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불교 종립학교인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에 가게 된 것은 내가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1976년, 종로 5가에 있었던 동대부고의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 건물도 매우 낡았고 중학교와 운동장을 같이 사용하는 등 시설도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위 노는 아이들이 많다고 소문이 난 학교였다. 사춘기의 예민한 감수성이 한창이던 고등학생 시절은 삶의 진로를 찾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던 때였다. 마치 사문유관을 통해 생로병사를 고민하던 고타마 싯다르타처럼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때, 국민윤리 과목에서 서양철학을 가르치면서 불교 교학을 담당한 박선영 선생님은 나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어떤 철학적 논리보다 수승한 불교철학을 서양철학과 대비시켜서 설명해주셨고, 당시 유행하던 실존철학과 노장철학을 나름 멋지게 해석한 부분은 나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했었다.

그 선생님의 수업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데, 청소년기 삶의 목표에 대해 고뇌하던 나에게 큰 여운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이때 형성되었던 종교에 대한 신념, 오리엔탈리즘에서 초래된 열등감, 그리고 민족주의라는 세 요소는 나의 삶 전체를 관통하면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한 가치관이 되었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해 보겠다는 것도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학 1학년 때는 10 · 26사건, 2학년 때는 서울의 봄과 이어진 광주항쟁을 겪으며 민중 중심적 사고와 평등의식이 고양되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에서 주변 노동자들의 노동의식을 고취하고, 학교에선 독재 타도를 위한 의식화 교육과 학내 시위를 주동하는 활동이었다. 

이어서 노동현장에서 노동운동가의 삶을 선택했지만, 대학생 출신이라는 한계와 나에게 닥쳐온 현실은 이러한 활동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에서 사업하면서 국내에도 여러 사업을 일구고, 고향 땅에는 고등학교까지 세우는 등 여러 분야에서 중추적으로 활동하던 부친께서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시작한 사업체는 한순간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집안이 처한 어려움에 잠시만이라도 집안일을 돌봐줘야 한다는 가족의 압박에 못 이겨서 집안 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물론 부친의 유업을 이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 두 번의 옥고를 치른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전혀 계획에 없던 사업가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니, 많은 갈등과 도전이 이어졌다. 

사업을 시작하던 초기에는 사용자의 정체성과 근로자의 정체성 사이에 혼란이 생가면서 갈피를 잡기 어려웠지만, 손실이 쌓여가고 자금난에 빠지게 되니,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다가는 사업에 실패하지 않을까?’ ‘내가 사업에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에 갑자기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로소 나는 사업으로 성공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주체적으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95년 서울에 있던 사업장을 정리하고 용인 수지로 물류센터 겸 사무실을 지어 이사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매출 신장을 위한 영업에 매진하였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성과가 나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경영은 이미 비용 절감 경영으로 단단해지고 있었으나, 자고 나면 거래처들이 부도가 나면서 사업 전망을 예측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준비한 자에게 기회가 있다고 했던가. 밥 문화가 흰쌀밥이 아니라 잡곡밥으로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당시 개발한 혼합곡이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출시한 혼합곡들은 지금도 판매되고 있으니, 사업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나의 사업은 잡곡 시장의 트렌드를 잘 따라가면서도, 이마트나 코스트코, 홈플러스 등 대형 할인점으로 이동하는 새로운 유통 흐름에 적응하여 나름대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21세기는 단순히 유통시장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IT 혁명으로 인터넷기업이 나오기 시작했고, 또 남북 정상이 마주 앉아 6 · 15선언을 하면서 남북 교류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곡물유통업에서 어느 날 갑자기 IT 사업이나 남북교역을 해서 좋은 성과를 낸다는 건 어불성설임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 이끌려 여러 일에 손을 대게 되었다. 내가 대표이사로 등록된 법인만도 5개 정도였고, IT 쪽 역시 여러 법인에 관여하면서 투자하게 되었다. 

결과는 뻔했다. 곡물유통 사업가가 IT 지식도, 경험도 없으면서 호기롭게 시작한 사업들은 잘될 수가 없었다. 당시 새로 시작했던 법인은 모두 폐업했고, 그로 인한 부채는 10여 년 동안 나를 괴롭혔다. 남북교역과 IT 투자 실패는 50대 중반까지 무거운 짐이 되었고, 거의 매일 회의다, 모임이다 하며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돌이켜보면 후회는 있어도 미련은 없다. 이런 질곡 속에서도 40대 후반이던 2007년, 참여불교재가연대와의 인연으로 새롭게 불교와 만나는 행운을 얻었기 때문이다. 재가연대에서 상임대표까지 하면서 단체활동도 열심히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인연으로 초기불교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니까야 경전 공부로 초기불교에 새롭게 눈을 뜨고 위빠사나 수행도 하면서, 예전의 관념적이고 직관적인 관점에서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수행 중심으로 세계관이 바뀐 것은 덤으로 주어진 복이자 희망이다. 

고교 시절에 만난 붓다는 그대로 있는데, 세상 풍파를 겪고 난 40대 후반에 새롭게 붓다를 만나다니, 이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환갑이 이미 지난 지금 자애로운 붓다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어 본다.          

허태곤 / 두보식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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