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가면 아양교 인근 구룡산 자락에 대한불교조계종 통천사가 있다. 태일 스님이 창건했고 동화사 강주와 대구사원연합회장을 맡고 있는 선지 스님이 주지로 있는 사찰이다. 통천사의 총무는 정명 스님이다. 이분은 일찍이 교토불교대학교로 유학했다. 그동안 후지산 홍원사, 교토 고려사, 오사카 통천사 분원을 창건해 주직을 맡고 있다. 스님은 일본 내에서 오키요가의 정통 전수자로 알려진 분이다. 태일 스님과 선지 스님, 정명 스님 세 분은 속가의 인연으로는 삼 형제이기도 하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정명 스님과 인연이 있어서 2017년 5월경에 오사카, 교토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귀국할 즈음에 오사카 교포 식당에서 통국사 주직인 무애 스님을 처음 만났다. 통국사는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나라를 잃은 도래인들이 건립한 백제계 사찰로 알려진 절이다. 무애 스님은 오사카 소재 원효종 통국사 주직인데 일제강점기에 온 가족이 일본으로 강제 이주하여 1951년에 출생하였다. 선친이 일본 이주 당시에 ‘조선’ 국적을 쓰셨기에 본인도 아직 조선 국적을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스님은 노무현 정부 당시 방한한 적이 있는데 그 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와서 방한이 여의치 않다고 했다. 그러니 고국을 방한할 수 있도록 신원보증을 해달라고 했다. 당시 국회 정책연구위원 신분이던 필자는 귀국하자마자 오사카 총영사관에 초청장과 체류 중 신원보증서를 보냈다. 심사 끝에 다행히 초청이 이뤄져서 무애 스님과 윤정강 보살께서 방한하게 되었다.

나는 벅찬 마음으로 쉰 살이 넘은 나이에 일일 화동이 되어 김포공항에 나가 스님의 방한을 환영하고 숙소를 안내해주는 등 국내 체류 일정을 보조하고 동행했다. 일주일여 국내에 머물렀던 무애 스님이 일본으로 돌아갈 즈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일본 내에는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 됐다가 국외에서 사망한 희생자 수백만 명의 유해와 유품들이 방치돼 있습니다. 이들의 국내 봉환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스님에 따르면 통국사는 1974년 이후 45년 동안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74위를 모시고 있다고 했다. 이들 유골을 늦게나마 국내에 봉환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듣는 순간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한 분 한 분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이 일을 꼭 성사시키고 싶었다.

자료를 보면 일제는 36년간 당시 조선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800만 명 정도를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들 대부분은 한반도가 아닌 일본, 만주, 동남아 등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연합군총사령부(GHQ) 지시에 의해 일본 기업은 1946년 8월 조선인에게 지급하지 않은 임금을 은행에 공탁한 사실이 있다. 이때 일본 정부가 증빙자료로 27만 명의 공탁금 사본을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민간기업 외 징용자들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실제로 스님에 따르면 일본 내 사찰에서 보관 중인 유해 중 조선인으로 확인된 것만 27,000기가 넘는다고 한다. 무애 스님은 이 가운데 통국사에 모셔져 있는 유골 74위를 한국으로 봉환하고 싶어 했다.

그냥 모셔 오면 될 것 같지만 유해봉환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 국내는 물론 남북한 간에 매우 민감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89년 동경 유천사에서 유골 1,401기가 교토 고려사로 옮겨진 것이다. 이 일은 일본 내에서 큰 사건으로 간주되어 유천사 주지 스님이 자살하는 사태로까지 비화하였다. 분단 이전에 일본으로 강제이주한 유해라 남북한이 공히 주권을 주장할 수 있으므로 남북한이 합의가 되고도 일본이 이를 수용해야만 특정 국가로 유해봉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필자는 김대중 대통령이 설립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국토교통분과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나는 민화협 김홍걸 위원장에게 무애 스님을 소개하였고, 유해의 국내 봉환 협조를 요청하였다. 김홍걸 위원장은 강제동원 유해봉환 사업을 역사적인 과제로 인식하고 많은 역할을 했다. 2018년 7월 중순 방북하여 남북한 민화협이 논의를 했고, 8월에는 일본 동경에서 ‘남북일 유해송환 공동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해 11월에 남북한이 민화협 20주년 기념식을 금강산에서 개최하였는데 필자와 정명 스님, 선지 스님도 함께 방북했다. 이때 설훈 의원, 김홍걸 위원장 등이 북한 측 민화협 김영대 위원장과 이 문제로 회담했다. 

이후 남북일이 공동으로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개최했다. 회의에서는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 유골 현황에 대한 총체적 실태조사와 함께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히려 노력했던 일본의 시민단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국내 학자들이 의견을 나누었다.

이 일은 잘 성사되어 드디어 2019년 2월 27일에 국내 봉환에 앞서 일본 통국사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74위 추도식이 열렸다. 다음날인 28일에는 인천공항으로 국내 봉환되어 광화문 잔디광장에서 노제를 거행했다. 3 · 1운동 100주년을 맞은 그해 3월 1일에 백범기념관에서 ‘동포여, 나를 위해 울어주오’를 주제로 추도식도 가졌다.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 수십 명의 내빈이 참석하여 고인들의 영혼을 달래주었다.

유골은 3월 2일에 제주시 애월읍 선운정사에 안치되었다. 1938년 4월 일제의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어 일본 내 공장이나 광산에서 노역에 시달리다가 오카야마 등지에서 숨진 조선인 유해 74위가 국내에 안치되는 순간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80년간 방기해온 일을 민간 차원에서 처음 이뤄냈다는 데 큰 보람을 느꼈다.

한국은 해방 후 70년 넘는 동안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 급성장해왔다.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넘어 세계 10위이며, 실질소득은 일본을 추월할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물질적 풍요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80년 전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일본으로 만주로 시베리아로 동남아로 강제 이주를 당해서 온갖 노역에 시달리다가 제 명을 못 살고 쓰러져간 영혼들은 지금도 죽어서도 중음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다. 

이들의 영혼을 달래고 제자리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일본 국내에 보관 중인 유골 외에도 매장 상태의 유골, 일본 국외의 유골들, 그리고 민간인 외 군속 등의 유해도 고향 땅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들에게도 광복의 기쁨이 돌아갈 것이다. “나를 위해 울어주오”는 바로 산 자들의 책임이라는 뜻이다.      

김우철 / 국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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