 신비적인 것에 놀라움을 느끼는 신비적 감정(mystic emotion)이 바로 진정으로 종교적인 것이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자기야말로 ‘심오한 종교적 인간’이라 했다.

 

4) 심층을 찾으라

필자는 이런 ‘종교 아닌 종교’에서 한 발짝 더 나간 것을 지적하고 싶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보고 놀라고 신비스러워해야 할까 하는 문제다. 모든 종교에 표층이 있고 심층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평소 지론이다. 오늘날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실망하고 종교에서 떠나는 것은 종교가 손가락의 역할을 하면서 가리키는 심층적인 면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표층적인 면만 보면서 그것이 종교의 전부인가 오해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는 어떻게 다른가? 가장 중요한 몇 가지만 들면, 1) 표층종교는 지금의 내가 잘되기 위해 믿는 종교라면 심층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나의 참 나를 찾고자 하는 종교다. 2) 표층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반면 심층종교는 이해와 깨달음을 중요시한다. 3) 표층종교는 경전의 문자에 매달리는 문자주의라면 심층종교는 문자 너머에 있는 속내를 꿰뚫어 보려고 노력한다. 4) 표층종교는 절대자를 나의 밖에서만 찾으려 한다면 심층종교는 나의 밖에서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도 찾는다. 5) 표층종교는 주로 내세 중심적이지만 심층종교는 ‘지금 여기’에서 환희와 기쁨의 삶을 강조한다. 6) 표층종교는 모든 사물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반면, 심층종교는 모든 것이 서로서로 연결되고 의존되어 있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라고 믿는다. 

 

심층을 찾으면?

위에서 심층종교의 특징을 몇 가지 들었는데, 이번 코로나 사태로 재래의 표층종교가 유효기간이 다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이제 그 대안으로 심층종교의 가르침이 주목받을 계기가 마련된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이제 더 많은 사람이 심층종교에 접하게 되면 우리의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나하나 다 열거할 수는 없고 그중 가장 큰 변화 세 가지만 들어 본다.

첫째, 이기적인 나를 위해 살던 나의 불안한 삶의 태도를 바꾸어 새로운 나, 큰 나(大我), 참나(眞我)로 거듭남에 눈뜨게 된다. 한국의 종교 사상가 류영모 선생의 용어를 빌리면 ‘제나’에서 ‘얼나’로 ‘솟남’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세계 중요 종교의 심층적 가르침의 골자라 할 수 있다. 탐진치로 찌든 지금의 나에서 새로운 나로 바뀜을 잘 그려낸 것으로 12세기 중국 송나라의 곽암(郭庵)이란 임제종 선사가 그린 십우도(十牛圖)라는 것이 있다.

둘째, 이렇게 작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참 나를 발견하게 되면 나와 너, 나와 우주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럴 때 갖는 체험을 전통적으로 만유일체(萬有一體), 혼연동체(渾然同體), 동귀일체(同歸一體), 동체대비(同體大悲) 등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우주 만물의 어울림에 눈 돌리고 나아가 이를 체감하고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코로나 사태는 그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어울려 있음의 우주에 눈 돌리게 되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음(陰)이 없으면 양(陽)이 있을 수 없고, 양이 없으면 음도 있을 수 없다는 ‘상호연관’ ‘상호의존’의 존재 양식을 깨닫게 된다. 상수도가 없으면 하수도가 있을 수 없지만, 하수도가 없어도 상수도가 있을 수 없다. 출발이 없으면 도착도 없지만, 도착이 없으면 출발도 없다. 계곡이 깊은 것은 산이 높기 때문이지만 산이 높은 것도 계곡이 깊기 때문이다. 이런 쌍들은 서로 배타적이나 반대가 아니라 상보적(complementary)이라는 것이다. 쉬운 말로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냐냐주의(either/or)’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하는 ‘도도주의(both/and)’이다. 거창한 용어로 하면 라틴말로 ‘coincidentia oppositorum(대립의 일치, harmony of the opposites)’라 한다.

또 다른 예를 든다. 우리가 먹는 밥이 있기 위해서는 쌀이 있어야 하고 쌀이 있기 위해서는 땅도, 물도, 공기도, 해도, 시간도 있어야 한다. 쌀이 있도록 하는 농부도 있어야 하고 농부의 부모와 조상도 있어야 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농기구가 있어야 하고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 사람도, 쇠붙이를 품고 있는 광산도 있어야 하고, 쇠붙이를 캐내는 광부도 있어야 하고…… 끝이 없다. 이렇게 보면 쌀 한 톨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고 말 수 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다. 

집이 있기 위해서는 문이 있어야 하고 문이 있기 위해서는 집이 있어야 한다. 집이라는 말 속에 문이 있고 문이라는 개념 속에 집이 있다. 영어로 ‘interrelatedness’ ‘interdependence’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의 용어를 빌리면 모든 존재는 ‘interbeing’이다.

이런 신비스러운 세계의 진실을 깨닫게 되면 나 혼자 잘났다고 독불장군처럼 거들먹거릴 수가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웃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된다. 영어로 자비를 뜻하는 ‘compassion’은 ‘아픔을 같이한다(com-passion)’는 뜻이다. 예수님의 권고처럼, 내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이웃을 대접한다거나, 공자님 말씀처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않는 마음(己所不欲 勿施於人)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봉사 정신의 실천이 가능하게 되기 마련이다. 

셋째, 특히 이웃종교와의 새로운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근본주의 입장에 서면 문자를 절대화하는 문자주의(literalism)를 고집하게 된다. 그러나 종교의 심층에 접한 사람은 문자 너머의 속내를 보기 때문에 문자주의를 고집하지 않는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다. 따라서 문자로 표현된 것을 절대적이라고 하는 고집이 없기 때문에 상대방에서 말하는 것을 무조건 틀렸다고 하며 내 주장만 고집할 수 없다. 남의 종교를 공격하고 비방하는 배타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믿음이 좋다는 증거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와 자세를 가지고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면 이웃종교와의 대화와 협력과 평화가 가능해진다.

 

나가면서

이 글 서두에서 지금은 탈종교화 시대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지금쯤 어느 정도 밝혀졌겠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면 표층종교로서의 종교는 사양길에 들어섰으나, 그 자리에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려는 심층종교에 대한 관심은 더 커질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은 탈종교화에서 심층종교화로 가는 길목이라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종류의 종교가 없어지고 어느 종류의 종교가 새로 대두되는가 하는 문제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한때 서양의 젊은이들이 자기들의 종교 전통에서 벗어나 동양 종교 전통에 매료되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동양 종교의 심층에서 찾을 수 있는 이와 같은 가르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 전통 중에도 심층적 신비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구태여 동양 종교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보고 있다. 이제 그들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는 종교적이 아니라 영성적이다(I’m not religious, but I’m spiritual).” 혹은 짧게 줄여서 “Religion, No; Spirituality, Yes” 혹은 SBNR(Spirituality But No Religion)이라고. 이제 이것이 어디 서양 젊은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인가? 지금은 IQ(지능지수), EQ(감성지수)를 따지는 것을 넘어 SQ(영성지수, Spituality Quotient)를 이야기하고 있다.

20세기 가톨릭 최고의 신학자로 알려진 칼 라너(Karl Rahner)는 21세기 종교는 신비주의적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신비주의’라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심층 차원의 종교를 가리킨다. 독일 신학자로 오랫동안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친 도로테 죌레(Dorothe Sölle)도 인구의 거의가 문맹이던 옛날에는 이런 심층종교의 경험이 소수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이제 새 시대에는 이런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는 “신비주의의 민주화”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한국 종교인 절대 다수가 표층종교를 종교의 전부라고 믿고 살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한국에서도 코로나19로 촉발된 긴급 사태를 계기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 새로운 눈뜸이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사실 그러기를 바란다. 특히 비대면 사회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깊은 명상과 통찰, 폭넓은 독서와 대화를 통해 1) 지금까지 인과응보 사상에 기초한 기복이나 상벌 중심의 율법주의적 종교나 내세의 보상을 위해 노예적 굴종의 삶을 살라는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종교, 2) 자연 훼손이 가져다주는 폐해를 절감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환경친화적 종교, 3) 일상사에서부터 광대무변의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신비스럽고 신기하게 여기는 외경의 태도를 지니는 종교, 4) 허상으로서의 이기적 나를 버리고 내면의 참 나를 찾아 참된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 5) 나와 자연과 우주의 상호 연관성, 상호 의존성이라는 신비를 실감하고 상생과 동정과 자비를 강조하는 종교, 6) 인류 공동체로 살아가면서 흑백논리에 기초한 배타적 태도에 따라 나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다 그르다는 생각, 나아가 내 종교만 옳고 이웃 종교는 모두 거짓이라 가르치는 종교를 떨쳐버리고 종교들의 진수에 들어가면 모두가 통할 수 있고 모두가 인류의 행복을 향해 함께 가는 길벗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 이런 심층종교로 심화되는 과정이 더욱 신속해지리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의 종교의 깊이가 줄 수 있는 평화와 시원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물론 코로나바이러스가 야기하는 문제점도 많지만, 그 때문에 이처럼 사랑과 자비가 더욱 편만하게 되는 사회가 앞당겨진다면 그야말로 코로나가 포스트코로나(post-corona) 시대에 가져다줄 수 있는 축복이 아닐까. 

예상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친다. ■ 

 

오강남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학사, 석사.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대학교 종교학과 Ph.D. 캐나다 리자이나(Regina)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역임.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도덕경》 《장자》 《예수는 없다》 《세계 종교 둘러보기》 등 저서 다수. 현재 리자이나대학교 종교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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